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을 통해 본 대순진리

여주 鳳尾山(봉미산) 神勒寺(신륵사) 1

고도인 2008. 5. 22. 06:30

여주 鳳尾山(봉미산) 神勒寺(신륵사)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北內面) 봉미산(鳳尾山)에 있는 사찰)


 ‘여주(驪州)’라는 지명은 조선 제 8대 예종원년(1469)에 세종대왕의 영능을 천능하고 나서 지명을 여주로 하여 현재까지 명칭이 존속되어 오고 있다.

삼한시대에는 마한 땅에 속했다가 백제 땅으로, 고구려 영역으로 속해졌다.

처음 기록은 고구려 장수왕 63년(서기 475)에 ‘골내근현(骨乃斤縣)’의 기록이다. 당시에는 강변 주위에 평야가 형성되지 않고 가파랐기 때문에 ‘깊은 골이 진 내’라는 뜻으로 지어졌다. 골내근현 시대에는 현재의 여주읍과 능서면, 가남면, 점동면의 북부지역, 북내면의 금당천 서쪽지역 뿐이었다.

그 후 신라의 경덕왕 때 ‘황효(黃驍)’라고 고쳤는데 이후 황려(黃驪)가 되었다. 황려는 확장된 큰 고을이라는 뜻으로 추측된다.

여주라는 지명이 말과 관련되었다고 하는데, 마암에서 나온 사나운 황마와 여마를 나옹대사가 신력으로 붙잡아 굴레를 씌웠다고 하는 전설은 그저 전설일 뿐 지명과는 관련이 없다.

1257년 (고려 고종)에 지명을 영의(永義)라고 고쳤다가 1305년(고려 충렬왕) 때에 여흥이라고 고쳤다. 1401년 현재의 죽산지역의 북부지역인 가남면과 점동면의 남부지역을 여주에 합병 시키고 1469년 인접해 있던 천령현을 폐합시키면서 여주(驪州)로 고쳤다.

강천면, 대신면 후포리의 등신거리 곡수천 동부지역, 점동면 처리, 멱곡리, 사곡리, 청안리, 흥천면 신근리, 능서면 용은리, 능서면 신지리, 등이 여주지역으로 합병 된 곳이다.   

여주 신륵사는 조계종 용주사 말사로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고려 말인 1376년(우왕 2) 나옹(懶翁) 혜근(惠勤)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한데, 200여 칸에 달하는 대찰이었다고 하며, 1472년(조선 성종 3)에는 영릉 원찰(英陵願刹)로 삼아 보은사(報恩寺)라고 불렀다.

신륵사의 유래에 의하며 어느 날 원효대사의  꿈에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가람이 설 곳이라고 일러준 후 사라지니,그 말에 따라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  이에 원효대사가 7일동안 기도를 올리고 정성을 드리니 9마리의 용이  그 연못에서 나와 하늘로 승천한 후에야  그곳에 절을 지을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청산은 나를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 나옹선사 '선시'


탐욕도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고 노래한 나옹선사. 나옹이 살았던 세상이나 현세나 탐욕으로 가득찬 모습은 비슷하다. 청산과 창공은 말도 없이 티도 없이 살라하지만 어느 세상이나 그 일을 벗어 두기엔 유혹의 끈이 질기고도 강하다.

나옹이 마지막으로 주석한 곳이

여주 신륵사(神勒寺)고 지금도 풍광이 빼어나게 아름다운 곳입니다.


경기도 여주군(驪州郡) 북내면(北內面) 천송리(川松里)

봉미산(鳳尾山) 기슭에 있는 이 절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元曉)가 창건했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신륵이라고 이름짓게 된 것은 나옹왕사[瀨翁王師)가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라고 전해집니다.


♣ 鳳尾山(봉미산)은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과 가평군 설악면의 경계를 이루면서 솟아 있는 봉미산은 백두대간상의 오대산 두로봉에서 서쪽으로 분기한 기맥이 내려오면서 양평의 비슬고개를 넘어 폭산(문례봉, 천사봉, 992m)에서 두가락의 산줄기가 갈라지는데 남쪽으로는 용문산으로 이어지고 북쪽으로는 성현으로 고도를 낮추다가 다시 솟구친 산이 鳳尾山(봉미산)이다.

신륵사를 가리키는 말 가운데 ‘벽절’이라는 별명이 있다. 이는 은행나무 뒤쪽 동대(東臺)에 우뚝 솟은 다층전탑에서 비롯되었다. 동대는 여강의 거센 물살로부터 신륵사를 지켜주고 있는 수구막이 암벽이다.  

               

                     

                          

 

 ◇황급히 여강 물에 잠긴 좌청룡을 비보하기 위해 세운 다층전탑.


현전탑은 이 거대한 동대의 암벽을 지키고자 하는 비원의 결과물이다. 비유컨대, 해마다 홍수해로 백성을 불안케 하는 황룡(여강)을 다스리기 위해 재갈을 물린 비보탑이 아니겠는가.



▣  절 이름에 관한 유래

1.  고려 우왕 때 여주에서 신륵사에 이르는 마암 馬岩 이란 바위 부근에서 용마 龍馬 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나옹선사가 신기한 굴레를 가지고 그 말을 다스렸다는 설화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2. 고려 고종 高宗때 건너편 마을에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이를 사람들이 붙잡을 수 없었는데, 이때 인당대사 印塘大師 가 나서서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으로 제압하였다하여 신력 神力 의 신" 神 " 과 제압의 뜻인 륵" 勒 "을 합쳐 신륵사 " 神勒寺 " 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 고려 때에는 벽절[펭 寺]이라 불려지기도 하였는데, 이는 경내의 동대(東臺) 위에 있는 다층전탑(多層塼塔)을 벽돌로 쌓은 데서 유래한 것이다.

 

     

      

 

 

   ◇봉황새 꼬리 부분을 누르면서 여강을 품고 있는 신륵사


여주의 신륵사(神勒寺)는 신라의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천년고찰이지만, 실제로 이 사찰이 유명하게 된 것은 세종대왕릉인 영릉을 이곳 여주로 천묘하면서 이 신륵사가 영릉의 원찰이 되면서부터이다.

세종대왕의 원찰답게 신륵사에는 국보급 문화재가 즐비하다.


(남한강)

  남한강은 태백준령인 태백산과 오대산에서 발원하여 정선 아우라지를 거쳐 영월, 단양, 충주로 내려와서 다시 양평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합쳐져 서울을 가로질러 서해로 흘러든다. 경기도 여주는 이 남한강이 만들어낸 넓고 비옥한 강마을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우리나라 3대 강마을로 대동강 평양과 북한강 춘천과 남한강 여주를 꼽았다. 그만큼 살기 좋다는 이야기이다.

  이곳 사람들은 남한강을 여강(驪江)이라고 부른다. 최근 이 지역에 골프장 등 각종 레저시설이 속속 들어서면서 옛스런 정취가 다소 줄어들었지만, <관동별곡> <택리지> 등 옛 문헌에서 보듯이 여전히 맑은 기상이 남한강과 함께 유유히 흐르고 있는 유서 깊은 고장이다. 천년고찰 신륵사를 비롯하여 영릉, 고달사 절터, 영월루, 명성왕후 생가, 여주향교 등 여주는 아직도 많은 역사유적들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여주 역사)

  그러나, 여주는 겉보기보다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삼국 초기 온조왕이 북쪽에서 내려와 한강변에다 도읍지를 정하면서 원주민격인 여주지역의 부족국가들이 백제의 지배를 받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역부족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그 후 고구려 장수왕이 남하하면서 전승지로 이 땅을 차지하고 골내근현으로 만들었다. 다시 70년 후 나제동맹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고구려가 물러가고 다시 옛 주인 백제의 품에 안기지만, 그것도 잠시, 신라의 진흥왕에 의해 다시 신라땅으로 귀속되는 파란만장한 운명을 겪었다. 그 사이사이 말갈족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한강을 차지하는 자가 한반도를 차지한다는 말을 실감케 하는 역사의 현장이 여주땅이다.


 (영월루 창하리 석탑)

  신륵사로 가자면 읍내에서 여주대교를 건너야 한다. 영월루는 이 다리를 건너기 직전 오른쪽에 야트막한 야산 위에 있다. 야산에 오르면 창리․하리 삼층석탑이 부부탑처럼 서 있다. 창리탑은 고려시대 것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탑신 아래에 복련을 둔 탑이다. 하리탑 역시 고려시대 탑으로서 창리탑보다 덩지가 크고 보전 상태가 좋은 편이다. 둘 다 길 건너편 옛 절터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 왼쪽에 있는 석탑이 창리 삼층석탑이고, 오른쪽에 보이는 석탑이 하리 삼층석탑이다.


* 신륵사 은행나무에 얽힌 전설이다.

  

   

 

 

 600년된 은행나무- 운길산 수종사의 은행나무와 나이나 크기가 비슷한데 좀 더 옆으로 퍼진듯하다.


 유 래 : 하늘로 치솟은 듯한 아름드리고목 은행나무가 마주 건너다 보이며 역사를 함께 한 곳이 바로 봉미산의 신륵사와 미지산의 용문사이다. 오랜 세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봉미산 비탈에 벽탑은 우뚝 서 있고, 그렇듯 오랜 세월 한 왕조의 주권을 지켜온 신륵사를 옛 사람들은 봉미산의 아늑한 나라의 맥(중요 한 곳)이라 불러 왔다. 바로 문안에 들어서면 나옹 선사께서 지팡이를 꽂은 것이 살아났다는 은행나무가 첫 눈에 들어온다. 여주의 넓은 평야를 누리며 너그러운 굴곡으로 흐르는 여강이 여주의 생명이며 역사이듯이 은행나무도 또한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여강과 여주의 역사를 말하려면 빠뜨릴 수 없는 곳이 신륵사와 영릉인데, 바로 이 신륵사가 영릉의 원찰이다. 원찰이란 대개 죽은 조상의 명복을 비는 절을 말하는데 왕실(임금의 집안)에 의해 낡은 신륵사를 영릉의 원찰로 고쳐 만든 당시의 상황을 김수온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하 한명회, 한계회에게 명하여 제조(들어 고름)로 삼고 여주 목사 이신효, 원주 목사 김춘향, 내시 부상선 이효지를 감역관(국가나 공공을 위한 일을 맡은 관리)으로 삼아 그 해 2월에 일을 시작하여 겨우 10월에 끝 마쳤다.] 흰모래를 끼고 흘러가는 여강 주변에 위치 한 신륵사가 유명한 세종대왕의 원찰로 정하여 지기까지 큰 역할을 한 분들은 나옹 선사와 목은 이색이라 하겠다. 두 분은 같은 지역인 경북 영해에서 태어나 고려말에 왕실과 인연을 맺어 나라와 운명을 같이하다가 어떤 기연에서인지 여강의 주위에서 푯대처럼 곧고 참다운 삶을 마지막으로 보내어 그 정신이 서린 곳이 신륵사이다. 또한 [신륵사 중수기문]에서 김수온은 낡은 신륵사를 고친 일을 다음과 같이 찬양하고 있다. 신륵사 풍경은 우리 나라에 소문난 것으로서 사대부(양반)들이 돛을 달고 오갔으나 아직 한 사람도 그 절을 발전시키지 않더니 다행히 오늘날 임금의 지혜의 시대에 달하여 왕의 능을 이 고을에 정하였으매 큰 경사가 시작되었으며 이를 잘 계승하면 먼저 왕의 빛이 될 것이다.' 고 하였다. 아무튼 신륵사는 나옹 선사가 덕이 높은 스님들을 찾아 이곳저곳 이름난 곳으로 다니며 마음을 닦고 불도를 배우고 중국에서 들어와 짚고 온 은행나무 지팡이를 심으며 이 나무가 살면 후일 내가 죽어도 살 것이고 만일 이 나무가 죽으면 나는 아주 죽은 겉과 같다는 말을 남겼다. 과연 지팡이에서 싹이 트고 잘 자라다가 거듭되는 전쟁으로 원래 가지는 타다가 만 채 오늘날까지 남아있고, 다시 움이 터 두 줄기로 자란 6백 여 년의 나이를 자랑하는 은행나무가 되었다. 항시 여강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여주에서 멀리 건너다 보이는 용문산이 마치 병풍이 둘러 처진 듯 한 용문산 세의 웅장하고 높 낮은 능선의 아름다운 경관이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라고 옛시인들은 말했다. 바로 이 산을 용문산이라 부르는 것은 미지산에 있는 용문사에서 생겨난 것인데 이 산은 산의 굴곡 이 아름답고 물소리가 맑아 감동적이다. 용문사에도 수백 년을 자랑하는 은행나무가 높이 솟아있는데, 전해오는 말로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세자(왕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심은 것이라고도 하고, 신라의 고승 의상 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은 것이 뿌리가 내려 성장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 나무는 하루 물 흡수량이 무려 50드럼이나 된다는 동양 최대의 나무이다. 이 용문사를 1447년 소헌왕후 심씨가 와서 불공을 드려 후에 세종대왕의 명으로 절을 늘리고, 소헌왕후의 원찰로 삼게 되었다. 옛날 어느 나무꾼이 이 은행나무를 베려다 뇌성벽력이 일어 못 베었다는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임금의 아내를 모신 원찰 이어서 수많은 열매를 맺는 암나무인데, 세종대왕의 원찰인 신륵사는 오늘날가지 열매를 맺지 않는다고 하며 이상하게도 나라에 큰 변이 있으면 나무가 땀을 흘리고 이상한 울음소리를 낸다고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