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증산 성사께서
“제갈량(諸葛亮)이 제단에서 칠일 칠야 동안 공을 드려 동남풍을 불게 하였다는 것이 우스운 일이라. 공을 드리는 동안 일이 그릇되어 버리면 어찌 하리요” 말씀하시고 곧 동남풍을 일으켜 보였도다.
● 적벽대전(赤壁大戰)과 동남풍
208년 원소(袁紹)를 토벌하고 북방의 평정을 완료하고 승상에 임명된 조조는 기세가 등등하여 남방 정벌을 시도하였다. 이때 형주(荊州)에서는 유표(劉表)가 병사하고 차남 유종(劉琮)이 뒤를 이었으나, 유종은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조조의 대군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대로 항복하고 만다. 번성(樊城)을 지키고 있던 유비 군은 믿었던 유종이 괴멸하자 동남의 하구(夏口 : 지금의 漢口)를 향해 철수하였다. 강북지역현재의 양자강 이북지역을 장악한 위나라의 조조는 강남지역마저 정벌하여 천하를 평정하고 바다를 다스리고자 20만명(일설에는 83만명)의 대병을 거느리고 지금의 무한 부근에 있는 적벽에 주둔하면서 남진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하구에 몰리어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된 유비는 손권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 당시 손권은 시상(柴桑)까지 진군하여 형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제갈공명은 이때 사신을 자청하여 손권을 설득하기 위해서 오나라로 건너갔다.
결국 제갈공명은 형주가 함락되면 오나라도 직접 조조의 압력을 받게 되기 때문에 오와 촉이 연합하여 조조의 대군을 물리쳐야만 서로가 살 수 있다는 논리로 손권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이에 손권은 주유(周瑜)에게 명하여 수군 3만을 이끌고 출전하게 하였다.
주유는 기마에 능한 조조 군사들의 도강(渡江)을 막기 위해 어떠한 방법이 좋을지 전략가 방통(龐統)에게 묘계를 청하였다. 방통이라면 일찍이 유비가 사마휘에게 군사(軍師)를 청하자 ‘복룡(伏龍)과 봉추(鳳雛),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얻는다면 천하를 평정 할 수 있다’라고 했던 인물 중 한사람이다. 복룡은 와룡(臥龍)으로 제갈량을 말했고, 봉추는 바로 방통을 말했던 것이다.
주유가 노숙에게 당부하여 방통에게 묘계를 청하자, 방통은 반듯이 화공(火攻)을 쓰되 연환계(連環計)를 써야만 한다고 일어주었다. 연환계는 배를 쇠사슬로 서로 연결하여 묶어놓는 것으로 강 위에서 한배에 불이 붙으면 나머지 배들은 사면으로 흩어지고 말 것 이므로 연환계를 쓰서 배들을 한데 묶어 놓지 않고는 화공(火攻)을 쓰도 소용없다는 것이었다.
이 계책을 실현하기 위해 방통은 조조의 첩자로 주유에게 왔던 장간을 따라 거짓으로 조조에게 접근하게 된다. 방통은 수전(水戰)에 약한 조조 군사들이 상대적으로 수전에 능한 주유의 군사들을 대적하는 것이 큰 걱정거리임을 간파하고 조조에게 연환계를 쓰라고 일러준다. 조조군은 원래 북방의 군사들이라 기마에는 능하지만 배에는 익숙하지 않아 배 멀미로 인해 구토하는 병이 나서 전투를 수행하는데 큰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큰 배와 작은 배를 적절히 배합하여 삼십척에서 오십척씩 서로 쇠고리로 연쇄해 놓고 그 위에 넓은 판자를 깔아놓으면 아무리 풍랑이 일고 조수가 오르내린다하더라도 두려울 것이 없다는 계책이었다. 조조는 방통의 계책에 흡족해 하였고 방통의 말대로 대소 선척을 모두 배합하여 연쇄해 놓았다. 그러자 정중덕이 나서서 말하길 “만약 적군이 화공을 쓰면 피하기 어려우니 방비를 하여야 합니다” 하고 걱정을 하자 조조는 웃으며 말하길 “대저 화공을 쓰려면 반듯이 풍력을 빌려야만 하는데, 이 겨울철에는 다만 서풍, 북풍이 있을 뿐이지 어찌 동풍, 남풍이 있겠소? 우리는 서북쪽에 있고 주유는 다들 남쪽 언덕에 있으니 화공을 쓰게 되면 도리어 저희 막사만 태워버리게 되니 무엇이 두렵겠소? 만약 시월 소춘(小春)시절이기나 하다면 내가 벌써 방비를 했을 것이오” 하며 호언장담하였다.
한편으로 주유는 방통의 계책대로 연환계가 이루어지기는 하였으나 문제는 조조의 말처럼 남동풍이 불어야 화공(火攻)을 쓸 수 있을 터인데 이때는 북풍이 거세게 부는 한겨울 동짓달이었으니 난감할 지경이었다. 이 때 촉나라의 재상 제갈공명이 대책을 제안하는데, 풍백우사라는 비법을 통해 동남풍이 불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제가 비록 재주는 없으나 일찍이 이인(異人)을 만나 기문둔갑천서(奇門遁甲天書)를 전수 받아 능히 바람을 불게하며 비를 내리게 할 수 있소. 도독[주유]이 동남풍을 쓰시겠다면 남병산(南屛山)에다 칠성단(七星壇)을 쌓고 제가 그 단위에 올라가 술법을 써서 동남풍을 빌려다가 도독이 군사를 쓰시는데 도움을 드릴까 하는데 어떻겠소?”
주유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대사를 가히 이룰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시일이 다급하니 늦어서는 안되겠습니다”라고 하며 당부하였으나 실은 반신반의 하였다.
그러나 주유는 일이 다급한지라 병사를 시켜 남병산에 칠성단을 쌓게 하였다. 칠성단은 동남방의 붉은 흙을 파다가 쌓게 하였는데 단의 둘레가 24장이요 매 층의 높이는 3척으로 모두 9척으로 쌓았다.
그리고 일층에는 이십팔수(二十八宿)의 기를 세우니 동방은 청기로 각항저방심미기(角亢氐房心尾箕) 일곱 깃발을 벌려 세우고, 북방은 흑기로 두우여허위실벽(斗牛女虛危室壁) 일곱 깃발을 세우고, 서방은 백기로 규루위묘필자삼(奎婁胃昴畢觜參) 일곱 깃발을 세우고, 남방은 홍기로 정귀유성장익진(井鬼柳星張翼軫) 일곱 깃발을 세웠다. 그리고 이층은 64괘(卦)에 응하여 누런깃발 64개를 8방에 세웠다. 또 삼층은 네 사람으로 하여금 사방에 서게 하였는데 앞쪽 왼편에는 장대 끝에 닭의 깃을 달아 바람의 동정을 살피게 하고, 앞쪽 오른편에는 북두칠성을 그린 신호띠를 매달아서 바람의 방향을 표시하게 하고, 뒤쪽 왼편에 선사람은 손에 보검을 받들고, 뒤쪽 오른쪽에 선 사람은 손에 향로를 받들며, 단 아래는 24명이 각기 다른 무기를 들고 사면을 둘러싸게 하였다.
그리고 동짓달 스무날 갑자 갑일에 목욕재계하고 칠성단에 올라가 칠일칠야(七日七夜) 기도를 들였다.
한편 주유는 군관들을 장중으로 불러들여서 동남풍이 불면 곧 출전키로 하고 화선(火船) 20척을 준비해서 뱃머리에 큰못을 빽빽이 박아놓고 배안에는 마른 갈대와 섶단을 산더미같이 쌓아 올리고 유황 등의 발화물질과 생선기름을 부어 놓고 청포와 유지를 푹 덮어씌우고 적진을 향해 돌진할 준비를 했다.
결전의 날, 공명은 목욕재계를 한 후 칠성단에 올라가 남동풍이 불기를 기원했다. 해는 저물어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하늘은 맑아 실바람조차 불지 않았다. 주유가 노숙을 보고 말하길 “공명의 말이 거짓이오. 이 깊은 겨울에 어떻게 동남풍을 얻겠단 말이요”라고 하며 의심을 하자, 노숙은 말하길 “내 생각에는 공명이 결코 거짓말을 한 것 같진 않습니다”라고 하며 기다렸다. 그런데 밤이 깊어 삼경(밤 11시∼새벽 1시 사이)이 가까워지자 바람소리가 들리기에 주유가 장막에서 나가보니 깃발이 펄럭이는데 서북편을 가리키고 있었다. 동남풍이 점점 거세지더니 바람이 크게 일어났다.
오나라 군사들은 급히 20여 척의 화선을 띄우고, 그 뒤에 각각 300여 척의 대군을 이끌고 조조 진영을 급습하였다. 속수무책으로 당한 조조는 대패하여 겨우 27기(騎)의 군사와 함께 혈로를 뚫고 도망가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적벽대전(赤壁大戰)이다.
주유는 동남풍이 거세게 일어나자 깜짝 놀라 “제갈량은 천지의 조화를 뺏는 법과 귀신도 헤아리지 못할 도술을 가지고 있으니 만일 이 사람을 남겨두었다가는 동오(東吳)의 화근이 될 것이다. 한시바삐 죽여서 후일의 근심을 없애도록 해야겠다” 하고 급히 남병산 칠성단으로 장수를 보내어 “제갈량을 잡아 불문곡직하고 즉시 목을 벤 다음 수급을 가지고 오라”고 하였으나 장수들이 칠성단에 도착했을 때 제갈량은 이미 배 한척을 타고 홀연히 떠난 뒤였다.
유비는 이 적벽대전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마침내 형주를 손에 넣고 삼국정립(三國鼎立)의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유비는 214년에 사실상 파촉(巴蜀)의 땅을 지배하고 221년 촉한(蜀漢)의 건국을 이룩하였다.
적벽대전의 결정적 승리는 바로 동남풍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갈량이 동남풍을 빌어 전무후무한 전술을 펼친 것은 신묘한 재주임에는 틀림없으나 칠일칠야 정성으로 이루어졌으니 만약 이 동안에 조조가 침공을 해왔더라면 실패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 러일전쟁과 동남풍
강증산 성사께서 이 일을 두고 말씀하시기를 “제갈량이 공을 드리는 동안 일이 그릇되어 버리면 어찌 하리요” 말씀하시고 곧바로 동남풍을 일으켜 보였다. 그리고 그 후 49일 동안 동남풍을 불게 하여 동양 전체를 섭권하려던 러시아의 야욕을 분쇄하게 하였으니 적벽대전에 비유될 바가 아니라 하겠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강증산 성사께서 계묘년(1903년) 여름에 자신을 따르는 종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제 동양 형세가 위급함이 누란과 같아서 내가 붙잡지 아니하면 영원히 서양에 넘어가리라” 깊이 우려하시며 “내가 일로전쟁(日露戰爭)을 붙여 일본을 도와서 러시아를 물리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당시 종도들로서는 이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은 러시아에 비하여 군사력 면에서 적수가 되지 못하였던 때이므로 모두 허황된 말이라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실재 1904년 2월 러일전쟁은 일어났고 러시아는 육전에서 불리하게 되는데 1905년 1월 “피의 일요일”이라 불리는 노동자 폭동이 거세게 일어나자 만주에서 전쟁중이던 육군이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철수를 하였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육전에서 불리한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흑해에 정박중인 발틱함대를 극동으로 파견하여 전세를 역전시키는 작전을 구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38척의 무적함대 발틱은 뜻밖에도 약세를 면치 못하던 일본 해군 12척의 함대에 궤멸되고 마는데 이것은 바로 때아니게 불어왔던 동남풍(東南風)으로 인해서이다.
러시아 발틱함대가 38척이라는 거대한 선단(船團)을 이끌고 대한해협으로 들어오고 있을 즈음 강증산 성사께서는 “이제 서양 사람의 세력을 물리치고 동양을 붙잡음이 옳으니 대신문(大神門)을 열어 사십구 일을 한 도수로 하여 동남풍을 불어 일으켜 서양 세력을 꺾으리라”고 말씀하시고 동남풍을 불러일으키는 공사를 행하시자 49일 동안 연일 동남풍이 불어왔다.
당시 일본 해군 사령관 도고 헤이치로(東鄕平八郞)는 거대한 함대가 일렬로 줄지어 들어오는 꿈을 일주일 동안 세 번이나 꾸고는 “이것은 하늘의 계시다”라고 하면서 예상 밖의 전술을 구사하게 되는데 일명 “T”자 작전이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위험한 전술로서 일렬로 들어오는 적을 가로로 막게되면 표적이 넓어 100%당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905년 5월 27일경 새벽에 실재 발틱함대는 등화관제를 하고 일렬로 줄지어 들어왔고 일본군은 그 길목에서 가로 막고 있었다. 꿈에서 본 상황 그대로였다. 치열한 해전이 벌어졌고 발틱함대는 거의 궤멸되다시피 하였는데 이것은 때 아닌 동남풍이 거세게 불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북 방향으로 대한해협을 가로지르던 발틱함대는 동남풍 때문에 파도를 옆면에서 받게 되고 이로 인해 배가 몹시 흔들렸던 반면 동남 방향으로 가로막고 있던 일본함대는 파도를 타고 있으므로 흔들림이 훨씬 적었던 것이다. 이것은 포탄의 명중률과 전투력 면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어 러시아 함포의 포탄은 번번이 빗나가는 반면 일본군 함대의 포탄은 명중하였던 것이다. 발틱함대 전함 38척 중 35척 격침 또는 파괴, 3척 나포, 4,800명이 사망하는 대 참패를 당하였다. 이에 견주어 일본 해군의 피해는 전함 12척 중 고작 3척 침몰, 전사 117명에 불과했다. 이때는 5월 중순경이라 동남풍이 불어올 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동남풍이 세게 불어와 일본해군을 도왔으므로 일본군은 이 동남풍을 일컬어 신풍(神風:가미가제)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제갈량은 동남풍으로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삼국정립을 시켰다면, 강증산 성사께서는 동남풍으로 러일전쟁을 일본의 승리로 이끌고 서양세력으로부터 동양을 구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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