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을 통해 본 대순진리

여주 鳳尾山(봉미산) 神勒寺(신륵사) 3

고도인 2008. 5. 22. 08:21

신륵사 칠성각(七星閣)


 

                      신륵사 칠성각(七星閣) 


치성 광여래는 해와 달, 별들을 다스리고 통솔하는 하늘의 주신으로 천재지변과 재앙에서 중생을 구원하며 자녀 생산을 관장하는 부처님이다. 칠성각은 칠성(치성광여래)에 대한 토속신앙이 불교와 융합되면서 사찰 내에 조성하게 된 전각이다. 신륵사 칠성각은 금당인 극락보전을 지나 적묵당 뒤켠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는 정면 3칸 건물이다. 내부에는 치성광여래와 일광보살, 월광보살로 구성된 칠성탱화을 위시하여 산신, 독성탱화를 봉안하였다.  <신륵사 홈에서..>

‘칠성’이란 북두칠성을 일컫는 것으로, 사찰에 칠성을 모시게 된 것은 중국의 도교사상이 불교와 융합되어 나타난 현상이다. 칠성을 부처님들로 화한 경우가 보통인데, 치성광여래를 주존으로 모시고 있다. 손에 金輪(금륜=전륜성왕을 뜻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좌우에 협시로 배치된다.         


 

                          신륵사 칠성각내 치성광여래

 

  

                           신륵사 칠성각내 나반존자


 

                            신륵사 칠성각내 나반존자   

 

 

 

     신륵사 칠성각내 白虎神(백호신=일명 山神산신) 

 


 

                         신륵사 관음전내 칠성탱화   


 

                신륵사 관음전내 관음불

 

 

            신륵사 관음전 벽에 그려져 있는 관음

 

(신륵사와 나옹)

 여주 신륵사 하면 나옹화상을 빼놓고는 이야기가 안 된다.

  ‘나옹’이라는 이름 뒤에 붙은 ‘화상’은 ‘선지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도가 뛰어난 선사에게 붙이는 말이다. 나옹은 경북 영해 태생으로 본명은 원혜, 법명은 혜근, 호는 강월헌이다. 고려 충숙왕 7년에 태어난 나옹은 다른 고승들도 그러하듯이 신비스러운 탄생설화를 갖고 있다.

어느 날, 어머니가 황금빛 새 한 마리가 낳은 알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나옹을 낳았다. 20세 때 가까운 친구의 죽음을 당하고 인생사에 의문을 품게 되어 출가하여 경기도 남양주 회암사에서 공부를 하다가 27세 때 중국(원나라)으로 건너가 법원사에 와 있던 인도승 지공


선사의 문하에 들어가 법을 받았다. 어떻게 왔느냐는 지공선사의 물음에 나옹이 ‘12방자(房子)를 데리고 왔다’라고 한 일화는 중국에서도 널리 회자되고 있는데, 12방자란 열두가지 인생법(제자백가의 논)을 터득하고 왔다라는 뜻이다. 나옹은 그 후 38세 때 귀국하여 오대산에 머물었다. 공민왕의 부름을 받고 왕사가 된 후 회암사에 주석하였다. 51세 때 공민왕으로부터 ‘왕사대조계종 사선교도총섭 근수본지중흥조 풍복국우세 보제존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57세 때 와병으로 밀양 영원사(표충사)로 가던 중 여주 신륵사 벽탑(다층전탑) 앞에서 입적. 그의 제자와 문도들이 사리를 수습하여 신륵사에 안치하였다. ‘쇠지팡이를 가로날려 휴휴암에 이르러 쉴 곳을 얻었거니 이내 쉬었네. 이제 휴휴암을 버리고 떠나거니와 사해 오호에서 마음껏 놀리라’라는 열반송과 법제자 48명을 남겼다. 우리나라 최초의 가사로 알려진 <서왕가(西往歌)>와 <발원문> <회심곡> 등도 그가 남긴 것들이다. 태조를 도와 조선을 세운 무학은 그의 수제자.


  

조사당 안의 진영. 가운데가 나옹이며 왼쪽이 지공 오른쪽이 무학이다.


  그런데, 신륵사에 오면 늘 나옹화상의 죽음에 대해 미스터리를 느낀다. 그는 일반에 알려진대로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은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 어쩜 비명에 갔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그것이다. 


(나옹과 신돈)

  나옹은 학승이면서도 당대에 가장 뛰어난 선승이었다. 신돈이 공민왕을 등에 업고 설치고 다닐 때 그는 깊은 산속에 은둔하고 있었다. 유림세력들에 의해 신돈이 희생되자 공민왕은 신돈을 대신하여 세속에 때묻지 않은 나옹을 끌여들인다. 나옹은 왕사로 추대받고 역사의 전면에 나서서 신돈의 과오와 유림들의 공격에 만신창이가 된 불교의 중흥을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는 만백성들의 열화같은 신임을 얻고 있었고, 불교는 그에 힘입어 다시 일어서기 시작한다. 신돈을 요승이라하여 역사의 뒷그늘로 밀어낸 개혁유림세력들은 나옹이 왕의 신임을 등에 업고 제2의 신돈으로 등장할 것을 지레 겁먹고는 그를 상소하여 느닷없이 회암사에서 밀양 영원사(표충사)로 귀양을 보내버린다. 귀양길에 그는 신륵사에 들렀다가 갑작스런 죽음을 맞게 되는데, 이 또한 미스터리이다. 병환이 아니라 모종의 그 무엇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러나, 더 이상의 추측은 나옹을 욕되게 할까 두렵다.


                       용마루의 봉황문 기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