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神道)로서 크고 작은 일을 다스리면
현묘 불칙한 공이 이룩되나니 이것이 곧 무위화니라.
신도를 바로잡아 모든 일을 도의에 맞추어서
한량없는 선경의 운수를 정하리니
제 도수가 돌아닿는 대로 새 기틀이 열리리라.
지나간 임진란을 최풍헌(崔風憲)이 맡았으면 사흘에 불과하고,
진묵(震黙)이 당하였으면 석달이 넘지 않고,
송구봉(宋龜峰)이 맡았으면 여덟 달에 평란하였으리라.
이것은 다만 선․불․유의 법술이 다른 까닭이니라.
옛적에는 판이 좁고 일이 간단하므로 한가지만 써도
능히 광란을 바로 잡을 수 있었으되
오늘날은 동서가 교류하여 판이 넓어지고 일이 복잡하여져서
모든 법을 합하여 쓰지 않고는 혼란을 능히 바로 잡지 못하리라.
최풍헌은 선조(宣祖)가 피난 간 의주로 가서 거지차림으로 막사를 돌며 “나에게 병권을 주면 왜적을 3일에 물리치리라” 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그를 믿어주지 않자 그는 병권을 얻지 못하여 역사(役事)를 하지 못했다. 만약 최풍헌이 병권(兵權)을 가졌더라면 당시 왜적이 3파로 나뉘어 공격해오는 길목에 서서 적장의 목을 하루에 한 명씩 베어버리면 사흘 만에 전쟁을 끝낼 수 있었을 것이다.
진묵은 불도(佛道)에 통한 자라 그 법술이 신통하였으나 역시 전쟁에 나설 수 없었고, 송구봉 역시 서자 출신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으므로 나설 수 없었다. 다만 송구봉은 거북선의 설계도를 이순신에게 넘겼다는 다음과 같은 고사(故事)가 전한다.
이순신이 12, 3세 때의 일이었다. 이순신은 어려서부터 전쟁놀이를 좋아하였으며 친구들과 함께 진(陣)을 치고 진법(陣法) 연습을 하곤 했다. 하루는 송구봉이 지나가다 이 광경을 목도하였다. 송구봉은 이순신의 진법놀이를 지켜보다가 자기의 집에 다녀갈 것을 종용했다고 한다.
이순신이 밤에 송구봉의 집을 찾아갔더니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방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벽에 구선도(龜船圖), 즉 거북선 그림이 걸려 있었다.
훗날 이순신은 무과에 급제하여 여수 수사로 부임하여 여수 둔덕재의 소나무로 어려서 본 그림대로 거북선을 만들었다. 그런데 거북선에 있는 여덟 개의 구멍 중 한 개의 용도를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모를 일이었다. 이순신은 다시 송구봉을 찾아 물었더니 그 구멍은 사청목(蛇聽目)이라 하였다. 뱀은 눈으로 소리를 듣기 때문에 바깥의 말을 듣기 위해서 한 구멍을 만들어 두어야 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임진란 때 왜군을 벌벌 떨게 했던 거북선이 완성되었다. 왜병의 병선은 선체가 적고 기동성이 뛰어난 반면 조선의 판옥선은 선체가 크므로 기동성이 떨어져 해전에서 불리하였는데 거북선은 기동성이 뛰어날 뿐아니라 견고하고 안전하며 강력한 화력을 탑재하고 있었으므로 왜병의 병선을 종횡무진 격파하였던 것이다. 거북선으로 기선을 제압한 연후 우세한 무기를 장착하고 큰 판옥선으로 왜병을 무찌르니 왜는 해전에서 연전연패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불과 3일이면 임진란을 평정시킬 수 있었던 최풍헌이나 석달이면 가능하였던 진묵이나 여덟 달을 넘지 않는다는 송구봉과 같이 아무리 법술이 뛰어난 도인이라도 병사를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이 없으니 마치 수족이 없는 자와 다를 바가 없는 처지가 되어 그 능력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단지 그들은 드러나지 않게 간접적으로 그 능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능력이 다소 부족하였으나 사명당은 승병을 조직할 수 있었으므로 임진란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울 수 있었다. 이후 사명당은 선조의 명을 받고 휴전협상을 하러 일본으로 가서 그의 도력을 발휘함으로써 일본인들을 경악케 하였다는 고사는 지금도 전해져 오고 있다.
일본조정에서는 조선 사명당이 도력이 높다는 이야기를 일찍이 들었던 바라 그가 사신으로 오자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를 시험하여 기를 꺾으려 하였다.
왜는 사명당이 사신으로 오는 길목에 병풍을 군데군데 세워두고 자랑을 하였는데 병풍에는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보낸 술사(術士) 서복과 동남동녀 500쌍이 일본에 머물렀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나중에 사명당이 도착하자 영접 나온 학자들이 길목의 병풍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사명당은 이때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답하였으나 끝내 한 장의 내용을 답하지 못하였다. 왜 그런가 물었더니 병풍에 글이 없었다고 하였다. 사실을 확인해보니 바람에 병풍이 접혀져 있었던 것이다. 사명당은 말을 타고 오는 중에 가끔씩 놓여진 병풍의 글을 읽고 모두 외워버렸던 것이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시험을 하였으나 사명당의 도력은 놀라웠다.
그러자 아예 죽여서 후환을 없애고자 구리로 숙소를 만들고 장작불을 때어 태워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날 방문을 열어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불에 타 죽었을 것이라 여겼던 사명당이 “일본은 덥다더니 어이 이리 추운고!” 하며 수염에 허연 고드름이 붙은 채로 추위에 덜덜 떨며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방 벽에는 얼음 빙(氷)자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사명대사의 고향인 경남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에 서있는 사명대사 비석, 일명 「표충비」에는 국란이 있을 때 마다 땀을 흘리고 있다.
이 표충비는 1738년(영조 14년) 사명대사를 기리기 위해 그의 법손인 남붕(南鵬)이 경산(慶山;경주의 산)에서 채취한 돌로 4년에 걸쳐 완성한 것으로 조선말 부산진에 있던 비를 밀양으로 이전해 왔다고 한다.
이 뒤로부터 신기하게도 국가에 큰 사건이 있을 때마다 비석에서 마치 사람처럼 땀을 흘린다. 그리고 이 땀은 진짜 사람 땀처럼 짠맛이 난다고 한다. 표충비는 1894년 갑오 동학혁명 7일 전에 서말 한되 분량의 땀을 흘린 것을 시작으로 1945년 해방 14일전 다섯 말 일곱 되, 1950년 6ㆍ25발발 25일전 서말 여덟 되, 1961년 5ㆍ16 군사혁명 5일전 다섯 말을 흘리는 등 지금까지 땀을 흘린 50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사명대사의 비석은 줄곧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생길 때마다 어김없이 땀을 흘려왔다. 사명대사의 도력이 몇 백년 지난 지금에까지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능력으로 일본인들을 놀라게 하였던 사명당도 7년 풍진을 겪어가며 임진란을 평정하였다고 하니 최풍헌이나 진묵이나 송구봉의 법술은 과히 상상을 초월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법술은 유불선의 신명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옛날에는 판이 좁아 유ㆍ불ㆍ선중 한가지 법술로써 능히 광란을 평정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동서가 교류하고 판이 넓으므로 유ㆍ불ㆍ선뿐만 아니라 과학적 법리까지 모든 법리를 합하지 않고는 능히 혼란한 천하를 바로 잡을 수 없으므로 강증산 성사께서는 이 모든 법리를 합하여 혼란한 시국을 평정하신다는 것이고 그것이 열탕이 끓는 듯한 광란의 천하가 급격히 안정추세로 변해온 지난 100년 동안의 세계사에 나타나 있으니 이것이 바로 신도(神道)에 의한 무위이화(無爲而化)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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