束手之地葛公謨計不能善事
속수지지갈공모계불능선사
瓦解之餘韓信兵仙亦無奈何
와해지여한신병선역무내하
두 손이 묶인 상황에서는 제갈공명이 일을 꾸며 계획한다 하여도 능히 일을 잘 할 수 없고, 병사가 흩어진 연후에는 병선이라는 한신이라도 어찌할 수 없다.
제갈공명의 신과 같이 뛰어난 재주라도 수족이 되어줄 사람이 없으면 쓰지 못하고, 아무리 병사를 잘 다루는 한신이라도 병사가 흩어지고 없어진 연후에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는 의미이다.
● 제갈공명의 속수지지(束手之地) 고사
조조(曹操)가 급파한 위나라의 명장 사마의(司馬懿)는 20만 대군으로 기산의 산야(山野)에 부채꼴[扇形]의 진을 치고 제갈량의 침공군과 대치했다. 이 ‘진(陣)’을 깰 제갈량의 계책은 이미 서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지략이 뛰어난 사마의인 만큼 군량 수송로(軍糧輸送路)의 요충지인 ‘가정(街亭:韓中의 東쪽)’을 수비하는 것이 문제였다.
만약 가정(街亭)을 잃으면 촉나라의 중원(中原) 진출의 웅대한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중책(重責)을 맡길 만한 장수가 마땅치 않아서 제갈량은 고민했다.
그 때 마속(馬謖:190-228)이 그 중책을 자원하고 나섰다. 그러나 노회(老獪)한 사마의와 대결하기에는 아직 어렸다. 그래서 제갈량이 주저하자 마속은 거듭 간청했다.
“다년간 병략(兵略)을 익혔는데 어찌 가정(街亭) 하나 지켜 내지 못하겠습니까? 만약 패하면 저는 물론 일가권속(一家眷屬)까지 참형을 당해도 결코 원망치 않겠습니다.”
제갈량은 마속에게 임무를 맡기기로 했다.
“좋다. 그러나 군율(軍律)에는 두 말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서둘러 가정에 도착한 마속은 지형부터 살펴보았다. 삼면이 절벽을 이룬 산이 있었다. 제갈량의 명령은 그 산기슭의 협로(峽路)를 사수만 하라는 것이었으나 마속은 욕심을 내어 적을 유인하여 역공할 생각으로 산 위에다 진을 쳤다. 그러나 마속의 생각과 달리 위나라 군사는 산기슭을 포위만 한 채로 산 위를 공격해 올라오지 않았다. 그러자 산 위에서는 식수가 끊겼고, 다급해진 마속은 전병력을 동원해 포위망을 돌파하려 했으나 위나라 용장 장합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마속이 실패한 지경에 이르자 제갈량의 계책(計策)도 속수무책(束手無策)이었다. 결국 전군(全軍)을 한중(韓中)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제갈량은 평소에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지만 군율을 어긴 마속을 참형에 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제갈량의 뛰어난 계책일지라도 그 수족이 되는 장수가 명령을 듣지 않는다면 마치 손발이 묶인 지경이 되어 쓸 수가 없다는 것이다.
● 한신의 와해지여(瓦解之餘) 고사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를 멸하고 한(漢)나라의 고조(高祖)가 된 유방(劉邦)은 소하(蕭何)․장량(張良)과 더불어 한나라의 창업 삼걸(創業三傑) 중 한 사람인 한신(韓信)을 초왕(楚王)에 책봉했다(BC 200). 원래 한신은 제나라의 왕에 책봉되어 있었으나 전쟁이 끝나고 보니 유방은 한신이라는 존재가 몹시 두려웠다. 한신이 물산이 풍부한 제나라의 70여개 성을 점령하고 있으면 좀처럼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뿐아니라 그 세력이 커질 것을 두려하였던 유방은 한신을 멀리 초나라의 왕으로 보내기로 한 것이다. 한신은 못 마땅하였으나 고향인 초나라로 금의환향(錦衣還鄕)하라는 유방의 말에 어찌할 수 없이 초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유방은 황제의 위에 오르고 문무백관이 모인자리에서 한나라를 창업한 삼걸(三傑)을 칭찬하기를 “내가 천하를 얻게 된 것은 내가 잘났기 때문이 아니라, 세분의 덕택이었다.
장중에 앉아서 천리 밖의 승리를 내다볼 수 있는 점에 있어서는 장량 선생을 따를 수 없고, 백성들을 잘 다스리고 군량을 풍부하게 공급해 준 점에 있어서는 소하 승상을 따를 수 없고,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승리를 쟁취하는 점에서는 나는 한신 장군을 따를 수가 없다. 그러므로 내가 천하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세분의 인걸을 얻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한신에게 묻기를 “장군은 백만대군을 거느릴 수 있다고 보는데, 장군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한신이 웃으며 대답하기를 “신은 백만대군뿐이 아니옵고 다다익선(多多益善)이옵니다”
유방이 다시 묻기를 “그러면 나의 경우에는 군사를 얼마나 거느릴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폐하께서 거느리실 군사의 한도는 십만인 줄로 아뢰옵니다.”
이 말에 유방의 얼굴은 불쾌한 빛이 감돌았고 좌중은 긴장감이 돌았다. 한창 동안 눈을 감고 있던 유방은 가벼운 미소를 띄면서 다시 묻기를 “한신 장군은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하면서, 나는 겨우 십만밖에 거느릴 능력밖에 없다면, 장군은 어찌하여 나의 신하가 되었소?”
이 질문에 한신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하기를“신은 병사들의 장수[兵之將]가 될 소질은 풍부하여도 장수들의 장수[將之將]가 될 소질은 전혀 없사옵니다. 그러나 폐하게서는 병사들의 장수[兵之將]는 못되어도 장수들의 장수[將之將]가 될 재질을 풍부하게 타고 나셨습니다. 그러니 어찌 신이 폐하의 신하가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말에 유방은 크게 기뻐하자 좌중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 말에 유방은 내심 한신에게 형용하기 어려운 두려움을 갖고 더욱 경계하게 되었다.
당시는 유방이 항우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하기는 하였지만 아직 곳곳에서 반란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실정에서 항우의 맹장(猛將)이었던 종이매(鍾離昧)가 예로부터 절친한 사이였던 한신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한고조(漢高祖)는 지난날 종이매에게 고전했던 악몽이 되살아나 크게 노하는 한편 한신이 역심을 품고 있다고 의심을 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고조(高祖)에게 초나라 농부 한 사람이 찾아와 ‘한신은 항우의 심복이었던 종이매를 숨겨 두고 있을 뿐 아니라 농지를 수탈하여 군사 훈련장으로 쓰고 있으니 이는 필시 반란을 도모하려는 의사임이 분명하다’는 보고를 하였다. 진노한 고조는 당장 군사를 파견하여 무력으로 평정하려 하였으나 참모 진평(陳平)이 제지하였다. “한신과 무력으로 싸워서는 안될 것 입니다. 그는 항우에 비길 장수가 아닙니다. 군사를 파견하여 그를 무력으로 평정하시려다가는 큰일 나시옵니다. 그러므로 지략으로써 그를 생포하셔야 합니다. 신에게 좋은 계책이 있사옵니다.” 그리하여 유방은 진평의 헌책(獻策)에 따라 제후들에게 이렇게 명했다.
“모든 제후(諸侯)들은 초(楚) 땅의 진(陳:河南省 內)에서 대기하다가 운몽호(雲夢湖)로 유행(遊幸)하는 짐을 따르도록 하라” 하며 제후들을 소집하고 이 자리에서 한신을 생포할 계략을 세웠다.
고조의 명을 받자 한신은 예삿일이 아님을 직감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고조가 이미 종이매를 숨겨 두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있다고 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한신은 종이매를 불러 말하기를 “그대를 숨겨둔 사실이 발견되었으니 나도 죽고 그대도 죽게 될 것이요. 그러니 어찌하면 좋겠소?” 이 말을 들은 종이매는 한신에게 말하기를 “지금 유방이 쳐들어오지 못함은 나를 두려워하기 때문이요. 나를 죽이고 나면 초왕도 반듯이 죽게 될 것이요”라고 하자 한신은 “내가 비록 한제의 손에 죽는다 하더라도 나에게는 두 마음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야 겠소.”라고 하였다. 이 말에 종이매는 한신에게 친구를 배신하고 영달을 꽤하는 자라고 분개하며 자결하고 말았다.
그래서 한신은 자결한 종이매의 목을 가지고 고조를 배알(拜謁)했다. 그러나 종이매의 말처럼 한고조 유방은 한신을 역적으로 포박하고 말았다. 한신은 자신의 일을 해명하였으나 유방은 과거에부터 마음에 두었던 모든 사실들을 들춰내어 죄로 간주하며 한신의 해명을 들으려하지 않았다. 여기서 한신은 분개하여 말하기를
狡兎死 良狗烹 高鳥盡 良弓藏
교토사 양구팽 고조진 양궁장
敵國破 謀臣亡 天下已定 我固當烹
적국파 모신망 천하이정 아고당팽
토끼를 다 잡고 나면 좋은 사냥개는 보신탕이 되어버리고, 새 사냥이 끝나면 좋은 활은 곳간에 처박히며, 적을 다 때려 잡고나면 지혜 있는 신하는 버림을 받는다고 하더니, 그 말은 천하에 이미 정하여져 있는 말이구나. 나 자신이 이런 신세가 될 줄 누가 알았으리오.
이일을 두고 후대 사람들은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 하였다. 한신이 죄인이 되어 수레에 실려 오는 광경을 보고 대부 전긍(田肯)은 유방에게 간하기를 “한신은 천하를 통일하는데 많은 공로를 세운 사람입니다. 폐하께서 세인들의 말만 듣고 운몽까지 행차하셔서 한신을 친히 체포하여 오셨으니 이 어찌된 일이옵니까?”
“천하의 보고인 제나라를 평정한 사람이 바로 한신 장군이었으니 그 공로로 보아 한신 장군을 제나라 왕에 봉했어야 옳은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신 장군을 초왕으로 강등하였다가 이제 죄가 있다고 체포까지 해오셨으니, 사후처리를 그처럼 그릇되게 하신다면, 폐하의 성은(聖恩)을 누가 믿겠습니까?” 라고 직간을 하자 유방은 마음이 누그러져서 한신을 살려두고 회음후(淮陰侯)에 봉하고 함양에 머물게 하였다.
이후 진희라는 자가 대주에서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유방은 친히 원정을 떠나려 하자 여황후가 묻기를 “한신 장군을 두고 어찌 폐하께서 직접 원정을 나간신단 말이요?”라고 하였다. 그러자 유방이 답하길 “한신이 진희와 결탁하여 모반할지 모르기 때문이요. 한신은 계략이 워낙 탁월하여 기회가 주어지면 어떤 변란을 일으킬지 모르오. 한신은 나의 그늘에서만 살아가기에 너무도 위대한 인물이오. 그래서 그에게 모든 병권을 박탈해버린것도 그런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요.”라고 하였다.
그리고 유방은 여황후(呂皇侯)에게 임시로 국권을 주고 한신을 잘 감시하라고 한 후 원정을 떠났다.
그리고 얼마 후 여황후는 한신이 진희와 내통하고 모반을 한다는 이유를 들어 처형하고 말았으니 한신은 너무나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한신은 형장으로 끌려가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를 “아아, 나는 ‘3국 분립’을 하라는 괴철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가 오늘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구나. 이것이 나의 운명이었단 말인가.”
이처럼 병사를 다루는 데는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 자신하였던 병선(兵仙) 한신 일지라도 이미 병권이 박탈당해 버리고 병사가 없어진 연후에는 어찌 해볼 도리가 없이 토사구팽(兎死狗烹)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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