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무너져도솟아날구멍이있다/종통(宗統)

2. 조정산(趙鼎山)은 옥황상제(玉皇上帝)의 역할을 하였다.

고도인 2008. 5. 11. 09:36

2. 조정산(趙鼎山)은 옥황상제(玉皇上帝)의 역할을 하였다.


강증산 성사로부터 종통을 계승받아 종단을 창설하신 조정산께서는 을미년(1895년) 12월 4일에 경남 함안군 칠서면 회문리 조(趙)씨 가문에서 탄강하시니 존호가 정산(鼎山)이시다. 조정산께서는 부조전래(父祖傳來)의 배일사상가로서 반일운동에 활약하시다가 신변의 위협을 느끼시고 항일구국을 위하여 망명(亡命)의 길에 오르니 1909년 4월 28일이다. 기차를 타고 만주지방으로 향하던 중 미시(未時:오후 1시)경 대전역 부근에 이르렀을 때 비몽사몽간에 한 신인(神人)을 대하셨으니 말씀하시기를 “내 그대를 기다린 지 오래노라. 그대는 나의 종통(宗統)을 이어갈 삼계(三界)의 진주(眞主)노라. 그대의 호는 정산(鼎山)이니 나와 그대는 증정지도(甑鼎之道)이니라”는 현몽을 받고 만주 봉천(奉天)지방으로 망명하시었다.

조정산께서는 동지들과 구국운동에 활약하시다가 도력으로 구국제세의 뜻을 정하시고 입산수도 공부에 전력을 다하시던 중 또 그 신인(神人)이 나타나 글이 쓰인 종이를 보이며 “이것을 외우면 구세제민(救世濟民)하리라” 하시므로 그 글을 보니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지기금지원위대강(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至氣今至願爲大降)’이었다.

조정산께서는 9년 공부 끝인 정사년(丁巳年:1917년) 2월 10일에 증산성사의 삼계대순의 진리를 감오득도(感悟得道)하시고 종통계승의 계시를 받으셨다.
그러던 어느 날 “왜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느냐 태인에 가서 나를 찾으라”는 명을 받고 동년 4월에 귀국하시어 전국 명산 각지를 두루 다니시며 수도하시던 중 다음해 정월 보름에 정읍 마동에서 대사모님과 증산성사님의 누이동생 선돌부인과 따님 순임을 만나셨다.
선돌부인은 조정산을 반갑게 맞아들이면서 “증산성사께서 재세시에 늘 을미생(乙未生)이 정월 보름에 찾을 것이로다. 봉서(封書)를 전달하라”는 명을 받았다고 하면서 조정산께 봉서(封書)를 내어주었다.
조정산께서는 왜정 당시 전북 구태인에 도장을 건립하시고 1925년 4월 28일에 강증산 성사를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姜聖上帝)로 봉안(奉安)하시고 무극도(无極道)를 창설하셨다. 1935년 일제의 종교단체 해산령에 의하여 종교활동을 일시 중단하시고, 전국 명산대천을 순회주환하시며 수도하시다가 1945년 8월 조국 광복을 맞이하신 조정산께서는 신앙자유의 국시(國是)에 따라 부산에 도 본부를 설치하시고 도명(道名)을 태극도(太極道)로 개칭하여 종교활동을 부활하시고 무극대운의 해원상생(解寃相生)의 진리를 설법하셔서 구제창생의 대도(大道)를 밝혀주셨다.
조정산께서 둔도수, 폐백도수, 단도수, 담뱃대도수 등 여러 도수를 보시고
“증산성사께서 짜 놓으신 도수를 내가 풀어가노라”고 하셨다.
그리고 종지(宗旨)와 신조(信條), 목적(目的)을 정하시고 전교(傳敎)와 포유문(布喩文)을 선포하셨으며 각종 수도 방법과 의식행사 및 준칙 등을 설법 • 시행하시고, 1957년 丁酉年(정유년) 11월에 도인(道人)들의 수도공부의 설석을 명하셨다.
조정산께서 보수동 산정에서의 공부를 멈추고 대청에 나오셔서 “앞으로 신도들의 동(動)이 두 번 있으리라” 말씀하시고 그 주변에 사는 신도들의 사정을 물으셨다.
이때 박한경, 오치국, 임규오, 박중하, 박봉상, 이인호 등이 시좌하였도다.
조정산께서 어느 날 종도들에게 “시시묵송공산리 야야한청잠실중 분명조화성공일 요순우왕일체동(時時默誦空山裡 夜夜閑聽潛室中 分明造化成功日 堯舜禹王一切同)”이라 일러 주셨다.

조정산께서 다음해 1958년 戊戌年(무술년) 2월 하순경에 최고 간부 전원이 모인 자리에서 "박한경을 도전으로 임명하니 그는 총도전이니라. 종전의 시봉 도전과는 다르니라"고 분부를 내리셨다.

조정산께서 정유년(丁酉年:1957년) 11월 21일 자시(子時, 저녁11시)부터 무술년(戊戌年:1958년) 3월 3일까지 도장에서 불면불휴하고 백일도수를 마치시니라. 5일에 심히 괴로워하시므로 한의사와 양의사를 불러왔으되 “때가 늦었도다”고 이르시며 “내가 가야 옥추문을 연다”고 하시며 간부 전원을 문 밖에 시립케 한 후 도전 박한경을 가까이 하고 도전의 머리에 손을 얹고 도의 운영 전반을 맡도록 분부를 내리셨다.
그리고 “오십년 공부종필(五十年 工夫終畢)이며, 지기금지 사월래(至氣今至四月來)가 금년이다. 나는 간다. 내가 없다고 조금도 낙심하지 말고 행하여 오던 대로 잘 행해 나가라”고 말씀하시고, 다시 문 밖을 향하여 ‘도적놈’을 세 번 부르시더니 화천(化天)하셨다.
이때가 1958년 3월 6일 미시(未時:오후 1시)요, 수(壽)는 64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