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절필동(萬折必東)의 의미

2. 이제 보은신은 우리에게

고도인 2013. 9. 7. 23:30

2. 이제 보은신은 우리에게

 

[전경] 공사 318

 

증산성사께서는 중국의 일을

신도(神道)로부터 바로 잡고자

종도들의 생각을 물어 공사를 처결하시고

우리가 부흥하리라고 예시하셨다.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의 조공을 받아왔으므로

이제 보은신은 우리에게 쫓아와서

영원한 복록을 주리니 소중화가 곧 대중화로

 

오랜 역사와 함께 찬란한 문화유산을 간직하며

한족(漢族)의 자부심으로 동양 문화권의

선두자리를 견지해 왔던 중국은 대륙이 광활한

만큼 이민족에 의해 많은 시달림을 당해 왔다.

중국이 외세의 침략을 당하면 이웃나라인

우리나라도 그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그래서 증산성사께서는 중국이 편안해야

우리나라가 안정을 찾고 부흥할 것이라는 관점에서

중국의 일을 신도(神道)로부터 바로잡고자

종도들의 판단을 들어 공사를 처결하셨다.

 

증산성사께서 원일과 덕겸에게

너희 두 사람이 덕겸의 작은 방에서

이레를 한 도수로 삼고 문밖에 나오지 말고

중국 일을 가장 공평하게 재판하라.

너희의 처결로써 중국일을 결정하리라이르시니

두 사람이 명하신 곳에서

성심성의를 다하여 생각하였도다.

이렛날에 원일이 불리워서

증산성사께청국은 정치를 그릇되게 하므로

열국의 침략을 면치 못하며 백성이 의지할 곳을

잃었나이다. 고서(古書)에 천여불취 반수기앙

(天與不取反受其殃)이라 하였으니

선생께서 무소불능하신 권능으로

중국의 제위에 오르셔서 백성을 건지소서.

지금이 기회인줄 아나이다고 여쭈어도

증산성사께서 대답이 없었도다.

덕겸은 이렛동안 아무런 요령도 얻지 못하였도다.

증산성사께서너는 어떠하뇨하고 물으시는

말씀에 별안간 생각이 떠올라 여쭈는지라.

세계에 비할 수 없는 물중지대(物衆地大)

예락문물(禮樂文物)의 대중화(大中華)

산하(山河)와 백성이 이적(夷狄:오랑케)

칭호를 받는 청()에게 정복되었으니

대중화에 어찌 원한이 없겠나이까.

이제 그 국토를 회복하게 하심이 옳으리라

생각하나이다.

증산성사께서 무릎을 치시며 칭찬하시기를

네가 재판을 올바르게 하였도다.

이 처결로써 중국이 회복하리라하시니라.

원일은 중국의 해원공사에만 치중하시는가하여

불평을 품기에 증산성사께서 가라사대

순망즉치한(脣亡卽齒寒)이라 하듯이

중국이 편안하므로써 우리는 부흥하리라.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의 조공을 받아 왔으므로

이제 보은신은 우리에게 좇아 와서

영원한 복록을 주리니 소중화(小中華)

곧 대중화(大中華)가 되리라일러 주셨도다.

 

이러한 중국해원공사의 취지하에

증산성사께서는 김 일부를 청국명부에 앉히시고

청주 만동묘(萬東廟)에 가서

청국 공사를 행하려 하나 길이 멀어 왕래하기

어렵고 불편하므로 청도원(淸道院)에서

공사를 행하리라하시고 청도원 류찬명의 집에

이르러 천지대신문을 열고 공사를 행하셨다.

[전경] 공사 26

 

그리고 증산성사께서 어느날

고부 와룡리에 이르사 종도들에게

이제 혼란한 세상을 바르려면

황극신(皇極神)을 옮겨와야 한다

말씀하셨도다.황극신은

청국 광서제(淸國 光緖帝)에게 응기하여 있다

하시며 황극신이 이 땅으로 옮겨오게 될 인연은

송우암(宋尤庵)이 만동묘(萬東廟)를 세움으로부터

시작되었느니라하시고 밤마다 시천주(侍天呪)

종도들에게 염송케하사 친히 음조를 부르시며

이 소리가 운상(運喪)하는 소리와 같도다

하시고 운상하는 소리를 어로(御路)라 하나니

어로는 곧 군왕의 길이로다.

이제 황극신이 옮겨져 왔느니라고 하셨도다.

이때에 광서제가 붕어하셨도다

[전경] 공사 322

 

광서제는 불과 4세에 청나라의 11

황제가 되었고, 그에 따라 황극신이 응기 되었다.

하지만 그는 어려서는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고,

장성한 후에는 혼란한 나라를 바로 세우려고

충신들의 간언을 받아들여 1898년에

변법자강운동(變法自彊運動)을 추진하는 등

개혁을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여 보았으나,

이미 그동안 수렴청정으로 정권을 유린해 온

이모 서태후에게 밀려 궁궐 안의 중화전에

유폐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는 서양의 군대를 피해 잠시 서안으로 피신한

적도 있었지만, 황제 재위 대부분의 기간 동안

좁은 중화전에 갇혀 나오지 못했다.

 

이런 정황에서 증산성사께서는

광서제에게 응기하여 있었던 황극신을

거두시어 조선으로 불러들이셨다.

그 방법은 장례 때 상여를 메고 가는 노랫가락으로 시천주를 읽는 것이었다.

운상할 때 부르는 노래는 지방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개 상여 앞에 선 사람이

북망산천 멀다더니 내 집 앞이 북망일세.”,

이제가면 언제 오나, 오실 날이나 일러주오.”라고

선창을 하면,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 , , , ,

, .” 하면서 그 뒤를 받는 형식이다.

증산성사께서는

를 두고 어로(御路)’라 하셨다.

즉 상여 메고 가는 노랫가락으로 시천주를 부르자

그로 인해 곧 군왕이 가는 길이 만들어졌고,

그 길을 따라 황극신이 광서제를 떠났으며

자연스레 광서제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최근 중국 당국은 광서제의 유골을 조사하여

독약인 비상(砒霜) 성분이 다량 검출되었음을

확인하였고, 그에 따라 광서제는 병사한 것이

아니라 독살 당하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광서제의 의복에도 다량의 비상 성분이 함유되어

있었다는 점으로 보아, 광서제는 비상을 한 번에

많이 먹고 죽은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

음식물을 통해 조금씩 먹었고 그것이 누적되면서

점차 병약해져 죽어갔음이 분명하다.

당시 광서제는 황제라고는 하나 아무런 실권이

없었으며, 유폐된 채 좁은 건물 밖으로는 아예

나오지도 못하였고, 음식물에 몰래 섞여 들어오는

비상 때문에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으며,

그나마 사랑했던 단 한 명의 여인 진비(珍妃)마저

서태후에게 죽임을 당한 후여서 삶에 아무런

의욕이 없었다.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던

광서제는 하루라도 빨리 죽고 싶었다.

광서제가 겪는 모든 고통의 배후에는

황제 위에 군림하는 서태후가 있었다.

그런데 광서제가 죽은 바로 그 다음날,

필적할 라이벌이 없었던 당대 최고의 권력자

서태후도 죽어버렸다.

따라서 이 공사로 인해 황극신은

우리나라로 넘어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 증산성사께서는

황극신이 우리나라로 오게 될 인연은

송시열의 만동묘에서 비롯된다고 밝혀주셨다.

송시열은 명나라의 후계자인 조선이 명의

마지막 연호인 숭정(崇禎)을 연호로 사용하고,

만동묘를 지어 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보내 준

명나라 14대 황제인 만력제(萬曆帝)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崇禎帝)

신위를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송시열은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를

군신관계로 파악하고 명이 멸망한 이후에는

조선이 중화문명의 계승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송시열이 죽은 뒤, 그의 제자인 권상하(權尙夏)

1703년에 스승의 유지(遺志)를 이어

충북 괴산에 만동묘를 세우고

명 황실에 제사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러한 만동묘의 위세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만동묘의 제사는 화양서원에서 주관하였는데,

그 서원에서 아무 날 아무 시에 만동묘에서

제사를 거행하니, 제수전에 필요한 얼마를 당장

갖다 바쳐라.’는 화양묵패(華陽墨牌)를 발송하면,

이유 불문하고 전답을 팔아서라도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여 무조건 대어야 했다.

화양묵패는 벼슬아치에게든 양반에게든 서민에게든

신분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발송되었고,

이에 불응하면 당장 끌려가 협박과 폭언을 듣고

매를 맞는 등 심한 능욕을 당했다고 한다.

조선 말기에 서원의 행패야 심했던 것이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만동묘를 등에 업은 화양서원의

횡포야말로 가장 극심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출세하기 전 이곳저곳을 떠돌던

젊은 시절에 만동묘 화양서원을 지나다가

그곳의 유생들에게 잡혀 큰 봉변을 당했던 일이

있었고, 그 치욕을 결코 잊을 수 없어 정권을

잡자마자 1865년에 만동묘에 모셔진 명 황실의

신위를 서울로 옮겨버리고 만동묘와 화양서원을

아예 폐쇄시켜버렸던 사건은 꽤나 유명하다.

대원군이 실각하자 유림들은 만동묘와 화양서원을

다시 복원시켰으나 일제는 1942년에

강제로 철거해버렸고, 그 후 한동안

터만 남아 있다가 최근에 다시 복원되었다.

명나라 황실의 신위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만동묘라는 존재는 중국을 사대한다는 측면에서

비판적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지 간에 지난 날

명 황실을 제사 지내왔다는 사실은

황극신이 우리나라로 넘어올 수 있게 되는

인연을 만들어주었고, 그것은 우리나라가

중국을 능가하는 문명을 지니는

상등국이 될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증산성사께서는 류찬명의 집에서 천지의

대신문(大神門)을 여시고 공사를 행하셨으니,

이는 대신명(大神明)이신 관성대제군께서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주셨는데

이 공사는 청국의 황극신을 운상하는 소리를 내어

만동묘에 응기케 함으로써

청국 광서제가 붕어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황극신은 관성대제군께

응기하게 되었다.

 

이러한 공사는 조정산성사에 의해서도 연결되었고

실제로 신명의 감응이 있었음을

아래의 구절에서 엿볼 수 있다.

 

[태극진경] 586.

 

조정산성사께서 화양동(華陽洞)

거동(擧動)하셔서 만동묘(萬東廟)의 묘지(廟趾)

묘비(廟碑)를 감()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이곳 청주(淸州) 화양동(華陽洞)

()() 양국(兩國)이 공존하는 곳이니라.

내가 이곳에 온 것은 황극신도수(皇極神度數)

대신문도수(大神門度數)를 보려 함이니라.

하시니라. 다시 암서재(岩捿齋)를 감()하시는

동안 일모(日暮)하매화양구곡(華陽九曲)

다 볼 것은 없지마는 온 김에 오곡(五曲)까지

가려 하였으나 일모(日暮)하였으니

신도(神道)로써 공사(公事)하리라.하시고

화양구곡(華陽九曲)을 떠나시니라.

 

이제까지 중국을 대국이라 일컬으며

모화사상에 심취해 있던 약소민족이

증산성사의 해원도수에 따라

만동묘를 기점으로 하여 황극신이 모셔짐에 따라

대중화가 되고 보은신이 우리에게 옴으로써

영화와 복록을 얻게 되었다.

 

원시반본의 대원칙에 따라 중국이

한족(漢族)을 중심으로 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증산성사께서 보신 공사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사는 단순히 중국의 해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순망즉치한이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이 제 위치를 찾아 편안해야

우리나라가 안정을 갈구할 수 있고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여 동북아시아가 평화로워지면

세계 또한 화평의 시대를 맞게 될 것이다.

 

따라서 만동묘에 행해진 공사의 의의는

지대하며 이러한 개개의 공사가 도수에 따라

하나하나 이루어질 때 우리나라는

만국을 활계하고 문명이 크게 개화하여

도화낙원(道化樂園)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또한 증산성사께서는

황극신이 우리나라로 오게 될 인연은

송시열의 만동묘에서 비롯된다고 밝혀주셨다.

 

그러나 명나라 황실의 신위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만동묘라는 존재는

중국을 사대한다는 측면에서

비판적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지 간에 지난 날

명 황실을 제사 지내왔다는 사실은

황극신이 우리나라로 넘어올 수 있게 되는

인연을 만들어주었고, 그것은 우리나라가

중국을 능가하는 문명을 지니는

상등국이 될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만동묘를 기점으로 하여 황극신이 모셔짐에 따라

대중화가 되고 보은신이 우리에게 옴으로써

영화와 복록을 얻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