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미륵불출현을 현시한 관촉사(灌燭寺) 은진미륵
⑴ 미륵불 현시의 계시
관촉사(灌燭寺)는 논산 시내에서 3km 남짓 떨어진 반야산 기슭이 병풍을 두른 듯 감싸고 있는 산 중턱에 있다.
고려 7대 목종 9년(1006년)에 완성되었는데, 찬란한 서기(瑞氣)가 삼칠일(21일) 동안 천지에 가득하여 찾아오는 사람으로 인해 저잣거리를 이룰 만큼 북적댔다고 하며, 심지어 관촉사 석불의 이마에서 나오는 황금빛이 하도 밝아 송나라의 지안대사가 빛을 따라 찾아와서 예불을 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중국의 가주(嘉州)에도 큰 석불이 동쪽을 향해서 서 있는데, 동과 서에서 광명이 동시에 서로 통한다고 하여 절 이름을 ‘관촉사(灌燭寺)’라 지었다고 한다.
관촉사(灌燭寺) 은진미륵불(恩津彌勒佛)
⑵ 은진미륵불(恩津彌勒佛)의 유래
관촉사(灌燭寺)에 있는 石佛(석불)은 높이 18.12m, 둘레 9.9m, 귀의 길이 3.3m, 관 높이 3.94m의 국내 최대 석불이다.
관촉사(灌燭寺) 미륵불상은 고려 초기 석불의 대표적인 것으로, 이 시기 충남·전북 지역에서는 기둥같이 큰 몸체에 관을 쓴 미륵보살의 조성이 유행되어 고려시대 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石佛(석불)들은 비사실적이고 도식화된 모습으로서 고려 불상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37년이라는 오랜 세월에 걸쳐 세워진 이 석불은 자연의 화강석 암반 위에, 허리 아래 부분과 상체와 머리 부분을 각각 조각하여 연결하였다. 머리에는 원통형의 높은 관을 씌웠고, 그 위에는 갓 모양의 네모난 보개가 표현되었는데, 네 귀에 이색적으로 풍령(風鈴)이 달려 있다. 체구에 비하여 큰 얼굴은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데, 언뜻 보기에도 온화하고 너그러운 미소를 머금은 모습이 예사 부처님과는 다름을 알 수 있다.
미륵전에서 거대한 은진미륵불이 일직선으로
또한 관촉사(灌燭寺)에는 석가불상이 따로 모셔져 있지 않고, 특이하게도 彌勒殿(미륵전) 뒤쪽 벽에 유리창을 두어 미륵불(彌勒佛)이 바로 쳐다보이게 하였다. 유리창 너머로 巨大(거대)한 은진미륵불(恩津彌勒佛)의 온화한 모습이 보인다.
이처럼 미륵전에서 거대한 은진미륵불(恩津彌勒佛)이 일직선으로 바라다보일 수 있도록 한 것은 다른 곳에서는 잘 볼 수 없는 특이한 배치이다. 그리고 이 은진미륵불(恩津彌勒佛)에는 佛像(불상) 造成(조성)과 관련한 특이한 유래가 전해오고 있다.
고려 4대 광종 19년(968년)에 사제촌의 한 노파가 고사리를 뜯으러 반야산에 갔는데, 어디서인지 어린애 울음소리가 들리므로 그곳에 가보니 큰 돌이 땅에서 솟아올라 있었다.
큰 돌이 땅에서 솟아 오른 모습
노파는 자신의 사위에게 이 사실을 알리어 관가에까지 보고되었고, 왕에게까지 상주 하였던바 신하들과 의견을 나누니 이는 석불이 될 조짐이라는 의견이 일치되어 혜명대사에게 명해 불상을 세우게 하였다.
혜명대사는 이에 100여 명의 석공들을 이끌고 내려와 대역사를 시작하였다.
큰 돌을 운반 하는 지혜
우선 솟아오른 바위에 부처님의 아랫부분을 조각하고 다시 1,000여 명의 장사로 하여금 큰 돌을 운반케 하니 그 선두가 연산땅 남쪽 20리에 이르렀으므로 그 마을을 쇠머리라 하였다.
두 동자가 강가에서 흙장난 하는 모양
이 돌에다 부처님의 윗부분을 조각하였다. 그러나 그 규모가 너무나 거대하여 사람의 힘으로는 세울 수 없어 고심하던 차, 하루는 혜명대사가 사제촌을 거닐고 있을 때 두 동자가 강가에서 흙장난을 하고 있었다.
큰 돌 하나를 세우고 모래로 덮은 뒤 굴려 올려서 가운데 것을 세우고 또 모래로 덮은 뒤 굴려 올려서 맨 윗부분을 세운 뒤 둘레의 모래를 파내니, 부처 모형만 남는 것이었다.
빛이 발산되어 온 누리에 비추었다.
이에 스님은 크게 깨달아 불상 아랫부분을 흙으로 덮고 윗부분을 차례로 올려 세워 무사히 일을 끝낼 수 있었다. 불상을 완성하자 큰 비가 내려 존상을 씻어내었으므로 존상은 맑고 고왔으며, 상서로운 기운이 삼칠일(21일) 동안이나 주위에 서리고 눈썹 사이의 玉毫(옥호)에서 빛이 發散(발산)되어 온 누리에 비추었다.
이로부터 四方(사방)에 所聞(소문)이 나서 여러 사람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경배하는 자가 市長(시장)巨利(거리)와 같아 그 앞 냇물을 視診(시진)이라 하였다. 중국의 지안이란 스님이 이 빛을 따라 찾아와 이르기를, 중국 가주 땅에도 큰 불상이 동쪽을 향하여 서 있는데 그 광채가 때를 같이하여 서로 응하였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관촉(灌燭)이라 이름 하였다.
⑶ 실제 미륵은 한 분이이다.
토속적이고 자비스런 모습에 특이한 조성 유래를 가진 은진미륵이 서 있는 관촉사는, 박 우당께서 과거 태극도를 떠나 수리사로 49일 공부를 들어가시기 전에 전국의 미륵사찰을 둘러보실 때 다녀가신 곳이다.
박 우당께서 내장산 백양사를 거쳐 개태사 미륵삼존불과 나반존자를 참관케 하신 후, 관촉사 은진미륵을 참관케 하시고자 한 것은 분명 삼존불 중 밝혀지지 않은 한 분이 은진미륵불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미륵삼존불(彌勒三尊佛)이라고 하여 세 분 모두 미륵인 것은 아니다. 세 분 중 한 분만 미륵이고 두 분은 다른 이름이 계시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가장 위주로 하는 분의 명칭을 앞에 붙여서 ‘무슨 삼존’이라고 칭하고 있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는 삼신(三神) 중 미륵불(彌勒佛)을 위주로 하므로 미륵삼존불이라고 칭하지만, 실제 미륵은 한 분이고 두 분은 다른 이름이 있는 것이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미륵삼존불 중 한 분은 반드시 ‘미륵불’인 것이다. 그런데 관촉사 은진미륵불과 같이 독불(獨佛)로 모셔질 경우에 이분은 어김없이 미륵불인 것이다.
박우당 도전 재세시, 미륵삼존불 중 증산성사는 공사를 맡은 설계자로 밝혀졌고, 또 정산께서는 得道(득도)를 하였다고 했으니 시행업자로 낙찰 받은 사람으로 밝혀졌고, 우당께서는 시공자로서 직접 집을 지은 가람이다. 밝혀지지 않은 마지막 한 분의 정체가 바로 집을 지어달라고 공사를 맡긴 주인으로‘미륵(彌勒)’이심을 관촉사 은진미륵불을 보면 깨우칠 수 있는 것이다.
고 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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