♣ 삼초(三哨)의 의미

3. 음(陰)적으로 2초(二哨)의 과정

고도인 2013. 7. 9. 21:10

3. ()적으로 2(二哨)의 과정

 

이초는 1894년에 1(60)을 더하면

1954년이 갑오년으로 이초가 되는데

이 해에 황극신을 모셔오는 공사를 보았다.

 

[태극진경] 586.

 

조정산성사께서 갑오년(1954) 삼월에

화양동(華陽洞)에 거동(擧動)하셔서

만동묘(萬東廟)의 묘지(廟趾)와 묘비(廟碑)

()하시며 말씀하시기를이곳 청주(淸州)

화양동(華陽洞)은 명()() 양국(兩國)

공존(共存)하는 곳이니라.

내가 이곳에 온 것은 황극신도수(皇極神度數)

대신문도수(大神門度數)를 보려 함이니라.

하시니라.

 

[전경] 교운 250절에 보면

 

갑오년(1954) 삼월에 조정산께서

안상익(安商翊) 외 네 명을 대동하고

청천에 가셔서 황극신(皇極神)이 봉안되어 있는

만동묘 유지(遺趾)를 두루 살펴보고 돌아오셨는데

돌아서실 때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밤중에 폭풍과 뇌성 벽력이 크게 일어

산악이 무너지는 듯하니라.

다음날에 숭정 황제 어필(崇禎皇帝御筆)

비례 부동(非禮不動)이 새겨 있는

첨성대 아래쪽 암벽의 좌편에 닫혀있던

석문(石門)이 두 쪽으로 갈라져 내리고

그 안의 옥조빙호(玉藻氷壺)의 네 자와

만력어필(萬曆御筆)의 네 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전하였느니라.

 

2초에는 조정산 성사께서

황극신을 모셔오는 공사를 보신 것이다.

이 공사로 1954(갑오년) 3월에 행하여

황극신(皇極神)이 들어오는 계기가 되었다.

이 황극신(皇極神)은 해원두목으로

해원신(解寃神)을 말한다.

 

즉 대두목 신명(神明)을 말하는 것이다.

대두목 신명(神明)1954(갑오년)이후로부터

우리나라로 모셔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 지역에는 예로부터

화양동의 석문이 열리면 천지가 개벽되고

진인(眞人)이 세상을 구제 하리라

말이 구전(口傳)되어 왔다고 전하여 온다.

 

[전경] 공사 318

 

증산성사께서는 중국의 일을

신도(神道)로부터 바로 잡고자

종도들의 생각을 물어 공사를 처결하시고

우리가 부흥하리라고 예시하셨다.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의 조공을 받아왔으므로

이제 보은신은 우리에게 쫓아와서

영원한 복록을 주리니 소중화가 곧 대중화로

 

여기에서 보은신(報恩神)은 천주(天主)로서

미륵세존님을 말하는 것이다.

 

예시 3절에 보면 증산성사께서

광구천하하심은 김일부의 꿈에 나타났으니

그는 증산성사와 함께 옥경에 올라가 요운전에서

원신(元神)이 상제와 함께 광구천하의 일을

의논하는 것을 알고

증산성사를 공경하여야 함을 깨달았도다.

 

; 김일부는 꿈에 강증산성사와 함께

옥경에 올라가 증산성사의 원신(元神)

상제와 함께 광구천하의 일을 의논 하는 것을

김일부가 보았는데 이는 강증산성사는

천지의 주인이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

즉 미륵이 아니고 공사를 맡았으니

주인과 의논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천지의 주인이신 상제는

따로 계신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상제는 보은신(報恩神)이고

대두목은 해원신(解寃神)인데

이렇게 보은신(報恩神)도 우리나라로 쫒아

오시는 이유는 대두목 신명(神明)이신 황극신을

우리나라로 모셔왔음으로 인해서 그 대두목께서는

보은신(報恩神)의 정체를 밝혀서 모시고

진정한 시천주(侍天主)가 되어

진법을 내기 때문이다.

 

오랜 역사와 함께 찬란한 문화유산을 간직하며

한족(漢族)의 자부심으로 동양 문화권의

선두자리를 견지해 왔던 중국은 대륙이 광활한

만큼 이민족에 의해 많은 시달림을 당해 왔다.

중국이 외세의 침략을 당하면 이웃나라인

우리나라도 그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그래서 증산성사께서는 중국이 편안해야

우리나라가 안정을 찾고 부흥할 것이라는 관점에서

중국의 일을 신도(神道)로부터 바로잡고자

종도들의 판단을 들어 공사를 처결하셨다.

 

[전경] 공사 26

 

증산성사께서 원일과 덕겸에게

너희 두 사람이 덕겸의 작은 방에서

이레를 한 도수로 삼고 문밖에 나오지 말고

중국 일을 가장 공평하게 재판하라.

너희의 처결로써 중국일을 결정하리라이르시니

두 사람이 명하신 곳에서

성심성의를 다하여 생각하였도다.

이렛날에 원일이 불리워서

증산성사께청국은 정치를 그릇되게 하므로

열국의 침략을 면치 못하며 백성이 의지할 곳을

잃었나이다. 고서(古書)에 천여불취 반수기앙

(天與不取反受其殃)이라 하였으니

선생께서 무소불능하신 권능으로

중국의 제위에 오르셔서 백성을 건지소서.

지금이 기회인줄 아나이다고 여쭈어도

증산성사께서 대답이 없었도다.

덕겸은 이렛동안 아무런 요령도 얻지 못하였도다.

증산성사께서너는 어떠하뇨하고 물으시는

말씀에 별안간 생각이 떠올라 여쭈는지라.

세계에 비할 수 없는 물중지대(物衆地大)

예락문물(禮樂文物)의 대중화(大中華)

산하(山河)와 백성이 이적(夷狄:오랑케)

칭호를 받는 청()에게 정복되었으니

대중화에 어찌 원한이 없겠나이까.

이제 그 국토를 회복하게 하심이 옳으리라

생각하나이다.

증산성사께서 무릎을 치시며 칭찬하시기를

네가 재판을 올바르게 하였도다.

이 처결로써 중국이 회복하리라하시니라.

원일은 중국의 해원공사에만 치중하시는가하여

불평을 품기에 증산성사께서 가라사대

순망즉치한(脣亡卽齒寒)이라 하듯이

중국이 편안하므로써 우리는 부흥하리라.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의 조공을 받아 왔으므로

이제 보은신은 우리에게 좇아 와서

영원한 복록을 주리니 소중화(小中華)

곧 대중화(大中華)가 되리라일러 주셨도다.

 

이러한 중국해원공사의 취지하에

증산성사께서는 김 일부를 청국명부에 앉히시고

청주 만동묘(萬東廟)에 가서

청국 공사를 행하려 하나 길이 멀어 왕래하기

어렵고 불편하므로 청도원(淸道院)에서

공사를 행하리라하시고 청도원 류찬명의 집에

이르러 천지대신문을 열고 공사를 행하셨다.

 

[전경] 공사 322

그리고 증산성사께서 어느날

고부 와룡리에 이르사 종도들에게

이제 혼란한 세상을 바르려면

황극신(皇極神)을 옮겨와야 한다

말씀하셨도다.황극신은

청국 광서제(淸國 光緖帝)에게 응기하여 있다

하시며 황극신이 이 땅으로 옮겨오게 될 인연은

송우암(宋尤庵)이 만동묘(萬東廟)를 세움으로부터

시작되었느니라하시고 밤마다 시천주(侍天呪)

종도들에게 염송케하사 친히 음조를 부르시며

이 소리가 운상(運喪)하는 소리와 같도다

하시고 운상하는 소리를 어로(御路)라 하나니

어로는 곧 군왕의 길이로다.

이제 황극신이 옮겨져 왔느니라고 하셨도다.

이때에 광서제가 붕어하셨도다

 

주해(註解)

황극이란 군왕을 의미한다.

즉 백성을 위하여 규범을 세우고 통치한다.

황극신은 군왕으로서

군왕보다 훨씬 높으신 옥황상제님을 모신다.

황극신이 무극신이신 옥황상제님을 모시고

혼란한 세상을 바로잡게 되는 것이다.

 

소강절 선생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황극경세(皇極經世)’라는 말은

임금(皇極)이 세상을 경영한다는 뜻이다.

상제님께서는 무극(無極)의 위치에 계신 것이며

무극신(無極神)이신 상제님으로부터 천명을 받고

세상을 통치하시는 대두목은

황극(皇極)의 역할을 하시는 황극신 이시다.

 

만동묘(萬東廟)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중국 명나라의 의종과 신종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만동묘(萬東廟)는 만절필동(萬折必東)

줄임말로서 김일부의 정역에 나오는 말이다.

만 번 꺾어지고 꺾어져서 필경에는

동으로 이른다는 말이니 이 뜻을 누가 알리오?

 

김일부 선생의 <정역正易>에 보면

이런 글귀가 있다.

 

天一壬水兮(천일임수혜),

萬折必東(만절필동)이로다.

북방 임은 1,6수 이로다.

하늘의 1태극 임수(壬水)!

만 번 꺾어지고 꺾어지고 하면서

그 기운이 반드시 동쪽으로 가는구나.

 

왜 그런가?

수생목(水生木)이거든.

물이라는 건 결국 동방 목()을 생하는 것이다.

북방(北方) 임수(壬水)는 만번 꺾어지고 꺾어져

동방(東方) ()을 생한다.

 

 

 

 

 

오운도(五運圖)

동은 봄의 새싹이 돋고 종달새 지저귀는 곳이다.

한민족의 터전인 동방은

인류의 시원역사가 시작된 곳이요,

선천문명이 귀결되고

또 후천의 신천지가 새 출발하는 곳이다.

어떤 일이든 곡절은 많아도 결국 이치대로 된다.

그래서 도()를 찾아서 순리에 맞게 살아야

하는 것이지 역천(逆天)자는 죽는 것이다.

 

이 지구촌 아프리카, 중동, 구라파, 동남아시아,

아메리카 남북 어디에서 터져도 지구촌

동서남북의 역사의 귀결점은 동방인 것이다.

자연과 인문, 문화의 매듭과 새 출발은

동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태양이 동()에서 떠올라 서(西)로 지듯

인간의 새 역사, 문명의 태양도

동에서 떠오른다. 동이 출발, 근본이다.

 

증산성사께서 화천하신 후 천지 역사가

앞으로 백년의 세운과 도운(道運)을 거쳐

삼변(三變) 성도(成道)의 대세의 과정이 있지만,

반드시 이 동방에서

우주의 역사가 끝난다는 뜻이다.

상제님 도에서 동()의 상징이 누구인가?

바로 상제님이시다.

 

서울의 종로구 숭인동에는 보물 142호로

지정되어 있는 동묘라는 사당이 있다.

동관왕묘라고도 불리는데,

바로 관우를 제사지내는 사당이다.

 

이곳의 정식 명칭은 "동관왕묘(東關王廟)인데

현판은 "현령소덕의렬무안성제묘

(顯靈昭德義烈武安聖帝廟)"라고 적혀있다.

()과 천자()는 그 격이 다르기에

시대에 따라서 관우를 부르는 명칭이

왕에서 천자로 격상된 것이다.

즉 관우는 천자로서 황극신이 되었다.

 

광서제는 불과 4세에 청나라의 11

황제가 되었고, 그에 따라 황극신이 응기 되었다.

하지만 그는 어려서는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고,

장성한 후에는 혼란한 나라를 바로 세우려고

충신들의 간언을 받아들여 1898년에

변법자강운동(變法自彊運動)을 추진하는 등

개혁을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여 보았으나,

이미 그동안 수렴청정으로 정권을 유린해 온

이모 서태후에게 밀려 궁궐 안의 중화전에

유폐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는 서양의 군대를 피해 잠시 서안으로 피신한

적도 있었지만, 황제 재위 대부분의 기간 동안

좁은 중화전에 갇혀 나오지 못했다.

 

이런 정황에서 증산성사께서는

광서제에게 응기 하여 있었던 황극신을

거두시어 조선으로 불러들이셨다.

그 방법은 장례 때 상여를 메고 가는

노랫가락으로 시천주를 읽는 것이었다.

운상할 때 부르는 노래는 지방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개 상여 앞에 선 사람이

북망산천 멀다더니 내 집 앞이 북망일세.”,

이제가면 언제 오나, 오실 날이나 일러주오.”라고

선창을 하면,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 , , , ,

, .” 하면서 그 뒤를 받는 형식이다.

 

증산성사께서는

를 두고 어로(御路)’라 하셨다.

즉 상여 메고 가는 노랫가락으로 시천주를 부르자

그로 인해 곧 군왕이 가는 길이 만들어졌고,

그 길을 따라 황극신이 광서제를 떠났으며

자연스레 광서제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최근 중국 당국은 광서제의 유골을 조사하여

독약인 비상(砒霜) 성분이 다량 검출되었음을

확인하였고, 그에 따라 광서제는 병사한 것이

아니라 독살 당하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광서제의 의복에도 다량의 비상 성분이 함유되어

있었다는 점으로 보아, 광서제는 비상을 한 번에

많이 먹고 죽은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

음식물을 통해 조금씩 먹었고 그것이 누적되면서

점차 병약해져 죽어갔음이 분명하다.

당시 광서제는 황제라고는 하나 아무런 실권이

없었으며, 유폐된 채 좁은 건물 밖으로는 아예

나오지도 못하였고, 음식물에 몰래 섞여 들어오는

비상 때문에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으며,

그나마 사랑했던 단 한 명의 여인 진비(珍妃)마저

서태후에게 죽임을 당한 후여서 삶에 아무런

의욕이 없었다.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던

광서제는 하루라도 빨리 죽고 싶었다.

광서제가 겪는 모든 고통의 배후에는

황제 위에 군림하는 서태후가 있었다.

그런데 광서제가 죽은 바로 그 다음날,

필적할 라이벌이 없었던 당대 최고의 권력자

서태후도 죽어버렸다.

따라서 이 일 역시 증산성사께서 보신

공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 증산성사께서는

황극신이 우리나라로 오게 될 인연은

송시열의 만동묘에서 비롯된다고 밝혀주셨다.

 

명나라 황실의 신위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만동묘라는 존재는 중국을 사대한다는 측면에서

비판적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지 간에 지난 날

명 황실을 제사 지내왔다는 사실은

황극신이 우리나라로 넘어올 수 있게 되는

인연을 만들어주었고, 그것은 우리나라가

중국을 능가하는 문명을 지니는

상등국이 될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이제까지 중국을 대국이라 일컬으며

모화사상에 심취해 있던 약소민족이

증산성사의 해원도수에 따라

이공사가 2초를 망을 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동묘를 기점으로 하여 황극신이 모셔짐에 따라

대중화가 되고 보은신이 우리에게 옴으로써

영화와 복록을 얻게 되었다.

 

한편 123초의 이 초()란 표현은

걸군 굿에서 상황의 진행을

나팔을 불어 알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연극으로 친다면 이라고 하면 된다.

적어도 세 번째 이 지나야

대인의 행차가 있으리라는 예언이다.

이렇게 볼 때 대인의 행차에

손병희의 선진주는 과거사였고

미래사에 참진주를 얘기해보자.

 

삼초(三招)를 보면

갑오년(甲午年1894) 오월에

나도 후천 진인이라. 천지현기와

세계대세를 비밀히 의논할 일이 있노라

고 하여 이 진인(眞人)

후천을 부르짖는 1초를 망보았고

1954(갑오년) 3월에 행하여

황극신이 들어오는 계기가 되었으니

이 황극신(皇極神)신이 2초를 망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