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무너져도솟아날구멍이있다/이 땅에 하느님이 오셨다

1. 하느님께서 이 땅에 오신 배경

고도인 2008. 5. 9. 07:20

1. 하느님께서 이 땅에 오신 배경


근세의 세계사는 서구유럽의 급부상과 5,000년간 찬란한 문명을 구가하던 동양의 몰락으로 인류문명의 판도가 동양에서 서구유럽으로 교체된 역사였다.
돌이켜보면 과거 세계의 역사 속에서 인류의 문명 발전을 주도한 곳은 동양이었다. 인류가 짐승과 같은 생활을 청산하고 농경생활을 처음으로 시작한 곳도, 인류최초의 문자를 만들어 낸 곳도, 인류 최초의 법전인 ‘함무라비법전’을 만들어낸 곳도 동양의 메소포타미아 • 인더스 • 황하지역이었다.
또한 인류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3대 발명품, 종이와 나침반과 화약을 발명한 곳도 동양의 중국이었다.
그러나 17세기 경부터 일기 시작한 서양의 물질문명이 19세기 들어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결국 문명발전의 주도권은 서양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후 서구 유럽에서는 산업혁명을 통해 물질문명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반면에 한때 4대 문명의 발상지로써 찬란한 문명의 꽃을 피웠던 동양은 문명발전의 주도권을 서양으로 넘겨주게 된 것이다.
어떻게 17~19세기에 걸쳐 서양에서 갑자기 이러한 대변혁이 일어나게 된 것일까? 암흑 속에 잠들어 있던 서구유럽이 갑작스럽게 산업혁명을 일으켜 전세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실제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이 역사적 의문의 중심에 서양인 선교사 이마두(利瑪竇, 본명:마테오 리치 Matteo Ricci 1552~1610)*와 조선의 고승(高僧) 진묵(震默, 1562~1633)**이 있었다. 이마두와 진묵은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에 이 세상에 지상선경(地上仙境)실현의 주사위를 던진 선지자(先知者)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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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에서 밝혀주신 이마두 이야기 : 강증산성사께서 어느 날 김형렬에게 가라사대 “서양인 이마두(利瑪竇)가 동양에 와서 지상천국을 세우려 하였으되 오랫동안 뿌리를 박은 유교의 폐습으로 쉽사리 개혁할 수 없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도다. 다만 천상과 지하의 경계를 개방하여 제각기의 지역을 굳게 지켜 서로 넘나들지 못하던 신명을 서로 왕래케 하고 그가 사후에 동양의 문명신(文明神)을 거느리고 서양에 가서 문운(文運)을 열었느니라. 이로부터 지하신은 천상의 모든 묘법을 본받아 인세에 그것을 베풀었노라. 서양의 모든 문물은 천국의 모형을 본뜬 것이라.” 이르시고 “그 문명은 물질에 치우쳐서 도리어 인류의 교만을 조장하고 마침내 천리를 흔들고 자연을 정복하려는 데서 모든 죄악을 끊임없이 저질러 신도의 권위를 떨어뜨렸으므로 천도와 인사의 상도가 어겨지고 삼계가 혼란하여 도의 근원이 끊어지게 되니 원시의 모든 신성과 불과 보살이 회집하여 인류와 신명계의 이 겁액을 구천에 하소연하므로 내가 서양(西洋)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와 천하를 대순(大巡)하다가 이 동토(東土)에 그쳐 모악산(母岳山) 금산사(金山寺) 삼층전(三層殿) 미륵금불(彌勒金佛)에 이르러 三十년을 지내다가 최제우(崔濟愚)에게 제세대도(濟世大道)를 계시하였으되 제우가 능히 유교의 전헌을 넘어 대도의 참 뜻을 밝히지 못하므로 갑자년(甲子年)에 드디어 천명과 신교(神敎)를 거두고 신미년(辛未年)에 강세하였노라”고 말씀하셨도다. -「전경(典經)」 교운 1장 9절
** 전경에서 밝혀주신 진묵이야기 : 강증산성사께서 전주 봉서산(全州 鳳棲山)밑에 계실 때 종도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시니라. 김 봉곡(金鳳谷)이 시기심이 강한지라. 진묵(震?)은 하루 봉곡으로부터 성리대전(性理大典)을 빌려 가면서도 봉곡이 반드시 후회하여 곧 사람을 시켜 찾아가리라 생각하고 걸으면서 한 권씩 읽고서는 길가에 버리니 사원동(寺院洞)입구에서 모두 버리게 되니라. 봉곡은 과연 그 책자를 빌려주고 진묵이 불법을 통달한 자이고 만일 유도(儒道)까지 통달하면 상대할 수 없이 될 것이고 또 불법을 크게 행할 것을 시기하여 그 책을 도로 찾아오라고 급히 사람을 보냈도다. 그 하인이 길가에 이따금 버려진 책 한 권씩을 주워 가다가 사원동 입구에서 마지막 권을 주워 돌아가니라. 그 후에 진묵이 봉곡을 찾아가니 봉곡이 빌린 책을 도로 달라고 하는지라. 그 말을 듣고 진묵이 그 글이 쓸모가 없어 길가에 다 버렸다고 대꾸하니 봉곡이 노발대발하는도다. 진묵은 내가 외울터이니 기록하라고 말하고 잇달아 한 편을 모두 읽는도다. 그것이 한 자도 틀리지 않으니 봉곡은 더욱 더 시기하였도다. -「전경(典經)」공사 3장 14절
그 후에 진묵이 상좌에게 “내가 八일을 한정하고 시해(尸解)로서 인도국(印度國)에 가서 범서와 불법을 더 익혀 올 것이니 방문을 여닫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고 곧 입적(入寂)하니라. 봉곡이 이 사실을 알고 절에 달려가서 진묵을 찾으니 상좌가 출타중임을 알리니라. 봉곡이 그럼 방에 찾을 것이 있으니 말하면서 방문을 열려는 것을 상좌가 말렸으나 억지로 방문을 열었도다. 봉곡은 진묵의 상좌에게 “어찌하여 이런 시체를 방에 그대로 두어 썩게 하느냐. 중은 죽으면 화장하나니라”고 말하면서 마당에 나뭇더미를 쌓아 놓고 화장하니라. 상좌가 울면서 말렸으되 봉곡은 도리어 꾸짖으며 살 한 점도 남기지 않고 태우느니라. 진묵이 이것을 알고 돌아와 공중에서 외쳐 말하기를 “너와 나는 아무런 원수진 것이 없음에도 어찌하여 그러느냐.” 상좌가 자기 스님의 소리를 듣고 울기에 봉곡이 “저것은 요귀(妖鬼)의 소리라. 듣지 말고 손가락뼈 한마디도 남김없이 잘 태워야 하느니라”고 말하니 진묵이 소리쳐 말하기를 “네가 끝까지 그런다면 너의 자손은 대대로 호미를 면치 못하리라” 하고 동양의 모든 도통신(道通神)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옮겨갔도다. -「전경(典經)」공사 3장 15절
증산성사께서 하루는 종도들에게 “진묵(震默)이 천상에 올라가서 온갖 묘법을 배워 내려 인세에 그것을 베풀고자 하였으나 김봉곡(金鳳谷)에게 참혹히 죽은 후에 원(寃)을 품고 동양의 도통신(道通神)을 거느리고 서양에 가서 문화 계발에 역사하였나니라. 이제 그를 해원시켜 고국(故國)으로 데려와서 선경(仙境) 건설에 역사케 하리라”고 말씀하셨도다. -「전경(典經)」 권지 2장 37절

이마두와 진묵은 자신들의 지상선경의 꿈을 이루기 위해 동양에서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원을 품고 죽게 되었는데, 그들은 생전에 이루지 못한 꿈을 사후(死後)에 신명계(神明界)를 통해 서양에서 이루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사후(死後)에 각각 동양의 문명신과 도통신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넘어가 서양의 문명과 문화계발에 역사(役事)하게 되었다.

이 시기가 대략 17세기 중반으로 이때부터 서서히 동양은 고난, 서양은 번영의 길을 걷게 되었다. 조선의 승려 진묵이 사후에 동양의 도통신을 이끌고 서양으로 건너가 문화계발에 역사하여 정신문화를 개혁하면서 서양은 정치 • 경제 • 종교 분야의 대 도약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이러한 토대위에 이마두가 데리고 간 문명신이 서양에 역사(役事)하여 천상의 문명을 받아내려 인세에 베풀게 된 결과였다.
실제로 17세기 이후 동양이 더 이상 문명의 발전을 보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걸었던 반면, 서양은 과학의 발전을 바탕으로 한 물질문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상업과 동서무역, 신앙과 종교, 과학과 선진기술, 산업화 • 기계화의 성공은 지상에 세워질 천국의 모습을 보이는 듯 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이고 일시적인 모습이었을 뿐, 인류에게 곧 다가올 엄청난 불행의 전주곡이었다. 17세기이후 유럽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그들 중심의 문명은 서구인들의 야욕과 제도적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극한투쟁과 전쟁과 유색인종 멸시 및 백인우월성을 잉태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17세기를 기점으로 18 ~ 19세기에 서양이 이루게 되는 진보와 발전, 근대화라는 것은 아시아나 아메리카의 처절한 희생위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진묵과 이마두가 천국의 묘법을 인세에 베풀어 민생을 편이하게 하고자 도통신과 문명신을 붙여 일으켰던 문명이 결국은 침략의 선봉에서 오히려 지구상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을 식민통치로 병들게 했던 것이다.

19세기의 막이 오르자 서구인들은 식민지획득을 위하여 세계침략이라는 가속페달을 밟기 시작하였다. 탐욕과 잔학과 우세한 병장기로 무장한 서구의 ‘제국주의호(帝國主義號)’들은 5대양 6대주를 누비고 다니면서 식민지쟁탈에 여념이 없었다. 가끔은 침략의 첨병자리에 성경이 서기도 했다. 처음엔 선교사들이 예수의 복음을 전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들어가더니 뒤이어 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을 앞세워 함포와 기관총 등 우세한 무기로 무장한 군인들이 뒤따라와서 그 다음 목표인 영토를 합병하는 일을 자행한 것이다.

이와 같이 서구열강의 야심과 탐욕에 비해 세계는 너무나 나약했다. 식민지를 둘러싸고 열강들끼리의 충돌은 마치 먹이를 두고 싸우는 굶주린 야수들 같았다.
19세기의 제국주의는 과거의 영토확장과 군사적 힘의 우위에 의한 정치적 지배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으로 인간이 만들어낸 것들 중에서 가장 저질적인 것이었으며 최악의 것이었다. 그것은 식민지의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종교를 정복자가 임의대로 개조시키는 것이며 이 과정에서 인간내면에 숨어있는 탐욕성과 야만성, 배타성, 잔인성, 그리고 극단적 이기주의 등이 정복자의 마음대로 발휘되었다. 유사 이래 전 세계에 걸쳐서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대가 과연 또 있었을까할 만큼 어지러운 시대였던 것이다. 대륙간, 인종간, 계급간, 사회간의 불평등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시대가 바로 19세기였으며 그것은 다가올 20세기의 비극을 예고하고 있었다.

19세기에 등장한 새로운 제국들은 과거 로마제국이나 이슬람제국, 몽골제국 등 역사적으로 존재해왔던 어떤 제국과도 달랐다. 이들은 이미 형성되어있는 세계시장(아메리카대륙과 동남아시아일부)의 토대위에서 이제는 일부 지역이 아닌 전 세계를 세력권으로 삼아 식민지의 이름으로, 봉건적이고 산업 기반이 취약하고 기계화에 늦은 대륙(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을 자본주의적 수탈의 그물망 속에 단단히 옭아 넣었던 것이다.

세계지도를 펼쳐보면 유럽은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19세기의 유럽은 공간적으로는 유럽이외의 전 세계를 통합, 종속시켜 하나의 세계로 재편성하면서 내부적으로는 갈등이 심화되어 전 세계적인 투쟁의 장을 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국과 식민지, 자본가와 노동자, 극소수의 지배 엘리트와 다수의 압박받는 대중의 극심한 상호갈등과 대립은 투쟁과 전쟁으로 번져 전 세계가 용광로 속에 끓어 넘치는 쇳물처럼 들끓고 있었으며, 이로 인한 희생의 피는 산과 들을 다 적시고 하천으로 흘러 대해를 이룰 지경이었다.

이와 같이 18세기부터 일기 시작한 산업혁명을 통해 급속도로 발전해 온 물질문명을 바탕으로 힘을 축적한 서구제국들의 팽창주의는 점점 극을 향해 치닫고 있었으며, 반면에 단지 서구열강의 착취대상으로 전락한 전 지구촌은 유럽의 식민지로 화하고 있을 즈음, 이대로 방치해 두었다간 인류는 결국 서로 싸우다가 궁극에는 모두 진멸할 위기에 놓이게 될 것이기에 천상의 신명계에서 신성 • 불 • 보살 등이 회집하여 우주 삼라만상의 주인이신 옥황상제님께 이러한 어려움을 하소연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