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고전성구古傳聖句

공명지정대(孔明之正大)

고도인 2008. 5. 27. 00:16

 

강증산 성사께서

 

“천지종용지사(天地從容之事)도 자아유지(自我由之)하고 천지분란지사(天地紛亂之事)도 자아유지(自我由之)하나니 공명지정대(孔明之正大)와 자방지종용(子房之從容)을 본받으라” 말씀하셨다.


이는 ‘천지가 따르는 일도 나로부터 연유되고, 천지가 어지럽게 나뉘는 일도 나로부터 연유된다. 그러므로 제갈량(諸葛亮) 공명(孔明)의 읍참마속(泣斬馬謖)과 같은 정대(正大)함을 본받고, 장량(張良) 자방(子房)이 자기가 처해진 상황의 기색(氣色)을 잘 살펴 조용히 천하기운의 순리를 따라갔음과 같은 종용(從容)을 본받으라’는 뜻이다.


孔明之正大 공명지정대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220∼263)의 정치가이자 전략가였던 제갈량(諸葛亮:181~234)의 공명정대(公明正大)한 일 처리를 높이 평가한 말이다.

제갈량의 공명정대한 일처리와 관련하여 전해오는 것 중에 대표적인 것이 마속과 제갈량에 관한 일화이다.

서기 228년 제갈량이 47세 되던 해의 일이다. 삼국통일의 꿈을 이루기 위해 때를 기다리던 제갈량은 중원(中原)의 젖줄기라 할 수 있는 가정(佳亭)을 점령하기 위해 직접 북정(北征)의 길에 올랐다. 당시 상황은 누가 먼저 가정을 점령하느냐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결정되는 중대한 상황이었다.

이때 제갈량은 가장 중요한 전투에서 부하 마량(馬良)의 아우 마속(馬謖)을 선봉장으로 발탁하게 된다. 마속은 제갈량으로부터 그의 재주를 인정받았고, 제갈량의 남정(南征) 때 전략의 기본방침을 제의하여 제갈량이 채용했을 정도로 제갈량과는 신의가 두터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선봉장 마속은 의기충천하여 산 위에다 진을 치지 말라는 공명의 말을 무시하고 산 위에다 진을 쳤다. 이를 기회로 적장 사마중달이 즉시 보급로를 차단시키자 마속은 전쟁에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배하게 된다. 마속은 이전에 제갈량이 매우 신임했던 인물이었지만 제갈량은 눈물을 뿌리면서도 공명정대하게 마속을 베고 만다.


子房之從容 자방지종용

 

한(漢)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공신(功臣)이었던 장량(張良:?~BC 168)은 선견지명(先見之明)으로써 권력 앞에 함부로 나서지 않고 조용히 순리를 따라 처신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장량은 어떠한 경우에도 처해진 상황의 기색(氣色)을 잘 살펴서 그 기운의 순리대로 일을 처리하여 막힘이 없게 하였는데, 이러한 자방지종용(子房之從容)의 대표적인 예가 ‘홍문(鴻門)의 연회(宴會)’ 사건이다.


‘홍문의 연회’란 초나라와 한나라가 천하를 두고 다툴 때 두 맹주 항우와 유방이 참석했던 연회를 두고 하는 말이다.

유방이 진나라를 멸하고 함곡관(函谷關)에 병사를 주둔시켰을 때의 일이다. 항우도 40만 대군을 이끌고 홍문(鴻門)으로 진격해 왔다. 그때 항우의 진영에 유방의 부하가 찾아와 유방이 스스로를 ‘관중왕(關中王)’이라 칭하고 있다고 밀고(密告) 했다.

이를 들은 항우는 화를 내며 유방을 치기로 결정하고 전군 총공격을 명령했다.

이때 항우의 숙부로 항백(項佰)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유방이 큰 그릇임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이 사실을 유방에게 알려 주고 내일 아침 일찍 항우를 찾아가 사죄하라고 일러 주었다. 항백의 충고를 들은 유방은 항우를 찾아가 그의 오해와 노여움을 가라앉혔다. 이에 기분이 좋아진 항우는 홍문에서 주연을 베풀어 유방을 위로해 주었다.

이때 항우의 책사인 범증(范增)도 함께 있었는데 그는 이 기회에 유방을 죽이지 않으면 후한(後恨)이 있을 것을 걱정하여 항우에게 유방을 죽이라고 간언했다.

하지만 자신의 힘을 과시하던 항우는 유방과의 이야기에서 유방이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는 빈약한 존재라고 믿어버리고 유방을 죽일 마음이 없어졌다.

일이 이렇게 되자 마음이 초조해진 범증은 장수 항장에게 명령을 내렸다.

“대왕은 지금 유방의 말장난에 넘어가고 있다. 그대가 검무(劍舞)를 추다 기회를 봐서 유방을 찔러 죽여라.”

범증의 지시를 받은 항장은 연회에 참석하여 유방에게 술을 따른 후 정중하게 말했다.

“진중군부대 내이라 변변한 대접을 못해 드려 죄송합니다. 대신 제가 칼춤을 추어 흥을 돋우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항장은 곧바로 칼을 빼어들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를 본 항백은 유방의 목숨이 위급하다고 여겨 자신도 칼을 빼어 유방을 감싸면서 칼춤을 추기 시작했다.

유방의 목숨이 풍전등화(風前燈火)임을 안 유방의 참모 장량(張良)은 얼른 밖으로 나가 장수 번쾌에게 말했다.

“사태가 위급하다. 항장의 검무는 속임수다. 속마음은 패공을 죽이려는 것이다.”

번쾌는 이 말을 듣자마자 경비병을 물리치고 술자리에 뛰어들어갔다. 그 기세에 압도된 항우가 번쾌에게 술을 따라주는 사이, 장량은 유방을 불러내어 탈출했다.

이후 범증은 항우에게 유방을 뒤쫓을 것을 간하였으나 항우는 이를 무시하였고 결국은 유방의 손에 그가 죽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외에도 장량이 행한 수많은 업적 덕분에 유방은 항우를 꺾고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방은 한나라를 창업한 후 자신의 천하통일을 도운 공신들의 지략을 심히 경계하여 모두 숙청하려 하였다.

그러자 이러한 낌새를 알아차린 장량은 유방의 숙청이 실행되기 전에 유방에게 자기는 초야(草野)에 묻혀 조용히 도(道)나 닦으며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하여 자연 속으로 들어갔다.

 

 

이렇듯 장량은 항우와 유방의 싸움에서 유방이 천하를 통일할 수 있도록 공을 세울 때나, 후에 권력의 폐해를 피해 초야로 숨을 때나 조용히 천하기운의 순리를 따라갔던 것이다. 이것이 자방의 종용(從容)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