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순 전경 ★/●•―‥교 법

교법(敎法) 2장 31 ~ 58까지

고도인 2008. 7. 11. 10:35

 교법(敎法) 2장 31 ~ 58까지 

 

31. 또 공우의 성질이 사나와서 남과 자주 다투기에 하루는 증산성사께서 공우에게 “너는 표단이 있으니 인단으로 가름하라”고 말씀하시고 난 뒤로는 성질이 누그러지고 남에게 이기려고 하지 않고 다시 다투지 아니하였도다.


32. 김광찬은 동곡에 있으면서 증산성사께서 차경석과 상종하시는 것을 과히 좋게 생각하지 않으니라. 그는 경석이 본래 동학당이고 일진회에 참가하여 불의한 일을 많이 행하였을 터인 데도 이제 그를 도문에 들여놓은 것은 증산성사의 공평하지 못하심이라고 불평하고 때로는 우리가 도덕을 힘써 닦아온 것이 모두 허탕이 되리라고 증산성사를 원망하기도 하기에  형렬이 증산성사를 배알하여 그 사유를 고하리라고 말하여 그를 위로하였도다. 어느 날 형렬이 광찬을 데리고 증산성사께 배알하였으나 모두 그 사유를 고하지 못하고 오후에 돌아가려 할 때에 증산성사께서 광찬에게 “주인은 김형렬이 좋으니 동곡에 가서 있어라” 일러주시고 형렬을 따로 불러 가만히 “광찬을 데리고 집에 돌아가서 잘 위로하여 주라”고 일러 보내셨도다.


33. 현하의 대세가 씨름판과 같으니 아기판과 총각판이 지난 후에 상씨름으로 판을 마치나니라.


34. 증산성사께서 경석에게 가르치시기를 “모든 일이 욕속부달(欲速不達)이라. 사람 기르기가 누에 기르기와 같으니 잘 되고 못 되는 것은 다 인공에 있느니라.”


35. 믿기를 활을 다루듯이 하라. 활을 너무 성급히 당기면 활이 꺾어지나니 진 듯이 당겨야 하느니라.


36. 증산성사께서 종도들에게 가르치시기를 “하늘이 사람을 낼 때에 헤아릴 수 없는 공력을 들이니라. 그러므로 모든 사람의 선령신들은 육십년 동안 공에 공을 쌓아 쓸만한 자손 하나를 타 내되 그렇게 공을 드려도 자손하나를 얻지 못하는 선령신들도 많으니라. 이 같이 공을 드려 어렵게 태어난 것을 생각할 때 꿈같은 한 세상을 어찌 잠시인들 헛되게 보내리요” 하셨도다.


37. 이제 너희들에게 다 각기 운수를 정하였노니 잘 받아 누릴지어다.

만일 받지 못한 자가 있으면 그것은 성심이 없는 까닭이니라.


38. 증산성사께서 종도들에게 “운수는 열려도 자신이 감당치 못하면 본 곳으로 되돌아 가기도 하고 혹시 다른 사람에게 옮겨지기도 하리라. 잘 믿을 지어다”고 경고하셨도다.


39. 공사의 일꾼이 된 자는 마땅히 씨름판을 본 따를지니 씨름판에 뜻을 두는 자는 반드시 판 밖에서 음식을 취하고 기운을 길렀다가 끝판을 벼르느니라.


◐ 씨름판은 대권(大權), 즉 종권(宗權)을 다투는 전투장을 의미한다. 현재 대순진리회는 박우당께서 화천(化天)하신 후 여러 임원들이 ‘자신이 종통을 계승하였다’고 하며 종권을 주장하여 마치 씨름판과 같이 ‘종권다툼’으로 대립되어 있다.

그러나 진정한 공사의 일꾼된 자라면 그들과는 달리 반드시 ‘판 밖’에서 진법(眞法)을 밝히고 진법을 수도하여, 기운을 길렀다가 참된 진리로써 승부하는 것이다. 도인은 모든 것을 ‘진리’로써 판단하는 것이다. 진리가 맞을 때 우리 법에 맞는 것이고, 그곳에 종권(宗權)이 있는 것이다.

40. 사람을 쓸 때는 남녀 노약을 구별하지 않으니라. 그러므로 진평(陣平)은 야출동문 여자 이천인(夜出東門女子二千人)이라 하였느니라.


◐ 夜出東門女子二千人(야출동문여자이천인); 진평(?∼BC 178)은 중국 한(漢)나라 때 공신으로, 처음에는 항우(項羽)의 군에서 도위(都尉;副將)를 지냈고 그 뒤 유방(劉邦)의 호군중위(護軍中尉;군의감찰관)가 되어 한나라 통일에 이바지하였다. 통일 후 장군으로 활약, 모반을 진압하여 곡역후(曲逆侯)에 봉해지기도 한 인물인데, 󰡔�초한지(楚漢誌)󰡕�에 ‘야출동문여자이천인(夜出東門女子二千人)’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고사(故事)가 전한다. 이 글의 뜻은 ‘밤에 여자 2,000명을 동쪽 문으로 내보내다’ 이다. 시대적 배경은 진시황이 죽은 후에 진나라가 서로 세력 다툼을 하던 시기이다. 당시에 초나라는 항우가 그리고 한나라는 유방이 왕이 되어 패권을 잡기 위해 대립하던 상황이었다. 서로 전쟁을 하던 중에 유방이 형양(滎陽)에서 항우군에게 포위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한왕 유방이 성을 탈출해야 될 상황에서 한나라의 장군 기신(紀信)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이 급박합니다. 청하옵건대 초나라 병사들을 속여야 몰래 사잇길로 탈출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기신 자신이 한왕으로 변장해 초나라 병사들을 속이고 유방은 서쪽 문으로 몰래 도망가야 함을 뜻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진평은 먼저 여자 2,000여 명을 갑옷을 입히고 동쪽 문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기신이 식량이 다 떨어져 한왕이 초나라에 항복한다고 말하며 의 수레를 타고 왕의 깃발을 세우고 나타나니 초나라 병사들은 모두 한나라가 항복한 것으로 생각하고 ‘만세!’를 외치며 성의 동쪽으로 모인다. 이때 한왕 유방이 기마 20-30여 기와 함께 서쪽 문을 통해 탈출하였다. 즉 전쟁 중에 싸울 수 없는 나약한 여자지만 급박한 상황에서 여자 2,000여 명을 쓰서 한왕이 무사히 탈출했던 일과 같이 사람을 쓸 때에는 남자, 여자, 늙은 사람, 그리고 약한 사람을 구별하지 않으며 모두 쓸 곳이 있다는 교훈이다.


41. 증산성사께서 공사하신 일을 어떤 사람이 “증산(甑山)께서 하는 일은 참으로 폭 잡을 수 없다” 말하거늘 증산성사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대인의 일은 마땅히 폭을 잡기 어려워야 하나니 만일 폭을 잡힌다면 어찌 범상함을 면하리오” 하셨도다.


42. “동학가사(東學歌詞)에 세 기운이 밝혔으니 말은 소․장(蘇秦 張儀)의 웅변이 있고 앎은 강절(康節)의 지식이 있고 글은 이.두(李太白杜子美)의 문장이 있노라” 하였으니 “잘 생각하여 보라”고 이르셨도다.


◐ 소진(蘇秦 ?∼BC 284)은 중국 전국시대 중후기 낙양(洛陽) 출신으로 생년은 미상이다. 자는 계자(季子)이고 진(秦)의 효공(孝公)이 위(魏)나라 출신 상앙(商鞅)을 등용하여 변법을 시행한 이후 진나라는 일약 제후국의 강대국으로 발돋움하였다. 기존의 강대국 제나라와 신흥 강대국 진나라를 사이에 두고 주변 제후국들이 각자 살아남기 위한 전략으로 내놓은 것이 이른바 ‘연횡’과 ‘합종’인데 ‘연횡’을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이 장의라면 ‘합종’을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이 소진이다. 1973년 장사(長沙)의 마왕퇴삼호한묘(馬王堆三號漢墓)에서 발굴된 󰡔�백서전국책(帛書戰國策)󰡕�에는 소진이 제나라의 민왕(재위 BC 300∼284)과 연나라의 소왕(재위 BC 311∼279)에게 보낸 서신과 헌책 등이 실려 있다. 소진은 연나라의 문후에게 6국 합종의 이익을 설득하여 합종책을 성사시켰다. 다시 조(趙)․한(漢)․위(魏)․제(齊)․초(楚)의 여러 나라를 설복하는데도 성공하여, 드디어 BC 333년 연나라에서 초나라에 이르는 남북선상의 6국의 재상이 되었고, 스스로 무안군이라 칭하여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이 때문에 동방으로 진출을 꾀하려던 진나라는 십수 년간 그 진출을 저지당했다. 그러나 그의 합종책은 장의 등이 헌책한 연횡책에 패배하여 실패하였다. 그 후 소진은 연나라의 관직에 있다가 다시 제나라에 출사했으나, 제나라 대부의 미움을 받아 암살당하였다. 소진은 진나라를 위해 연횡책을 썼던 장의와 함께 전국시대 책사의 1인자로 병칭되고 있다.

◐ 장의(張儀 ?∼BC 168)는 중국 전국시대 모사이다. 종횡가의 비조이며 위나라 사람이다. 합종책(合從策)을 제창한 소진과 더불어 귀곡선생에게서 사사하였다. 처음에 초나라에 가서 벽(璧)을 훔친 혐의를 받고 태형의 벌을 받은 뒤에 추방되었으나 제후에 대한 유세(遊說)를 계속하였다. 이후 소진의 주선으로 진(秦)나라에서 벼슬을 하게 되어 혜문왕의 재상이 되었다. 그는 연형책(連衡策)을 주창하면서 위․조․한 등 동서[횡(橫)]로 잇닿은 6국을 설득, 진을 중심으로한 동맹관계를 이룩하는 등 활약이 컸으나 혜왕이 죽은 후에는 실각하였으며 위나라로 피신하여 재상이 된 지 1년 만에 죽었다. 소진과 장의는 중국 전국시대 최고의 책사들로서 그들은 웅변으로써 전국시대 6국을 설득하여 가히 천하를 움직여 통합하였다.

◐ 소강절(邵康節 1011∼1077)은 중국 송대(宋代)의 유학자이다. 이름은 옹(雍)이며 자는 요부(堯夫)이고 강절은 그의 시호이다. 이정지(李挺之)에게 도가(道家)의 도서선천상수(圖書先天象數)의 학을 배워 신비적인 수리(數理) 학설을 세우고, 이에 의해 우주관과 자연철학을 설파하였으며 또 이를 기본으로 한 경륜(經綸)을 주장했다. 그는 「황극경세서」에서 역리(易理)를 응용하여 수리(數理)로써 천지만물의 생성변화를 관찰ㆍ설명하였는데 123진(辰)을 하루, 30일(日)을 한 달, 12개월을 1년(年), 30년을 1세(世), 12세를 1운(運), 30운을 1회(會), 12회를 1원(元)으로 하였다.

그러므로 1원(元)은 12만 9천 600년이고, 천지(天地) 우주는 1원(元)마다 한 번 변천하고, 만물은 이 시간적 순서에 따라 진보한다는 것을 밝혔다. 6권까지는 역(易)의 64괘(卦)를 원ㆍ회ㆍ운ㆍ세에 배당하여 요제(堯帝)의 갑진년(甲辰年)에서 후주(後周)의 현덕 6년까지의 치란(治亂)의 자취를 적고, 7~10권은 율려성음(律呂聲音)을 논하고, 11~12권은 동식물에 관해 논하였다. 이러한 소강절의 지식은 가히 천문ㆍ지리와 역사, 정치, 예술, 동식물학까지 통달하였다.

◐ 이백(李白 701∼762)은 중국 당(唐)나라 시인이다. 자는 태백(太白)이고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이다.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되는 중국 최대의 시인이며, 시선(詩仙)이라 불린다. 1,100여 편의 작품이 현존한다. 남성적이고 용감한 것을 좋아한 그는 25세 때 촉나라를 떠나 양쯔강(揚子江)을 따라서 장난(江南)·산둥(山東)·산시(山西) 등지를 편력하며 한평생을 보냈다. 젊어서 도교(道敎)에 심취했던 그는 산중에서 지낸 적도 많았다. 그의 시의 환상성은 대부분 도교적 발상에 의한 것이며, 산중은 그의 시적 세계의 중요한 무대이기도 하였다.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났다. 청소년 시절에는 독서와 검술에 정진하고, 때로는 유협(遊俠)의 무리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쓰촨성(四川省) 각지의 산천을 유력(遊歷)하기도 하였으며, 민산(岷山)에 숨어 선술(仙術)을 닦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방랑은 단순한 방랑이 아니고, 정신의 자유를 찾는 ‘대붕(大鵬)의 비상(飛翔)’이었다. 그의 본질은 세속을 높이 비상하는 대붕, 꿈과 정열에 사는 늠름한 로맨티시스트에 있었다. 또한 술에 취하여 강물 속의 달을 잡으려다가 익사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그에게도 현실 사회나 국가에 관한 강한 관심이 있고, 인생의 우수와 적막에 대한 절실한 응시가 있었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는 방식과 응시의 양태는 두보와는 크게 달랐다. 두보가 언제나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살고 인간 속에 침잠하는 방향을 취한 데 대하여, 이백은 오히려 인간을 초월하고 인간의 자유를 비상하는 방향을 취하였다. 그는 인생의 고통이나 비수(悲愁)까지도 그것을 혼돈화(混沌化)하여, 그 곳으로부터 비상하려 하였다. 술이 그 혼돈화와 비상의 실천수단이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백의 시를 밑바닥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은 협기(俠氣)와 신선(神仙)과 술이다. 젊은 시절에는 협기가 많았고, 만년에는 신선이 보다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술은 생애를 통하여 그의 문학과 철학의 원천이었다. 두보의 시가 퇴고를 극하는 데 대하여,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詩風)이다. 두보의 오언율시(五言律詩)에 대하여, 악부(樂府)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장기로 한다. ‘성당(盛唐)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이백은 한편으로 인간․시대․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자부에 불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개는 차츰 전제와 독재 아래의 부패․오탁의 현실에 젖어들어, 사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하는 시인은 동시에 ‘만고(萬古)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속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생활태도를 반영한 대표작으로는 「촉도난(蜀道難)」등이 있다. 󰡔�이태백 시집󰡕� 30권이 전한다.

◐ 두보(杜甫 712∼770)는 중국의 당대(唐代) 시인이다. 자는 자미(子美)이며 호는 소릉(少陵)이다.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 불렸으며, 또 이백(李白)과 병칭하여 이두(李杜)라고 일컫는다. 본적은 후베이성(湖北省)의 샹양(襄陽)이지만, 허난성(河南省)의 궁현(鞏縣)에서 태어났다. 먼 조상은 진대(晉代)의 위인 두예(杜預)이고, 조부는 초당기(初唐期)의 시인 두심언(杜審言)이다. 소년시절부터 시를 잘 지었으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하였고, 각지를 방랑하여 이백·고적(高適) 등과 사귀었으며, 후에 장안(長安)으로 나왔으나 여전히 불우하였다.  그는 방랑을 하다가 59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그의 시를 성립시킨 것은 인간에 대한 위대한 성실이었으며, 성실이 낳은 우수를 바탕으로 일상생활에서 제재를 많이 따서, 널리 인간의 사실, 인간의 심리, 자연의 사실 가운데서 그 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찾아내어 시를 지었는데, 표현에는 심혈을 기울였다. 장편의 고체시(古體詩)는 주로 사회성을 발휘하였으므로 시로 표현된 역사라는 뜻으로 시사(詩史)라 불린다. 단시정형(短詩定型)의 금체(今體)는 특히 율체(律體)에 뛰어나 엄격한 형식에다 복잡한 감정을 세밀하게 노래하여 이 시형의 완성자로서의 명예를 얻었다. 그에 앞선 육조(六朝)․초당(初唐)의 시가 정신을 잃은 장식에 불과하고, 또 고대의 시가 지나치게 소박한 데 대하여 두보는 고대의 순수한 정신을 회복하여, 그것을 더욱 성숙된 기교로 표현함으로써 중국 시의 역사에 한 시기를 이루었고, 그 이후 시의 전형(典型)으로 조술(祖述)되어 왔다. 최초로 그를 숭배했던 이는 중당기(中唐期)의 한유(韓愈)․백거이(白居易) 등이지만, 그에 대한 평가의 확정은 북송(北宋)의 왕안석(王安石)․소식(蘇軾) 등에게 칭송됨으로써 이루어졌으며, 중국 최고의 시인이라는 인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현재 󰡔�두공부집(杜工部集)󰡕� 20권이 전해지는데, 고체(古體) 399수, 근체(近體) 1006수가 수록되어 있다. 이태백과 두보의 글은 읽는 이로 하여금 마음속 깊이 감동을 자아내게 하는 기운이 있다. 그러므로 천하사에 뜻을 둔자라면 소ㆍ장의 웅변과 강절의 지식과 이ㆍ두의 문장이 주는 기운과 같이 설득할 수 있는 능력과 천지 우주에 이르기까지 관통한 지식과 상대의 마음에 감동을 주어 비분강개케 하거나 웅지를 품게하는 기운을 사용할줄 알아야 함을 잘 알아 두라는 교훈이다.


43. 속담에 “맥 떨어지면 죽는다” 하나니 연원(淵源)을 바르게 잘 하라.


맥은 정기(精氣)가 흐르는 줄기를 말한다. 혈맥, 산맥, 수맥 등이 있다. 맥이 떨어지면 죽는 것이다. 연원(淵源)이란 도가 흐르는 맥을 말함이다. 도의 근원으로부터 흘러 내려와서 도가 나오는 根本處(근본처)를 말함인 것이다. 즉 종통 • 종맥을 말한다. 증산성사께서 인세에 강세하셔서 천지공사를 하시고 화천하신 후 어느 누구도 종통 종맥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종통 종맥은 이어져 왔다. 그것은 계시, 임명, 발표등 역설이나, 심법으로 계승되어 왔으므로 道(도)는 깨달아야만 길이 보이는 것이다. 증산께서도 자기 종도들에게 종통을 주지 않았다.  판밖에 있는 조정산에게 계시로서 이어졌다. 계시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경위와 이치가 �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이 사계절이 돌아가듯이 원시 반본이 되어서 다섯 명이 나와야 오선위기도수에 맞으며 도가 완성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철을 알라고 한 것이다. 이것이 포태(봄), 양생,(여름), 욕대(가을), 관왕(겨울), 불로불사(중앙)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원도통(淵源道通)인 것이다. 연원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맥이 떨어지는 것이다. 맥 떨어지면 도통이 없는 것이다. 또한 맥 떨어지면 도를 몰라 죽는다는 것이다.


44. 속담에 “무척 잘 산다” 이르나니 이는 척이 없어야 잘 된다는 말이라. 남에게 억울한 원한을 짓지 말라. 이것이 척이 되어 보복하나니라. 또 남을 미워하지 말라. 사람은 몰라도 신명은 먼저 알고 척이 되어 갚나니라.


45. 또 증산성사께서 “춘무인(春無仁)이면 추무의(秋無義)라. 농가에서 추수한 후에 곡식 종자를 남겨 두나니 이것은 오직 토지를 믿는 연고이니라. 그것이 곧 믿는 길이니라” 하셨도다.


◐ 춘무인(春無仁)이면 추무의(秋無義)라; 봄에 씨를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추수할 것이 없느니라. 추수한 뒤에 곡식 종자를 가려 두는 것은 오직 토지를 믿는 연고이니 이것이 곧 믿음의 길이니라. 이 말씀은 너의 믿음을 주어야 나의 믿음을 받으리라는 말씀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믿고서 정성과 공경을 다 한다면 좋은 결실을 거둔다는 뜻이다. 즉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말씀이시다.


46. 이웃 사람이 주는 맛 없는 음식을 먹고 혹 병이 생겼을지라도 사색을 내지 말라. 오는 정이 끊겨 또한 척이 되나니라.


47. 고부(古阜)는 예절을 찾는 구례(求禮)이니라.


◐ 구례(求禮); 禮(예)를 求(구)한다. 고 해서 求禮(구례)라고 하였다. 즉 고부(古阜)는 禮(예)를 求(구)한다는 뜻인데 이 말씀은 고부인(대두목)은 도통을 원하는 군자들에게서 禮(예)를 求(구)한다는 뜻이다. “구례는 세 가지가 크고 세 가지가 아름다운 땅이다.” 라고 한다. 세 가지가 큰 것은 웅장한 지리산, 섬진강이 빚은 아름다운 자연경관, 땅이 기름져서 농사가 잘되는 들판이고 세 가지가 아름다운 것은 이 때문에 생기는 풍요로움, 이곳 사람들의 순박함과 인정 있는 마음씨이다. 그래서 구례는 “원수에게도 예를 베푼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즉 이러한 마음씨를 갖춰라.


48. “바람이 불었다가도 그치느니라.(風易吹而息)” 하듯이 움직이고 가만히 있는 것은 다 때가 있느니라.


◐ 풍역취이식(風易吹而息); 바람도 불었다가 그치느니라.

움직이고 가만히 있는 것은 다 때가 있느니라.


49. 한신(韓信)은 한 고조(韓高祖)의 퇴사 식지(堆食食之)와 탈의 의지(脫衣衣之)의 은혜에 감격하여 괴철(蒯徹)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나 이것은 한신이 한 고조를 저버린 것이 아니오 한 고조가 한신을 저버린 것이니라.


◐ 퇴사 식지(堆食食之); 음식을 사양하여 그것을 먹게 함.

◐ 탈의 의지(脫衣衣之); 입고 있는 옷을 벗어 옷을 입게 함.

괴철은 한신을 찾아가 한신에게 한 고조는 고생을 같이할 수 있지만, 부귀영화는 같이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하고, 한신에게 한왕(韓王)이 될 것을 말하였다. 그러나 한신은 괴철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한신이 한 고조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한 고조는 한신이 대장군으로 한중의 왕으로 봉하게 되면 그의 재능으로 민심을 얻어 천하를 빼앗을 것을 걱정하고 의심했다. 결국 한신의 충성심을 믿지 않고 그를 죽였다. 마치 사냥이 끝나면 주인은 사냥개를 삶는 격이 되었다. 그러므로 한 고조가 한신을 저버린 것이다.


50. 한 고조는 소하(蕭何)의 덕으로 천하를 얻었나니 너희들은 아무 것도 베풀 것이 없는지라. 다만 언덕(言德)을 잘 가져 남에게 말을 선하게 하면 그가 잘 되고 그 여음이 밀려서 점점 큰 복이 되어 내 몸에 이르고 남의 말을 악하게 하면 그에게 해를 입히고 그 여음이 밀려와서 점점 큰 화가 되어 내 몸에 이르나니 삼갈지니라 하셨도다.


◐ 소하(蕭何); 중국 한(韓)나라의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제상. 

한신(韓信), 장량(張良), 조참(曺參)과 함께 고조의 공신 중의 일원,  그는 진(秦)나라를 토벌할 때 秦(진)의 도성에서 도적문서를 입수하여 한나라 왕조의 경영의 기초를 세웠으며, 초(楚), 한(漢) 전쟁 때에는 고조를 위하여 군인과 식량의 보급을 확보하였기 때문에 고조가 즉위할 때에 논공행상에서 으뜸가는 공신이라 하여 찬후로 봉해지고 시읍 7,000호를 받았다. 제상 시절에는 진나라의 법률을 취사(取捨)하여 구장율(九章律)을 편찬하였다. 이 말씀은 신하인 소하가 고조를 위하여 베풀었으나 우리들은 베풀 것이 없다. 그러나 말이라도 남을 잘되게 베풀라고 하신 것이다.


51. 대학(大學)에 “물유본말하고 사유종시하니 지소선후면 즉근도의(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卽近道矣)”라 하였고 또 “기소후자에 박이오 기소박자에 후하리 미지유야(其所厚者薄 其所薄者厚 未之有也)”라 하였으니 이것을 거울로 삼고 일하라.


◐ 물유본말하고 사유종시하니 지소선후면 즉근도의(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卽近道矣); 사물에는 근본이 되는 것과 말단이 되는 것이 있고, 일에는 마침과 시작이 있다. 그것의 먼저 할 것과 나중 할 것을 알면 도에 가깝다.

◐ 기소후자박 기소박자후 미지유야(其所厚者薄 其所薄者厚 未之有也); 그 하는 바가 후한 자에게 박하게 하고, 그 하는 바가 박한 자에게 후하게 하리오. 아직 그런 것은 본 적이 없다. 하였으니 이것을 거울로 삼고 일하라” 하였다.


52. “위천하자(爲天下者)는 불고 가사(不顧家事)”라 하였으되 제갈량(諸葛亮)은 유상 팔백주(有桑八百株)와 박전 십오경(薄田十五頃)의 탓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느니라.


◐ 爲天下者不顧家事(위천하자불고가사);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가정 일을 돌아보지 않는다.

◐ 유상팔백주(有桑八百株)와 박전십오경(薄田十五頃); 제갈량이 유비를 만나 천하사를 위해 떠날 때 동생 제갈균에게 당부하여 말하길 ‘내가 유비현덕의 세 번 찾아 주신 은혜를 받으매 아니 갈 수 없어 나갈 터이니, 너는 여기서 부지런히 밭을 갈아 땅을 묵히는 일이 없도록 해라. 내 공을 이루는 날 다시 돌아 오겠다’ 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제갈량에 대해 지은 시가 있으니 이러하다.


미처 집을 나서기 전 돌아올 일 예산했네.

그가 공명 세운 날에 응당 생각나련만

간곡한 임의 부탁 저버릴 길 없어

추풍(秋風) 오장원(五丈原)에 큰 별은 떨어졌네.


여기서 제갈량의 마음과 뜻을 볼 수가 있다. 제갈량이 천하사에 뜻을 두고 천하의 창생들을 구제하여 만백성을 편안케 해주고자 하는 대의(大義)를 가졌다고는 볼 수 없다. 단지 자신의 뛰어난 제주를 발휘하여 천하를 제패하고 공명을 세울 뜻을 두고 그 재주를 써 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역력히 읽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떠나면서 동생인 제갈균에게 유상팔백주와 박전십오경을 맡아 잘 간수하라고 당부를 하고 자신이 공명을 세우는 날 돌아올 것이라는 다짐을 하였던 것이다. 즉 천하를 구하여 창생들을 구제하고자 나서는 자가 천하창생들을 생각하는 마음보다는 박전십오경과 유상팔백주를 잘 가꾸게 하여 자기의 식솔들의 의식을 먼저 단속해 놓고, 혼란한 시국을 평정하여 백성의 안위를 우선하는 마음보다는 자신의 재주를 발휘하여 공명을 취하고자 하였으니 이는 신명(神明)이 제갈량의 모사(謀事)에 응해 주지 않게 하는 계기를 주어 천하사를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제갈량이 호로곡(葫蘆谷)에서 사마의(司馬懿) 삼부자를 화공작전을 써서 꼼짝없이 죽게끔 만들었으나 그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내려 사마의 부자가 살아날 수 있었다. 이 때 제갈량이 하늘을 우러러 한 말이 ‘모사재인(謀事在人)이요, 성사재천(成事在天)’이라 하였다. 제갈량의 신과 같은 재주라도 신명이 응해 주지 않으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그 후 오장원(五丈原) 전투에서 사마의(司馬懿)가 천문을 보아 제갈량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 지연작전을 써서 제갈량이 죽기를 기다렸다가 제갈량이 죽자 전투를 치루어 승리로 이끌었다. 그 후 그 아들 사마소(司馬昭)가 위(魏)를 도와 촉한(蜀漢)을 멸망시키고, 소의 아들 사마염(司馬炎)이 위제(魏帝)로부터 황제자리를 양위 받아 제위에 올라 동진(東晋)을 세우고 사마의를 선제(宣帝)로 받들었으니 결국 천하는 사마씨(司馬氏)에게로 돌아가게 되었다. 제갈량은 천하창생을 구하고자 하는데 뜻을 두지 못함으로써 그 재주는 놀라웠으나 신명이 응해 주지를 않으므로 해서 결국 천하사를 이루지 못하였다. 천하사를 하는 자가 한 개인의 작은 가사에 연연하여 결국은 큰일을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또 조정산성사께서 말씀하시길 ‘천하사(天下事)를 도모(圖謀)하는 자는 모름지기 하우씨(夏禹氏)를 본(本) 받을 지니라’ 증산성사께서도 ‘위천하자(爲天下者)는 불고가사(不顧家事)니라’ 하시고 제갈량의 성공하지 못한 고사(古事)를 말씀하셨거니와 ‘하우씨(夏禹氏)는 구년치수(九年治水)하는 사이 삼과기문(三過其門)하되 불입기문(不入其門)하였으므로 왕천하(王天下)하였느니라. 하우씨(夏禹氏)인들 구년 동안 어찌 처자식이 그립지 않았으랴’ 하셨다. 천하를 건지려는 뜻을 둔 자가 나의 한 개인적인 가사에 치우친다면 천하사를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가사를 져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천하(天下)도 역시 하나의 큰 가정이므로 천하사의 책임을 맡은 자는 천하의 큰살림을 모두 살펴야 하는 것이지 개인적인 살림에 연연하지 못하는 것이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에 있는 자로써 박전십오경과 유상팔백주를 두어 자손의 의식은 여유가 있으니 자신의 생활은 조금도 염려가 없다고 장담하였으니 제갈량이 과연 천하창생의 배를 불리고자 하였겠는가. 창생을 구하고자 하는 뜻이 없는 곳에 신명이 응할 리가 만무한 것이니 천하사를 성공시킬 수 가 없었던 것이다. 반면 하우씨(夏禹氏)는 구년치수를 하는 동안 자기 집 앞을 세 번 지나칠 일이 있었으나 단 한 번도 집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그것이 어찌 하우씨가 집안 식구들을 위하는 마음이 없어서이겠는가. 그러나 천하창생의 목숨을 책임진 자가 개인의 정에 이끌리어 마음에 편중을 두고 내 가정을 먼저 살핀다면 가정을 두고 치수(治水)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들이 어느 누구인들 개인의 사사로움이 없는 자가 있겠는가. 그 사사로움을 모두 채우고자 하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제 살길만 챙기느라 바빠서 천하창생을 구하는 치수(治水) 사업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천하사를 하는 자는 천하에 공평하게 처사하는 것이지 내 가정의 안위에 우선을 두어 편중을 둘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하우씨가 천하창생을 구제하고자 하는데 뜻을 두고 천하사에 공평무사하였을 따름이요. 사사로운 감정을 조금이라도 두지 않았으므로 천하의 왕(王)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천하사에 종사하는 자는 내 가정을 돌보는 일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다.


53. 생각에서 생각이 나오나니라.


54. 증산성사께서 “양이 적은 자에게 과중하게 주면 배가 터질 것이고 양이 큰 자에게 적게 주면 배가 고플 터이니 각자의 기국(器局)에 맞추어 주리라”고 말씀하셨도다.


55. 지난 선천 영웅시대는 죄로써 먹고 살았으나 후천 성인시대는 선으로써 먹고 살리니 죄로써 먹고 사는 것이 장구하랴, 선으로써 먹고 사는 것이 장구하랴. 이제 후천 중생으로 하여금 선으로써 먹고 살 도수를 짜 놓았도다.


◐ 선천에는 영웅들이 천하를 제패하고자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을 해치고 남의 나라를 빼앗아 땅과 권력을 장악했다. 그리고는 전쟁에서 수훈을 세운 공로자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또 자기 나라의 백성들을 살게 하였으니 선천은 죄로써 먹고살았다. 그러나 후천에는 모두 도(道)로써 수도하여 인격과 인품이 완성된 성인(聖人)들만이 갈 수 있고, 그러한 성인들로써 각기 운수를 정하여 각자 천명(天命)을 받들어 임무에 충실토록 하고, 네가 없으면 내가 살 수 없고, 내가 아니면 네가 살 수 없는 상생의 구조로써 서로 조화롭게 살아가도록 도수를 짜두었으므로 남을 해쳐서 자기 것으로 만든다거나, 탐욕심으로 사심을 일으켜 남의 것을 훔치는 등의 일체 죄를 짓지 않는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후천의 모든 중생들은 죄를 짓지 않고 선으로써 먹고 살아가는 것이다.


56. 천존과 지존보다 인존이 크니 이제는 인존시대라. 마음을 부지런히 하라.


57. 증산성사께서 하루는 공사를 행하시고 “대장부(大丈夫) 대장부(大丈婦)”라 써서 불사르셨도다.


58. 후천에는 계급이 많지 아니하나 두 계급이 있으리라. 그러나 식록은 고르리니 만일 급이 낮고 먹기까지 고르지 못하면 어찌 원통하지 않으리요.


◐ 후천에는 사농공상의 원리가 통한 사농공상의 직업(職業)을 가진 자와 군자(君子)가 있어 두 계급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농공상의 직을 가지든 의통직업을 가지든 간에 식록은 고르게 같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야만 억울하고 원통한 것이 없이 욕심을 부려 잘못되는 일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천은 식록은 동일하되 자신이 지은 바 복에 따라 수명이 또한 다르다. 다시 말하면 복을 많이 지은 바에 따라 후천 선경의 무궁무진한 극락세계를 누리며 살아가는 시간이 다른 것이다. 복이 많은 자는 오만 년의 세월을 누리며 살되, 복이 적은 자는 그렇지 못하고 수명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식록이 동일하므로 욕심과 억울함이 생기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