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법(眞法) 진리

내가 산 제사를 받았으니 이후에까지 미치리라

고도인 2015. 1. 5. 14:31

내가 산 제사를 받았으니 이후에까지 미치리라

 

전경 교운 137

증산성사께서 차경석의 집에 유숙하시니

종도들이 모여와서 증산성사를 배알하였도다.

이 자리에서 증산성사께서

양지 온 장에 사람을 그려서 벽에 붙이고

제사 절차와 같이 설위하고 종도들에게

그 곳을 향하여 상악천권(上握天權)하고

하습지기(下襲地氣)식으로 사배하면서

마음으로 소원을 심고하라고 명하시니라.

종도들이 명하신 대로 행한 다음에

증산성사께서도 친히 그 앞에 서서 식을 마치시고

너희는 누구에게 심고하였느냐고 물으시니라.

어느 종도 한 사람이 선생님께 심고하였나이다

말씀을 올리니 증산성사께서 빙그레 웃으시며

가라사대 내가 산 제사를 받았으니

이후에까지 미치리라하시고 자리로서는

띠자리가 깨끗하니라고 일러주셨도다.

 

상악천권(上握天權), 하습지기(下襲地氣);

위로는 하늘의 권위를 쥐고,

아래로는 땅의 기운을 끌어당긴다.

 

공사 311

그 후에 응종이 증산성사의 분부를 받고

식혜 아홉 사발을 빚고 태인 신 경원의 집에 가서

새 수저 한 벌을 가져오고 단지 한 개를 마련하여

증산성사께 드리니 증산성사께서

식혜를 단지에 쏟아 넣으시니 단지가 꼭 차는지라.

또 증산성사께서 양지와 백지와 장지를

각각 준비하여 놓으시고 가라사대

비인복종(庇仁覆鍾)이 크다 하므로

북도수를 보노라. 북은 채가 있어야하나니

수저가 북채라. 행군할 때 이 수저로 북채를

하여야 녹이 진진하여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양지와 백지와 장지를 각각 조각조각

찢으시고 조각마다 글을 써서 단지에 넣고

그 단지 입을 잘 봉하여 깨끗한 곳에 묻으셨도다.

 

단지 속에 식혜 아홉 사발을 부어 넣으신 것은

9(九數)가 대두목을 지칭하는 수로써

대두목을 단지 속에 덮어두신 것이다.

그 단지 속의 식혜에 양지, 장지, 백지를 넣어서

덮어두신 것은 세 분은 일체로서

상제님의 일을 하신 것이고 대두목이 진짜

옥황상제님의 정체를 밝혀서 원위에 모셔지면

成道(성도)가 되어 진법이 나오는 이치를

대두목에게 맡겼다는 것이다.

비인복종(庇仁覆鍾)은 씨를 항아리에 넣어

잘 덮어 깨끗한 곳에 묻어 두었다는 것으로,

씨는 한 알이 자라서 여러 알로 벌여 나오므로

대두목 한 사람에게 도()를 통()하게 하여

묻어 놓으면 이것이 장차 12천 도통군자로

번창 하여 나오도록 하신 것이다.

즉 대두목을 숨기고 덮는 공사이다.

 

식혜 아홉 사발;

9(九數)는 대두목을 지칭하는 수이다.

식혜는 감주라고도 한다.

감주를 한문으로 ()이며

의원 의. 단술 의. 라고 한다.

 

즉 대두목은 의원(醫員)으로

창생들을 병겁으로 부터 구제하여

다스려나가는 의통자(의통령)이다.

 

양지(洋紙);

증산성사께서 양지온장에

사람 형상을 그리고 산제사를 받으셨다.

산제사를 받았다는 의미는

죽으면 소용없고 살아서 극락도 있고 선경도

있는 것이지 죽으면 다 소용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증산, 정상 우당은 화천하고 안 계시는데

어떻게 운수를 주고 도통을 베푼단 말인가.

 

분명히 전경에 보면

우리 일은 남 죽을 때 잘 살자는 일이요,

남 잘살 때에 부귀와 영화를 누리자는 일이라고

했는데 어찌 죽은 자한테 운수를 기다리는가!

 

장지(壯紙); (두꺼운 한지로 인화지를 뜻한다.)

조정산께서 사진을 찍어

영대에 손수 봉안하시고 산제사를 받으셨다.

 

백지(白紙); 상도 박성구 선감이

백지에 박우당 용안을 그려 올라갔다.

그리고 납향치성 때 산제사를 올렸다.

 

비인복종(庇仁覆鍾);

(덮을 비, 씨 인, 덮을 복, 항아리 종)

항아리 속에 씨앗을 넣어 덮어 두셨다.

비인복종이 크다함은

항아리에 묻어둔 가 크다는 것이다.

이 씨가 싹을 틔워서 나오게 되면

대두목이 세상에 나와 일을 하게 되는데,

오선위기에서 주인노인은

분명히 한사람이라고 했는데

그 주인노인 즉 진짜 옥황상제님의

정체를 밝혀서 모시고 진법을 완성시켜

이 법이 세계만방으로 퍼져나가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증산성사께서 북도수를 보셨는데

비인복종(庇仁覆鍾)에서 종()

항아리 종이지만 쇠북 종도 된다.

북을 치면 소리가 난다.

즉 항아리 속에 식혜를 아홉 사발 넣고 식혜 속에

양지, 백지, 장지를 각각 조각조각 찢어서 넣어

두었으므로 증산, 정산, 우당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 덮어 둔 항아리가 열리는 날에는,

증산, 정산, 우당은 아니라는 소리가 난다.

즉 종을 쳐서 소리가 나게 되면

감추어 놓았던 진법이 완성되고

이 법이 세계만방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북을 칠 때 북채는 수저인데,

수저는 태인(泰仁)에서 가져왔다.

그리고 태인은 큰 씨앗이므로 대두목을 뜻한다.

즉 대두목은 태을주신명으로 太人(태인=泰仁)이다.

 

또 수저의 형태를 보면 숟가락은

‘9’자이고 젓가락은 ‘11’자 모양이므로

‘9’는 대두목의 수요,

‘11’은 성도진인수(成道眞人數)로써

11 이란 수리(數理)

10 인 무극(無極)

1 태극(太極)의 합수(合數)로서,

이것은 이른바 정역(正易)에서 말하는

11 귀체설(歸體說)이 된다.

 

고로 (1)(10)()하고

(10)(1)()하여

十一(11)一體(일체)()하니

역시 ()()을 겸하는 것이다.

(9)를 쓸 때는 5가 황극이나

十一歸體(11귀체)에는 (6)이 중앙이다.

11은 천지창조주 ()이다.

그리고 대두목은 9()이다.

         

                                태을주는 밥숟가락

                        (숟가락과 닮은 꼴 = 9수이다)

 

 

그러므로 대두목이

북채(태을주)를 쥐고 이 소리를

세계만방으로 퍼져나가게 한다는 의미이다.

이 북채는 종()을 치는 수저인데

수저는 태을주이다.

 

수저란 단순히 밥 먹는

유형의 도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태을주는 밥숟가락이다.

여의주와 같은 태을주가 있다고 해도

내가 주문하지 않으면 효험이 없다.

또한 수저는 밥을 먹는 도구로써

상제님 모시는 법을 전하고 나가면

()이 풍성하여 떨어짐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

 

전경 예시 89

 

증산성사께서 화천하시기 전 김형렬에게

글 한 수를 읊어주시니 다음과 같도다.

 

後人山鳥皆有報 勸君凡事莫怨天

후인산조개유보 권군범사막원천

 

박우당 재세시 쌍계사를 순행할때에

쌍계사의 내력을 잘 알아두라 했다.

쌍계사는 어떤 내력이 있길래

잘 알아두라고 했을까?

 

쌍계사는 종통에 관한 내력이 숨어 있다.

종통 부분에서 오조(五祖) 홍인(弘忍)

혜능(慧能)의 그릇을 보고 내심 기뻐하면서도

모르는 척하며 마음을 감추고

혜능의 행보를 관찰하였듯이,

도전 박우당께서도 이미 종통을 이어갈

그 사람을 발견하고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 19865

두 번째로 쌍계사를 가시기 전에 마음에서

이미 내정하셨다고 보이는데,

한편 이것은 그 전 해인 198511월에

전경예시(豫示)

후인(後人)이 산조(山鳥=)’라는 구절을

삽입케 하신 점으로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後人山鳥皆有報 勸君凡事莫怨天

후인산조개유보 권군범사막원천

 

다음 사람은 산조(山鳥=)라고 모두에게 알리노니

제군들이여, 범사에 하늘을 원망치 말라.

 

리고 이후 19881129일에는

전체 임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산조(山鳥)의 의미인 섬 ()’가 들어가 있는

상도(上嶋)라는 호를 박성구(朴成九) 선감에게

내림으로써, 박우당(朴牛堂) 도전(都典)을 이을

다음 사람인 후인(後人)’을 확정지으셨던 것이다.

박우당 도전께서는 대순진리회를 창설하시고

1995년 화천(化天)하실 때까지

800여 개 방면 호를 내리셨지만,

전체 임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호를 내린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섬 도()

들어있는 호는 상도(上嶋)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같은 날 납향치성(臘享致誠)

올리라고 발표하셨다.조정산성사께서도

납향치성을 한 번 받으시고 화천하셨다.

납향치성을 각 방면 회관·회실에서 올리도록 하라.

납향치성은 제후가 천자(天子)께 드리는 치성이다.

납평일(臘平日)은 동지(冬至)로부터

셋째 미일(未日)이고,

이날 치성을 납향치성이라 한다.

납향치성은 일반적인 치성의 관례와는 달리

지방의 각 방면 회관·회실에서

방면 책임자의 집례 하에서 올리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조정산께서 천자로서 산제사

납향치성을 받으셨듯이,

박우당 당신도 천자로서

산제사인 납향치성을 받으시겠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바로 석가여래가 영대(靈臺)

원위(元位)에 봉안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3,000년으로 그 운()을 다한 석가불이

모셔져 있는 것도 그러하거니와,

더욱이 원위는 삼신(三神)의 자리인데

석가여래가 앉아 있는 것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었다.

 

삼신(三神)을 불교에서는

미륵삼존불(彌勒三尊佛)이라 하는데,

석가불이 미륵삼존불에 속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대의 원위에는

이미 그 운이 다한 석가불을 대신하여

당연히 미륵불이 봉안되었어야 맞는 이치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자리에는 이미 운을 다한

석가여래가 아직도 봉안되어 있는 것이다.

과거에 도인들이 이러한 의문을 가질 때

어떤 임원들은 앞으로 석가여래 자리는

도전님 자리이다라고 말하는 자도 있었으나,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시점에서

그것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이며,

또 누가 그 일을 실행시킬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자신의 수도생활에 종말을

고할 수도 있는 문제이기에 확실한 깨달음이

없이는 누구도 실행치 못할 일이었다.

그런데 도전께서는 지금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박우당께서는 임원들이

식사하러 내려올 때나 올라갈 때면,

항상 그 길목인 숭도문(崇道門)에 납시어

무엇인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듯이 앉아 계셨다.

상도(上嶋) 박성구(朴成九) 선감은

이러한 박우당의 의중을 궁금히 여기던 중,

어느 날 영대(靈臺) 원위(元位)의 석가여래 자리에

박우당 도전(都典)을 모셔야 함을 깨닫고

강릉선감 박춘균을 만나 의논하였다.

영대의 석가여래 모신 자리에

도전님을 모실 도수(度數)가 왔으니

뜻을 같이하자.”상도 박성구 선감의 말을 듣고 난 박춘균은

깜짝 놀라면서 참여치 않겠다고 하였다.

도전께서 나를 죽으라고 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나는 빠지겠다!”

결국 임원들과 의논해서 될 일이 아님을 깨달은

박성구는 1115(양력 1231),

방면 수도인 왕재상을 불러 박우당 도전의

존영(尊影)을 그릴 것을 지시하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 이후로부터

박우당께서는 숭도문으로 납시지 않으셨고,

또한 이로부터 3일이 지난 이듬해 13,

전 임원들에게 지방으로 내려가라는 지시와 함께

영대(靈臺) 봉안일을 경오년(1990) 1124

(양력 199119)로 발표하셨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었다.

박우당 (朴牛堂) 도전(都典)과 뜻이 통한 것을

내심 확인한 박성구 선감은 확신을 가지고

박우당 존영을 완성한 후,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박성구 선감은 19901120

(양력 199115), 서울 중곡동 상도방면

연락소에서 도전님 존영(尊影)에 잔을 올리고,

4배를 드리고 치성을 모신 후,

방면 임원들을 모아 도전님을 영대에

모실 도수(度數)가 왔다는 취지를 설명하였다.

이것에 대해 방면 임원들은

모두 이치(理致)에 합당하다고 수긍하였다.

드디어 영대 봉안 이틀 전날인

1122(양력 199117),

상도(上嶋) 박성구(朴成九) 선감 외 6명의 임원들

(최해경·김진원·이정지·유기혁·김재목·이태경)

아침 일찍 박우당 도전의 존영을 모시고

여주도장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이것이 천운이었는지,

이날은 아침 일찍부터 폭설이 쏟아져

도장에서는 종사원들이 제설작업을 하느라

평소와는 달리 도장 문을 전부 열어놓고 있었다.

 

때문에 존영을 모신 차가 정문 초소의

검문 없이 바로 도장 내부에 있는

내정 앞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박성구 선감은 최해경과 함께

박우당께서 계신 내정(內庭)으로 올라갔는데,

박우당께서 아래 내정에 계신다하여

존영을 차 안에 두고

아래 내정으로 내려가 도전님을 뵈었다.

박우당을 뵙고 그 자리에서

박성구 선감은 4배를 드렸다.

박우당께서는 한복 차림으로 앉으셔서 4배를

다 받으시고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으셨다.

박성구 선감은

존영을 모시고 왔습니다라고 상고드렸다.

박성구 선감의 상고를 들으신 박우당께서는

나가서 가져온 것을 확인해봐라하시며

옆에 있던 서선미 시봉을 내보내셨다.

그 사이 최해경이 천자님의 존영을 모셔왔습니다.

거두어주옵소서라고 상고드렸다.

그런데 박우당께서는 박성구 선감에게

손을 내밀며 그래, 받아주마. 내어보아라

하셨고, 박성구 선감은 위 내정 앞에 세워둔

차 안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서선미 시봉이

인터폰으로 박우당께 연락을 해왔다.

박우당께서는 수화기를 들자마자 바로 말씀하시길,

세로가 몇 자, 가로가 몇 자이더냐?”고 물으셨다.

그러시더니 잠시 후, 인터폰 수화기를 놓으시고

갑자기 노기를 띠시며

그러면 나더러 죽으라는 거냐?

도장에 있는 임원들을 전부 불러와!”

하고 큰소리를 치셨다.잠시 후 그 소리를 듣고

김찬성과 정인식이 급히 달려왔다.

도전님의 큰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박성구가 내 사진을 갖다놓고

나를 죽으라고 한다!”

그 소리를 듣고 뒤이어 달려온 임원들이

내정으로 들어와 먼저 최해경을 끌고 나가버렸다.

그 자리에서 박우당은 박성구 선감에게

너 이러면 죽어라고 하셨다.

그러나 박성구 선감은

일국(一國)의 대통령도 동사무소에까지

사진을 다 걸어놓았습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러자 박우당께서는 박성구에게

도정실(道政室)에 가서 기다리라고 하셨다.

이와 같은 일련의 상황은,

육조 혜능이 본성(本性)을 깨달았음을 알고도

오조 홍인이 그것을 덮어버렸던 상황과 같다.

오조 홍인이 혜능의 게송을 보고

문도들에게 이르기를,

이도 또한 깨달은 바가 아니로다.

이것은 오랑캐의 글이니 필요없다

라며 지워버렸다.

문도들이 이를 보고 혜능을 비웃자,

오조 홍인은 그제서야 안심하며 돌아갔다.

만약 모든 이들이 지켜보는 그 자리에서

홍인이 혜능을 인정하게 되면,

혜능을 죽이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박우당 도전은 박성구 선감이

이렇게 자신의 존영을 옳게 모셔오자

그 답을 확인한 후 아주 매몰차게 대하여

이 사건을 크게 확대시킴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박성구 선감이

을 가져왔음을 알리심과 동시에,

박성구 선감을 시기하는 자들의

저해를 피할 수 있도록 방편을 취하셨던 것이다.

만약 박성구 선감이

박우당 도전의 존영을 모셔온 것이 잘못되었다면,

시봉에게 존영의 가로, 세로 치수가 어떻게 되는지

물으실 아무런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박우당께서 존영의 치수를

물어보셨다는 것은 박성구 선감이

존영을 모셔온 것이 옳은 일임을 인정하신 것이고,

나아가 그 존영의 치수대로 영대(靈臺)

모실 수 있는지의 여부를 확인하신 것이다.

하지만 이치에 어두운 원로 임원들은 이 사건을

크게 확대시켜 연일 박우당 도전을 찾아 뵙고,

박성구 선감을 감사위원회에

회부하겠다고 말씀드렸다.

경석규 종무원장은 임원들이 있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하길, “태극도에서도 이보다

큰 사건이 없었고, 대순진리회에서도

이보다 더 큰 사건이 없었습니다.

감사원에 회부할까요?” 하고 박우당께 여쭈었으나

박우당께서는 단번에 자유도수야! 놔둬!”

라는 말씀으로 일축해버렸다.

자유도수란 말에 모든 임원들은

더 이상 할 말을 잊고 어찌할 수가 없었다.

 박우당 도전께서

그림에 박성구 이름을 써서 태워버려라

고 하시자 임원들은 박우당의 의중은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박성구 선감이

정말 잘못했기 때문에

그림을 태우라고 한 것이라 생각하였다.

이것은 마치 오조 홍인이

신수(神秀)의 글은 그냥 두어서 읽게 하고,

혜능의 글은 신고 있던 신발로

지워버린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하겠다.

또한 그냥 태워도 될 터인데

이름을 써서 태우라고 한 것은

공사(公事)를 처결하는 의미가 담긴 것이다.

사람이 어떤 일을 신명계에 알릴 때는

글자를 써서 태우는 것이다.

박우당 도전께서는 을 확인하시자,

바로 이틀 후인 경오년(1990)

1124(양력 199119)

영대(靈臺) 봉안을 거행하셨다.

 

그러나 이날 영대 원위(元位)에는

박성구 선감이 그려왔던

박우당 도전의 존영은 봉안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모든 임원들이

이치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박성구 선감이

존영을 모셔왔던 것에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우당 도전은 이미 자신의

정체를 알아보고 답을 가지고 온 사람을

찾았으므로, 이후 안심하고

당신의 자리에 가실 준비를 하셨던 것이다.

박성구 선감이 석가여래 자리가 박우당 도전의

자리라며 존영을 가지고 왔다는 것은,

박우당 도전의 정체가

미륵(彌勒)이심을 알아보았다는 뜻이다.

그것은 앞에서도 언급하였거니와

석가여래가 3,000년 운을 다하였으므로,

다음은 새로운 운을 여실 미륵(彌勒)’께서

반드시 그 정체를 드러내시게 되고,

이후 후천오만년의 미륵 운()이 열리는 것이다.

이것이 순리(順理)인 것이다.

그러므로 박성구 선감이 원위에 모셔진

석가여래를 퇴위시키고 그 자리에

박우당 도전의 존영을 모셔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박우당 도전의 정체가 바로

미륵세존(彌勒世尊)이심을 깨달았다는 뜻이 된다.

즉 이것은 박성구선감 당신께서 50수 되는해에

자신이 미륵이심을 깨닫고

내가 미륵이다할수 없으므로 역설법으로

박우당을 미륵이라고 밝히신 것이다.

그래서 상도 박성구 선감이

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원위에 석가여래를 퇴위시키고

박우당 도전의 정체를 미륵세존으로 밝혀서

봉안하는 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천부적으로 정해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박우당 도전께서는 이 일은 나도 못해!”라고

임원들에게 말씀하신 바 있다.

 

그것은 박우당 당신이 스스로 그 정체를 밝혀서

영대에 봉안할 수는 없다는 말씀이시며,

따라서 이 일은 반드시 박우당 도전으로부터

천부적 종통을 계승한 사람이

해야만 하는 것이므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박우당 도전께서는 앞서 본 바와 같은

일련의 문제와 답을 통하여 천부적으로

정해진 사람을 확인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문제는 납향치성이었다.

강증산 성사께서는 종도들에게 산제사를 받으시고

이 산제사가 이후에까지 미치리라고 하셨다.

 

이 산제사는

인세에 오신 하느님께서 인신으로 계실 때,

인간에게 4배로서 받는 제사이다.

그 내용을 보면 앞에서 밝힌바와 같다.

이와 같이 강증산 성사께서는

종도들에게 산제사를 받으시고

이것이 이후에까지 미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후 그 말씀대로 조정산성사께서도

인세에 오신 하느님으로서 산제사를 받으셨다.

조정산성사께서는 정유년(1957),

영대(靈臺)의 옥황상제(玉皇上帝) 위패의

위지(位紙)를 떼어내어 태우시고

그 자리에 당신의 진영(眞影)을 모시고,

919일 강증산 성사의 강세치성 때

당신의 진영에 잔을 올리고,

4배를 받으심으로써 산제사를 받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박우당 도전께서도

삼위일체로 하느님의 일을하러 오신분이므로

당연히 하느님으로서 당신의 산제사를

받으셔야 했던 것이다.

 

존영을 모셔 올린 지 며칠 후인 1990

1129(양력 1991114)의 일이다.

박우당께서는 수임선감들과 사정위원,

징계위원 전원과 상도방면 임원 23명을

회관 4층에 모으신 자리에서

박성구 선감을 앞으로 나오게 하시고

전경(典經)을 가져오게 한 후

교운 137, ‘……상제께서 가라사대

내가 산제사를 받았으니 이후에까지 미치리라……

하신 구절을 펼쳐 보이시며

, 산제사 이것 보고 했지?” 하시며

너 석가여래 자리에 나를 모신다고 하는데,

누구에게 배웠느냐?”고 물으셨다.

박성구 선감이 , 입도 시에

주문에 석가여래를 모셔놓은 것이 이상하여

한동안 도()를 닦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후에 정대진 선감이

그 자리는 후일 도전의 자리라고 해서

그렇게 이해하고 도를 닦게 되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도전께서 갑자기 노기를 띠시며

정대진 선감에게 정대진이 너!

그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느냐?”고 물으셨고,

정대진 선감은 황급히 일어나 저는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하며 극구 부인하였다.

그러자 다시 박성구 선감에게

봐라! 정대진이 그런 적이 없다는데

너는 왜 그러느냐?”고 다그쳐 물으셨다.

이에 박성구 선감은 제가 깨달아서 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박우당 도전께서는

전경(典經)산제사구절을 펴 보이시며

, 산제사 이것 보고 했지?

, 석가여래 자리에 나를 모신다고 하는데,

누구에게 배웠느냐?” 하시며

박성구 선감의 심중을 물으신 것이다.

 

즉 이 말씀의 의미는

네가 나(박우당 도전)에게 산제사를 지내려고

그렇게 했지 않느냐?

그것을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라

(박성구) 스스로 깨달아서 하였다면

산제사를 지내야 하지 않느냐?’는 의미였다.

이러한 도전(都典)의 의중을 깨달은

박성구 선감은 존영을 모셔 올린 이후,

동지로부터 셋째 미일(未日)

19901210(양력 1991125)

납향치성을 모실 때,

원위(元位)의 석가여래가 봉안된 자리는

박우당 도전(都典)의 자리라고 하면서

박우당 도전께 잔을 올리고 4배를 드렸다.

 

이것이 바로 박우당 도전께 올린 산제사였다.

이렇게 되어야만 강증산 성사께서 말씀하신

이후에까지 미치리라하신 구절이

맞아들어가는 것이고, 또한 박우당 도전께서

인세에 오신 하느님(미륵세존)으로서

산제사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후 19901227(양력 1991211)

유경문 선감이 일어나 박우당께

박성구 선감이 이번 납향치성 때

석가여래 자리가 도전님 자리라고 하며

4배를 올리고 치성을 드렸답니다라고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보고를 드렸다.

 

그러자 박우당께서는

누가 집사를 보았지?” 하시며 다른 쪽으로

말씀을 돌려버리시고 다른 말로 바꾸어버렸다.

이처럼 임원들은 여전히 석가여래 전에

잔을 올리고 3배를 올리고 있었으니,

박우당 도전의 의중과는

전혀 다른 길로 가고 있었다.

 

위의 내용을 통해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박우당(朴牛堂) 당신께서 내놓은 문제에 대해

정확한 답을 가져온 사람을 찾았다는 것이다.

 

후인 산조 개유보

박우당 도전께서는 찾던 사람을 이제 찾았다.

그러므로 확정적인 발표를 하기에 이른다.

지금까지의 종통계승자의 경우와는 달리

이번에는 발표를 해야만 한다.

그 이유는 이번에 도통(道通)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번에 박우당 도전의

후인(後人)’을 찾지 못하면

종통의 맥()이 떨어지게 되고,

따라서 후천(後天)의 운수를

받을 수 없게 될 것이기에,

이후 박우당 도전께서는 모든 임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누구라도 알 수 있도록

발표로써 알리셨다.

그것을 일러 개유보(皆有報)라고 한다.

()모두라는 뜻이고,

()보도(報道)’한다는 뜻으로

모두에게 알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박우당 도전께서는

19901228(양력 1991212),

전체 임원들을 여주도장 회관 4층에 모아놓고,

박우당 도전의 대업(大業)을 계승할

후인(後人)을 발표하였다.

어떤 단체가 있다면 그것을 이끌어나가는

책임 있는 사람이 있어야 된다.

통솔해나가고 많은 수도인을 영도해가는

책임이 있다. 다른 것이 아니다.

내 책임(도전)이란 그것이다.

이것은 도주님께서 전해주신 것이다.

옥황상제께서 그런 책임을 나한테 주셨다.

설령 아니라 그래도

내 말이라면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맡을 도(), 옥편에도

그런 도()자 없더라고 박성구가 말한다.

그럼 내가 그걸 말하려고 일부러 만들었단 말인가?

내가 확인해보았다.

시봉을 시켜서 옥편을 보았는데,

거기에 총()자로 나와 있다.

거느릴 총()인데 총지휘, 총재 등으로 쓴다.

거느릴 도(), 모두 도()는 맡을 도()자이지.

()이란 모두 도()자이다.

()이란 법 전()자 법이 되고,

주장 주()는 주인 주()이다.

모든 것을 주장하는 사람이다.

거느릴 총자나, 맡을 도자나

뜻이 다를 것이 뭐 있어.”

 

도전(都典)의 도()자는 맡을 ()’자이다.

도전께서는 그 뜻이 동일한 총()자에 빗대어

()’자를 설명하셨다.

도전(都典)이 무엇을 맡느냐 하면

()을 맡는 것이다.

()자가 법 전()자이기 때문이다.

법은 곧 진법(眞法)을 말한다.

강증산 성사께서 난법(亂法)으로 세워두신

석가여래 자리에 박우당 도전을 모시는 것이

바로 진법(眞法)이다.

바로 이것을 박성구 선감이 주장한 것이다.

주장 주()는 주인 주()자로서,

주장하는 사람이 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을 주장하는 자가

[]을 맡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박성구 선감이 법을 주장하므로,

박성구(朴成九) 선감이 법[]을 맡는[]

도전(都典)’이 되는 것이다.

또한 맡을 도()는 거느릴 총()이므로,

[]을 맡아서[] 도인들을 거느리고[]

나아가라는 말씀으로서,

곧 총도전(總都典)을 맡으라는 발표이셨다.

이처럼 박우당 도전께서는,

전체 임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상도(上嶋) 박성구 선감이

총도전임을 발표함으로써

천부적인 종통계승을 발표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후인(後人)이 산조(山鳥=)임을

개유보(皆有報, 발표)하신 것이다.

산조(山鳥)는 섬 도()로서, 이는

곧 박성구 선감의 호()인 상도(上嶋)를 뜻한다.

 

자리공부와 대강식의 후일 기약

박우당 도전께서는 이처럼

후인(後人)을 찾아 도전을 맡으라

발표를 하고 난 후, 당신의 자리로

가실 준비를 하게 된다.

그것의 준비로서 시학, 시법 공부를 여신 것이다.

박우당께서는 신미년(1991) 622

하지부터 시학(侍學) 공부를 연다고 발표하셨다.

612일 훈시에서 공부는 자리공부다.

시학, 시법은 자리공부다.

시학은 초강, 합강, 봉강이 있다.

이걸 마치면 시법(侍法)이다.

지금 중곡동에서 하는 것은

시법이 아니고 기도공부다.

 

봉강을 마치고 시법공부를 못하면

얼른 생각할 때 도통(道通)

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데,

공부를 안 해도 상관은 없어라고 하셨다.

즉 이것은 수도인의 운수자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수도인들의 자리가 정해지고

운수(運數)를 받는 공부는 시학공부의

대강식(大降式)에서 있는데,

당시 시학공부는 봉강식까지만 거행하였고,

그 봉강식에서

대강식은 후일을 기약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봉강문(奉降文)을 보면 잘 나타나 있다.

대강식은 생략하옵고 후일을 기하오나,

날짜나 기념하기 위하옵서 봉강 중이오니

봉강식으로 현안 올리옵니다.

 

천지대팔문(天地大八門)

일월대어명(日月大御命)

금수대도술(禽獸大道術)

인간대적선(人間大積善)

시호시호(時乎時乎) 귀신시호(鬼神時乎)

시구시구(矢口矢口) 조을시구(肇乙矢口)

대강대강(大降大降) 해원신(解寃神)

 

위에서 보듯이 봉강식은

날짜나 기념하기 위한 것이고,

대강식은 후일을 기약한다고 했는데,

이는 조정산 재세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시학, 시법 공부 후 봉강식까지만 거행하고

대강식(大降式)은 후일에 있을 것이라는 의미는,

이 공부는 곧 수도인들의 자리공부가 아닌

박우당 도전께서

당신의 자리로 가시는 공부라는 뜻이다.

박우당 도전께서 당신의 자리로 가신

이후라야 진짜 상제님의 정체가 밝혀지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박우당 도전 재세시에는

그토록 손꼽아 기다리던 대강식(大降式)

열리지 않았고, 박우당 도전께서도

여기에 대한 더 이상의 아무런 말씀 없이

화천(化天)하셨다.

 

[참고] 조정산께서도 사진을 촬영하여

원위에 봉안하시고 산제사를 받으셨다.

 

(태극진경 876)

1957918일 하오에 조정산께서

상급임원들을 중궁에 시립하게 하시고

친히 영대의 옥황상제위패의 위지(位紙)를 떼어

소화하신 다음 그 위()

옥체진영을 봉안하시니라.

임원들은 어의(御意)를 헤아릴 수 없어서

감히 상고하지 못하니라.

 

(태극진경 878)

919일 강증산성사 강세 치성일에

임원들이 진설을 봉행하다가 진반순서(進飯順序)

도주님 진영위전에 이르매 진설원(陣設員)

윤섭이 주저하면서지존진영 위전에도

메를 올려야 하나이까하고 상고하니

너희들이 그렇게 미련하냐 답답하도다.

뜻대로 하라하시므로 진반하고

치성을 봉행하니라.

 

대순진리회 27년 역사상 박우당께서

어느 누구에게도 '산제사'를 받은 적이 없고

오직 한사람, 바로 상도 박성구 선감으로부터

'산제사'를 받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