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고사(故事)

● 오십이지 사십구년지비(五十而知 四十九年之非) 고사

고도인 2008. 5. 27. 08:18

이윤(伊尹)이 

오십이지 사십구년지비(五十而知四十九年之非)를 깨닫고 성탕(成湯)을 도와 대업을 이루었나니 이제 그 도수를 써서 물샐틈 없이 굳게 짜놓았으니 제 도수에 돌아 닿는 대로 새 기틀이 열리리라.


오십이지 사십구년지비(五十而知 四十九年之非) 고사


이윤은 걸을 망하게 하고 탕을 도와 왕도정치를 펴서 은나라를 부흥시킨 훌륭한 재상이다. 이윤은 49세가 될 때까지 천명(天命)을 깨닫지 못하고 걸왕의 신하로 있으면서 걸을 바르게 세우고자 최선을 다하였으나, 50세에 비로소 천명을 깨닫고 성탕을 도와 걸을 멸하고 대업(大業)을 이루었다.

이윤의 본명은 지 혹은 아형이다. 이윤은 본래 유신씨의 들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기의 재능을 숨기고 초야에 묻혀 살았다. 탕이 그의 현명함을 알고 사람을 보내어 맞아들이려 하였으나 이윤은 쉽사리 응하지 않았다.

탕은 세 번이나 사신을 보내어 예를 갖추어 청한 후에야 비로소 부름에 응하였다.

「여씨춘추」나 「열자」에는 이윤의 출생 경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윤의 어머니는 이수가에 살고 있었다. 거기서 이윤을 잉태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꿈에 신령이 나타나 말하기를 ‘만약 이수에 절구통이 떠내려 오거든 너는 그것을 보는 즉시 동쪽을 향하여 달리되 절대로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된다’고 경고하였다.

이튿날 이수에 가보니 과연 절구통이 떠내려 오는지라 그녀는 무조건 동쪽으로 달렸다. 10리쯤 달리고 나서 이제는 괜찮겠지 하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 순간 마을은 완전히 물바다로 변했고 그녀는 속이 빈 뽕나무로 변해버렸다. 뽕을 따러 온 여인이 뽕나무속에 어린아이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이 아이가 이윤이라는 것이다.

이 이상한 아기를 유신국의 왕에게 드렸는데 임금은 이 아기를 주방책임자에게 맡겨 기르도록 명하였다.

이윤은 요리솜씨가 뛰어났으며, 이로 인하여 걸왕의 주방장으로 들어가 걸왕에게 간언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대 요ㆍ순ㆍ우왕의 시대를 일컬어 태평시대라고 한다. 순을 이어 우(禹)가 왕위를 물려받아 이끌어 가다가 우의 아들 계에 이르러 세습왕조체제로 바뀌어 하왕조가 이어졌다.

하왕조 17대에 이르러 걸왕(桀王)이 즉위하였다.

걸왕(桀王)은 이름을 계(癸) 또는 이계(履癸)라고도 하며 중국역사상 최초의 폭군으로 기록되었다. 53년간 재위하였으며, 나라가 망하자 추방되어 굶어 죽었다고 전한다.

힘이 장사인 걸왕은 언제나 그의 힘만 믿고 백성들을 이유 없이 괴롭혔으며 포악한 정치로 농업생산을 파괴하였으며, 대외원정을 남발하여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약탈하기를 일삼았다.

즉위 33년째 되던 해에 병력을 동원하여 유시씨(有施氏)를 정벌하였는데 유시씨는 화의를 청하는 뜻에서 그에게 매희(妹喜)라는 미녀를 바쳤다. 그는 매희를 매우 총애하여, 특별히 그녀를 위해 옥으로 장식한 화려한 집(瓊室)을 지어 상아로 장식한 회랑(象廊)과 옥으로 장식한 누대(瑤台)를 지었으며 옥으로 만든 침대(玉床)에서 밤마다 일락(逸樂)에 빠졌다. 

걸왕은 매희의 소망에 따라 전국에서 선발한 3000명의 미소녀(美少女)들에게 오색찬란한 옷을 입혀 날마다 무악(舞樂)을 베풀었다 한다. 

또 무악(舞樂)에 싫증이 난 매희의 요구에 따라 궁정(宮庭) 한 모퉁이에 큰 못을 판 다음 바닥에 새하얀 모래를 깔고 향기로운 미주(美酒)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못 둘레에는 고기[肉]로 동산을 쌓고 포육(脯肉)으로 숲을 만들었다.  이것을 일러 후대사람들은 주지육림(酒池肉林)이라 하였다.

걸왕과 매희는 그 못에 호화선을 띄우고, 못 둘레에서 춤을 추던 3,000명의 미소녀(美少女)들이 신호의 북이 울리면 일제히 못의 미주를 마시고 숲의 포육을 탐식(貪食)하는 광경을 구경하며 희희낙낙 즐겼다. 

이 같은 사치음일(奢侈淫佚)의 나날이 계속되는 가운데 국력은 피폐하고 백성의 원성은 하늘에 닿았다. 걸왕이 즉위한지 37년째 되던 해에 동쪽 상(商) 부락의 장인 탕(湯)은 걸왕이 학정을 일삼는 것을 보고 재덕을 겸비한 현인 이윤(伊尹)을 걸왕에게 알현시켰다. 이윤 같은 사람이 걸왕을 보좌하면 나라가 올바르게 다스려 질 것이라 믿고 이윤을 선관(궁궐 안의 주방을 맡은 관리인)으로 변장시켜 걸에게 보냈던 것이다. 이윤은 요순의 인정(仁政)으로써 걸을 설득하여, 걸왕이 백성들의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심혈을 다해 천하를 다스리기를 간언하였다. 그러나 걸왕은 “선관 주제에 무슨 참견이냐” 하며 들은 척도 아니하여 이윤은 매번 다시 돌아와야만 했다.

만년에 이르러 걸왕은 더욱 황음무도해졌다. 그는 사람들에게 명하여 ‘야궁(夜宮)’이라는 큰 연못을 파게 한 다음, 한 떼의 남자와 여자들을 데리고 그 연못에서 뒤섞여 살면서 한 달 동안이나 조회에도 나가지 않았다. 태사령(太史令) 종고(終古)가 울면서 간언을 하였으나, 걸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종고를 쓸데없이 남의 일에 참견한다고 질책하였다. 종고는 걸을 구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상(商)으로 가서 탕(湯)에게 투신하였다. 민심은 떠나고 나라 형편이 점점 피폐해져갔다. 현신(賢臣) 관룡봉(關龍逢)이 더 이상 볼 수 없어 걸에게 직간을 하다가 배가 갈리우고 허파가 뜯기는 비참한 죽임을 당하였다. 이를 지켜본 이윤은 마음을 바꾸어 탕을 도와 걸을 멸하기로 결심을 하였다. 이때 이윤의 나이 50세였다. 이것을 일러 오십이지 사십구년지비(五十而知四十九年之非)라 한다. 즉 49년 동안 깨닫지 못하였던 천명天命을 50세에 이르러 깨달았다는 것이다. 


혹은 이런 이야기도 있다. 어느 날 술 취한 사람이


왜 박으로 가지 않는가?

왜 박으로 가지 않는가?

박은 크기만 한데.

깨어나라! 깨어나라!

나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다네.

암흑을 버리고 광명을 찾을거나.

무엇이 걱정이란 말인냐!


여기서 박은 은나라의 수도라는 노래를 하기에 이제까지 자기가 걸왕을 섬겨온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깨닫고 탕의 훌륭한 재상이 되어 탕을 도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때 상(商) 부락은 탕의 통치하에서 나날이 번성해졌다. 걸왕은 상의 탕이 자신에게 위협을 미칠 것을 염려하여 그를 하대(夏台, 지금의 하남성 禹縣 경내)에 가두었다. 얼마 후 탕은 걸왕을 안심시키는 계략을 꾸며 석방되었다.


걸왕의 횡포가 나날이 심해지자, 민심이 떠나버린 것을 알아차린 탕은 명재상 이윤(伊尹)의 도움으로 군대를 일으켜 걸을 정벌하였다. 탕은 먼저 걸왕의 측근인 위국(韋國)과 고국(顧國)을 점령하고 곤오국(昆吾國)을 격파한 다음, 하(夏)의 요충지 명조(鳴條, 지금의 산서성 안읍현 서쪽)로 돌진해갔다.

이 소식을 접한 걸왕은 급히 군대를 이끌고 명조로 달려갔다. 양군이 교전을 하고 있을 때 걸왕은 인근의 산꼭대기에 올라가 관전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져 걸은 황급히 아래로 내려가 비를 피하였다. 하(夏)나라의 병사들은 원래부터 걸왕을 위해 목숨을 바칠 생각이 없었던지라 이때를 틈타서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갔다. 걸왕은 그것을 제지하지 못하고 급히 성안으로 도망쳤다. 탕의 병사들이 뒤를 추격해오자 걸왕은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를 수 없어 매희와 보석을 챙겨서 배를 타고 남소(南巢, 지금의 안휘성 소현)로 도주하였다. 그후 탕의 추격으로 사로잡혀 밖으로 추방되었다. 이때도 걸왕은 여전히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고, “당시에 탕을 하대의 감옥에서 죽여 버리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스럽구나!”라고 하였다.

걸왕과 매희는 사치가 몸에 배여 있었던지라 아무도 시중드는 사람 없는 황량하고 외진 산골에 있으면서도 스스로 일할 줄도 몰랐다. 결국 그들은 와우산(臥牛山)에서 산채로 굶어 죽고 말았다.


탕은 이윤의 덕으로 폭군 걸왕을 몰아내고 천자의 자리에 올라 덕치에 힘을 기울여 왕도정치를 실현하였다.

탕이 백성의 뜻을 받들어 걸왕을 칠 수 있었던 것은 천도에 따른 것이며, 또한 이윤과 같은 현명한 재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증산성사께서도 걸이 망하고 탕이 흥한 것은 이윤에게 있다고 말씀하셨다.


桀惡其時也 湯善其時也

걸악기시야 탕선기시야

天道敎桀於惡 天道敎湯於善

천도교걸어악 천도교탕어선

桀之亡湯之興 在伊尹

걸지망탕지흥 재이윤


걸이 악을 행함도 그때요

탕이 선을 행함도 그때이다.

천도가 걸로써 악을 가르쳤고

천도가 탕으로써 선을 가르쳤다.

걸은 망했고, 탕은 흥하였으니

여기에는 이윤이 있었다.


탕왕이 죽은 후 태자 태정은 일찍 죽었으므로, 아우 외병이 즉위했다. 2년만에 외병이 죽고, 다시 그 아우 중임이 즉위했는데 또한 4년만에 죽으니, 태정의 아들 태갑이 즉위했다.

그러나 태갑은 어리석고 포악하여 조부인 탕왕의 법을 어기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일이 많았다.

그리하여 이윤은 그를 동궁에 가두었다. 태갑은 3년 동안 선왕 중임의 옷을 입고 나서 크게 깨달아 잘못을 뉘우치고 자신의 부덕함을 깨닫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이윤은 태갑을 은의 수도 박으로 모셔왔다. 그로부터 태갑은 덕을 잘 닦았으므로 제후들이 모두 잘 따랐다. 태갑이 얼마 후 죽자 그의 아들 옥정이 즉위하였는데 이윤이 죽은 것도 이때이다.


이윤이 죽자 은나라에서는 그들 조상묘에 배향하는 파격적인 은혜를 베풀었다.

이윤이 없었다면 은나라는 천자국이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를 선조의 사당에 배향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이윤이 탕 임금을 도와 대업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