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무너져도솟아날구멍이있다/종통(宗統)

3. 박우당(朴牛堂)은 전생이 석가여래 이었다.

고도인 2008. 5. 12. 17:05

3. 박우당(朴牛堂)은 전생이 석가여래 이었다.


유명(遺命)으로 종통(宗統)을 계승(繼承)하신 박우당(都典 朴牛堂)께서는 정사년(丁巳年:1917년) 11월 30일 충북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 박(朴)씨 가문에서 탄강하시니 존호가 우당(牛堂)이시고 존휘가 한경(漢慶)이시다.

박우당께서는 청년시절 나라를 잃은 설움에 만주 일대를 유력하고 계셨는데, 어머니의 연락을 받고 집으로 오셨다가 1943년 징용(徵用)으로 일본에 건너가셔서 2년 후인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어 귀국하셨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은 병사 및 군사시설 확충을 할 인력이 절대 부족 하였고, 이것을 조선인으로 충당할 것을 결의하고 징병(徵兵)과 징용(徵用)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조선 총독부의 ‘국가 총동원법’에 의해 박우당께서는 일본 아우모리현(靑森懸) 미사와 비행장으로 징용을 가게 되었고, 2년이 지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자 귀국선에 오르게 되었다.
이 귀국선은 일본 해군함 우키시마(浮島)호로써 1945년 8월 22일 아우모리현 오미나토항을 출발하여 부산항으로 향하던 중 8월 24일 일본 마이즈루만 근처에서 원인 모를 폭탄이 배안에서 폭발하여 귀국선은 침몰하였고, 이로 인하여 귀국선에 올랐던 수천 명에 달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이 대부분 사망하였다. 그러나 당시 박우당께서는 거북이 등에 의지하여 현해탄을 떠돌던 중 다행히 민간인 어선에 구출되어 이후 무사히 부산항으로 귀국하시게 되었다.

그 이듬해
30세 되시던 병술년(丙戌年:1946년) 정월에 이모집에 세배 갔다가 이종사촌에게 도(道)를 전해 듣고 주문(呪文)이 이상하여 알아보려고 태극도(太極道)에 입도(入道) 하셨다.

조정산성사께서 갑오년(甲午年:1954년) 가을에 박한경에게 『사략(史略)』 상하권(上下卷)과 사서삼경(四書三經)의 구판을 구하게 하시므로 이때에『통감(通鑑)』•『소학(小學)』•『대학(大學)』•『논어(論語)』•『맹자(孟子)』•『시전(詩傳)』•『서전(書傳)』•『중용(中庸)』•『주역(周易)』의 구판(舊版)을 구하여 올렸더니 이 책들은 그 후에 도장(道場)에 비치되었도다.

태극도 당시 조정산성사 재세시에 박한경은 도인의 수가 4~5천 호에 이르렀으나 임명을 받지 못하였는데 도인들을 잘 통솔해 나가므로 이후에 수포감의 임명을 받고, 1958년 2월 하순경에 최고 간부 전원이 모인 자리에서 조정산성사께서 “박한경을 도전(都典)으로 임명(任命)하니 그는 총도전(總都典)이니라. 종전(從前)의 시봉도전과는 전혀 다르니라”고 분부를 내리셨다.

총도전에 임명되신 박우당께서는 조정산성사 화천(化天) 후 태극도 전반을 영도해 나가시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시고 고등공민학교를 인가받아 설립 운영하셨으나 무학도통(無學道通)이라 하며 학문이 필요없다고 착각한 임원들은 도전의 종단 운영에 대하여 반발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내수(內修) 도인(道人)들의 두발(댕기와 쪽진 머리)과 복장을 자율화를 지시하셨으나, 임원들은 더욱 불평을 가지고 통솔을 따르지 않았다.
도전께서 태극도를 떠나올 때까지 파란곡절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한때는 종단 운영에 불만을 가진 임원들에 의해 기소(起訴)되어 민간형무소 6개월 군형무소 3개월 구속되기까지 하셨으나 모두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임원들이 더 이상 통솔을 따르지 않자 1968년 7월 와이셔츠 차림으로 태극도 도장을 나오신 도전께서는 부산 해운대(海運臺), 청도 적천사(淸道 天寺), 경주 계림(慶州 鷄林), 대구 동화사(大邱 東華寺), 공주 갑사(公州 甲寺)를 거쳐 서울로 올라오셔서 안양 수리사(修理寺)에 들어가 49일 공부를 마치셨다.


박우당께서는 1969년 4월에 종단 대순진리회(大巡眞로써會)를 창설하시고 서울시 광진구 중곡동에 중앙본부 도장을 건립하셨다. 1971년 5월 24일 조정산성사를 조성옥황상제(趙聖玉皇上帝)로 봉안하시고 포덕 • 교화 • 수도사업을 종단의 3대사업으로 정하셨는데 3대 기본사업으로 구호자선사업 • 사회복지사업 • 교육사업을 지정하셨다. 또한 여주도장, 제주도수련도장, 포천수도장, 금강산 토성수련도장을 건립하셨고 학교법인 대진학원과 의료법인 대진의료재단을 설립하여 대진대학교를 비롯한 여섯 개의 고등학교와 동두천제생병원 및 분당제생병원을 건립하셨다.
대순진리회는 박우당께서 영도하시는 기간 동안 세계 종교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초고속 성장을 했다.


박우당께서는 1990년 12월 28일(양 1991년 2월 12일) 훈시(訓示)에서「납향치성을 도전한테 올리는 것이라고 하는데, 자고 이래로 산사람이 제사 받은 적 없다.」라고 말씀하시고, 또「박성구가 납향치성때 석가여래전에 도전(都典)인 내가 있을 곳이라 하여 사배를 올렸다. 또 최해경과 같이 내정에 올라와서 나의 용안을 들고 서가여래전에 봉안해야 한다고 주장(主張)하였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시길「조정산께서 도전(都典)의 직책을 나에게 주셨다.」하시고「설령 아니라 그래도, 내 말이라면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맡을 도(都)자,옥편에도 그런 도(都)자가 없더라고 박성구가 말한다. 그럼 내가 그걸 말하려고 일부러 만들었단 말인가. 옥편에는 총(總)자로 나와 있다. 거느릴 총(總), 모두 도(都), 맡을 도(都)자지, 전(典)이란 법전(法典)자 법이 되고, 주장 주(主), 주인 주(主)다. 모든 걸 주장하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상도 박성구(上嶋 朴成九)는 도전(都典)을 맡으라」는 명을 전임원들이 모인 가운데서 발표〔개유보(皆有報)〕하신 것이다.


그리고 1991년 6월 22일 시학공부를 여시면서 ‘시학공부는 자리공부’라고 일러주셨다. 그리고 1991년 9월 28일에「생부정,사부정이 있는데 앞으로는 없앤 다기 보다 가릴 것이 없다.」라 일러주시고 1995년 12월 4일 未時(양 1996년 1월 23일 1시 30분)에 화천(化天)하셨다.


박우당(都典 朴牛堂)께서는 丙戌年(1946년) 정월 보름에 태극도에 입문하여, 乙亥年(1995년) 12월 4일 화천하시는 날까지 오십년공부종필로써, 천하창생들에게 새 세상(新天地)을 개도(開道)해 주신 석가의 후신이시다.


『열반경』에 나오는데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려고 누웠을 때 제자들이 질문한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何故不住一劫 半劫敎導我等

하고불주일겁 반겁교도아등


어찌하여 1겁도 머물지 않으시고 반 겁 동안만 우리를 가르쳐 인도 하십니까.


석가모니가 80세에 열반에 들었으니 1겁(100년)을 머물지 못했고, 49년을 설법하였으니 반 겁 동안을 설법한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박우당께서도 반 겁인 50년 동안 교화 하시고  80세에 화천 하셨다. 석가는 미륵이 오실 터전을 닦아 놓았고 또 미륵이 오실 때는 석가모니가 수기를 내린다고 하였으니 그 예언대로 맞은 것이다.


미륵불(彌勒佛)은 극락(極樂)을 열어주는 부처이다. 병들어 괴롭고 죽어 장사지내는 것을 면하여 불로불사(不老不死)하며, 빈부의 차별이 없고, 모든 것이 풍요롭고 항상 평화로우며 지극히 아름다운 세상, 즉 모든 인류가 소망하는 최고 이상을 실현시켜주는 부처가 바로 미륵불이다.
석가모니 부처는 미래에 미륵보살(彌勒菩薩)이 도솔천에서 이 땅으로 내려와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삼회(三會) 설법으로 중생들을 제도하게 되면 이 세상은 더할 나위 없는 극락세상(極樂世上)으로 변하게 된다고 설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설법이 사실인지 아니면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인지, 사실 믿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미래에 미륵불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수기(授記)’라는 형태의 약속으로 확신시켜주고자 하였다. 즉, 삼세불에 관한 설법(說法)이 그것이다.
삼세불(三世佛)이란 과거불과 현재불과 미래불을 일체로 일컫는 말로서, 이 부처들 간에는 ‘반드시 부처가 된다는 약속’인 수기로 연결되어 있다. 즉,
연등불(燃燈佛)의 수기를 받은 선혜행자가 석가모니불로 왔으며, 석가모니불로부터 수기를 받은 아일다(阿逸多)가 미래에 미륵불로 오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는 「금강경(金剛經)」에서 말하기를, 자신이 석가모니(釋迦牟尼)라는 이름으로 오는 것은 연등불로부터 수기를 받을 때 이미 정해져 있었다고 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우경(賢愚經)」에서는 아일다가 미륵(彌勒)이란 이름으로 오는 것이 이미 정해져 있다고 설법하였으며,
「미륵상생경」과 「미륵성불경」에 의하면 석가모니불이 아일다에게 ‘다음 세상에 부처가 될 것이며, 그 이름은 미륵이라 하리라’는 수기를 내렸음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수기(授記)는 부처의 약속이므로 미래에 반드시 오시는 미륵불을 ‘당래불(當來佛)’이라 부른다. 즉, ‘미래에 마땅히 오시는 부처’라는 뜻이다. 부처의 약속이기에 미륵불이 오시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미륵이 언제, 어디로 오느냐 하는 것이다. 미륵의 하생(下生) 시기는 약 7가지 정도의 설이 있는데 그 시기가 56억 년설, 5억6,700만 년설, 인수(人壽) 8만4,000세설 등 현실성 없는 시기로 되어 있다.
100년을 살기 힘든 인간에게 56억 년이나 5억 년 후에 미륵불이 하생하신다면, 그것은 그림의 떡에 불과한 것이다. 미륵사상이 극락이라는 이상세계를 제시한다는 점에서는 매력을 지니고 있지만, 대중들에게 외면당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현실성 없는 시간관념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미륵을 신앙하는 대부분의 대중들이 석가모니가 설법한 ‘미륵이 열어주시는 극락세상’에 태어나려는 소원보다는, 당대의 현실세계에서 미륵이 도와주기를 바라는 현세 기복신앙에 더 치중했던 점도 이러한 현실성 없는 시간관념 때문일 것이다.
또 한편으로 현실성 없는 시간을 아예 무시하고 ‘바로 지금이 미륵시대’라고 주장하고, 자신을 스스로 미륵이라 칭하며 극락을 열어주겠노라고 나섰던 위정자(爲政者)들의 미륵교비(彌勒敎匪)가 일어나게 된 것 또한 불분명한 시간관념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러한 미륵교비는 이후 미륵의 하생을 더욱 의심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어쩌면 석가모니는 처음부터 ‘미륵이 하생하는 시기’를 풀기 어려운 비밀로 감추어놓았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 시기를 정확히 일러준다면 그 시기에 맞추어 자신이 미륵이라고 나서는 사람이 수없이 나타날 것이고, 따라서 세상은 더욱 혼란스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점을 살펴볼 때, 석가모니의 49년간의 설법을 기록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의 뜻이 ‘팔만 가지 설법 속에 크게 감추어둔 것이 있다’고 한 것처럼 ‘미륵의 하생시기’ 역시 비밀 속에 깊이 감추어두었을 것이다.
비밀은 밝히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때가 있는 법이니, 그 시점은 미륵불이 이 땅에 하생한 시기가 될 것이다.


미륵불이 오신다는 30겁(三十劫)은 3,000년을 말하며, 불기 3천년이면 미륵께서 강림하시는 것이다.

『화엄경(華嚴經)』 78권(卷) 법계품(法界品)에도 이와 같이 미륵께서 오시는 시기를 알려놓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優曇華 三千年開花 佛如優曇華

우담화 삼천년개화 불여우담화


우담화는 3천년에 꽃이 피는데, 부처는 우담화와 같다.


『법화경』에는 우담화(우담바라)가 피면 상서로운 일이 생길 징조라고 하였는데 그 전설의 꽃인 우담화가 최근 몇몇 사찰 등 우리나라 땅 여러 곳에서 연이어 피어났다고 한다. 이를 불교계에서는 법화경의 예언이 현실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상서로움의 상징인 이 꽃은 맨 처음 1997년 7월 22일 경기도 광주군 도척면 ‘우리절’에서 24송이가 피었다고 하여 수많은 불자들이 모여들기도 했다.

 

「열반경」 2권 수명품(壽命品)에서도 미륵께서 오시는 시기를 기록해놓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佛如優曇華 値遇生信難

불여우담화 직우생신난


부처는 우담화와 같아서, 살아생전에 만나서 그를 믿기가 어렵다.

또한 「묘법연화경」 ‘묘장엄왕본사품’에도 이와 같은 구절이 나온다.


佛難得値 如優曇跋羅華 又如一眼之龜 値浮木孔

불난득직 여우담바라화 우여일안지구 직부목공


부처를 직접 만난다는 것은, 우담바라화를 보는 것과 같다. 또한 눈 하나 달린 거북이가 떠다니는 나무의 구멍을 직접 만나는 것과 같다.


위에서 말한 부처는 곧 미륵불을 뜻한다. 따라서 이 말씀의 뜻은 우담바라는 3,000년에 한 번 피는 꽃으로서 살아생전에 그 꽃을 보기가 어렵듯이, 부처를 살아서 직접 만나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이 말씀은 석가불 다음에 반드시 오시는 미륵불께서 ‘석가불 입멸 후 3,000년’이 경과하면 이 지상에 강림하신다는 것을 우담바라화에 비유하여 설법한 것이다.

현재 불교계에서 통용되고 있는 불기(佛紀)는 태국과 미얀마 등지에서 쓰던 남방불기로서, 기원전 544년을 기원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예로부터 북방불기를 실제로 사용해왔던 중국과 한국 등지에서는 기원전 1026년(계축년)을 불기로 사용하였다. 또한 <대한불교조계종 종헌 제2장 5조>를 보더라도 ‘본종(本宗)은 석가모니불의 기원을 단기 1,307년으로 기산(起算)한다’라고 되어 있다.

논산군에 있는 ‘개태사 정문의 상량문’에 적혀 있는 불기(佛紀)를 보면 경신년(庚申年, 1980년)을 불기 3,007년이라고 적고 있다.

따라서 1972년이 불기 3,000년이 되는 해이므로, 오늘날은 이미 말법시대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말법시기에 반드시 오시기로 되어 있는 ‘미륵불’이 출현하시는 시기는 근세(近世)가 되는 것이다.


       

                       

 

 


미륵은 석가여래가 말한 미래불로서, 후천 극락세상(極樂世上)을 열어주시는 분이다.

강증산 성사께서는 대선생(대두목=주재자)이시고, 조정산께서는 전생에 연등불이시며 연등불로써 석가에게 수기를 주신분이다. 즉 조정산께서는 박우당에게 수기를 내린 것이 된다. 그러므로 미륵은 따로 계시는 것이다.

박우당정체가 바로 석가여래이셨으니, 박우당께서는 미륵을 모실 터전을 마련 하시고 개유보(皆有報) 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