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을 통해 본 대순진리

여주 鳳尾山(봉미산) 神勒寺(신륵사) 2

고도인 2008. 5. 22. 06:42

 

  신륵사 창건


  신륵사는 여주대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풍치가 뛰어난 강변에 자리하고 있다.

  신륵사의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고구려설과 신라설로 크게 나누어진다.

  고구려 때 여주 지방을 골내근(骨乃斤)이라고 했다. 이 지명은 ‘굴레끈’에서 나온 말로서 이런 전설이 있다. 여강에 흑룡과 황룡이 살고 있었는데, 황룡이 설치면 이 강에 홍수가 진다고 했고, 그 황룡을 다스리기 위해 고구려  인당대사가 강가에다 신륵사를 세웠다고 한다. 신륵사의 ‘勒륵’자는 곧 황룡을 다스리는 굴레끈에서 나온 말이다. 전설 속의 황룡은 말[馬岩마암]으로 상징되는, 이 지역의 토착적인 옛 백제세력이 아니겠는가. 이 전설에는 고구려의 내침에 반발하는 백제유민들의 정서가 깃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신륵사가 고구려 절이라는 데 대해 신빙성을 더해주는 유산으로는 중원땅 고구려비와 마애불상군이 지척에 있다. 시기가 다른, 유사한 전설도 있다.

  또 다른 전설로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흰 수염의 노인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연못을 메우고 절을 지었다는 설이다. 처음에는 연못 속의 아홉 용이 반대를 했으나 7일기도로 용들을 모두 승천시켜주고 신륵사를 지었다고 한다. 이 전설은 신륵사 창건시기를 신라의 삼국통일 직후 쯤으로 잡고 있다. 통일은 했으나 아직 지방통치까지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신라 정부는 이 지역의 고구려 잔존세력들에게 관직을 주어(승천시켜주고) 회유했을 가능성이 있어보인다. 삼국 통일 전후의 상당수 신라 절들이 매우 정치적인 동기에서 창건되었음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영릉의 원찰, 신륵사)

 

   

 

 

                       봉미산 신륵사 일주문


* 신륵사 일주문 양옆 기둥에 새겨놓은 글귀가 눈에 뛴다.


     

      

 

                삼일수심 천재보(우측 기둥)


* 3일간의 도를 닦은 마음이 천년동안 보배가 된다는 뜻이다.


     

      

 

                   백년탐욕 일조진(좌측기둥)


* 백 년 동안이나 탐하였던 탐욕들이 하루아침에 먼지가 되고 후회할 날이 있을 것이니 너무 탐욕을 부리지 말라는 뜻이다.


구룡루(九龍樓)

 

 

 

                 신륵사 구룡루(九龍樓) 전면


구룡루(九龍樓)는 나옹선사가 아홉 마리의 용에게 항복을 받고 그들을 제도하기 위해 지었다는 전설의 얘기도 있고 원효대사의 꿈에 하얀 노인이 나타나 절터로 연못을 가리켜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잘 되지 않다가, 7일 기도를 마치자 9마리의 용이 승천하고서야 절을 짓게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구룡루(九龍樓)는 누각 앞뒤로 ?구룡루(九龍樓)?와 ?봉미산신륵사(鳳尾山神勒寺)? 편액이 각각 걸려 있다.


  

     구룡루 뒤편에 봉미산신륵사(鳳尾山神勒寺)편액


구룡루는 절을 가기 위해 강변의 너른 마당을 지나다보면 왼쪽에 있다.


구룡루(九龍樓)는 1858년 김병기의 지원으로 중창된 건물이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인데 본래는 1층 앞부분이 트여 있었으나 지금은 벽으로 막아 2층만 사용하도록 되어 있다. 보통의 사찰 누각이 누대 밑으로 출입문이 나 있으므로 공간을 충분히 두는 데 비하여 이 구룡루는 누대 밑의 공간이 아주 낮다. 그것은 신륵사 중심사역으로의 출입이 강가 쪽의 정면이 아니라 범종루와 극락보전 오른쪽이므로 출입문으로서의 기능보다는 의식 집행의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강조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구룡루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석가부처님이 탄생하실 때 성수를 뿜어 부처님을 목욕시켰다는 아홉 마리 용에 대한 이야기와, 신륵사 창건설화에 등장하는 아홉 마리 용의 승천과 관계있을 것으로 보인다. 누각 앞뒤로 「구룡루(九龍樓)」와 「봉미산신륵사(鳳尾山神勒寺)」 편액이 각각 걸려 있다.

 

★ 원래 九(아홉 구)는 龜(거북 구)를 의미 한다.

 

九(구)자를 풀어 보면 乙(새 을)자에 /(나무가 삐침)자가 합성된 자이다. 의미는 나무에 새가 앉아서 노래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구룡루(九龍樓)의 전설에서 구룡(九龍)을 아홉 마리 용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구룡(龜龍)을 말하는 것이다. 즉 거북이가 龍沼(용소)에서 龍(용)으로 昇天(승천)했을때 九龍沼(구룡소)라고 한다. 또한 격암유록 남사고 비결에는 구룡(龜龍)을 龍龜(용구)라고 표현 되어 있다.

 

다음은 격암유록 제 1장 남사고 비결에 나오는 내용이다.


龍龜河洛兩白理 心淸身安化生人 世人不知雙弓理

룡구하락양백리 심청신안화생인 세인부지쌍궁리

天下萬民解寃世 渡海移山 海印理 天下人民神判機

천하만민해원세 도해이산 해인리 천하인민신판기


龍龜(용구)는 河圖(하도)와 落書(낙서)의 理致(이치)이며 兩白(양백)의 이치이다. 마음을 맑게 하고 몸을 편안하게 하며 조화로써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다. 세상 사람들이 이 雙弓(쌍궁)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는 구나. 天下(천하)에 모든 萬民(만민)들이 解寃(해원)하는 세상이다. 바다도 옮겨가고 山(산)도 옮길 수 있는 海印(해인)의 理致(이치)이다. 海印(해인)은 天下(천하)에 모든 사람들을 神判(신판)하는 機具(기구)이다.


이와 같이 구룡(九龍)은 구룡(龜龍)이며 龍龜(용구)이고 海印(해인)의 이치이다.

 

 

                       魚龍(어룡) 일명 목어라고 한다.


물고기가 용으로 승천하면 어룡이라고 한다. 여의주를 입에 물었으니 마음대로 조화를 부릴 수 있다는 뜻이다.

이 木魚(목어)에서 구룡(龜龍)의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 신륵사는 조선시대 들어와 이 절은 조선 세종의 능이 대모산에서 여주로 옮겨진 후 영릉의 원찰이 되었다. 그 때문에 절 이름도 한동안 ‘보은사(報恩寺)’라 하였다. 여기서 잠깐 원찰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원찰(願刹)이란,  스님들의 수행이나 포교를 목적으로 세워진 사찰이 아닌, 특정한 인물의 명목을 빌거나 창건주 자신의 소원을 빌기 위해 세운 절을 원찰이라고 한다. 또는 기왕에 창건된 절을 특정 목적의 원찰을 삼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사찰에는 주로 특정 인물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진영(眞影)을 봉안하는데, 일명 원당이라고도 부른다. 궁궐 안에도 이와같은 원당을 지어 내불당(內佛堂)이라고 이름하였다.


  내불당의 역사는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기 전인 소지왕 때 처음 나타나지만, 공식화된 것은 진흥왕 5년(544) 흥륜사가 처음이다. 그러나, 이 때는 특정인물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당이라기 보다는 국가의 발전과 백성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데 더 큰 목적이 있었다.


  그 후 동해의 용왕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유언한 문무왕의 넋을 위로하고 그의 수중릉을 돌보기 위해 지은 감은사의 경우도 원찰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봉덕사 역시 무열왕의 명복을 기리기 위해 지은 원찰이며, 팔공산 동화사 역시 민애왕을 추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원찰이었다. 왕이 아닌 일반인의 원찰로는 순교자 이차돈의 명복을 위해 지은 자추사가 처음이다. 이와같이 신라에는 원찰사상이 팽배해 있어서 원찰을 관리하는 별도의 기구인 원당전(典)을 두기도 하였다.


  고려에 들어서면 원찰 창건이 다소 주춤해진다. 그것은 태조 왕건이 <훈요십조>에서 ‘후세의 국왕이나 공후. 왕후. 제신들이 원당(원찰)을 창건하는 것은 크게 걱정할 일이다. 신라는 다투어 부도를 만들어 지덕을 쇠잔케하여 멸망하였다’고 지적하였다. 왕건의 이러한 지적에는 정치적인 배려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신라말 구산선문이 각 지방의 정치세력(호족)을 등에 업고 여기 저기 난립하여 결국은 중앙집권과 왕권강화를 가로막고 국론을 분열시켰던 사실을 왕건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통일은 했다고 하나, 지방호족들이 불만스런 자세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왕위를 둘러싼 자식들의 싸움이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었기에 왕건은 정치적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이다. 왕건의 원찰 건립 반대 유언은 상당기간 지켜져 내려온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면 원찰제도는 다시 부활하기 시작한다. 조선에 들어서면서 왕실과 귀족들을 위한 원찰들이 속속 세워졌다. 고려 고종 때 세운 강화도 선원사를 비롯하여 태조 이성계의 계비 강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흥천사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조선시대에는 역대의 능원 주변에 집중적으로 원찰을 많이 세웠는데, 조선시대의 원찰은 숭유배불의 영향으로 원찰을 새로 짓기보다는 주변에 있던 사찰을 원찰로 정하는 예가 많았다.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의 원찰 신륵사, 단종의 능인 장릉의 원찰 보덕사 등이 그러한 예이다. 그러다가 차츰 원찰에서 생기는 폐단이 심해져서 조선 정조 원년(1776)에는 법을 정해 원찰제도를 없앴다.


  이러한 원찰제도는 불교의 호국적 역할을 도모하기도 했지만, 부정적인 면으로는 불교가 왕권에 편향 종속될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다층전탑)

 

                               

 

 

  또, 신륵사를 또는 ‘벽절’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경내에 전탑(塼塔:벽돌로 쌓은 탑)이 있다는 데서 연유되었다.


  경내에 들어서면 맨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다층전탑이다.

강 건너 마암과 대비되는 절벽 위에 우뚝 서 있다.  

이 바위는 남한강 홍수해로부터 신륵사를 지켜주는 수구막이 바위로서, 그 바위 위에 전탑을 세운 것은 용마(홍수해)의 입에 물린 재갈과도 같은 것이다. 절 이름을 구룡사에서 신륵사로 바꾼 것도 신의 끈[神勒 : 굴레,재갈]을 이용하여 강의 몸부림(홍수)을 막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보물 제226호인 이 전탑은 국내 유일한 고려시대의 전탑이다. 재료는 전(塼)으로, 감실은 없고, 탑신의 체감비율은 거의 무시되어있다. 옥개의 너비가 좁아서 다소 기형적인 느낌을 준다. 탑신의 벽돌 사이를 넓게 면토를 발랐으나, 벽돌의 배열구조는 무질서하다. 벽돌 문양은 연주문에 당초문을 넣은 것이 대부분이다. 안동지역의 전탑과는 양식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북방계 전탑으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강월헌)

  다층전탑 아래 물가에 강월헌이 있다.

 

 

여주(驪州) 신륵사(神勒寺) 경내 남한강변에 있는 강월헌(江月軒)


夜靜江天霽月懸  蟲音在草水禽眠

騷人自是秋多感  松下寒巖坐悄然

(야정강천제월현 충음재초수금면

 소인자시추다감 송하한암좌초연)


고요한 밤 물결 속엔 맑은 달 걸려 있고

풀숲에선 벌레 울고 물새는 잠들었네

시인은 가을이라 절로 느낌 많아져서

솔 아래 찬 바위에 시름겨워 앉아 있네


 

※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1569년 어느 달 밝은 밤 신륵사 일주문을 지나 남한강 기슭의 강월헌(江月軒) 동대(東臺) 바위 위에 앉아 읊은 시라 한다. 강월헌(江月軒)은 신륵사(神勒寺)에서 입적한 나옹혜근(懶翁慧勤) 선사의 별호이기도 하다.


강월헌이 앉은 자리는 전탑이 앉은 자리의 지질과 다른 회백색의 화강암이다. 화강암 암맥은 남한강 깊은 물속으로 내려가 침잠하고 있는데, 풍수가들을 이 화강암액을 봉황의 꼬리[鳳尾]라고들 한다. 정자의 이름은 나옹화상이 머물었던 회암사의 누각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전한다. 강월헌 옆에 삼층망탑이 하나 서 있는데, 이 역시 풍수비보탑으로 세웠을 것이다.


(이색과 나옹)

  강월헌이 올라앉은 바위 밑으로 푸른 남한강이 유유히 흐른다. <관동별곡>에서는 흑수(黑水)라 하였고, 다른 문헌에서는 대부분 여강(麗江)이라고 했다. 이 강은 고려말 충신 이색이 이방원이 꾸민 계략에 빠져 뱃놀이를 하던 중 독주를 마시고 세상을 뜬 곳으로 전해진다.


  이색의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호는 목은(牧隱)으로, 고려말 충신 삼은(三隱)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한산 이씨 문중을 중흥시킨 대학자 이곡(李穀)의 아들로, 이제현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에 몸 담고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0년만에 귀국한 후 대제학에 이어 대사성에 올라 우리나라 성리학의 토대를 마련하였는데, 공민왕이 그를 만날 때 ‘중국서도 만나기 어려운데 내 어찌 교만할 수 있으리오’하며 제자의 도를 갖추었다는 데서도 그의 덕망과 유명세는 넉넉히 짚어볼 수 있다.


  그는 처음에는 이성계와 함께 친명정책을 지지하였으나, 이성계 일파의 견제를 받아 정몽주가 피살에 이어 여러 차례 유배되었으며, 그의 제자와 아들들도 많은 피해를 입어 둘째아들이 피살되는 불운도 있었다. 조선개국 후 이성계의 종용이 있었으나 ‘망국의 신하가 살아남기 바라겠는가’ 하고 끝내 고사하였다.


  그에 앞서 이곳은 나옹화상이 열반한 곳이다. 나옹과 이색은 태어난 곳(경북 영해) 같다. 한 사람은 고려 불교에 우뚝한 왕사(王師)요, 또 한 사람은 성리학으로 왕을 감동시킨 대유(大儒)였다. 고려말 정신적 기둥이었던 두 사람의 사상은 서로 달랐지만, 인간적인 친분은 사상을 초월하는 바 있었다. 게다가 두 사람이 한 고향에서 태어나 한 곳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비운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은 예사로운 숙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대장각기비)

  보물 제230호인 대장각기비는 전탑 뒤쪽 산기슭에 있다. 이곳은 나옹화상과 그의 문도들이 대장경을 인출한 곳으로, 대장각비는 고려 말 충신 이색이 부모의 유언으로 고려 우왕 6년(1380년)에 이 비를 세웠다. 이색의 어머니는 경북 영해 출신으로 나옹화상과 같은 고향 같은 시대 인물로 친분이 각별했다고 한다.


  대장격각비의 귀부와 이수 부분은 장방형 복련대석과 지붕돌이 대신하고 있다. 비신을 보호하기 위해 양쪽에 돌기둥을 댄 것이 이채롭다. 이것도 고려말과 조선초에 한때 유행하던 양식이다.


  이 절의 큰법당은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보전이다. 특정인의 명복을 빌기 위한 대개의 원찰에서는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한다. 그리고 명부전이 거의 딸려있다. 영릉의 원찰인 이 절도 예외는 아니다.


(다층석탑)

  극락보전 앞에 아담한 탑 하나가 서 있다. 보물 제225호인 이 탑은 조선 전기의 백색 대리석탑으로, 재료가 희귀석인 만큼 탑층의 부재를 모두 1매씩으로 한 소규모 탑이다.

 

 

                                            다층석탑


지대의 4변 상면에는 복연화문을 조각, 하층 기단갑석은 두꺼워서 다소 중후한 느낌을 준다. 상층기단 면석에 화형과 연주문으로 장식한 우주형 모각이 있고, 그 가운데 비룡과 구름문양을 새겼다.

 

 

                                             석탑 밑에 새겨진 용문양

 

8층 탑신까지는 그대로이나 그 위층 상륜부는 없어졌다. 조성시기는 영릉이 여주로 이장되고 이 절이 원찰로 지정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심검당과 적묵당)

  탑을 바라보고 오른쪽으로 심검당(尋劍堂)이한 현판이 걸린 선방이 있다. ‘不立文字불립문자’  ‘직지인심直指人心’  ‘敎外別傳교외별전’  ‘見性成佛견성성불’이라고 쓴 4개의 주련이 걸려있다. 이 말은 선가(禪家)의 금과옥조 같은 요체이다. 굳이 풀이하자면-. 참된 眞法(진법=종통)은 문자나 언어로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不立文字(불립문자)라고 하여 심법으로 통한다는 뜻이며, 또한 대인의 진면목(마음)을 바로 꿰뚫어 보는 지혜가 있어야 (直指人心직지인심)으로 그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뜻이며, 참된 眞法(진법=종통)이란 말이나 글로 전하지 못하므로 부득이 마음으로 따로 전하니(敎外別傳교외별전)이라고 하며, 부지런히 수행하여 대인의 진면목(本性)을 깨달아 대인의 의중을 알게 되는 것을 (見性成佛견성성불)이라 한다. 이는 직설적으로 의중을 전할 수 없을 때 비유법이나 역설법등으로 사용 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5조 흥인과 6조 혜능의 종통 전수이다. 오조 홍인은 대중이 보는 앞에서는 상좌였던 신수(神秀)를 인정해주고 혜능을 철저히 무시하였다. 이것은 자기만족에 빠진 신수 상좌와, 신수의 견해에 현혹된 문도들의 시기심으로 인해 육조 혜능이 저해를 받지 않도록 감싸고 보호키 위함이었던 것이다.

오조 홍인은 문득 혜능의 게송을 보고, 곧 혜능이 큰 뜻을 깨쳤음을 알아챘으나, 여러 사람들이 그것을 눈치 챌까 두려워하여 대중에게 말하기를, “이도 또한 깨달은 바가 아니로다!” 하고 신발을 벗어 지워버렸다. 이것을 본 문도들이 혜능을 비웃기 시작하였다. 이에 홍인은 비로소 마음을 놓고 당우(堂宇)로 돌아갔다.

그후 홍인은 조용히 방앗간을 찾았다.


“방아는 다 찧었느냐?”

“다 찧은 지 이미 오래입니다. 키질만 하면 됩니다.”


한편 방앗간으로 찾아간 오조 홍인과 육조 혜능의 대화는 일반인으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서로 간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하는 대화였다.

‘방아를 다 찧었느냐’는 말은 마음의 번뇌의 껍질은 다 벗었느냐는 말이었으며, 키질만 하면 된다는 것은 번뇌는 다 벗었으나 본성(本性)을 밝히기 위해서는 껍질을 키질해줄 스승의 가르침이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바로 옆에 행자가 있었으나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 알지를 못했다.

혜능의 마음을 알아차린 홍인은 주장자로 절굿대를 세 번 치고는 뒷짐을 지고 천천히 돌아갔다. 이것은 삼경(三更)의 깊은 밤에 뒷문으로 들어오라는 뜻이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이 것 역시 알 수가 없었다.

혜능이 삼경 깊은 밤에 조사당의 뒷문으로 찾아갔다. 홍인은 문을 열어주고 안으로 불러들여 「금강경」을 설하였다.

혜능은 ‘머물지 않는 곳에 그 마음이 생긴다(應無所住而生其心)’는 구절에 이르러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혜능이 그날 밤으로 법(法)을 전해 받았으나 사람들은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이내 오조 홍인은 ‘단박에 깨치는 법(頓法)’과 ‘가사(袈裟)’를 전하며 말하였다.

“네가 육대 조사(六代祖師)가 되었으니 가사(袈裟)와 발우(鉢釪)로써 신표(信標=증표)를 삼을 것이며, 대대로 이어받아 서로 전하되, 법(法)은 마음으로 마음에 전하여 마땅히 스스로 깨치도록 하라.” 오조 홍인은 또 말하기를 “혜능아, 예부터 법을 전함에 있어서 목숨은 마치 실낱에 매달린 것과 같다. 만약 이곳에 머물면 사람들이 너를 해칠 것이니, 너는 모름지기 속히 이곳을 떠나라” 하였다.

이와 같이 심법전수는 서로 마음과 마음으로 통하여 법이 전해져 내려간 것이다. 반면 신수는 아무리 실력이 있고 세력이 있다고 하여도 오조 홍인의 마음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오조와 통하지 못했던 것이며, 또한 욕심으로 가사와 발우를 차지하려 하여도 신명이 용납치 않았던 것이다.


* 심검당 반대편에 적묵당(寂黙堂)이 앉아있다. 심검(尋劍 : 見成)을 해서 도달하는 최고의 해탈(解脫)경지가 적묵(寂黙)이요, 적멸(寂滅)이며, 열반(涅槃)이다.


  

                        극락보전내 아미타 삼존불(대세지-아미타-관음)


극락보전과 적묵당 사이로 빠져나가면 왼쪽으로 적묵당 굴뚝이 눈길을 끈다. 이 굴뚝은 다른 굴뚝과는 달리 벽체에 붙어있어서 답답한 느낌은 주지만, 기와조각과 진흙을 사용하여 색다른 맛을 풍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