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최제우에게 천지대도를 계시하시다
강증산성사께서 금산사 육장금불에 영(靈)으로 임하여 계실 때, 경주 사람 최제우가 양산 천성사 적멸굴에서 기도하고, 다시 고향인 경주 용담정에서 혼란한 세상을 건지겠다는 큰 포부를 품고 상제님께 기도하고 있었다.
최제우는 1824년 경상북도 월성군(현재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구미산(龜尾山) 아래서 최옥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수운(水雲)이고,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부친 최옥은 당시 경상도 일원에서 명망이 높았던 근암공(近庵公)으로, 이후 몰락하여 가세가 기울었다.
최제우는 대내외적으로 어수선하고 불안정한 시대인 조선 말기 몰락한 양반가에 태어났던 것이다. 게다가 일찍 부모를 여읜 그의 처지 또한 불우하였다. 이러한 그의 출신부터 기울어 가는 가세와 당시 조선말의 불안정한 사회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았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1844년부터 10년 동안 도를 닦기 위해 전국을 유랑하였다. 이 구도행각(求道行脚)의 유랑에서 그는 부패한 관리들의 핍박에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을 보았고, 양반 • 상놈의 구분과 남존여비, 적서차별의 억울함을 가진 백성들의 비애를 보았으며, 그릇된 정치가 행해지고 있는 나라 실정에 서양과 일본제국 세력이 조선을 넘보고 있었으니 백성들은 안주하지 못하고 세상도 크게 어지러워짐을 보고 한탄하였다.
당시의 국내외 정세를 보면, 서구의 동방 침략이 중국에까지 미쳐 1840년의 아편전쟁, 1856년의 영•불 연합군의 베이징(북경) 함락 등 큰 사건이 일어났고, 이웃 일본은 먼저 서구 물질문명을 받아들인 후 군사력을 증강하여 외국으로 세력을 펼쳐 나갈 기세를 보이고 있었다.
조선은 봉건정부의 병폐인 당쟁과 세도정치를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의 큰 난리를 치르고도 시정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정의 내분과 정부의 부패는 극에 달해 있었으며 지방의 말단 탐관오리들은 백성들을 핍박하고 있었으니, 나라 안팎의 정세에 백성들은 안주할 곳을 잃고 재래의 비결인 『정감록(鄭鑑錄)』 등을 들고 피난처를 찾거나, 서교(西敎)에 귀의하여 난을 피하려는 등 민족적 위기가 점증되고 있었다.
최제우는 이러한 어지럽고 병든 세상을 바로잡아 보겠다고 결심하고 1856년 경남 양산에 있는 천성산(千聖山) 내원암(內院庵)에서 도를 닦기 시작하여 1857년에 천성산(千聖山) 적멸굴(寂滅窟)에서 49일간 기도를 드리고 정성을 드렸다.
그리고 1859년에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인 경주에 돌아와 구미산(龜尾山) 용담정(龍潭亭)에서 억울한 민생과 병든 나라를 구하고자 하늘에 기도하였다. 그러던 중 경신년(庚申年, 1860년) 4월 초 5일에 상제로부터 강(降)을 받았는데, 『동경대전』의 ‘포덕가’에 나와 있는 그때의 정황은 이러하다.
뜻밖에도 마음이 선뜩해지고 몸이 떨려서 무슨 병인지 집증(執證)할 수 없고 말로 형상하기도 어려울 즈음에 어떤 신선(神仙)의 말씀이 있어서 문득 귀에 들리므로 놀라 캐어물은 즉 대답하시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세상 사람들이 나를 상제(上帝)라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시기를 “내 또한 공이 없으므로 너를 세상에 내어 사람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노니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라.” 또 묻기를 “그러면 서도(西道)로써 사람을 가르치리이까” 대답하시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나에게 영부(靈符)가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仙藥)이요, 그 형상은 태극(太極)이요, 또 형상은 궁궁(弓弓)이니 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주문(呪文)을 받아 사람을 가르쳐서 나를 위하게 하면 너도 또한 장생하여 덕을 천하에 펴리라.”
이 때 그의 나이 37세였다. 최제우는 상제로부터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다(吾心則汝心)’라는 결정적 계시를 받은 후, 홀연히 ‘사람은 누구나 한울님(하느님)을 자신 속에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侍天主)의 원리를 깨닫고 주문(呪文)을 적어내어 포교를 시작하였다.
당시 국가의 기강과 사회도덕이 모두 타락하여 국가는 외세에 대응할 힘이 없었고, 서민들은 각종 차별주의적인 제도에 속박되어 권익이 보장되지 못하고 억압당하여 억울함에 한이 맺혔으니, 최제우는 이러한 세상을 구하고자 먼저 보국안민(輔國安民)과 포덕천하(布德天下)의 기치를 내걸고 구국제민(救國濟民)을 표방하는 한편, 당시 외래 종교인 서교(西敎)에 상대되는 동학(東學)을 창시하여 외세에 대한 저항 의식을 고취시키고 국가와 민족을 구하기 위한 정신을 배양했다.
그리고 시천주(侍天主) 사상은 한민족의 전통적인 제천신앙(祭天信仰)의 핵심인 한울님(하느님)을 자기 자신 속에서 찾아 자신과 세계를 구하자는 신앙이며, 기존의 낡은 세계와 질서를 근본부터 부인하는 개벽사상(開闢思想)이었다.
이러한 사상이 농민, 천민, 유생에 이르는 광범위한 계층에 ‘후천 개벽 세상’이 도래됨을 공포하며 교세가 확장되어 나갔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차별이 없는 평등세상을 선포한 후천(後天) 개벽설(開闢說)은 억압받던 기층 농민이나 천민들에게 열광적인 희망을 주었던 반면, 상류층의 양반계급과 조정에서는 위협의 대상이었다.
그 와중에 동학은 1861년 6월부터 포교활동을 시작하여 삽시간에 수많은 신도들을 확보했고, 동학세력의 교세가 확장되어 나가자 당시 혼란한 시국에 빠져 있던 조정에서는 위협을 느끼고 박해를 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최제우는 1862년 9월 경주관아에 의해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간신히 풀려나오게 된다. 그 후 그는 포교활동이 순탄치 않게 되자 교통(敎統)을 이을 후계자 선정과 교의(敎意)를 정립하기 위한 경전(經典) 편술(編述)과 동학의 기본 조직인 접주제(接主制)를 실시하고 각 지방에 접소(接所)를 두어 관장하게 하는 등 대폭 활동의 방향을 정비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 14개 접소에 접소마다 교인이 3,000명에 달했다. 그 해 7월 제자 최시형(崔時亨)을 북접(北接) 대도주(大道主)로 삼고 8월 14일 교통(敎統)을 계승시켜 교주(敎主)로 삼았다.
그러나 최제우는 지방 접소를 순회하다가 1863년 12월 9일에 경주 용담정에서 다시 체포되었다. 그리고 갑자년(甲子年, 1864년) 3월 10일에 좌도난정(左道亂正)의 죄목으로 대구(大邱) 장대(將臺)에서 사형되었다. 이 때 최제우의 나이 41세였다.
최제우는 사형 당시, 북향사배(北向四拜)를 하고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는데 그의 유언은 당시 처형장에 모였던 동학교도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더디도다 더디도다
만고(萬古) 없는 무극대운(无極大運)
팔 년이 더디도다.
전 사십은 나려니와
후 사십은 누구련고.
최제우의 유언대로 최제우가 죽은 지 8년 후인 신미년(辛未年, 1871년)에 전라북도 고부군 우덕면 손바래기 마을에서 한 신인(神人)이 탄강하게 되었으니 바로 이 분이 천 • 지 • 인 삼계의 主宰者(주재자)요, 개벽장(開闢長)이신 강증산(姜甑山) 성사(聖師)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분은 39세를 일기(一期)로 화천(化天)하시었다. 최제우는 41세로 타계하고 증산께서는 39세로 하늘로 돌아가시니 전 사십은 자신을 지칭하는 말이요, 후 사십은 곧 강증산 성사를 가리키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의 유언은 8년 뒤에 오시는 그분이 곧 무극대운을 열어 그가 하지 못했던 광구창생을 하신다는 예언이었던 것이었다.
최제우의 말을 좀더 인용하여 보면
“나는 도시 믿지 말고 한울님만 믿었어라. 나 역시 바라기는 한울님만 믿고”라는 『용담유사』「교훈가」중에서 말하였듯이 하느님이 계심을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 말 저 말 다 던지고 한울님만 공경하면 아 동방 삼년괴질 죽을 염려 있을소냐”라고 『용담유사』「권학가」중에서 일러주고 있다. 또 “어화 세상 사람들아 무극지운 닥친 줄을 너희 어찌 알까보냐, 무극대도 닦아내니 오만년지운수로다”라고『용담유사』「용담가」중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하느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무극대운을 열어 주심을 알 수 있다.
이마두와 진묵이 동양에 와서 지상천국을 열려고 하였으되 실패하였던 가장 큰 원인은 유교의 폐습이었다.
유교의 폐습이란 반상구분, 적서차별, 남존여비와 같은 강권을 가진 자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옹호하기위해 규정지어 놓은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제도를 말한다.
이러한 악습이 있는 한은 결코 개벽(開闢)은 이루어 질수가 없고, 하늘의 덕(德)이 만천하에 펼쳐 질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썩은 유교의 악습은 하루 속히 일소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최제우 역시 유교의 전헌(典憲), 즉 유교의 가르침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하였다.
그의 저서인『동경대전』「수덕문(修德文)」을 보면 이러한 내용들을 볼 수 있다.
元亨利貞 天道之常 惟一執中 人事之察 故 生而知之 夫子之聖質
원형이정 천도지상 유일집중 인사지찰 고 생이지지 부자지성질
學而知之 先儒之相傳 雖有困而得之 淺見薄識 皆由於吾師之盛德
학이지지 선유지상전 수유곤이득지 천견박식 계유어오사지성덕
不失於先王之古禮
부실어선왕지고례
원 • 형 • 이 • 정은 천도의 떳떳한 것이요, 오직 한결같이 중도를 잡는 것은 인사의 살핌이니라. 그러므로 나면서부터 아는 것은 공부자의 성인 바탕이요, 배워서 아는 것 은 옛 선비들의 서로 전한 것이니라.
비록 애써서 얻은 천견박식이라도 다 공자님의 성덕으로 된 것이요 선왕의 옛 예의를 잃지 아니한 것이니라.
胸藏不死之藥弓乙其形 口誦長生之呪三七其字 開門納客其數其然
흉장불사지약구을기형 구송장생지주삼칠기자 개문납객기수기연
肆筵設法其味其如 冠子進退若有三千之班 童子拜拱倚然有六七之
사연설법기미기여 관자진퇴약유삼천지반 동자배공의연유육칠지
詠 年高於我 是亦子貢之禮 歌詠而舞 豈非仲尼之蹈
영 연고어아 시역자공지례 가영이무 기비중니지도
가슴에 불사약을 지녔으니 그 형상은 궁을이요, 입으로 장생하는 주문을 외우니 그 글자는 스물한자라. 문을 열고 손님을 맞으니 그 수효가 그럴듯하며, 자리를 펴고 법을 베푸니 그 재미가 그럴듯하도다.
어른들이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은 마치 삼천제자의 반열같고, 어린이들이 읍하고 절하는 것은 육칠의 읊음이 있는 것 같도다.
나이가 나보다 많으니 이 또한 자공의 예와 같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니 어찌 공자의 춤과 다르랴.
이와 같이 최제우가 유교의 전헌(典憲)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 유교의 폐습을 개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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