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법(眞法) 진리

[스크랩] ● 문수보살(文殊菩薩) 도수

고도인 2018. 1. 3. 12:12

문수보살(文殊菩薩) 도수

 

전경 예시 19

 

모친에게 장삼을 입혀 자리에 앉힌 다음에

쌀 서말로 밥을 지어서 사방에 흩으시고

문수 보살의 도수를 보시니라.

 

증산도 도전 564

 

* 문수보살 도수를 보심

 

1. 초여름에 상제님께서

손바래기 본댁에 가시어 유덕안에게 이르시기를

"백미 서 말과 백지 세 권을 사 오라."

하시고 그 쌀로 밥을 짓게 하시니라.

 

2. 그 날 밤 마당에 덕석을 깔고

청수 한 동이를 떠 놓으신 뒤에

다른 가족들은 밖을 내다보지 못하게 하시더니

 

3. 성모 권씨께 장삼을 입혀 청수 앞에 앉히시며

"문수보살 도수를 본다." 하시고

 

4. 지어 놓은 밥을 손에 쥐고

사방에 던지시며 주문을 읽으시니라.

 

5. 이튿날 아침에 가족들이 마당에 나가

아무리 찾아보아도 밥알 하나 보이지 않거늘

모두 신기하게 여기니라.

 

6. 상제님께서 사흘을 더 머무르시고

"회문산을 거쳐 모악산으로 가노라."

하시며 집을 떠나시니라.

 

증산성사께서 문수보살 도수를 보셨는데

문수보살 도수를 보셨을까?

참으로 난해(難解)한 대목이다.

 

보살(菩薩)’, 이라 하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전경 교운 219]에 보면

 

원시의 모든 신성과 불과 보살이 회집하여

인류와 신명계의 이 겁액을 구천에 하소연하므로

 

하고 보살에 관한 언급(言及)이 있다.

보살(菩薩)은 불교에서 신앙하는 신명으로

이 신명들이 어떤 분들인지

아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보살(菩薩):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미루고

속세에 머물 것을 자원하여 일체의 중생을

먼저 깨달음의 세계로 이끄는 존재.

보리살타[菩提薩]’의 준말로

불교에서는 부처 다음가는 성인이며,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미륵보살 등이 이에 속한다.

대승불교에서는 누구든지 성불(成佛)하겠다는

서원을 일으켜 보살의 길로 나아가면

그 사람이 바로 보살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면 보살에 대한 의미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보살은 신명을 지칭하는 말이지만

불교에서의 보살(菩薩)이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보디삿트바(Bodhi-sattva),

팔리어로는 보디삿타(Bodhi-satta)라는

말의 음을 모사한 것에서 유래된다.

 

이 원어를 정확히 음사하여 라고 쓰기도 한다.

그래서 원어에서 깨달음을 뜻하는

보리가 로 축약되고,

생명체 즉 중생을 뜻하는

살타가 로 축약되어

보살이라 통칭한 것이라고 한다.

 

곧 보살은 완성된 존재인 부처가 되려고

마음을 먹고 부처의 가르침을 따라서

수행하는 중생을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후 대승불교가 발전하면서

수없이 많은 생을 거치며 선업을 닦아

높은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른

위대한 존재를 뜻하는 말로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

 

불교 경전에는

전생의 서가여래부처님을

석가보살이라 칭하고 있다.

서가여래부처님의 전생담인

자타카(Jataka)’에서 석가보살은

갖가지 선행과 공덕을 쌓고

당시 부처인 연등여래(燃燈如來)로부터

장차 부처가 될 것이라는 수기(受記)를 받는다.

 

석가보살의 생애를 본받아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원(),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원() 등을 세워

상구보리(上求菩提)ㆍ하화중생(下化衆生)

실천 수행하는 길이 보살도(菩薩道)이다.

 

보살이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 실천해야 할

보시(布施), 인욕(忍辱), 지계(持戒),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

여섯 가지 덕목이 있으니

이를 육바라밀(六波羅蜜)이라 한다.

 

육바라밀의 의미를 살펴보면

첫째, 보시는

자비심으로 다른 이에게

조건 없이 베푸는 것을 말한다.

보시에는 물질을 베푸는 재시(財施),

가르침을 베푸는 법시(法施),

두려움이 사라지게 해주는 베풂인

무외시(無畏施)가 있다.

 

둘째, 인욕은

아무리 곤욕을 당하더라도 참고 견디어

마음을 평정시키는 노력을 말한다.

사람에 대해 참는 것을 생인(生忍)이라 하고,

추위나 더위 또는 개인의 질병같이

사람 아닌 것에 참는 경우를 법인(法忍)이라 한다.

 

셋째, 지계는

불교 윤리인

()와 율()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넷째, 정진은

용맹스럽게 착한 법을 닦고

악한 법을 끊는 마음의 작용이다.

게으름을 버리고 부지런한 습성을 기르는 등의

수행을 통해 수도의 완성을 위해

한걸음, 한걸음 실천하는 과정이다.

 

다섯째, 선정은

직관, 정념, 관찰을 통해 자신을 계발(啓發)하여

사물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보고 궁극의 진리인

열반을 깨닫는 지혜의 성취로 이르는 길이다.

 

여섯째, 지혜는

앞의 5가지 바라밀의 귀결처이자

그 바탕으로 일체의 집착과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 육바라밀의 수행과 관련해 가장 기본은

보살의 굳은 마음가짐 즉 원행(願行)이다.

자신의 성불인 자리(自利)

중생의 구제인 이타(利他)를 위해

모든 보살이 일으킨 원행이

후세에 구체화한 것이 바로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

모든 번뇌를 끊고, 모든 가르침을 배우고,

불도를 이루겠다는 사홍서원(四弘誓願)이다.

 

보살은 사홍서원을 뿌리 삼아

육바라밀을 실천하며 기나긴 세월을 수행하는데

그 수행의 경지에 따라 10단계로 구분된다.

 

이를 십지(十地)라 하며

환희지(歡喜地)ㆍ이구지(離垢地)ㆍ발광지(發光地)

염혜지(燄慧地)ㆍ난승지(難勝地)ㆍ현전지(現前地)

원행지(遠行地)ㆍ부동지(不動地)ㆍ선혜지(善慧地)

법운지(法雲地)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보살의 계를 받고서

보살행을 시작한사람은 초지보살(初地菩薩)이며

도의 높이와 공덕에 따라 경지가 올라간다.

8지보살 이상의 경지에 이르면

인간의 경지를 벗어나 몸도 마음도 아무것도

걸릴 것이 없는 대보살의 경지에 이른다고 한다.

 

그리고 문수보살(文殊菩薩),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지장보살(地藏菩薩),

보현보살(普賢菩薩) 등은 대보살이라 하며

이미 10지를 초월하여 능히

부처의 경지를 이루고도 남으나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원()을 세우고

보살의 위()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한다.

 

* 문수보살은 서가여래부처 이전에 이미

성불한 부처로 부처의 단계에 들어선 분이다.

중생을 구제하려는 방편으로

보살의 모습을 빌어 나타나며 지혜의 화신이다.

 

* 관세음보살은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손이 있어

천수천안관자재보살(千手千眼觀自在菩薩)이라는

명호(名號)를 가지고 있으며

중생의 어려움과 번뇌를 모두 풀어주는

대자대비(大慈大悲)한 보살이다.

 

* 보현보살은 자비행을 하거나

진리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을 옹호하며 그들에게

힘을 주며 가르침을 베푼다.

 

*지장보살은 수억 겁 전에

지옥이 빌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라는

원을 세우고 육도를 윤회하는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성불할 것조차도 포기하고

지옥은 물론 육도를 두루 다니시면서

중생들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그 밖에도 불법을 힘으로 나타내어 보여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천둥 치는 소리가 나서

마귀들이 몸을 떤다는 힘의 화신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등과 함께

무량수의 보살들이 있다.

 

이처럼 불교에서의 대보살들은

대자대비한 마음과 우리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신통력을 지닌 분들로 중생 구제의 대원을 세우고

이를 위해 정성과 노력을 다하였다.

 

그렇지만 증산성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신명은 비겁에 쌓이고

창생은 재겁에 빠지고

세상은 진멸할 지경에 다다르게 되어

보살들의 서원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다.

 

천지신명들이 상제님(증산)이 아니면

천지를 바로 잡을 수 없다 하므로

증산께서는 괴롭기 한량없으나

창생을 위해 천지공사를 맡으신 것이다.

 

그런데 증산성사께서

문수보살 도수를 보신 이유는

또 다른데 있는 것이라고 본다.

문수보살하면 지혜의 보살로 알려져 있다.

즉 도()를 닦고 수행을 한다면

지혜(智慧)로서 깨달으라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 친구 돈 믿음 모든 것이 다 중요하지만

보다 깊은 내면에 들어가 살펴보면

지혜(智慧)’가 가장 중요한 게 아닐까.

 

친구를 사귀는 데도 지혜가 있어야 하고,

돈을 버는 데도 지혜가 필요하며,

가정을 원만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도

지혜는 있어야 된다.

지혜롭게 행동하는 사람이

남에게 믿음을 주지 못할 리 없고,

살아가며 부닥치는 각종 어려움을 극복할 때도

지혜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물론 지혜지식과는 다르다.

지식은 배워서 아는 것이지만

지혜는 깨달아서 얻는 것이다.

이를 깨달음의 지혜라 말한다.

 

문수보살은 바로

이 지혜를 상징화한 보살이다.

문수보살은 지혜를 상징하기에,

문수보살은 불교의 핵심적인 보살이다.

즉 수도(修道)의 본질은 깨달음()이기에

문수보살 도수를 보신 것이 아닌가 한다.

 

다음은 제생(濟生) 43절에

지혜로써 깨달아야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증산성사께서 전주 이치안의 집에

고견 원려 왈지(高見遠慮曰智)

의 글을 써놓으셨도다.

 

높이 보고,

멀리까지 생각하는 것을 일컬어 지혜라 한다.

 

오감(五感)에 매어있는 인간이

하느님의 거대한 의지를 깨닫기는

참으로 난해하다.

 

새도 적당히 커야 크다고 하지

만일 어떤 새의 크기가

날개 끝에서 끝까지 삼천리(1,200km)라고

가정한다면 그 새의 크기를

인간의 잣대로써는 잴 수도 없고

아예 볼 수도 없는 것과도 같다.

 

하지만 인공위성의 힘을 빌린다면

그 형태를 파악할 수 있듯이

대우주를 통솔하시는 하느님의 섭리역시

인공위성과 같은 전혀 새로운

차원의 법칙을 안다면

그분의 운행경로를 예상해볼 수 있지만

그렇지 않고 단순히 자기 육안(肉眼)

통해서만 보려고 고집한다면,

바로 머리위에 그 새가 날고 있어도

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 개미들이 쌀알 하나를 옮기려고

온갖 힘을 쏟는 것이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극히 미미해보이지만 개미들로써는

매우 과중한 업무량이듯,

하느님의 입장에서 보실 때는

인간세계의 역사 또한

개미들의 그것과 다름이 없지 않겠는가.

 

만일 개미 수십 마리가 벌레를 옮기려고

온 힘을 다해도 안 될 때,

이를 보다 못한 인간이 측은한 마음으로

그 벌레를 개미들의 집 앞에 하니 갖다놓는다면

힘없는 개미들로써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불가사의함이라고 느끼듯이

하느님의 권능을 인간의 잣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비유를 생각하며 근세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거대한 역사의 전환을 생각해본다면

하느님의 거대한 손이 인간세계에

작용했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시리라.

그래서 아주 높은 곳에서도 보고

멀리서도 볼 줄 아는 것을 知慧(지혜)라고 한다.

 


                            쌍계사 문수보살

출처 : 고도인의 해인海人으로 가는 카페
글쓴이 : 고도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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