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치악산 龜龍寺(구룡사)
(강원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 033-732-4800)
구룡사 전도
꿩의 전설이 서려있는 치악산( 雉꿩치, 岳큰산악, 山뫼산),
그 산 자락에 있는 龜龍寺(구룡사)에 5월 15일 다녀왔다.
구룡사 입구에는 여느 사찰과는 달리 일주문이라 안하고
圓通門(원통문)이라고 현판이 걸려있다.
圓通門(원통문)이란 圓(원)과 通(통)하는 門(문)이란 뜻인데
圓(원)은 바로 無極(무극=○)인데 무극신을 말하는 것이며
무극신은 미륵을 일컫는 것이다.
즉 이 門(문)으로 들어서면 무극신과 통할 수 있는 진리가 있으니
그것을 깨닫고 가라는 뜻이다.
원주 구룡사 입구 원통문
구룡사(龜龍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668년(문무왕 8)에 의상(義湘)이 창건하였으며, 창건에 얽힌 설화가 전하고 있다.
⊙ 유래 및 역사
아득한 옛날이라고 할 천 삼백년 전의 일이다. 메마른 품이 학같은 늙은 스님 한 분이 원주 지방에 찾아와 절 자리를 두루 고르고 있다가 관서우 거산 치악산을 향해 떠났다.
이 스님의 이름은 무착대사라고도 하고 의상조사라고도 하나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원주서 치악산을 향해 육십여리 길을 가던 대사는 그 곳에서 다시 시오릿길을 더 가서 지금의 구룡골에 멎었다.
구룡사 입구 구룡교
스님이 사방을 살펴보니 동쪽으로는 주봉인 비로봉이 솟아 있고 다시 천지봉의 낙맥이 앞을 가로질은 데다가 계곡의 경치 또한 아름다웠다.
절을 세울만한 곳이군. 그러나 대웅전을 세우려면 저 연못을 메워야겠는데.....? 대사는 발을 옮겨 연못가로 갔다. 그때 그곳에 있던 큰 연못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다.
연못을 메우자니 모처럼 용이 사는 것을 쫓아야겠고 난감한 일이구나.......? 대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연못에 살던 용들이 들었다. 그리고는 대사를 향해 "대사님이 벌써 우리를 내어 쫓을 생각을 하시나 우리도 마음이 안놓여 살수가 없오, 대사와 우리가 서로 내기를 해서 우리가 이기면 대사가 이곳에 절을 못 지을 것이요, 지면은 선뜻 자리를 내어드리리다." 했다.
대사가 "너희들이 무슨 재주를 부리려느냐?" 하느냐"
" 그것은 잠시 두고 보시면 압니다."
고 대답한 용들은 연못에서 날아 하늘로 치솟더니 뇌성벽력과 함께 우박같은 비를 쏟아놓았다.
이 바람에 근처의 산들은 삽시간에 물에 잠기고 대사 또한 물속에 빠져 죽는가 했으나 대사는 태연하게 앉았다가 비로봉과 천지봉 사이에 배를 건너 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동안 비를 퍼부은 용들은 이만하면 대사가 물속의 귀신이 되었겠다 생가하고는 비를 거두고 내려왔다. 그러나 뜻밖에도 대사는 배 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홉 마리의 용들이 다 내려오자 부시시 일어난 대사는
"너희들의 재주가 고작 그것뿐이냐 이제 내가 조화를 부릴것인즉 너희들은 눈을 크게 뜨고 잘 지켜 보아라."
하고 부적을 한 장 그려 연못 속에 넣었다.
얼마 안있어 연못에서는 더운김이 무럭무럭 오르며 큰 연못의 물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물속에서 뜨거움을 참다못한 용들은 뛰쳐나와 한다름에 동해바다로 달아나고 말았다.
그런데 이 아홉 마리의 용 가운데 한마리의 용이 눈이 멀어서 미쳐 달아나지를 못하고 근처에 있는 조그만 연못으로 옮겨 앉았다.
구룡사 자리에 살던 9마리의 용 가운데 마지막 용이 머물렀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치악산 구룡폭포. 선녀탕이라고도 함. <원주시 제공>
용들이 달아나자 대사는 못을 메우고 지금의 구룡사 대웅전을 지었다. 한편 뜨거운 물에 쫓겨 달아나던 용들은 얼마나 다급했던지 구룡사 앞산을 여덟 개의 골이 치어있으며, 이때 미쳐 도망하지 못한 눈먼 한 마리의 용은 구룡사 옆에 있는 용소에서 지난 왜정때까지 살다가 그해 여름 장마때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한다.
구룡사 앞 거북바위
또한 지금 아홉구(九) 대신 거북구(龜)자를 쓰게된 연유는 본래 구룡사는 스님들의 수양도장으로 세워졌으나 오랜 세월을 두고 흥망성쇄에 따른 곡절이 많았다.
이조에 들어서면서 치악산에서 나는 산나물은 대부분 궁중에서 쓰게 되어 구룡사 주지스님이 공납의 책임자 역할까지 하게 되었고 좋거나 나쁘거나 구룡사 스님의 검사 하나로 통과되는 지라 인근 사람들은 나물값을 제대로 받기 위해 별도로 뇌물을 받치기도 했다.
견물생심이라 아무리 부처님같은 스님이라 할지라도 여기엔 욕심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구룡사는 물질적으로 풍성하기는 하였으나, 정신도장으로서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럴 즈음 한 스님이 찾아와 몰락한 이 절을 보고 개탄하면서 이 절이 흥하지 못하는 것은 절로 들어오는 길 입구에 있는 거북바위 때문이니 그 거북바위를 쪼개 없애면 좋을 것이라고 했다.
절에서는 그 스님의 말을 믿어 거북바위를 쪼개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후부터 찾아오는 신도는 더욱 적어지고 거찰(巨刹 : 큰절)로서의 명성은 점차 줄어들었다.
급기야는 절문을 닫아야할 처지에 이르렀다. 이럴 때 어느날 도승 한 분이 또 찾아왔다.
"이 절이 왜 이렇게 몰락하는가 하면 그 이름이 맞지 않기 때문이오" 하고 말했다. 주지스님은 "그건 무슨 말씀이지요?"하고 물었다.
"본시 이 절은 절 입구를 지키고 있던 거북바위가 절운을 지켜왔는데 누가 그 바위를 동강으로 내 혈맥을 끊어버렸으니 운이 막힌 것이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주지 스님은 재차 물었다. 그랬더니 그 도승은 거북이 이미 죽었지만 다시 살린다는 뜻에서 절의 이름을 아홉구(九)자 대신 거북구(龜)자를 쓰라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지금 현판에 새겨진 대로 치악산 구룡사로 불리우게 되었다.
출처; http://www.guryongsa.or.kr/
※ 치악산의 유래
치악산의 주봉은 비로봉이다. 그 모양이 시루를 엎어놓은 것 같다 해 '시루봉'으로 불리기도 한다. 비로봉의 높이는 해발 1288m. 정상에 오르면 원주의 한 주민이 치악산 산신령의 계시를 받아 쌓았다는 신선탑·용왕탑·칠성탑 등 3개의 미륵불탑이 지친 몸을 반긴다.
옛날에는 치악산을 아름다운 단풍이 아름다워 적악산(赤岳山)이라 불렸으나 전설에 의하면 옛날 경상도 의성 땅의 한 선비가 이곳 적악산의 오솔길을 지나다 꿩을 잡아먹는 구렁이를 발견하고 꿩을 구해 주었고 이 꿩도 구렁이가 나그네를 해치려는 것을 구해주었다는 이야기이다.
지금 상원사에 은혜를 갚은 報恩의 종이 복원되어 있다고 한다.
치악산의 "雉"자가 그래서 꿩을 의미하는 꿩"雉"자로 되어있다고 한다.
(위 내용은 비로봉 정상에 치악산 경관 해설판에 나온 것임)
치악산 전설
원주 치악산에 한 절이 있어 하루는 불존(佛尊) 수좌(首座)가 법당(法堂) 뒤를 배회하고 있었는데, 큰 구렁이 한 마리가 꿩을 감싸고 있었고, 구렁이와 꿩이 서로를 삼키려 하고 있었다. 아, 이렇듯 서로 물고 버티며 놓지 않는 다툼이 있었는데, 둘이 서로 싸움하는 사이에 어부지리(漁父之利)가 가까이에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불존 수좌가 지팡이로 구렁이를 풀어 꿩을 구하니, 이날 이경(二更 밤10시경)에 하얀 형상을 한 노인이 와서 전등(剪燈)의 왼쪽에 앉아 쇠붙이가 부딪치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말하기를, "나는 이내 이 절의 종을 주조하는 화주승(化主僧)이다. 사방에서시주를 모아 자선(慈善)을 베풀고자 이 큰 종을 주조하였으나 종소리가 맑지 못하여 도리어 죄업(罪業)에 대한 응보(應報)를 받았다.
살리고 죽이는 것은 구렁이의 뜻이었고, 지금에는 재앙과 액운이 헤아릴 수 없다. 오늘 다행히 꿩 한 마리를 얻어 점심으로 먹으려 하였다. 그대의 자비로 이와 같이 한번 굶주렸으니 반드시 그대를 대신으로 먹어야겠다. 그대의 뜻은 어떠한가. 만약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나를 위해 종을 쳐서 소리를 내면 이러한 추한 응보를 면할 것이니, 이것 또한 자비이다." 하고 말이 끝나자 홀연히 떠나갔다.
의심스러워 괴상하게 여기는 사이에 앞에 있는 울리지 않던 종이 천천히 하늘 밖으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두운 속에서 한 쌍의 꿩을 보니 부리를 사용하여 종을 울렸다. 한 번은 소리가 크고 한 번은 소리가 작아 큰 소리와 작은 소리가 마디가 있었고 한 번은 암컷의 소리였고 한 번은 수컷의 소리여서 암컷과 수컷의 차례가 있었다. 일종(一宗)이 죽고 일종(一宗)이 살았으니 죽고 사는 것에는 표지(標識)가 있으며 이것이 불문(佛門)에서 예악(禮樂)을 짓는 법이다.
동틀 무렵에 노인이 다시 와서 말하기를, "나는 종이 울리는 힘을 입어 얽어맸던 몸에서 벗어나 승천한다."고 하였다. 해가 솟아 밝아올 무렵에 가서 보니 금구렁이 한 마리가 남쪽 처마 아래에 죽어 있으므로 승(僧)이 죽었을 때의 예와 같이 장사지냈다.
아, 꿩은 자기의 몸을 희생하여 목숨을 구해준 승(僧)의 은혜를 보답했고 승(僧)은 꿩의 목숨을 구해 준 것으로 인하여 목숨을 구하는 보답을 받았다. 구렁이는 승(僧)으로 인하여 생명을 아껴 꿩을 살려 주었고, 꿩으로 인하여 쌓였던 억겁(億劫)의 고통을 벗었으니 이것이 일거삼득(一擧三得)이다. 사물은 비록 같지 않았으니 세상에서 뛰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치악(雉樂)으로써 그 산의 이름으로 하고 종을 쳤던 소리로써 온 나라의 사찰에 퍼졌다고 한다. (자웅종기에는 雉岳이 雉樂으로 되어 있음.)
- 해남 대흥사에서 1921년 발간한 「범해선사 문집」중의 '자웅종기(雌雄鐘記)'
치악산은 원주의 진산이다. 옛 이름은 적악(赤岳)이었다고 한다. <택리지>에도 ‘원주 동쪽에 적악(赤岳)이 있다’고 하였다. 꿩 전설이 생기고부터 치악이라는 새 이름표가 붙었으나, 조선 초 무학대사가 이미 ‘치악’이라는 지명을 사용했고, 선조 때 인물인 정철이 <관동별곡>에서 ‘치악’이라는 지명을 사용하고 있는 걸로 미루어 치악이라는 지명은 이미 고려 이전부터, 어쩌면 적악이라는 이름과 함께 불려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치악산은 고려 왕조를 마무리지은 산으로 기억된다. 이성계 일파에 의해 재위 4년만에 왕위에서 �겨난 공양왕이 나이 50에 두 아들 왕석(王奭)․왕우(王瑀)를 데리고 처음 유배 들어온 산이 치악이기 때문이다. 그 후 공양왕은 강원도 고성으로 이배되었다가 다시 스님으로 이배된 뒤에 후환이 두려웠던 이성계 일파에 의해 1394년 살해되었다.
치악은 조선에 들어와 오악(五岳) 가운데 하나로 숭상되었다. 북악 묘향․중악 계룡․남악 지리․서악 구월과 함께 치악은 동악이 되었다. 그 후 조정은 치악에 동악단(東岳壇)을 세우고 매년 춘추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치악산에는 한때 70여개의 사찰이 있었으나 지금은 구룡사·상원사·국향사·보문사·입석사 등 몇 곳만 남아 있다. 구룡사는 신라말기 도선국사, 고려말 무학대사, 조선 중엽 사명대사 등 고승들의 수도처로 지방문화재 제145호인 보광루를 비롯, 범종각·삼성각·사천왕문·원통문 등 많은 건축물이 남아있다.
보광루의 짚으로 만든 멍석은 세 사람이 3개월에 걸쳐 완성했다는 국내 최대의 멍석이다. 이밖에 구룡사 방면에는 구룡폭포를 비롯, 거북바위·범바위·용바위 등 명소가 많다. 사찰 부근엔 조선조 때 궁궐을 짓는 데 쓰였던 노송들이 군락을 이뤄 벌목을 금하던 황장금표(黃腸禁標)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
황장금표 바위
학곡마을을 지나면서부터 치악산은 서서히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다. 학곡마을에서 구룡사까지는 10여분 거리다.
구룡사 매표소를 지나자마자 왼쪽 나무그늘에 황장금표(黃腸禁標)라고 새긴 작은 바위 하나가 땅에 박혀있다. 옛날 치악산에는 ‘황장목’이라고 불렸던 질 좋은 소나무 숲이 울창했다. 황장이라는 말은 나무의 속질이 황금빛을 띠고 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이 나무는 조정에서 베어다가 왕족들의 관(棺)을 만들 때 썼다. 황장목은 나무껍질조차 붉은 빛을 띠고 있어 더욱 매혹적인 우리 소나무이다. 물론 우리 소나무라고 모두가 황장목은 아니다. 태백산맥 일부지역에 나타나는 금강송만을 가리킨다. 하늘로 곧게 솟은 황장목의 줄기는 등천하는 용과도 같은 모양이다. 그래서 때로 ‘적룡(赤龍)’으로 표현되기도 했는데, 그 붉은 나무껍질을 적룡피(赤龍皮)라도 하였다.
그리고, 금표란 무단벌채를 막기 위해 세워둔 일종의 경고판이다. 또한. ‘금(禁)’이라는 말에는 ‘왕’이라는 뜻도 함께 들어있다. 영월 금몽암(禁夢庵)은 단종이 왕으로 있을 때 꿈에서 본 절이라는 뜻의 이름이다.
황장금표는 물론 이곳에만 세워진 것은 아니다. 기록에 따르면, 나라 안에 60군데에 금표비가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울진 소광리를 비롯하여 현재 몇 곳에 당시의 금표가 남아있다.
구룡사 원통문을 지나면 사천왕문이고 사천왕문을 지나면 구룡사 보광루가 나온다.
원주구룡사보광루(原州龜龍寺普光樓)
구룡사 보광루
보광루는 치악산 중턱에 위치한 구룡사의 불이문 역할을 하는 건물이다. 구룡사의 진입은 사천왕문을 통과하여 보광루 밑을 지나 대웅전 앞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
앞면 5칸, 옆면 2칸의 익공집으로 맞배지붕의 형태를 하고 있다. 기단은 자연석이며 배흘림이 있는 둥근기둥을 세운 뒤에 그 위로 누각형 건물을 올렸다.
누각층은 대웅전 앞의 마당을 향해 개방시킨 형태이며, 기둥은 1층보다 빈약한 배흘림이 없는 원형기둥을 사용하였다. 천장은 우물반자이며, 누마루는 우물마루인데, 한때 마루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멍석이 깔려 있었다고 한다.
보광루(普光樓)는 구룡사(龜龍寺) 경내로 들어가는 정문이 다. 입구의 추녀 밑에 '치산룡악구사(雉山龍岳龜寺)'라는 현 판이 걸려 있다. 정면 5간(間), 측면 2간(間)의 맛배집으로 2층루(層樓)의 마 루집인데, 2층 마루에 깔린 멍석은 인부 3인이 3개월에 걸쳐 만들었다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것이라고 전한다. 윗층은 마루가 깔려 있고, 밑은 통로가 개설되어 중앙에 출입 문이 설치되어 있는데 좌우의 2간(間)은 사방 판벽(板璧)으로 막아 창고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지붕은 맛배형으로 골기와가 얹혀 있으며 화려하지 않게 단청(丹靑)을 하였다. 좌우에는 방풍판이 달려 있다. 비록 조선후기의 건물이나 이곳 일대에서는 가장 장 대한 건물이며, 5간의 기둥이 큼직하고 누(樓)마루가 장중한 모양을 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6·25전쟁 때에도 소실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다.
(원주)
원주는, 삼한시대에는 마한지역이었다가 백제가 합병을 하였고, 이어 북쪽에서 장수왕이 밀고 내려와 고구려땅 평원이 되었다. 그러다가 신라 진흥왕이 고구려를 북쪽으로 내쫓고 북원소경이라는 새 이름으로 불려졌다. 태조 때인 1395년 원주로 이름을 고치면서 강원 관찰사가 있는 감영이 되었다. 당시 춘천은 강원좌영으로, 스님은 강원 우영이 되었다.
<택리지>에 ‘원주는 영월 서쪽에 있다. 강원도 감사가 있는 곳으로, 거기서 한양은 서쪽으로 250리이다. 동쪽은 영과 두메에 가깝고, 서쪽은 산골짜기 사이사이에 들판이 섞여있어서 명랑하고 수려하다. 경기도와 영남 사이에 끼어서 동해로 수운(輸運)하는 생선․소금․인삼 등과 궁중에 쓰는 재목 따위가 모여들어서 하나의 도회를 이룬 곳이 원주다. 두메와 가까워서 난리가 일어나면 숨어 피하기가 쉽고, 서울과 가까워서 세상이 평안하면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는 까닭에 많은 한양 사대부들이 여기 와서 살기 좋아한다’고 했다.
시내에 있는 옛 감영지에는 당시의 건물인 선화당, 포정루, 청운당 등이 있다. 포정루는 감영의 영문(營門)으로, 민흘림기둥의 팔작다락집이며, 익공계이다. 2층에는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돌렸다. 선화당은 당시 동헌(東軒)의 부속건물이었다. 감영지 뜨락에 석조 유물들이 있다.
국향사는 비로봉 서쪽 산자락에 있다. 원주시내라고 해도 좋을 그런 평지에 자리해 있다. 이 절은 신라 경순왕 때 무착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무착대사라면 꿩 전설을 소재로 한 무학대사의 시에 나오는 주인공이다.
치악산 여근나무 ?
치악산 여근나무 ?
치악산 음양합덕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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