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을 통해 본 대순진리

원주 치악산 龜龍寺(구룡사)

고도인 2008. 5. 17. 08:14

 

원주 치악산 龜龍寺(구룡사)

                 (강원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  033-732-4800)


경상도 의성에 사는 한 선비가 과거를 보러 가는 길에 적악산 기슭을 지나게 되었다. 그때 선비는 길을 가다가 꿩이 뱀에게 잡아먹히려는 것을 보고 뱀을 죽이고 꿩을 살려주었다. 그리고 선비는 날이 저물어 산 속의 어느 집에 묵게 되었다. 마침 그 집은 청상과부집이었다. 선비는 그만 과부의 꾀임에 빠져 동침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보니 과부는 커다란 뱀이 되어 선비의 몸을 칭칭 감고는 죽이려 하였다. 그 뱀은 낮에 선비가 죽인 남편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청상과부로 변한 암뱀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여왔다. 종소리에 뱀은 놀라서 도망을 치고 선비는 위기에서 벗어났다. 날이 새자 선비는 종소리가 난 곳을 찾아갔다. 스님도 없는 낡은 절터에 종이 있었고, 어제 선비가 살려준 꿩이 범종에 머리를 부딪고 죽어있었다. 선비는 나중에 급제하여 꿩에 대한 보은으로 그 자리에 절을 지었다.

  내용이 조금씩은 다르게 전해지고 있지만, 이 보은의 꿩 전설은 강원도 치악산에 전해오는 설화이다.


(원주)

  원주는, 삼한시대에는 마한지역이었다가 백제가 합병을 하였고, 이어 북쪽에서 장수왕이 밀고 내려와 고구려땅 평원이 되었다. 그러다가 신라 진흥왕이 고구려를 북쪽으로 내쫓고 북원소경이라는 새 이름으로 불려졌다. 태조 때인 1395년 원주로 이름을 고치면서 강원 관찰사가 있는 감영이 되었다. 당시 춘천은 강원좌영으로, 스님은 강원 우영이 되었다.


  <택리지>에 ‘원주는 영월 서쪽에 있다. 강원도 감사가 있는 곳으로, 거기서 한양은 서쪽으로 250리이다. 동쪽은 영과 두메에 가깝고, 서쪽은 산골짜기 사이사이에 들판이 섞여있어서 명랑하고 수려하다. 경기도와 영남 사이에 끼어서 동해로 수운(輸運)하는 생선․소금․인삼 등과 궁중에 쓰는 재목 따위가 모여들어서 하나의 도회를 이룬 곳이 원주다. 두메와 가까워서 난리가 일어나면 숨어 피하기가 쉽고, 서울과 가까워서 세상이 평안하면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는 까닭에 많은 한양 사대부들이 여기 와서 살기 좋아한다’고 했다.


  시내에 있는 옛 감영지에는 당시의 건물인 선화당, 포정루, 청운당 등이 있다. 포정루는 감영의 영문(營門)으로, 민흘림기둥의 팔작다락집이며, 익공계이다. 2층에는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돌렸다. 선화당은 당시 동헌(東軒)의 부속건물이었다. 감영지 뜨락에 석조 유물들이 있다.


  국향사는 비로봉 서쪽 산자락에 있다. 원주시내라고 해도 좋을 그런 평지에 자리해 있다. 이 절은 신라 경순왕 때 무착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무착대사라면 꿩 전설을 소재로 한 무학대사의 시에 나오는 주인공이다.


(치악산)

  원주 시내에서 치악산까지는 꽤나 멀다. 대개는 원주시내를 거치지 않고 영동고속도로 새말나들목에 내려서 42번 국도를 탄다. 멀리 치악산 산자락이 내려와 있다.

  치악산은 원주의 진산이다. 옛 이름은 적악(赤岳)이었다고 한다. <택리지>에도 ‘원주 동쪽에 적악(赤岳)이 있다’고 하였다. 꿩 전설이 생기고부터 치악이라는 새 이름표가 붙었으나, 조선 초 무학대사가 이미 ‘치악’이라는 지명을 사용했고, 선조 때 인물인 정철이 <관동별곡>에서 ‘치악’이라는 지명을 사용하고 있는 걸로 미루어 치악이라는 지명은 이미 고려 이전부터, 어쩌면 적악이라는 이름과 함께 불려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치악산은 고려 왕조를 마무리지은 산으로 기억된다. 이성계 일파에 의해 재위 4년만에 왕위에서 쫒겨난 공양왕이 나이 50에 두 아들 왕석(王奭)․왕우(王瑀)를 데리고 처음 유배 들어온 산이 치악이기 때문이다. 그 후 공양왕은 강원도 고성으로 이배되었다가 다시 스님으로 이배된 뒤에 후환이 두려웠던 이성계 일파에 의해 1394년 살해되었다.


  치악은 조선에 들어와 오악(五岳) 가운데 하나로 숭상되었다. 북악 묘향․중악 계룡․남악 지리․서악 구월과 함께 치악은 동악이 되었다. 그 후 조정은 치악에 동악단(東岳壇)을 세우고 매년 춘추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황장금표)

  학곡마을을 지나면서부터 치악산은 서서히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다. 학곡마을에서 구룡사까지는 10여분 거리다.

  구룡사 매표소를 지나자마자 왼쪽 나무그늘에 황장금표(黃腸禁標)라고 새긴 작은 바위 하나가 땅에 박혀있다. 옛날 치악산에는 ‘황장목’이라고 불렸던 질 좋은 소나무 숲이 울창했다. 황장이라는 말은 나무의 속질이 황금빛을 띠고 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이 나무는 조정에서 베어다가 왕족들의 관(棺)을 만들 때 썼다. 황장목은 나무껍질조차 붉은 빛을 띠고 있어 더욱 매혹적인 우리 소나무이다. 물론 우리 소나무라고 모두가 황장목은 아니다. 태백산맥 일부지역에 나타나는 금강송만을 가리킨다. 하늘로 곧게 솟은 황장목의 줄기는 등천하는 용과도 같은 모양이다. 그래서 때로 ‘적룡(赤龍)’으로 표현되기도 했는데, 그 붉은 나무껍질을 적룡피(赤龍皮)라도 하였다.

  그리고, 금표란 무단벌채를 막기 위해 세워둔 일종의 경고판이다. 또한. ‘금(禁)’이라는 말에는 ‘왕’이라는 뜻도 함께 들어있다. 영월 금몽암(禁夢庵)은 단종이 왕으로 있을 때 꿈에서 본 절이라는 뜻의 이름이다.

  황장금표는 물론 이곳에만 세워진 것은 아니다. 기록에 따르면, 나라 안에  60군데에 금표비가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울진 소광리를 비롯하여 현재 몇 곳에 당시의 금표가 남아있다.


(구룡)

  금표를 지나면 구룡교가 나온다. 구룡이라는 말은 신라 의상대사가 문무왕 8년에 구룡사를 창건하는 과정에서 생긴 전설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창건설화를 보면-  지금의 구룡사 터는 원래 깊은 소(沼)가 있었고, 그 안에 아홉 마리 용이 살고 있었다. 의상대사가 그 소를 메우고 큰절을 세우고자 명산인 치악산에 찾아들었다. 지금의 구룡골에 접어들었는데 동편에는 시루봉을 쳐다보며 아늑한 협곡으로 되어있는 이곳 풍치의 아름다움은 가히 절경이었다. 그러나 명당을 골라 절을 세우려고 주변을 살펴본즉 대웅전을 앉혀야 할 자리가 꼭 연못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스님은 그 연못을 메우려고 했다. 이때 이 연못속에서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는데 용들로서는 큰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살곳을 메우다니 그런 무자비한 일을 스님이 어떻게 할수 있소?" 하고 항의 했다. 그러나 스님은 "존엄하신 부처님을 모시려면 너희들이 사는 연못이어야 하는데 어떻하겠나?" 하고 양보하려 들지 않았다. 스님과 용들은 메우겠다 못 메운다 한참 실갱이를 벌이다 용쪽에서의 제의로 내기를 하여 이긴쪽의 뜻에 따르기로 하였다.


용들은 먹구름을 불러 일으키며 하늘로 치솟으니 갑자기 뇌성벽력과 함께 장대같은 소나기가 억수로 쏟아지는데 삽시간에 계곡이 넘쳐 스님이 서 있는데까지 잠겨버렸다. 이와 같은 용의 재주를 미리 짐작하고 시루봉과 천지봉 사이에 배를 건너 매어 놓고 태연히 기다리고 있던 스님은 배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용쪽에서 볼때는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럼 이번에는 내가 한수 부려볼까?"

스님은 부적을 한장 그려서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는 연못속에 집어 넣었다. 그러자 연못에서 김이 무럭 무럭 오르더니 연못물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용들은 견딜수 없어 하늘로 달아났는데 그중 눈먼 용한마리가 달아나지 못하고 근처 연못으로 옮겨 앉았다. 스님은 예정대로 그 연못을 메우고 대웅전을 지음으로써 오늘의 구룡사가 들어 앉게 되었다.


구룡사에서 보면 동해를 향한 여덟 개의 골이된 산봉우리를 볼수 있는데 이것은 그때 여덟마리의 용이 급히 도망치느라 골이 생긴것이라 한다. 그래서 이 절을 아홉 마리의 용이 살던곳이라 하여 "구룡사"라 했다 한다. 지금은 아홉구(九)대신 거북구(龜) 자를 쓰는데 이자를 바꾸게 된 연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본래 구룡사는 스님들의 수양도장으로 세워졌으나 오랜 세월을 두고 흥망성쇠에 따른 곡절이 많았다. 이조에 들어서면서 치악산에서 나는 산나물은 대부분 궁중에서 쓰게 되어 구룡사 주지스님이 공납의 책임자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좋거나 나쁘거나 구룡사 스님의 검사 하나로 통과되는지라 인근 사람들은 나물값을 제대로 받기 위해 별도로 뇌물을 받치기도 했다. 견물생심이라 아무리 부처님 같은 스님이라 할지라도 여기엔 욕심이 나지 않을수 없었다.


이리하여 구룡사는 물질적으로 풍성하기는 하였으나 정신도장으로서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럴즈음 한 스님 이 찾아와 몰락한 이절을 보고 개탄하면서 이 절이 흥하지 못하는 것은 절에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거북바위 때문이니 그 거북바위를 쪼개 없애면 좋을것이라고 했다. 절에서는 그 스님의 말을 믿어 거북바위를 쪼개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 후부터 찾아오는 신도도 더욱 적어지고 거찰로서의 명성은 점차 줄어들었다. 급기야는 절문을 닫아야 할 처지에 이르렀다. 이럴때 어느 날 도승 한분이 찾아왔다.


"이 절이 왜 이렇게 몰락하는가 하면 그 이름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고 말했다. 주지스님은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요?"

하고 물었다.

"본시 이 절은 절 입구를 지키고 있던 거북바위가 절운을 지켜왔는데 누가 그 바위를 두동강으로 잘라 혈맥을 끊어버렸으니 운이 막힌 것이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주지 스님은 재차 물었다. 그랬더니 그 도승은 거북을 다시 살린다는 뜻에서 절의 이름을 아홉구(九)에서 거북구(龜)자를 쓰라고 해서 龜(구)자를 쓴 龜龍寺(구룡사)로 쓰기로 했다 한다.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에 있는 龜龍寺(구룡사)는 지금부터 약 1300여년전에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됐다.

내용출처 : http://www.wonju.go.kr/



  이와 유사한 내용의 사찰 창건설화들이 많다. 구룡지가 있는 양산 통도사가 그렇고, 영주 부석사 전설도 이야기 구조에서는 비슷하다.


  구룡사나 통도사 전설에 등장하는 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양한 견해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우선 유추해볼 수 있는 것으로는, 신라의 삼국통일에서 나라를 잃고 숨어든 유민집단, 또는 통일과정에서 피해를 본 지방의 호족세력이나 불교를 반대하는 무속신앙 등 종교집단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서 나중의 것은 설득력이 가장 약하고, 전자의 것이 그런대로 설득력을 많이 갖고 있다. 그 까닭은, 구룡사를 비롯하여 의상이 세운 화엄 10찰의 위치가 대개 백제땅이거나 한때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던 곳, 아니면 서라벌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곳 치악산 지역도 남하정책을 내세운 장수왕 이후 한참동안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던 땅이다. 이렇게 유추해볼 때, 구룡사를 비롯한 의상의 화엄10찰 개창은 정치적인 성격을 다분히 띠고 있다 하겠다.


  아홉마리 용 전설과 관련하여 불려진 구룡사(九龍寺)라는 이름이 구룡사(龜龍寺)로 바뀌었다.

아마 시기적으로는, 절터에서 ‘康熙四十五年’이라는 명문이 찍힌 기와조각이 발견된 것을 보아 조선 숙종조 이후가 아니겠는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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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륵사 원통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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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천왕문 안에 있는 남쪽과 동쪽 하늘을 맡은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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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천왕문 안에 있는 서쪽과 북쪽 하늘을 맡은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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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웅산용 악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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