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을 통해 본 대순진리

원주 치악산 龜龍寺(구룡사) 2

고도인 2008. 5. 17. 17:15

龜龍(구룡)

  

龜(구)는 거북 龜(구)자로 재앙을 막아주는 의미가 있다.

박우당께서 임원들을 대동하여 남원 광한루를 순행했을 때, 광한루에는 연못 속에 섬 모양으로 만들어진 삼신산(三神山)이 있는데 천체(天體)와 우주(宇宙)를 상징하는 광한루원(廣寒樓苑)은 신선사상(神仙思想)을 바탕으로 한 여러 구조물과 더불어 삼신산(三神山) 혹은 삼신선도(三神仙嶋)로 불리우는 영주산·봉래산·방장산을 은하수를 상징하는 호수 속에 건설하여 옛 사람들이 생각한 이상향을 현실세계에 구체적으로 표현해낸 정신사적 구조물로 되어 있었다. 박우당께서 임원들을 대동하여 이곳 광한루를 순행하신 뜻은, 앞으로 병겁이라는 재앙에서 살아날 방도를 깨우쳐주기 위함이었다. 이 연못 속에 섬 모양으로 만들어진 삼신산(三神山)이 있고 연못가에는 매우 특이한 바위가 하나 있다.


광한루 앞 오작교 입구에, 화강암으로 곱게 깎아 만든 ‘큰 자라돌’이 삼신산을 바라보고 금방이라도 뛰어들 듯이 앉아 있다. 이 자라돌은 높이 1.2m, 폭 1.2m, 길이 2.4m의 크기로서, 그 옆에 설명을 적은 석판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남원 광한루 앞에 있는 鰲石(오석)

 


이곳에 자라돌을 두게 된 연유는 정확하지 않지만 「남원지(南原誌)」의 기록에는 오석(鼇石)을 자라로 보느냐, 거북으로 보느냐에 따라 의미가 다른 두 가지의 전설이 전해온다고 한다.

그 하나는 광한루원이 우주를 상징하는 정원으로 꾸며졌다는 신선사상과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원의 풍수지리와 관련된 것이다.

먼저 첫 번째의 경우를 살펴보면, 예부터 동해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자라가 등에 삼신산(三神山)을 업고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 광한루 연못에 삼신산을 지은 후로는 계속하여 천재지변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원인을 분석해본 결과 삼신산을 업고 있는 자라가 없었기 때문에 섬이 불안정하여 그렇다 하여, 이곳에 자라돌을 만들어 삼신산을 지켜보게 한 뒤로부터는 그 천재지변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치악산 구룡사의 三神(삼신=용)을 업고 있는 모습


또 다른 전설은 이 오석(鼇石)을 자라가 아닌 거북으로 보는 것인데, 지리산에서 바라봤을 때 동남방에 위치한 남원에는 예부터 지리산에서 동남풍만 불어오면 나쁜 유행병이 퍼져 인명이 상하거나 혹은 화재, 홍수 등이 빈번하게 일어났다는 것이다. 오행설에 의하면, 이러한 동남풍을 제압하려면 동해(東海)에 사는 거북의 힘밖에 없다 하여 광한루에 이 거북상을 만들었다. 그후부터는 동남풍으로 인한 천재지변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자라가 삼신산(三神山)을 등에 업고 있다는 전설이 ‘금산사(金山寺)’의 이치와 개태사 ‘삼천일지(三天一地)’의 이치와도 일맥상통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龍(용)은 미륵을 상징하는 것이며 三神(삼신)을 의미 한다. 그래서 후천 미륵세상을 용화세상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구룡은 거북(龜구)과 龍(용)을 말하는 것인데 거북(龜구)이 龍(용)을 등에 업고 災殃(재앙)을 막는다는 의미이다.


한편 박우당께서도 청년시절에 만주 일대를 유력하시며 지내셨는데, 어머니께서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접하고 1943년 고국으로 돌아오셨다. 그리고 그 해 10월에 일본의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일본 아우모리 현(靑三縣)에 있는 미사와 비행장에 징용(徵用)되었다가 1945년 8·15해방을 맞이하여 귀국길에 오르셨다.


               

                                

                              박우당이 거북이 등에 업힌 모습


당시 귀국선(일본 해군함 우키시마 호)에는 박우당을 포함하여 7,000여 명의 한국인 노동자가 타고 있었다. 그런데 아우모리 현 오미나토 항을 출발하여 부산항으로 향하던 귀국선은 일본 마이즈루 만 근처에서 원인 모를 폭발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귀국선에 올랐던 수천 명에 달하는 대부분의 한국인 노동자가 사망하였다. 그러나 당시 박한경(박우당)은 큰 거북의 등에 의지하여 현해탄을 표류하다가 다행히 민간인 어선에 구출되어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박우당께서는 귀국한 그 이듬해인 병술년(丙戌年, 1946년) 정월 보름에 안상익의 권유로 태극도에 입도하였다.

입도 후 강증산 성사의 대순(大巡)하신 진리와 조정산성사의 창도(創道)하신 취지를 순회 연포하여 포덕(布德)에 힘을 다했고, 이후 산하에 많은 수도인들이 입도하게 되었다.

박우당께서 수리사에 들어가시기 전까지 둘러보신 사찰은 대부분이 미륵을 모신 사찰들이었으며, 특히 청도 적천사는 미륵보살(彌勒菩薩)이 계신 도솔천을 본딴 도솔암이 있는 곳으로, 이곳은 조정산께서 단도수(壇度數)를 보신 곳이기도 하다.

박우당께서 미륵(彌勒)을 모신 사찰들을 거쳐 서울로 올라오신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미륵은 석가여래가 말한 미래불로서, 후천 극락세상(極樂世上)을 열어주시는 분이다.

박우당의 정체가 바로 미륵이라면, 거북등에 업혀서 구원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륵은 따로 계시기 때문에 後人(후인)은 山鳥(산조)라고 皆有報(개유보)하신 것이다.

                  

 

                         치악산 구룡사 거북이


                

 치성광여래

 

 

구룡사 관음전내의 관음불

 

 

관음불 좌측면 사진

 

 

 

관음불 우측면 사진

 

 

 

 

龜龍寺(구룡사) 삼성각내의 나반존자

   (포항 박성구 도전님과 너무나 닮은 모습이다.)

 

 

 

 

 

 

 

 

사찰에서 山神(산신)으로 추앙 받고 있는 西神(서신)

  (호랑이는 백호로서 이다. 그러므로 산신은 서신을 의미 한다.)

 

 

 

 

 치악산 비로봉 돌탑(미륵불을 상징한다고 한다)

 

 

 

    

            

  

                     치악산 비로봉 미륵 삼존불

 

석탑축조 및 경위 :원주에 거주하던 용진수(용창중)라는 사람이 신의 계시에 따라

(3도의 돌을 모아 도가 보이는  곳에 탑을  쌓아야 병도 낳고 가정이 편안하다)

1960년경부터 10년에 걸쳐 치악산 비로봉(1,288m)에 미륵탑 3기

(용왕 탑, 산신탑, 칠성탑)를 혼자  축조하여 현재까지 존치되어 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