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도(祈禱)의 참된 의미와 주문(呪文)
1. 기도의 의미
기도(祈禱)란 ?
글자의 뜻 그대로 “빌고 또 비는” 것이다.
빌 기(祈), 빌 도(禱)
두 글자가 모여 한 음절을 이루는 말이다.
무당은 무당으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평생을 비는 것이다.
그래서 무당을 지칭하기를
<기자(祈者)-비는 사람>이라고 한다.
무당을 지칭하는 호칭은 ‘만신’ ‘보살’ ‘무당’
‘박수’ ‘법사’ ‘단골네’ ‘단골’ 등 여러 가지
호칭이 있으나 그 중 가장 적당한 말은
기자(祈者)인 것이다.
그러면 무당(기자)는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비는 것일까?
무당 자신(단골네)과 제가집(단골)을 위해서
비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당이 자신을 위해서 비는 것은
기도 중 가장 근본이 되는 것 이고,
무당이 제가집을 위해서 비는 것은
기도의 가장 근본이 되는 목적에 해당 할 것이다.
그 가운데 무당이 자신을 위해서 비는 것은
‘기도’ 라고 함이 원칙이고,
무당이 제가집을 위해서 비는 것은
기도에 포함 되지만 엄밀히 표현하면
‘축원(祝願)’이라 고 함이 마땅하다.
물론 무당 이 자신을 위한
‘기도’를 할 때에도 ‘기도’와 ‘축원’은
분명히 구분되는 개념임에는
틀림이 없다 할 수 있다.
나 자신을 돌아보기. 기도의의미는 무엇일까?
"기도"라고하면,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합니까?
자신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하는 것을 연상하나요?
기도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고 생각 합니다.
만약
"소원을 들어 달라"고 한다면
누구에게 말하는걸까요?
상제님입니까?
대두목입니까?
아니면 석가입니까?
예수입니까?
불상에 큰절하고 돌부처에 큰절하고
돌탑에 큰절하고 무덤에 큰절하고
젯상에 큰절하고 산신 천신 칠성신 부처님
용왕신에게 큰절하고
기운을 내려받기 위해 매달리는
무속행위를 행하고 하는데 이게 무속기도법이다.
그건 무속기도법이지
정법기도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과연
나는 누구한테 기도를 하고있는 것일까?
祈禱(기도:하늘에 고하여 빌어야 하느니)
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至氣今至願爲大降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지기금지원위대강
하늘의 주인을 모시고 조화를 정하여
세상 영원토록 잊지 아니하면
만사를 다 알게 되오니,
원하옵건데 지극한 기운을 크게 내려 주옵소서.
오늘날 인류가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바탕이 되는 환경을 파괴하여
온갖 질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는 원인은
다름 아닌 물질적 욕심에 눈이 멀어
인간의 근본이 되는
‘도(道)’를 상실함으로 인한 것이다.
현세의 돌아가는 세상을 볼 때,
병겁의 재앙은 틀림없이 오는 것이다.
남이야 죽든 말든
나 하나만 덕을 보면 된다는
양심을 저버린 파렴치한 심성과
‘나 하나쯤이야’ 하는 안일하고
무관심한 마음자세들이 전 세계에 만연하고,
이것이 계속 쌓이고 누적되어 이제는
뼛속 깊이까지 병이 침투한 상태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이러한 병세를 느끼지 못하는
인류의 교만과 무지는 어느 순간 한꺼번에
멸망으로 엄습할지 모르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이러한 근본적인 대병(大病)을
치유하지 않는 이상 장차 인류에게 닥쳐올
대병겁(大病劫)으로부터 인류는
자유로울 수 없으니, 이는 곧 예상치 못한
죽음으로부터 누구도 살아나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강증산 성사께서는
이러한 대병(大病)에 대한 처방을 내놓으셨는데,
“대병의 약이 되는 것이 있나니
마음을 안정(안심安心)하고
몸을 안정(안신安身)하라” 하셨다.
안심(安心)이란,
사람의 행동 기능을 주관함은 마음이니
편벽(偏僻)됨이 없고 사사(私事)됨이 없이
진실하고 순결한 본연의 양심으로 돌아가서
허무한 남의 꾀임에 움직이지 않고
당치 않는 허욕에 정신과 마음이 팔리지 않고
기대한 바의 목적을 달성하도록
마음을 안정케 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안신(安身)이란,
마음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은 몸이니
모든 행동을 법례(法禮)에 합당케 하며
도리(道理)에 알맞게 하고
의리와 예법에 맞지 않는 허영에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바로 이러한 안심과 안신이 대병의 약이다.
그리고 기도(祈禱)도 가르쳐주셨다.
기도는 빌 기(祈), 빌 도(禱)로서
신명(神明)께 정성을 드리고
소원을 빈다는 뜻이다.
신명에게 빌려면 신명을 불러야 하는데,
신명을 부르는 것을 주문(呪文)이라고 한다.
따라서 주문을 하는 것을 기도라고 한다.
그리고 기도를 할 때는
물을 꼭 떠 놓고 기도를 모시는데,
그 물을 법수(法水)라 한다.위에서 본 것처럼
기도를 할 때는 주문을 해야 하는데,
주문을 할 때 어떤 신명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가 관건이다.
다른 것은 접어두고,
여기서 기도주(祈禱呪)만 보면,
그 주문은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지기금지원위대강
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至氣今至願爲大降>
이고, 그 뜻은
‘하늘의 주인을 모시고 조화를 정하여
세상 영원토록 잊지 아니하면 만사를
다 알게 되오니 원하옵건데
지극한 기운을 크게 내려 주옵소서.’이다.
여기서의 하늘의 주인은
전 인류의 신앙의 대상이신 하느님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올바른 정체를 알고
기도를 모셔야 모든 것이
자연의 순리에 의해 조화롭게 나아간다.
즉, 하느님을 영원토록 잊지 않고
마음에 모시면 세상사의 모든 일을 알 수 있고,
따라서 전 인류의 소망인 영생(永生)과
무궁한 복락(福樂)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기도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 기도(祈禱)와 법수(法水)가
어떻게 병겁을 예방하고
병을 고치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1) 기도 지금 이 시대는
대우주의 가을로 넘어가는 환절기로서,
수기(水氣)가 하강하는 때이다.
즉 신(神)이 사람에게 접하는 때이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상
가을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음양(陰陽)이 합일(合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양적 존재인 사람에게
음적 존재인 신(神)이 상합(相合)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神)도 신명(神明)이 있는가 하면
귀(鬼)가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람이
죽으면 혼(魂)과 백(魄)으로 나뉘게 되는데,
혼(魂)은 신(神)이 되어
천상(天上)으로 가게 되지만,
백(魄)은 땅에 남아 귀(鬼)가 되어
돌아다니다가 흩어지게 된다.
이것을 두고 옛사람들은
혼비백산(魂飛魄散)이라고 하였다.
즉 ‘혼(魂)은 하늘로 날아가고,
백(魄)은 땅으로 돌아가 흩어진다’는 말이다.
백(魄)은 원래 인간의 오욕(五慾)을 일으켜
생존욕구를 지배하던 존재로써
혼(魂)이 빠져나가버리면 귀(鬼)는
이성(理性)을 잃어버린 욕심덩어리만 남게 된다.
그런데, 귀(鬼)는 생존하고자 하는 욕구
그 자체이므로 어떻게 해서든지 흩어지지 않고
존재하고자 한다.
때문에 귀(鬼)는 돌아다니며
사람에게 붙어 정기(精氣)를 빨고
자신을 유지해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안 되면 흩어져 없어지게 된다.
지금 신(神)과 인간(人間)이
상합(相合)하는 이때에
신명(神明)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모두 이 귀(鬼)가 접하게 된다.
그런데 인간 마음의 상태에 따라
신(神)과 귀(鬼)가 이르는 것이 달라진다.
마음이 밝고 진실된 사람은
신명(神明)이 이르게 되지만,
마음이 어둡고 욕심이 많은 사람은
귀(鬼)가 접해 들어오는 것이다.
신명(神明)이 이르게 되면 이치가 밝아지고
살아가는 기운이 강해지지만
귀(鬼)가 이르게 되면 이치가 어두워지고
죽어가는 기운이 강해진다.
결국 병겁이 왔을 때
신명(神明)이 이르면 살 수 있지만
귀(鬼)가 이르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욕심덩어리인 귀(鬼)가 접해 들어오면
물질만능주의 세상에서
마음에는 더욱더 욕심이 일어나게 되고
마치 목마른 자가 바닷물을 마시듯이
그 갈증이 끊일 줄을 모르게 된다.
결국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남이야 죽든지 말든지 돈만 벌면 그만이라는
생각에서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하게 되고,
그 결과 병겁의 원인을 초래하게 되어 남
을 죽이고 결국 자신마저 병겁(病劫)과
재난 속에 떨어져 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에 신명이 이르게 되면
이치가 밝아지고 진실을 구하게 됨으로써
올바른 길을 찾게 되고,
따라서 병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용어 중에
신출귀몰(神出鬼沒)이라는 말도
그 의미를 해석해보면
‘신명(神明)이 출(出)하면
귀(鬼)는 몰살(沒殺)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신명을 찾고 정성을 드려야
귀(鬼)가 떨어져 다시는 근접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천하가 돌아가는 세태를 알 때
병겁과 환란을 넘어
대우주의 가을에 펼쳐지는
극락세상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며,
반면 천하가 돌아가는 세태를 모르는 자는
결국 그 길[도(道)]을 찾지 못하고,
말라 떨어져 길이 멸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병겁을 예방하고
가을의 완성된 세상으로 가기 위해서는
신명(神明)께 정성을 드려야 한다.
이처럼 신명을 부르는 것이 주문이다.
그리고 신명께 정성드리는 법이 기도인 것이다.
세상에서 모두들 기도한다고 하지만,
어느 시간에 어떤 신명을 불러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올바른 신명이 응하는 것이다.
신명을 찾는 것이 바로 도(道)를 찾는 것이다.
병든 환자는 명의(名醫)를 만나
치료를 받아야 살 수 있듯이
지금의 병든 인류 또한
지구와 인류를 구할 명의를 찾아나서야 한다.
그것이 바로 도(道)를 찾는 것이다.
도를 찾는 것만이 앞으로
곧 밀어닥칠 대환란인 ‘병겁’을 피하는 길이며,
영원한 복록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이다.
2) 법수(法水)
법수(法水)라는 것은,
정해진 법(法)에 따라
신명께 정성드린 물을 말한다.
옛날부터 어머니들이
가정에 어려움이 닥치거나 평강하지 못하면
첫 새벽에 정화수(井華水)를 떠놓고
기도를 드리는 풍습이 있었다.
인간의 소망을 담아 기도를 올리는데
꼭 물을 떠 놓고 드렸다.
그것은 물이 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과학에서 물의 기원을 연구하면서 천지가
창조될 때 물로써 이루어졌음을 밝혀내었다.
이것은 소천지인 사람이
태어나는 환경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은 누구나
어머니 자궁의 양수 속에서 태어난다.
이처럼 만물은 물로부터 만들어졌고,
따라서 물은 우주의 모든 답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치가 이러하므로,
우리가 물을 떠 놓고 마음으로 정성을 드리면
마음의 형태에 따라 물의 결정체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물의 성질이 우리 인류에게
커다란 희망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류의 소망이
기도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는 암시이기 때문이다.
실제적으로도 물을 떠놓고
인간의 소망을 담아 기도를 드리면
그 소망하는 바에 따라 물이 가지는
물리적 성질이 변화됨이 증명되었다.
이처럼 기도에 의해 물이 바뀐다는 것은,
기도로써 우리의 정신과 육신도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 육신의 70%가 물로 이루어졌고,
우리 인체의 가장 기본적인 세포도
70%가 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의 기억성
일본의 에모토 마사루 박사가 지은
『물은 답을 알고 있다』에 보면,
물을 향해 기도를 올리면 물의 결정이
극적으로 모습을 바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모토 마사루 박사는 그의 저서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 ‘물의 기억성’이다.
즉, 물은 어떠한 현상을
모두 다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하였던 내용이
그것과 부합되는 상황을 만나게 되면
작용을 하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동기현상(同氣現象)
혹은 동종현상(同種現象)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소망하는 바를 담아
정성을 들인 물을 마시게 되면,
이 물이 우리의 소망을 기억한 채
끊임없이 우리의 주위를 도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러한 소망과 부합되는 상황이 나타나면
물은 곧바로 기억을 되살려 우리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작용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해진 법도에 따라
정성드린 법수가 곧 약수(藥水)가 되는 이유이다.
이처럼 물이 가진 신비와 함께
신명께 정성드리는 마음이 합쳐짐으로써
우리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이렇게 정성드린 물(法水)을 마시게 되면,
병들어 지치고 면역성이 약해진 세포가
생기를 얻어 활성화됨으로써
‘강력한 면역력’이 길러지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병겁을 예방하고
치유하는 힘이 되는 것이다.
【공사 3장 40 】
증산성사께서 어떤 공사를 행하셨을 때
所願人道 願君不君 願父不父 願師不師
소원인도 원군불군 원부불부 원사불사
有君無臣其君何立 有父無子其父何立
유군무신기군하립 유부무자기부하립
有師無學其師何立 大大細細天地鬼神垂察
유사무학기사하립 대대세세천지귀신수찰
의 글을 쓰시고 이것을
천지귀신주문(天地鬼神呪文)이라 일컬으셨도다.
◐ 원하는 바가 있다면, 사람의 도리이다.
임금이 되고자 하여도 임금이 되지못하고,
어버이가 되고자 하여도 어버이가 되지못하고,
스승이 되고자 하여도 스승이 되지 못하는 것은,
임금이 있으되 신하가 없으면
그 임금이 설 수 없고, 아비가 있으되
자식이 없으면 그 아비가 설 수 없고,
스승이 있으되 학생이 없으면
그 스승이 설 수 없다.
아주 큰 것에서부터 아주 작은 세밀한 곳까지
천지에 귀신과 신명들이 드리워 살핀다.
【교운 1장 25】
증산성사께서 정미년(1907년) 가을 어느 날
신원일과 박공우와 그 외 몇 사람을 데리고
태인 살포정 주막에 오셔서 쉬시는데
갑자기 우뢰와 번개가 크게 일어나
집에 범하려 하기에 증산성사께서
번개와 우뢰가 일어나는 쪽을 향하여
꾸짖으시니 곧 멈추는지라.
이 때 공우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번개를 부르시며
또 때로는 꾸짖어 물리치기도 하시니 천지조화를
마음대로 하시니 상제시라.
어떤 일이 있어도 이 분을 쫓을 것이라고
마음에 굳게 다짐하였더니 어느 날
공우에게 말씀하시기를 “만날 사람 만났으니”
라는 가사를 아느냐 하시고
“이제부터 네가 때마다 하는 그 식고(食鼓)를
나에게 돌리라” 하시니 공우가 감탄하여 여쭈기를
“평생의 소원이라. 깨달았나이다.”
원래 공우는 동학신도들의 식고와는 달리
“하느님 뵈어지소서.”라는 발원의 식고를 하였는데
이제 하시는 말씀이 남의 심경을 통찰하심이며
조화를 임의로 행하심을 볼 때
하느님의 강림이시라고
증산성사를 지성으로 받들기를 결심하였도다.
【교운 1장 37】
증산성사께서 차경석의 집에 유숙하시니
종도들이 모여와서 증산성사를 배알하였도다.
이 자리에서 증산성사께서
양지 온 장에 사람을 그려서 벽에 붙이고
제사 절차와 같이 설위하고 종도들에게
“그 곳을 향하여 상악천권(上握天權)하고
하습지기(下襲地氣)식으로 사배하면서
마음으로 소원을 심고하라”고 명하시니라.
종도들이 명하신 대로 행한 다음에
증산성사께서도 친히 그 앞에 서서 식을 마치시고
“너희는 누구에게 심고하였느냐”고 물으시니라.
어느 종도 한 사람이 “선생님께 심고하였나이다”
고 말씀을 올리니 증산성사께서 빙그레 웃으시며
가라사대 “내가 산 제사를 받았으니 이후에까지
미치리라” 하시고 “자리로서는
띠자리가 깨끗하니라”고 일러주셨도다.
◐ 상악천권(上握天權), 하습지기(下襲地氣);
위로는 하늘의 권위를 쥐고,
아래로는 땅의 기운을 끌어당긴다.
【교운 1장 54】
증산성사께서 十一월에
대흥리 경석의 집에 계시면서
포덕소(布德所)를 정하는 공사를 보셨도다.
어느 날 증산성사께서 황극수(皇極數)를 보신 후에
종도들을 모으고 각기 소원을 물으셨도다.
경석은 증산성사께서 재차 묻는 말씀에
“유방백세(遺芳百歲)를 못하면
유취만년(遺臭萬年)이 한이로다.
열지(裂地)를 원하나이다”고 여쭈니
증산성사께서 경석에게
“너는 병부가 마땅하니라” 하시니
경석은 불쾌히 여기는지라.
증산성사께서 “병권은 직신(直臣)이 아니면
맡기지 못하므로 특히 너에게 맡기었노라”
고 말씀하셨도다.
◐ 유방백세유취만년열지(遺臭萬年遺芳百歲裂地);
오랜 세월 동안 명예로운 이름을 남기지 못하면,
나쁜 소문(추문)이 만년 동안 남게 되리니
한이로다. 땅을 나누어 주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너에게 병권을 맡기었노라.
※ 직신(直臣)이란?
제왕학(帝王學)에서 다스리는 자
(왕이나 태자, 관료 등)를 위한
학문이 있는데 여기에 나온다.
여기에 보면 ‘6정과 6사’라는 부하 분류법을 보면
원래 ‘6정과 6사’란 전한(前漢) 시대의
유향(劉向)이 지은 『설원(說苑)』에 나오는
말로서 정관 14년, 위징이라는 신하가
당태종에게 ‘좋은 인재를 발탁해 주십사’하고
올린 상주문에 인용되어 있는 내용이다.
6정(六正)이란 좋은 신하 여섯 가지란 뜻이고,
6사(六邪)란 나쁜 신하 여섯 가지란 뜻이다.
* 6정(六正)이란
① 성신(聖臣); 미리 위기에 대처하고
상사[主君]의 안전을 지키는 부하.
② 양신(良臣); 좋은 계획을 진언하고,
상사의 장점과 단점을 알게 하여
바로 잡도록 돕는 부하.
③ 충신(忠臣); 좋은 인재를 추천하고,
옛 성인의 행적을 예로 들어
상사의 마음을 격려하는 부하.
④ 지신(智臣); 일의 과정을 미리 알아서,
상사가 걱정하는 일이 없도록
미리 대처하는 부하.
⑤ 정신(貞臣); 원칙을 존중하며,
허례허식을 멀리하여
검소한 생활을 하는 부하.
⑥ 직신(直臣); 아첨을 하지않고,
상사의 잘못을 직접 간하는 부하.
* 6사(六邪)란
① 패신(貝臣); 지위에 안주하고,
봉급만 탐내고, 주위의 정세에만
신경을 쓰는 부하.
② 유신(諛臣); 아첨을 일삼아서,
상사의 일은 무조건 좋다하고
좋아하는 것을 상납하는 부하.
③ 간신(姦臣); 겉과 속이 달라서
겉으로는 성인군자인척 하면서
실제는 사악한 마음을 품은 부하.
④ 참신(讒臣); 자신의 잘못을 감추거나
남을 설득시키는 재주가 있으나
분열과 분쟁을 일삼는 부하.
⑤ 적신(賊臣); 자기 좋을 대로 규칙을 변경하고,
사적인 도당을 만들어 지위를 높이는 부하.
⑥ 망국신(亡國臣); 상사를 모함하고,
현명한 사람을 배척하며,
상사의 나쁜 면을 내외에 선전하는 부하.
【교운 1장 58】
증산성사께서 어느 날 한가로이
공우와 함께 계시는데 이 때 공우가
옆에 계시는 증산성사께
“동학주(東學呪)에 강(降)을 받지 못하였나이다”
고 여쭈니 “그것은 다 제우강(濟愚降)이고
천강(天降)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셨도다.
또 “만일 천강을 받은 사람이면
병든 자를 한번만 만져도 낫게 할 것이며
또한 건너 보기만 하여도 나을지니라.
천강(天降)은 뒤에 있나니 잘 닦으라”
고 일러주셨도다.
최제우도 열심히 빌었지만
욕속부달(欲速不達)로서 천강이 되지 못하고
제우강이 되고 말았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천강은 뒤에 있다고 했는데
그때는 언제인가?
기도는 말 그대로 '비는 것'이다.
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면 과연 누구한테 빌 것인가?
빈다면 또 어떻게 빌 것인가?
기도란 이루기를 원한다는 것이고,
원하는 바가 크고 강할수록
우리의 기도는 더욱 간절해진다.
그러나 다른 말로 기도가 간절해진다는 것은
그만큼 강하게 바란다는 말이다.
과연 기도의 의미가
무엇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데 있을까?
수행자의 기도는
내가 바라는 결과를 얻고자 함이 아니고,
어떤 결과가 오더라도 그 결과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강인한 내적인 수행력을 쌓는데 있다.
기도를 하면 마음이 비워지고
마음이 비워지면 결과에 대한
애착과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며,
그랬을 때 결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
그것이 기도의 참 의미가 아닐까.
이것이야말로 마음을 비우는 수행의 과정이다.
기도를 했는데 안 이루어졌다는 그 마음 자체가
아직 마음을 비우지 못한 것이다.
기도를 하면서, 수행을 하면서
'목표를 반드시 이루기를' 바라고
집착하는 마음으로 기도한다면,
그건 벌써 어긋나기 시작한 것이다.
기도와 수행은 아무런 이유가 붙어서도 안 되고,
그 어떤 조건이나 거래의 마음이
붙어서도 안 된다.
그 어떤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욕심이다.
수행하고 기도하는 순간
이미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완전히 이룬 순간인 것이고
마음을 비운 것이 되어야 한다.
[참된 기도란 무엇인가]
사실 기도의 본래 의미는 아이러니 하게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을 때 찾아온다.
'바라는 바'가 있다는 자체는 벌써
지금 이 순간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고,
그랬을 때 지금 이 순간의 평화는 깨지고 만다.
바라는 바가 있는 이상
지금 이 순간은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라는 바를 놓아버렸을 때
그래서 지금 이 순간 그대로 만족할 수 있고
온연한 평화로움과 고요와 마주할 때
비로소 참된 기도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구를 믿을 것인가]
내가 지금 믿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부처님을 믿고 있는가,
하느님을 믿고 있는가,
아니면 어떤 사실이나 원칙, 진리를 믿고 있는가.
무엇이든 좋다.
왜 그것을 믿는가.
두렵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믿는다.
그 두려움이란 알지 못함,
즉 무지에서 오는 두려움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 알지 못한다.
어리석다.
어리석다 보니 온통 불분명하고,
불투명하며, 복잡하고, 불규칙하게 느낀다.
무엇 하나 온전한 것이 없다.
그러다 보니 두렵고 무섭다.
미래에 대해서도 두렵고,
일에 대해서도, 죽음에 대해서도,
모든 것이 알 수 없는 두려움 뿐이다.
그러다 보니 무언가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
나를 안락하게 해 줄 도피처를 찾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그 때 사람들은 어떤 ‘절대’나
혹은 ‘신’, ‘불’을 가정해 놓고,
그것만이 온전하다고 가정해 놓고,
이제부터 그것을 믿기로 작정하기 시작한다.
그럼으로써 이 세상이라는
두려운 곳에서 의지할 곳을 얻게 된다.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믿음’의 실체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은 언제고 바뀔 수 있다.
선택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내가 믿을 대상에 대한 확증 없이
그저 두려움 때문에 믿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언제든 나의 믿음은 바뀔 수 있다.
하느님을 믿다가
하느님이 나의 두려움을 해소시켜 주지 못하거나,
내가 바라는 바를 얻게 해 주지 못하면
선뜻 믿음의 대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부처나 신 보다도 나무나 산이나
바다를 믿을 수도 있고, 그 믿음의 대상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그것은 그 대상이 내 믿음으로 확증된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정해 놓고 믿기로 마음먹은 때부터
믿음이 시작되었기 때문이고, 그렇기에
그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온전한 믿음이라면
믿음의 대상은 바로 내가 되어야 한다.
나만이 내 스스로 경험하며,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 자신에 대한 믿음,
나 자신의 근본에 대한 확신과 신뢰,
그것이야말로 온전한 믿음의 시작이다.
내 바깥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선택’이다.
수많은 내 바깥의 대상들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하여 믿기로 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온전하지 못하고,
내 스스로 확증해 보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내 안의 두려움과 나약함,
그리고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 등
나의 부족함을 어떤 대상에게 의지함으로써
보상받고자 하는 허약한 심리일 뿐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만이 온전하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하면 누가 나를 믿겠는가.
내가 나를 믿지 못하고 내 바깥의 대상을 믿는다면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공허할 것인가.
내 안에 내 주인을 세우지 못하고
내 바깥에 의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나약한 일인가.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다.
스스로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에
내 바깥의 대상을 절대화, 신격화,
진리화 시켜 놓고 그것을 믿
고 의지하려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가짜 믿음이다.
그러한 종교는 가짜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와 확신이야말로
온전하고 참된 믿음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믿음을 가지는 사람은 두렵지 않다.
자기 근원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나약하지 않고, 두렵지 않으며,
강하고 용기와 자신감에 넘쳐 흐른다.
자기 자신이야말로
진리이며 신이고 부처인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랬을 때 참된 용기가 생기고,
두려움은 사라진다.
그 어떤 것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괴로움이나 두려움이
오더라도 그 경계가 자신을 휘두르지 못한다.
나야말로 진리의 나툼임을 알고 있다.
진리가 나를 헤칠 리가 없음을 알고 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다 진리다운 이유가 있기 때문임을 알고 있다.
나라는 존재는 진리의 일을 하기 위해
이러한 모습으로 여기에 있음을 온전히 알고 있다.
내 앞에 펼쳐지는 그 어떤 괴로움도,
그 어떤 경계도 기꺼이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이 내가 이 곳에 온
목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내 앞에 나타나는 그 어떤 존재도
모두가 법계에서 부여한 나름대로의
온전한 목적이 있음을 안다.
그렇기에 그 어떤 존재도,
그 어떤 일도 온전히 존중하며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이 나 자신에 대한,
내 근본에 대한 믿음이다.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일체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다.
내 안의 근본에, 내 안의 진리에,
내 안의 신이며, 내 안의 부처에게
일체 모든 것을 내맡길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참된 믿음은 그렇듯 모든 것을 내맡기고
받아들일 용기와 자신감을 가져온다.
물의 흐름처럼 내 인생의 법다운 흐름에
턱 내맡기고 따라 흐를 준비가 되어 있다.
나약하고 두려우며 어리석은 사람은
결코 나 자신을 나 자신에게 내맡길 수 없다.
믿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턱 내맡기지 못한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모든 것을 내맡길 수 있는 용기를 준다.
이제 그는 더 이상 괴로울 일이 없다.
그 어떤 경계가 오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진리의 나툼이며
내가 진리답게 살아가는
한 방식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알지도 못하는 내 밖의 어떤 존재에게
나를 행복으로 가져다 달라고,
두려움과 괴로움을 없애 달라고
믿고 의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믿음이다.
어떤 종교를 선택할 것인가.
어떤 믿음을 선택할 것인가.
‘선택’을 해서는 안된다.
어느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선택에 대한 미련이 남을 것이다.
그랬을 때 내 마음은
평온을 잃고 혼란을 가져온다.
선택하지 말고 다만 믿으라.
내 바깥을 기웃거리면
선택할 것만 계속해서 늘어난다.
그러나 내 안을 바라보고
내 내면의 근본에 대한 믿음을 가지면
분열이 없고 혼란이 없다.
그것은 선택이 아닌 당위이다.
나 자신은 여러 가지가 아니다.
여럿 중에 어떤 것을 믿을까,
선택할까의나뉘는 문제가 아니다.
그저 나 자신을 믿는다는 것은
선택이 아닌 확신이다.
그랬을 때 힘이 생기고 자기 중심이 우뚝 서며,
일체를 내맡길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참된 믿음은 내맡김이고, 용기이다.
믿음이 없다면 불안과 두려움이
늘 나를 따라다니겠지만, 참된 믿음이 있다면
그 어떤 두려움도 불안도 없다.
오직당당한 용기로써 내맡김 만이 있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참된 믿음으로 일체 모든 것을 맡기라.
【교운 1장 20】
종도들이 모인 곳에서 증산성사께서
三월 어느 날 증산성사께서 가라사대
“지금은 신명 해원시대니라.
동일한 五十년 공부에 어떤 사람을 해원하리요.
최 제우는 경신(庚申)에 득도하여
시천주(侍天呪)를 얻었는 바
기유(己酉)까지 五十년이 되니라.
충남(忠南) 비인(庇仁) 사람 김경흔(金京訢)은
五十년 공부로 태을주(太乙呪)를 얻었으되
그 주문을 신명으로부터 얻을 때에
그 주문으로써 많은 사람을 살리라는
명을 받았느니라.”고 말씀을 하시고
이어서 “이 두 사람 중의 누구를 해원하리오.”
라고 물으시니 시좌하고 있던 종도들 중에서
광찬이 “선생님의 처분을 기다리나이다” 하니
성사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시천주는 이미 행세되었고 태을주를 쓰리라”
하시고 읽어 가르치시니 그 주문은 이러하였도다.
‘吽哆吽哆 太乙天上元君
吽哩哆耶都來 吽哩喊哩 娑婆啊’
훔치훔치 태을천상원군
훔리치야도래 훔리함리 사바아
◐ 해원시대를 맞이하여
신명(神明)도 모두 해원(解寃)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증산성사께서 “지금은 신명해원시대니라”
고 말씀하셨다.
“동일한 50년 공부에 어떤 사람을 해원하리오”
라고 하신 것은 최제우가
경신년(庚申年1860년)에 시천주(侍天呪)를 받아서
사용하다가 죽은 후 증산성사께서 강세하셔서
화천하신 기유년(己酉年1909년)까지
시천주를 사용하였으니 50년이 되는 것이다.
이 말의 뜻은 최제우가 강증산성사로 와서
시천주를 사용했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이 주문의 신명은
해원이 됐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충남 비인(庇仁) 사람 김경흔(金京흔)은
50년 공부로 태을주(太乙呪)를 얻었으되
그 주문을 신명으로부터 얻을 때에
그 주문으로써 많은 사람을 살리라는
명을 받았으나 쓰지 못하고 죽었다.
김경흔은 조선 선조 때 충청도 비인 출신으로써
50년 간 도통공부를 하는 방편으로
여러 주문을 사용하였으되 효험이 없었다.
그러다가 예로부터 비전되어 온
구축병마주(鷗逐病魔呪:병마를 몰아내는 주문)인
‘훔리치야 도래 훔리함리 사바아’를
송(頌)하다가 비로소 공부가 열렸다.
이때 신명의 계시를 받아
그는 주문의 머리에
태을천상원군(太乙天上元君)을 붙여서 염하였으나,
이 주문으로 완전한 도통을 얻지 못하고
다만 『태을경(太乙經)』이라는 책에
이 사실을 기록하였다.
이때 김경흔에게 응했던 신명은
‘태을천상원군’이었다.
김경흔은 태을천상원군으로부터
“이 주문으로써 많은 사람을 살리라”는
명을 받았으나 자신의 도통공부에만 치중하여
신명의 명을 실행치 못하였으니
김경흔도 도통을 하지 못한 원이 맺히고,
신명 또한 이 주문으로써 많은 사람을
살리지 못하였으니 원이 있는 것이다.
만일 그때 김경흔이
태을주를 많은 사람에게 전하여
사람들을 많이 살렸으면 도를 통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해원시대를 맞이하여
신명을 해원하기 위해 증산성사께서
사람을 많이 살리는 주문인 태을주(太乙呪)를 써서
신명을 해원시키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인들이 태을주를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 가면 많은 사람이 살게 되고
이로써 전하는 도인들로 도통을 하게 되므로
신명은 해원이 되는 것이다.
◐ 김경흔이 받은 주문은
‘태을천상원군 훔리치야도래 훔리함리 사바아’
이다.
이것만으로는 기운이 발휘되지 않으므로
증산성사께서 앞에
吘哆吘哆(훔치훔치)를 더 붙였다.
吘(훔)은 소 울음소리 훔이고,
哆(치)는 소 먹음소리 치이다.
이것은 송아지가 어미소를 부르는 형상으로
도문소자(道門小子)가
옥황상제님을 찾는 소리이다.
심우도(尋牛圖)에서 흰 소는 옥황상제님을 뜻한다.
옥황상제님으로부터 기운을 받아서
태을주 기운이 발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에 옥황상제님을 모실 때
비로소 이 태을주의 기운이 들어오는 것이고
옥황상제님의 정체가 밝혀져야만
완전한 태을주 기운이 발휘될 수가 있다.
기도주는 옥황상제님께 약속하는 주문으로
맹세를 하고 다짐을 하는 주문이다.
그래서 태을주만이
소원성취를 할 수 있는 주문이다.
* 태을천상원군(太乙天上元君)은
태을성(太乙星)에 계시는 제군(帝君)으로서
천상(天上)의 많은 제군들 중
으뜸가는 임금이시다.
도통주(道通呪)의 ‘천상원룡(天上元龍) 감무(坎武)
태을성(太乙星) 두우군(斗牛君)과
같은 분으로서 옥황상제님을 모시고
만신(萬神)을 거령(擧令)하고,
천지(天地)일월성신(日月星辰)을
주관(主觀)하는 신명(神明)이다.
다시 말하면 태을주(太乙呪)는
태을천상원군(太乙天上元君)이
옥황상제님으로부터 기운을 받아 내려
인세에 베푸는 우주(宇宙)의 진액(津液)인 것이다.
그러므로 『전경』 [교운] 1장 60절에 보면,
어느 날 증산성사께서 종도들에게
“오는 잠을 적게 자고 태을주를 많이 읽으라.
그것이 하늘에서 으뜸가는 임금이니라.
오만 년 동안 동리 동리 각 학교마다 외우리라”
하셨도다. 고 일러주신 것이다.
그리고 정산성사께서
『태극진경』 8장 50절에서 말씀하시길,
“그대들이 지금 태을주(太乙呪)를 외고 있으나
그 뜻을 알고 하느냐?
만사무기(萬事無忌) 태을주,
포덕천하(布德天下) 태을주,
소원성취(所願成就) 태을주니라.
그러므로 일자(一字) 일음(一音)에도
성(誠) • 경(敬) • 신(信)을 붙여
마음 다져 외워야 태을천상원군(太乙天上元君)의
감응(感應)이 있으리라.” 하셨고,
또 『태극진경』 9장 30절, 31절에서 보면,
“사람의 몸에 구령삼정(九靈三精)이 있음은
천상(天上)의 구성삼태(九星三台)에
상응(相應)함이므로 인신(人身)은
소천지(小天地)이니라.
또 그 몸에 팔만사천 모원공(毛元孔)이 있고
그 모원공마다 모원신(毛元神)이 있으니
태을주(太乙呪)의 정기(精氣)가 거기에 차야
도체도골(道體道骨)이 되느니라.” 고 하셨다.
이것은 마치 누에가 입에서 실을 뽑아
고치를 치고 자신의 몸을 완성시켜 가듯이
도인(道人)이 옥황상제님을 모시고
태을주를 하게 되면
도체도골(道體道骨)이 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인이 태을주를 외울 때
“감는다.”라고 한다.
오는 잠을 적게 자고 태을주(太乙呪)를 많이 하고,
많은 사람에게 전하여 많은 사람을 살려야
신명(神明)이 해원(解寃)하고,
사람도 해원이 되는 것이다.
◐ 吽哆吽哆(훔치훔치) ;
입 口(구)자, 네 개(口 口 口 口)와
牛多牛多(우다우다)이다.
즉 밭에 소가 많다. 소가 많다 이다.
밭은 우주의 축소판인 바둑판을 말하는 것이고
소는 도를 뜻한다.
다음 사진을 보면서 밭 田(전)자를 풀어 보자.
※밭 田(전)자는 무극(◯)이며
입 口(구)자는 무극안에 들어 있다.
* 입 口(구)자 네 개를 합치면
밭 田(전)자가 된다.
밭 田(전)자는 다시
입 口(구)자가 5개로 만들어 진다.
다섯 번째 만들어 지는 입 口(구)자는
외곽으로 둘러져 있는 4면이다.
이 다섯 번째 만들어 지는
입 口(구)자가 숨은 비결이다.
격암유록에도 나에게 이로움을 주는 것은
田田(전전)에 있다 하였고
춘산 채지가에도 田田(전전)자로
成宮(성궁)을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훔치훔치를 풀려면 田(자)를 풀어야 한다.
그러면 田(전)자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입 口(구)자 네 개는 밭 田(전)자가 되고
밭 田(전)자는 입 구 다섯 개가 만들어 지고
입 口(구) 다섯 개는 또다시 무극을 만들어 낸다.
즉 무극안에 밭 田(전)자가 들어 있는 것이다.
이곳이 숨겨진 비결이다.
태을주는 음양합덕 주문으로
천지부모를 찾는 소리라고 한다.
그러므로 훔치훔치는 무극으로 무극신,
하늘 아버지를 부르는 뜻이고,
태을천상원군은 고부인으로
땅 어머니를 부르는 호칭이다.
그래서 봉축주(奉祝呪)에 보면
무극신의 크나 큰 도덕을 천명(天命)으로 알고
받들며, 신명(神明)의 가르침으로 받들고자
도(道)의 문(門)에 들어 왔으니
소자(小子)의 소원하는 바를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하였다.
바로 이 무극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소원하는바 목적을 이룰 것이다.
우리가 기도를 하고 주문을 한다고 하지만
그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기도를 하고 주문을 해도 효험이 있지,
그 대상이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고
빈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2006년 1월 3일 훈시말씀에 보면,
“증산성사의 의중을 알고 빌면 다 성공해.
무조건 빌면 되겠어요?
돌에 빌고, 물에 빌고, 하면 되겠어요?
비는데도 대상이 있어야 한다.
신명에게 비는 것을 주문이라 한다.
어느 시간에, 누구에게 비는 것을 기도라 한다.”
라고 말씀 하셨듯이
내가 빌고 있는 그 신명이 누구인지
그 대상을 알아야만
소원성취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기도를 할 때는 주문을 해야 하는데,
주문을 할 때 어떤 신명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가 관건이다.
그러므로 태을주는 훔치훔치가 들어가야만
그 기운을 받는 것이며
천지부모를 찾는 소리가 된다.
즉 무극신은 하늘아버지인
옥황상제님을 부르는 소리이고,
태을천상원군은 땅 어머니격인
대두목을 부르는 소리이다.
그래서 음양합덕 주문이라고 한 것이다.
[참고]격암유록 은비가
利在全全 畫牛顧溪 物名卽牝 音卽道下止
이재전전 화우고계 물명즉빈 음즉도하지
≪온전하게 이로운 곳은 그림의 소가
계곡의 물을 돌아보는 곳인데 그 물명은
즉 계곡이며, 주문소리가 나는 곳
즉 道(도)아래에서 머물러라.≫
[참고]격암유록 말운론
怨無心 利在田田 十勝化 上帝豫言眞經說
원무심 이재전전 십승화 상제예언진경설
≪怨(원)자에서 心(심)자를 없애면
죽을 死(사)자만 남는다.
그래서 田田(전전)이 나에게 이로움이 있는데
이 田田(전전)을 모르면 죽는다고 한 것이다.
그곳은 십승지로 조화가 있는 곳이며
상제께서 예언하신 말씀으로 틀림없는 학설이다.≫
[참고]격암유록 전전가
四口合軆入禮之田 五口合軆極樂之田
사구합체입례지전 오구합체극락지전
田田之理分明하나 世人不覺 恨歎이라
전전지리분명 세인불각 한탄
大亂全世人心洶洶하니 入田卷엇기極難구나
대란전세인심흉흉 입전권 극란
利在田田心田인가 跪坐誦經丹田이라
이재전전심전 궤좌송경단전
田中之田彈琴田 淸雅一曲雲霄高라
전중지전탄금전 청아일곡운소고
≪4口(구)를 합한 몸이
예를 갖춰 들어가니 田(전)에 이른다.
이것은 5口(구)를 합한 몸으로
극락으로 이르는 田(전)이다.
전전의 이치가 분명하나 세상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니 한탄스럽다.
전 세계 대란이 일어날 때에
사람들의 마음은 흉흉하니
入田卷(입전권=태을주) 얻기가 극히 어렵구나.
田(전)에서 田(전)으로 이르게 되면
거문고타는 소리(태을주)의 田(전)이다.
그 소리는 맑고 우아한 곡조로써 아주 높은
구름 속에서 메아리처럼 들려온다.(태을주)≫
[참고]격암유록 도부신인
利在田田秘文(이재전전비문)으로
田之又田田田(전지우전전전)일세
≪전전은 숨겨놓은 글이다.
田(전)으로 가고 또田(전)으로 가라
그러면 바둑판(田)의 주인인
태을주(田)를 찾으니 이로움이 있다.≫
[참고]격암유록 계명성
擲柶大會(척사대회)하고보니
無才能(무재능)이 分明(분명)하야
五卯一乞(오묘일걸) 玬東佛出(단동불출)
길나라비 活活道飛(활활도비)
≪道(도)판을 벌리고 보니
재능이 없다는 것은 분명 한데
다섯째에 묘하게 한번 빌었더니
동방 木(목)기운이신 미륵불이 출현 하시고
道(도)의 살 수 있는 법방으로 활활 나는 도다.≫
* 실제로 윷판에서 상대편에게 다 잡아 먹혀서
4동이 그대로 있는데,
상대편은 3동이 이미 나고
1동은 마지막 끝인 날 모에 먹여 놓은 상태 일 때
상대편의 승리는 99.999%로 굳어져
거의 포기한 상태에서 판은
終(종)치기 5분전(五分佺)이다.
이때에 윷 던지기는 우리 편에 넘어왔지만
4동이 아직 출발도 못한 상태이다.
가능성은 0.000001% 인데
이것을 역전하는 방법이 5묘 1걸이다.
이 말은 오선위기 도수에서
다섯 번째로 오는 해도 진인을
묘하게도 한번 만나서 빌었더니
도통하여서 활활 날르더라 는 뜻이다.
그래서 교운 1장 30절에 오주를 지어
천지의 진액(津液)이라 이름 하시었고
교운 1장 59절에 오주(五呪)를 써서
한 사람에게 주어 읽히고 “만 명에게 전하라”
다짐하시고 나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그와 같이 다른 사람에게 전하게 하셨도다.
라고 하였으며 예시 88절에는
오주(五呪)의 글을 쓰시니 이러하도다.
고 하였는데 그 오주(五呪)는
聖師醫統 慶州龍潭(성사의통 경주용담)
无極神大道德奉天命奉神敎大先生前如律令
(무극신대도덕봉천명봉신교대선생전여율령)
審行先知後覺元亨利貞布敎五十年工夫
(심행선지후각원형이정포교오십년공부)이었다.
◐ [태극진경 3장 9, 10절]에 보면,
정산성사께서 신유년(辛酉年, 1921년) 4월(四月)
28일(二十八日) 봉천명 치성일에 말씀하시길
‘나는 이제 대도(大道)의 진주로서
천명(天命)과 신권(神權)을 사용하여야 하므로
오늘 치성은 옥황상제님(道主)의
위격(진짜가 아님)으로 올리는 것이라’ 하시고
치성을 올리시니 갠 하늘에 번개가 치고
뇌성(雷聲)이 울리므로, 정산성사께서
‘뇌성보화천존께서 하감 흠향하심이니라’ 하셨다.
※ ‘옥황상제(玉皇上帝)’라는 하느님의 이름은
중국의 4대 기서(奇書) 중 하나인
『서유기(西遊記)』에도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서유기(西遊記)』를 보면,
옥황상제는 천상계(天上界)의 모든 일을 관장하는
삼신하느님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옥황상제라는 하느님의 이름은
동양의 고서(古書)에는 셀 수 없이 많이 나온다.
즉 ‘옥황상제(玉皇上帝)’는
그 자체로 하느님의 이름이다.
이 이름은 나뉘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성옥황상제(趙聖玉皇上帝)’를
‘옥황조성상제(玉皇趙聖上帝)’라 하는 것은
‘고건 서울시장’을 ‘서울시 고건장’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우를 범한 것이다.
그러므로 둘 다 잘못된 것이다.
주문은 바로 신명을 부르는 부호인데,
옥황상제님을 믿지 않는다면
옥황상제님께서는 하감하시지 않으며,
여기에는 어떠한 신명들도
그 주문에 응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옥황상제님께서 하감하시지 않으면
아무리 주문을 외울지라도
어떠한 신명도 응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예시 41】
증산성사께서 하루는 공우에게
마음속으로 육임(六任)을 정하라고 명하셨도다.
공우가 생각한 여섯 사람 중
한 사람이 불가하다 하시여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정하였더니
이 사람들을 부르사 불을 끄고
동학 주문을 외우게 하여 밤새도록
방안을 돌게 하다가 불을 켜 보게 하시니
손씨가 죽은 듯이 엎어져 있느니라.
증산성사께서 “나를 부르라”고 그에게 이르니
그는 겨우 정신을 돌려 증산성사를 부르니
기운이 소생하니라.
증산성사께서 이 일을 보시고 종도들에게
“이는 허물을 지은 자니라.
이후에 괴병이 온 세상에 유행하리라.
자던 사람은 누운 자리에서 앉은 자는 그 자리에서
길을 가던 자는 노상에서 각기 일어나지도 못하고
옮기지도 못하고 혹은 엎어져 죽을 때가 있으리라.
이런 때에 나를 부르면 살아나리라”고 이르셨도다.
◐ 육임(六任)은 조선시대에 지방행정을
원활히 수행키 위해 수령의 보조기구로서
면 • 리 단위에 두었던 집강(執綱)에 근원을 두고
동학에서 원용하여 육임제도를 만들었는데
곧 교장, 교수, 도집, 집강, 내정, 증정의
여섯 가지 직책이다.
증산께서 박공우(朴公又)에게
육임(六任)을 정하게 하셨다.
즉 박우당께서 상도 박성구 선감에게
1991년 2월 12일 도전을 맡으라는 분부를
전체 임원들 앞에서 발표하신 후,
1995년 8월 14일에
각 도장의 원장을 임명(任命)하셨다.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은 당시
경석규 원장, 안영일 종의회의장,
정대진 재단이사장, 유경문 감사원장,
옥천 이유종 선감, 안동 정훈봉 선감,
서울방면 전호덕 교감, 용암 김찬성 선감,
신용덕 총무부장이었다.
여기서 육임을 정하셨는데
①경석규 원장 ②여주본부도장 원장 안영일
③포천수련도장 원장 이유종
④토성수련도장 원장 손경옥
⑤재단법인이사장 정대진
⑥감사원장 유경문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안영일 선감이 몸이 아파서
불가하다 하여 정훈봉 선감으로 바꾸어
①여주본부도장 원장 이유종
②토성수련도장 원장 정훈봉
③포천수련도장 원장 손경옥(이후 전호덕 교감이 맡음)
④재단법인 이사장 정대진
⑤감사원장 유경문
⑥경석규 원장은 중곡동 일을 보라고 하신
육임(六任)이 정해졌다.
※ 동학 주문은 시천주(侍天主) 주문인데,
즉 기도주(祈禱呪)이다.
천주(天主)를 모시는 일을 시키면서 돌려 보니,
즉 일을 시켜 보니
손씨(孫氏)가 죽은 듯이 엎어져 있었다.
손(孫)이란 자손이 이어져 내려간다는 뜻으로
맥(脈)을 말하고,
씨(氏)란 계통(系統)을 말하므로
손씨(孫氏)란 종통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손씨(孫氏)가 엎어졌다 함은
종통 • 종맥이 끊어졌다는 것이다.
육임에게는 연원의 맥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1995년 12월 4일 박우당께서 화천하시고,
12월 10일에 장례를 치른 후,
12월 13일 육임(六任)에 의해
금강산 토성수련도장에서 봉안치성을 올렸는데
육임(六任)들은 박우당을
영대(靈臺)에 봉안하지 않고
영대(靈臺)에 서가여래를 봉안하였다.
그렇게 함으로 인해
육임(六任)은 맥(脈)이 떨어져 버린 것이다.
이는 허물을 지었기 때문이다.
허물을 지었다 함은 죄를 지었다는 말씀이다.
수반들에게는 ‘박우당은 하느님이시다’ 해놓고
정작 자신들은 박우당을 믿지도 않고
수반들의 눈과 귀를 막아 버렸으니
그 죄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 이후에 괴병이
온 세상에 유행하리라고 하셨는데
괴병(怪病)이라면 이름 모르는 괴이한 병을
말하는데 그야말로 괴질병(怪疾病)인 것이다.
이것이 앞으로 오는 온 세상에
전염병처럼 널리 퍼진다는 것이다.
이 병으로 인해 자던 사람은 누운 자리에서,
앉은 자는 그 자리에서, 길을 가던 자는 노상에서
각기 일어나지도 못하고 옮기지도 못하고
혹은 엎어져 죽을 때가 있다는 말씀이시다.
허물을 지은 자는
뉘우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것이다.
증산성사께서 진멸지경에 처한
천하창생을 구하기 위해 오셔서 이 지상에서
모든 겁재를 물리치시고 후천 오만 년의
불로장생의 화평세계를 열어 주셨지만,
오직 병겁만큼은 남겨 두고 가셨다.
그리고 병겁은 너희들에게 맡긴다고 하셨다.
너희들이란 도인들을 말함이다.
※ 탈곡한 곡식은
알맹이와 쭉정이를 다 거두어들이지 않으며,
썩은 사과를 성한 사과와 같이
새 바구니에 담아둘 수는 없다.
그러므로 후천의 새 세상에 살아갈 수 있는 자들은
대두목께서 틀림없이 이러한 세상을 열어
주셨다는 것을 믿고, 후천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대두목께서 내놓으신 수도의 법방에 따라 수도하여
지금까지의 모든 허물을 고치고,
인간 본연의 양심을 회복하여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올바른 인간이 되어야만 병겁을 넘어
후천의 무궁한 복록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인들이 도의 근원이 끊어져
진멸지경에 닥친 천하창생들에게
대두목을 알리고 나아가 인간성을 회복시키고,
도의 근원을 세워 살리고자 하지만,
오직 욕심에 차고 재리에만 눈이 어두운
세상 사람들은 대두목을 믿지 않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 도의 근원을 찾아 인간성을 회복하여 자신을
완성시키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는 것이다.
봄은 인(仁)이지만, 가을은 의(義)이다.
의즉결단(義則決斷)이다.
즉 옳고 그른 것을 가린다는 말이다.
그러니 장차 괴병이 천하에 창궐하여
죽어갈 그러한 급박한 시기가 닥쳐
죽음에 임박할 때 ‘대두목을 부르면 살아나리라’
고 하면 어찌 믿지 않을 자가 있겠는가.
옥황상제님을 모시는 법이 진법이다.
진법을 알고 옥황상제님을 모실 때만이
신명이 응하고 모든 주문(呪文)은
효력을 발휘한다.
그러므로 장차 괴병이 창궐할 때
옥황상제님을 모시고, 기도하고,
공부하여 인간의 본질을 회복한다면
모두 살아날 수가 있는 것이다.
※ 참고 1; [만법전] 제세신약가
동서양 괴질 운수 소리 없이 죽을 적에
어이 아니 한심한가 앉아 죽고 서서 죽고
듣다 죽고 보다 죽고 가다 죽고 오다 죽고
울다 죽고 웃다 죽고 약국 죽고 의원 죽고
법도 죽고 죄도 죽고 운수 좋다 자랑 말고
의통인패수방패를 얻고 난 뒤 장담하소.
※ 참고 2; [용담유사] 권학가
그 말 저 말 다 던지고 한울님을 공경하면
아동방 삼 년 괴질 죽을 염려 있을소냐.
※ 참고 3; [격암유록] 가사총론
三年之凶 二年之疾 流行瘟疫萬國時에
삼년지흉 이년지질 유행온역만국시
吐瀉之病 喘息之疾 黑死枯血 無名惡疾
토사지병 천식지질 흑사고혈 무명악질
朝生暮死 十戶餘一 當服奄常常誦呪로
조생모사 십호여일 당복엄마상송주
萬怪皆消海印일세
만괴개소해인
≪삼년 동안 천하에 흉작이 오는데,
병겁이 2년 동안 돌아
지구에 유행성 온역병이 만국에 돌 때,
토사, 천식, 흑사, 고혈 등
하늘이 내린 괴질로 다 죽고 아침에 살아 있던
사람이 저녁에 보니 죽고 열 집에
한 집만 살아남는다. 이때를 대비하여
한복을 입고 모인 집에 주문을 하는
해인을 찾아 만(萬) 괴질을 면해 보소.≫
※ 참고 4; [격암유록] 말중운
天火飛落燒人間에 十里一人難不見이라
천화비락소인간 십리일인난불견
十室之內無一人에 一境之內亦無一人
십실지내무일인 일경지내역무일인
≪하늘에서 불비가 사람한테 내려 다타 죽는 때라.
이 때는 십리를 가도 한 사람도 못 본다네,
열 집에 한 사람 살기가 어렵고,
하루종일 걸어도 한 사람 만나지 못한다.≫
【전경 교운 2장 23절】
조정산성사께서
“時時黙誦 空山裡 夜夜閑聽 潛室中
시시묵송 공산리 야야한청 잠실중
分明造化 成功日 堯舜禹王 一切同
분명조화 성공일 요순우왕 일체동
이라” 말씀하셨도다.
그러나 듣고 있던 사람들은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하느니라.
註; 때때로 주문을 외는 소리가
공산(空山)안에서 들리는데
조용히 깊은 밤 숨겨진 방에서
한가하게 들리는 이 주문소리는
분명히 조화로서 성공하는 날이다.
이때는 요순우왕 모두가 일체로 같다.
※ 空山(공산=⊔);
공산(空山)이란 뜻은 비어 있는 산(山)이란 뜻으로
사람이 살지 않는 산중을 말하나
이치로서 풀어야 비결이 풀리는 것이다.
山(산)자에서 ❘(일)을 빼면 ⊔ (공산)이 된다.
이 말은 셋이 아니고 두 분
즉 兩山(양산)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正陰(정음) 正陽(정양)으로서
천지부모를 뜻하는 것이다.
주문에서는 无極神(무극신)과
太乙天上元君(태을천상원군)을 말한다.
이 두 분께 빌어야 성공한다는 뜻이다.
즉 미르세존과 관음, 이 두 분께 빌어야
분명히 조화로서 성공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순우왕 일체동」이란
요, 순, 우임금을
증산, 정산, 우당에 비유한 말로서
증산, 정산, 우당이 일체로 같다는 뜻이다.
증산께서는 미륵도 아니고
정산께서는 옥황상제도 아니며
우당께서도 미륵세존이 아니다.
이 세분은 모두가 옥황상제님의 일을
하러 오셨던 것이며 그 터전을 마련한 것이다.
※ 그리고 교운 1장 66절 현무경에 보면
益者三友(익자삼우)
巽者三友(손자삼우)라 하였다.
나에게 이익을 주는 세 명의 벗이 있고
나에게 손해를 주는 세 명의 벗이 있다.
즉 도판은 다섯명이 나와야 성도(成道)되어지는
오선위기(五仙圍碁)도수이다.
이 다섯명중에 박우당을 중심으로 해서
甑山(증산) • 鼎山(정산) • 牛堂(우당)은
巽者三友(손자삼우)이고,
牛堂(우당) • 朴成九都典任(박성구도전님) •
韓昇元大頭目(한승원대두목)은 익자삼우이다.
이 말은 증산, 정산, 우당을
세분하느님이라고 믿고 따르면 운수가 없으므로
내가 손해를 본다는 뜻이다.
그리고 박우당, 박성구도전님, 한승원대두목,
이 세분을 믿고 따르면 운수가 있으므로
나에게 이익이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우당께서는 화천 했으므로
세분의 山(산)이 兩山(양산=⊔)만 남게 되므로
兩山道(양산도)라 하였고
空山(공산=⊔)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空山(공산=⊔) 안에서
분명히 조화로써 성공을 한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증산성사께서는 금산사의 금불을
양산도(兩山道)라고 이름하시고 세속에 있는
민요 양산도와 비유하셨던 것이다.(예시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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