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무너져도솟아날구멍이있다/종통(宗統)

4. 심법(心法)에 의한 종통종맥의 전수-개유보(皆有報)

고도인 2008. 5. 12. 17:12

4. 심법(心法)에 의한 종통종맥의 전수-개유보(皆有報)


박우당께서는 1988년 11월에 “조정산성사도 납향치성(臘享致誠)을 한번 받으시고 화천하셨다”하시면서 납향치성(臘享致誠)을 발표하시고 지방 각 방면 회관에서 치성을 올리도록 명하셨다.
1990년 11월 22일(양력 1991년 1월 7일) 상도(上嶋) 박성구(朴成九)선감이 박우당의 존영을 그려서 모셔 올리고, 동지로부터 셋째 미일(未日)인 1990년 12월 10일(양력 1991년 1월 25일) “영대(靈臺)의 석가여래 자리는 박우당께서 모셔질 자리이다”라고 하면서 박우당께 4배를 올리며 납향치성((臘享致誠)을 올리자, 박우당께서는 1990년 12월 28일(양력 1991년 2월 12일) 훈시(訓示)에서 “납향치성을 도전한테 올리는 것이라고 하는데, 자고이래로 산 사람이 제사 받은 적 없다” “정산성사께서 도전(都典)의 직책을 나에게 주셨다. 설령 아니라 그래도 내 말이라면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맡을 도(都)자’ 옥편에도 그런 도(都) 자가 없더라고 박성구가 말한다. 그럼 내가 그걸 말하려고 일부러 만들었단 말인가. 옥편에는 총(總)자로 나와 있다. 총지휘, 총재 맡을 도(都)자지, 전이란 법전(法典)자 법이 되고, 주장 주(主), 주인 주(主)다. 모든 걸 주장하는 사람이다”라고 전 임원들이 모인 가운데서 “상도 박성구(上嶋 朴成九)가 도전(都典)을 맡으라”고 발표를 하셨다.
이는 대순진리회의 경전인 전경(典經) 맨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 바와 같이 종통을 이어갈 후인(後人)은 산조(山鳥), 즉 섬 도(嶋=山+鳥)자의 호(號)를 가진 사람(上嶋 박성구)이라는 것을 개유보(皆有報: 모두에게 알림)하신 것이다.
전경 마지막 구절인 ‘예시 89절’을 보면 증산성사께서 화천하시기 전 김형렬에게 글 한수를 �어주시니 다음과 같도다.

後人山鳥 皆有報
후인산조 개유보
勸君凡事 莫怨天
권군범사 막원천

후인(계승자)은 산조(山鳥=嶋)임을 모두에게 알리노니 권하건대 범사에 하늘을 원망하지 말라.

강증산성사께서 이와 같은 글을 제세시(在世時)에 종도들에게 �어 주신 것은 이미 천부적으로 정해진 종통계승자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신 내용이었다. 단지 그 내용이 밝혀지기까지는 증산성사께서 언급하신 대로 삼천(三遷)*의 이치가 이루어질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고 그 변화하는 이치에 따라 옥황상제님의 법이 점차 완성되어 비로소 1995년 12월 15일(음) 전산, 증산, 우당의 正體(정체)가 정립(正立)되는 진법(眞法)이 정해지게 된 것이다.

* 삼천(三遷) : 삼천(三遷)의 '천(遷)'의 훈음(훈음)은 '옮길 천', '바뀔 천' 이다. 이는 종통(宗統)이 세 번 계승되어 옮기고, 진법(眞法)이 세 번 바뀌어 완성된다는 뜻이다.

종통계승을 통하여 새롭게 밝혀지게 된 사실은 증산성사께서 천지공사를 집행하셨던 동곡약방 남쪽 기둥에 써놓으신 글귀가 섬도(嶋)자 였다는 사실이다. 이
섬 嶋(도)자에는 山(산)자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결국 박우당은 강증산성사제께서 이미 100여 년 전에 정해놓으신 그 사람(後人)을 찾아 세우고자 하신 것이고, 그 사람이 바로 박성구 현 도전이라는 것을 전체 임원들 앞에 발표하는 형식을 취하셨던 것인데 이를 심법전수방식(心法傳受方式)으로 하셨다.
공개적(公開的)으로 종통을 발표하셨던 그날, 수수께끼 같은 박우당의 말씀을 듣고 그 진의(眞意)를 깨달은 사람은 오직 종통계승자인 박성구 현 도전 한 사람뿐이었다.

이날 박우당께서는 현 박성구 도전을 무척 꾸중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시면서 모든 임원들의 관심이 집중되게 하셨는데, 그 소란스런 와중에 ‘순간적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종통계승을 하셨던 것이다.
당시 대다수 임원들은 나름대로 일정한 세력을 가지며 박우당의 측근이자 심복임을 자처하며 외형적인 충성심에 마음이 쏠려 있었다. 이들은 휘하 도인들에게 박우당의 뜻을 올바로 전하기보다는 각자의 세력유지와 외형적 규모를 늘리는데 연연하여 상당기간 동안 갖가지 내부적, 사회적 병폐를 불러왔었다.
그런데 만일 공개적인 자리에서 누구나 알아듣기 쉽도록 종통을 전한다면 박성구 현 도전은 그들의 시기심으로 인해 저해를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들보다 서열이 아래인 사람에게 종통이 계승된다면 종단 전체가 알게 모르게 혼란에 휩싸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박우당께서는 이러한 내부적인 병폐를 모두 알고 계셨기에 꾸중을 통해 임원들의 관심을 전혀 엉뚱한 곳으로 분산시키신 다음,
1) 두 분의 심중으로 종통을 전하시고
2) 내부적으로는 내분의 소지를 없애고
3) 외부적으로는 남아 있는 대업을 무사히 마무리하시고자 이러한 법을 쓰신 것이다.
박우당께서는 이른바 역설법(逆說法)을 활용한 독특한 방식으로 종통을 정해주셨기 때문에 그 당시 훈시내용을 이러한 심층을 기준으로 한 역설(逆說)로 대입(代入)시켜 분석해보면 종통에 관련한 모든 수수께끼가 홀연히 풀리는 것이다.
당시 모든 임원들은 박우당께서 왜 굳이 전체 임원들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셨는지 그 이유 자체를 숙고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어른이 어린이에게 “밉다”라고 한 “표현”을 정말 미워서 밉다는 “말”로 알아들은 것이다. 즉, 기(氣)로써 듣지 않고 ‘귀’로만 들은 것이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시선이 모두 쏠려 대인(大人)의 진의(眞意)를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1 : 1방식은 과거 석가모니가 수제자인 가섭에게 종맥을 전해준 방식과도 같다.
이를 불가(佛家)에서는 ‘염화미소’나 ‘염화시중’으로 상징되는 ‘이심전심(以心傳心)법’ 이라고 한다. 3천 년 전 어느 날, 석가모니가 제자들에게 설법을 시작하지 않고 한참 동안 침묵하고 있자 제자들은 그 의도를 궁금히 여겼다. 그러다가 긴 정적을 깨고 느닷없이 화사하게 핀 연꽃 한 송이를 1.250명의 제자들을 향해 보여주었다.
이때 1.249명의 제자들은 그 의도가 무엇인지 몰라 술렁거리고 있었는데 ‘가섭’ 혼자만이 좋지도 싫지도 않은, 알 듯 모를 듯한 애매모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석가모니는 홀로 미소를 짓는 가섭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미묘한 법을 가섭에게 전하노라” 하고 모든 제자들에게 발표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가리켜 교외별전(敎外別傳 :문자를 떠나 마음에서 마음으로 별도로 전함), 직지인심(直指人心: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킴), 불립문자(不立文字: 문자로써 가르침을 세울 수 없음)로 표현한다. 불교의 종맥을 이와 같이 대다수 제자들을 향한 ‘모습’만 취하였을 뿐 그들의 생각의 범위를 벗어나 이치를 ‘알아듣는’ 사람끼리 1 : 1방식으로, 즉 마음에서 마음으로 ‘직접’ 전해졌던 것이다.
가섭은 늘 초라한 행색으로 여러 제자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지만 홀로 외로이 수행을 쌓아 부처의 경지에 도달한 ‘제 2의 부처님’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용맹전진 했던 사람이었다. 외형적 모습을 떠난 심법의 세계를 깨닫게 해주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선가(禪家)의 또 다른 종맥전수법(宗脈傳授法)으로 일반인들에게 가장 많이 거론되고 있는 이야기는 보리달마(중국선종의 창시자, 1조)로부터 발원하여 5조가 되는 홍인(弘忍: 602~675)과 그로부터 종통을 전해 받은 6조 혜능(慧能: 638~713)을 들 수 있다. 그는 노자-맹자-장자-공자와 더불어 중국 역사에서 성인의 칭호를 받는 사람으로서 달마대사와 함께 선종의 봉우리로 상징되는 인물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300년 전 나무꾼 생활을 하던 23세의 젊은이 혜능은, 거래처 주막에서 들리는 『금강경』독경소리에 홀연히 법열(法悅: 진리를 깨달았을 때 느끼는 황홀한 기쁨)을 느껴 당시 중국선종의 5조이자 『금강경』의 권위자였던 홍인대사를 찾아 도를 구하였다.
홍인대사는 첫 만남과 대화에서부터 혜능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그에게 종통을 계승하고자 마음먹었으나 수많은 선임자들의 시기와 질투를 우려해 짐짓 그를 꾸짖으며 방앗간 일을 시켰다. 그 후 열반에 들어야 할 시기가 다가왔음을 깨달은 홍인대사는 입산한 지 불과 8개월밖에 되지 않은 24세의 초라한 행자(行者)에 불과한 혜능에게 심법(心法)으로써 법을 전해주기로 결심하였다.
홍인대사는 어느 날 후원에서 방아를 찧고 있는 혜능을 찾아가
“공부는 잘 되어가고 있느냐?”하자 혜능이 태연하게 “해가 서산 너머로 너울너울 넘어가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혜능의 당돌한 대답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의아했지만 둘이 나눈 대화가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혜능의 답변을 알아들은 홍인대사는 주장자로 방앗대를 ‘세 번“치고는 주장자를 ’뒤로' 끌며 천천히 돌아갔다. 순간, 스승의 암시를 깨우진 혜능은 그날 밤 ‘삼경(三更)’에 ‘뒤문’을 통과하여 대사를 찾아갔다.

대사는 그 자리에서 혜능에게 『금강경』을 설하고, 혜능의 깨달음과 신념이 완전함을 재차 확인한 뒤 가사와 바릿대를 건네주며 당부하길 “이 길로 너는 남쪽으로 내려가되 시기가 무르익을 때까지 절대 법을 설하지 말라”며 주의를 주고 “법을 잘 보호하고 널리 중생을 교화하여 제도하도록 하라”는 마지막 부탁을 하였다.
혜능은 그 길로 야음을 틈타 이 충격적인 사실이 알려짐으로써 닥쳐오게 될 소란과 저해를 우려해 남쪽으로 내려갔다.
다음날 아침,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홍인대사의 최측근 제자인 ‘신수(神秀)’가 스승을 찾아갔으나 스승은 이미 열반에 든 후였고 종통의 상징인 가사와 바릿대도 없어진 후였다. 뒤늦게 정황을 파악한 신수는 대사의 또 다른 제자였던 ‘혜명’을 시켜 급히 혜능을 쫓아가 가사와 바릿대를 빼앗아오게 하였다. 혜명은 날쌘 중들을 이끌고 추격하여 마침내 혜능을 잡았다.
혜명이 가사와 바릿대를 내놓으라고 하자 혜능은 흔쾌히 가사와 바릿대를 놓아두고 가져가라고 했다. 그러나 혜명은 아무리 힘을 써도 그 가사와 바릿대를 들지 못하였다.
혜명은 그 순간 크게 각(覺)을열어 단순히 방앗간 행자만 알고 있었던 혜능을 법의 스승으로서 따르게 되었다.
이처럼 도(道)의 종통은 그에 걸맞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결코 전해 받을 수 없음을 지나간 불교역사는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강증산성사로부터 조정산 , 박우당 , 박성구 현도전에까지 이르는 종통계승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미 천부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므로 인위적으로 만들어 주장할 수는 없는 여합부절의 증거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통계승자를 정하여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 때에 그 사람을 찾아서 승계하는 것이다.


그 승계하는 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심법전수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조정산께서도 화천(化天) 직전 박우당 도전을 향해 “도적놈”을 크게 세 번 부르는 역설적인 방법으로써 종통계승을 마무리했던 것이고 박우당 도전 역시 수많은 임원들 앞에서 온화하셨던 평소 모습과는 달리 “역적, 난동자”라는 격한 표현을 쓰시며 조정산성사께서 쓰신 역설적 방법으로 일반적인 문자(文字)의 경계를 벗어나 대도(大道)의 종맥을 전해주셨던 것이다.


조정산 성사께서는 만수도인들이 이러한 종통의 역사와 흐름을 깨달아 맥이 끊기고 법이 혼란한 난법시대에 처하여, 길을 잃지 말고 새 생명이 움트는 진법을 찾아 소원을 이루도록 하기 위해 ‘부성인지경전 불구문장지색채 이구기진리 진인지심 구기실 이불구외식(夫聖人之經典 不求文章之色彩 而求其眞理 眞人之心 求其實 而不求外飾)’이라 하셨다.
이 뜻은 “대저 성인의 법이란 문장의 색채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구하며, 진인의 마음은 그 열매를 구함이지 외식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성인(聖人)의 진리(眞理)와 진심(眞心)은 문자이나 언어와 같은 외형의 경계를 넘어선 곳에 담겨 있다는 글을 각도문(覺道文: 도를 깨닫게 해주는 글)을 통해 명명백백(明明白白)히 밝혀 주셨던 것이다.


이처럼 광대무변(廣大無邊)한 하느님의 진법은 고정관념이나 상식의 틀 안에 갇힌 범인(凡人)의 상식 범위를 넘어서 현대인들이 ‘전설’로만 생각하기 쉬운 수천 년 전 심법전수방식을 통하여 천부적(天賦的)인 종통종맥을 이어주셨음을 깨달을 수 있다.
박우당께서는 화천하시기 전에 위 내용에 나오는 바와 같이 대인(大人)의 심법(心法)으로써 종통종맥을 전하셨던 것이고 그로부터 약 6개월 후인 1991년 6월 22일 시학(侍學)공부를 비로소 여셨으며 1991년 9월 28일 “생부정(生不淨), 사부정(死不淨), 몸부정이 있는데 몸부정은 없앴다기보다 가리지 않고 있다.
앞으로는 생부정, 사부정을 가릴 것이 없다”라고 일러주시고, 1995년 12월 4일(양력 1996년 1월 23일 오후 1시 30분) 증산성사의 유지(遺志)와 정산성사의 유법(遺法)을 완성하신고 後人(후인)은 山鳥(산조)임을 皆有報(개유보) 하시고 화천(化天)하셨다.
종통을 승계받으신 박성구(朴成九) 현 도전께서는 숱한 어려움을 딛고 1995년 12월 15일 박우당의 신위(神位)를 박성미륵세존(朴聖彌勒世尊)으로 밝히시고 영대(靈臺)에 봉안(奉安)하셨다.

박우당은 쪽박의 이치로 오셨기 때문에 쪽박이란 박을 둘로 쪼개도 둘 다 박이라는 뜻이다.  즉 박우당이 미륵이라면 박성구현도전님 당신도 미륵이라는 말씀이다. 당신이 미륵이신데 내가 미륵이다 하고 직설적으로 말을 할 수 없으므로 역설법을 이용하여 박우당을 미륵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강증산성사께서 또 오는 박으로 두 번째 朴(박)인 박공우에게 만국대장 박공우라고 공사를 본 것이다.


이로써 우주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옥황상제님의 진법은 수많은 성현(聖賢)과 예언가(豫言家)들의 말대로 인류가 ‘된서리를 맞게 될 위기’에 처한 우금(于今)에 이르러서야 인류사회에 그 광명정대(光明正大)한 본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하늘이 무너져가는 긴박한 시점에 솟아날 구멍을 열어주신 것이다. 한 줄기 빛과 같은 열린 틈을 통해 1만 2천의 선남선녀를 중심한 모든 인류는 비로소 눈을 떠 하느님의 진영(眞影) 앞으로 모여들어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