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절필동(萬折必東)의 의미

1. 황극신(皇極神)이 봉안되어 있는 만동묘

고도인 2013. 9. 7. 23:25

1. 황극신(皇極神)이 봉안되어 있는 만동묘

 

[전경] 교운(敎運)250

 

갑오년(1954) 삼월에 조정산께서

안상익(安商翊) 외 네 명을 대동하고

청천에 가셔서 황극신(皇極神)이 봉안되어 있는

만동묘 유지(遺趾)를 두루 살펴보고 돌아오셨는데

돌아서실 때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밤중에 폭풍과 뇌성 벽력이 크게 일어

산악이 무너지는 듯하니라.

다음날에 숭정 황제 어필(崇禎皇帝御筆)

비례 부동(非禮不動)이 새겨 있는

첨성대 아래쪽 암벽의 좌편에 닫혀있던

석문(石門)이 두 쪽으로 갈라져 내리고

그 안의 옥조빙호(玉藻氷壺)의 네 자와

만력어필(萬曆御筆)의 네 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전하였느니라.

 

이 지역에는 예로부터

화양동의 석문이 열리면 천지가 개벽되고

진인(眞人)이 세상을 구제 하리라는 말이

구전(口傳)되어 왔다고 전하여 온다.

@ 숭정황제어필(崇禎皇帝御筆);

명나라 숭정황제(崇禎皇帝)의 필적이라는 뜻.

 

@ 만력어필(萬曆御筆); 만력은 중국(中國)

()나라 신종 때의 연호(年號)

서기(西紀) 1573년부터 1619년까지를 말하며

어필(御筆), 임금의 글씨란 뜻이다.

즉 명나라 신종황제(만력萬曆)의 글이라는 뜻.

 

이 공사를 1954(갑오년) 3월에 행하여

황극신이 들어오는 계기가 되었다.

 

@ 첨성대(瞻星臺); 충북 괴산군

청천면에 있는 화양동 5곡에 있다.

첨성대 아래의 대명천지 숭정일월

(大明天地 崇禎日月)은 송시열의 글씨이고

옥조빙호(玉藻氷壺)는 명나라 신종,

비례부동(非禮不動)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글씨에서 따온 것인데

숙종 때 판서 민정중이 북경에 갔을 때 구해서

송시열에게 준 것을 새겼다고 한다.

 

옥조빙호의 옥조는 임금의 면류관에 달았던

옥을 뜻하며 빙호는 얼음을 넣는 항아리이다.

첨성대에서 조금 올라간 곳의 큰 바위에 새겨진

만절필동(萬折必東)

선조 임금이 임진왜란 후에 쓴 글씨로

경기도 가평군의 조종암에 새겨진 것을

베껴 옮긴 것으로 의리사상을 말한다.

 

 

                              만절필동(萬折必東)

 

화양 3(화양 5) 도명산 오르는 길에

왼쪽에 우뚝 솟은 바위(첨성대)위로

"만절필동(萬折必東)" 이라 각인되어있다.

 

만절필동은 일만 번 꺾이더라도

반드시 동쪽으로 간다는 뜻으로 ,

결국은 본뜻대로 됨을 이르는 말

충신(忠臣)의 절개(節介)는 꺾을 수 없다는 말.

 

@ 만동묘 [萬東廟]

 

 

 

 

 

 

 

 

 

 만동묘의 위치는 동천구곡(洞天九曲)

3곡인 읍궁암(泣弓巖) 위쪽에

낙양산(洛陽山)을 배후로 북향하고 있다.

 

만동묘라는 이름은

경기도 가평군에 있는 조종암(朝宗巖)에 새겨진

선조의 친필인 萬折必東(만절필동)’이란 글에서

자를 취해 지은 것이다.

 

 

 

                                 만동묘 내부모습

 

내부모습을 보면 신종(神宗)과 의종(毅宗),

관운장 세 분의 위패를 모신 것이 보인다.

 

 

 

 

                                                                                  관운장

 

천하영웅 관운장은 화룡도에서

적장 조조를 살려 보내 줄 정도로 의리가

깊은 장수로서 충의(忠義)의 표상이었다.

그는 죽어서 수많은 천지신명들의

신망(信望)을 얻어 관성제군(關聖帝君)으로

추대 되었으며 천상 복마대제로서 중국 사람들이

오래 동안 민간신앙으로 모시어 왔다.

 

왜인들이 불의하게 저의 스승 나라인

조선을 침략했던 임진왜란 때

관운장의 신명이 나타나

불의한 왜적을 무찌르는데 큰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감사의 뜻으로

조선강토 곳곳에 관운장의 사당을 세웠다.

 

 

 

                            만동묘로 오르는 계단

 

 

만동묘로 오르는 계단은 너무 좁고 경사가 심해

도저히 몸을 앞으로 하고 오를 수 없는데,

이는 정면으로 오르지 못하고 측면으로

공손하게 국궁자세로 오르도록 만든 것이다.

 

조정에서는 명에 대한 보은의 의리와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자 만동묘를 보호해주었다.

 

@ 비례부동(非禮不動)

 

화양동 제5곡인 첨성대에서 계곡 쪽으로

20m 내려온 지점에 있다.

 

 

 

 

 

비례부동우측에는 崇禎皇帝御筆

(숭정황제어필) 여섯 글자가

작은 글씨로 새겨져 있다.

숭정황제는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을 가리키며 어필은 황제의 글씨란 뜻이다.

 

비례부동네 글자는 바로

명나라 의종 황제의 글씨인 것이다.

 

비례부동의 뜻은 어떤 의미인가?

원래 이 말은 중용(中庸)에 나오는 한 구절인데,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근원이자 핵심으로 이해되었다.

 

,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하는

출발점이자 요체는 수신(修身)에서 시작되며,

수신의 핵심은 비례부동에 있다는 인식이다.

 

예가 아닌 비례(非禮)’

사사로운 욕심을 의미하며

비례부동이란 말 뜻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고 사사로운 욕심을 버린다는

뜻으로 예()는 곧 하늘의 이치로써,

사사로운 인간의 개인 욕심을 제거할 수 있는

근원이자 방편인 것이다.

 

()의 의미를 다시 대순진리 속에서

찾아보면 먼저 대순지침에는

 

예라는 것은 사람으로서

일생동안 움직일 때나, 정지할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누워 있을 때나(起居動靜)

가리지 않고 항상 정도를 넘는 일이 없이,

공경심으로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여 주는

인도(人道)를 갖추는 것을 이른다.고 하였다.

예라는 것은 인간으로서 꼭 지켜야 할

기본적인 것으로써 모든 일이

예에서 기본 하는 것임을 알 것이다.

 

대순진리회요람을 보면

마음의 현상을 나타내는 것은 몸이니

모든 행동을 법례에 합당케 하며

도리에 알맞게 하고 의리와 예법에 맞지 않는

허영에 함부로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

구절이 있다.

예에 맞지 않은 것에는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비례부동)것이

바로 수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며

안신(安身)을 이루는 길이다.

예를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형식에 빠져 본질을 잃어버리게 되고,

반대로 예에 소홀해지면

경위를 잃고 분수를 망각해 혼란을 야기한다.

 

이와 같이 비례부동이나 만절필동, 옥조빙호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같은 뜻으로

충신의 굳은 절개를 말하는 것이다.

즉 혈식천추 도덕군자와 같은 의미이다.

 

조종암(기념물 제28호 시대: 조선 숙종)

 

조종암이란 바위에 새긴 암각문, 비석, 단지(壇址)

등의 유적을 통틀어 일컫는 것으로

암각문은 朝宗巖(조종암)』『思無邪(사무사)

日暮途遠 至通在心(일모도원 지통재심)

萬折必東 再造瀋邦(만절필동 재조심방)등으로

한 곳에 모여 있는 여러 개의 바위에 새겨져 있다.

 

비석은 이 바위들의 바로 앞쪽에 세워져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제사를 지내는

대통묘가 있으며 그 앞으로는

맑은 조종천이 산굽이를 돌아 흐르고 있다.

조종암을 이곳에 세우게 된 이유는

조종천이 있기 때문이다.

 

조종(朝宗)이란 명칭이 여러 강물이

바다에 흘러 들어가 모인다는 뜻이면서 또한

제후가 천자를 알현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조종천이

조종암을 조성한 당시의 유신들에게 선택되어

숭명배청의 장소로 조성된 것이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서울 남한산성에서

40여일 간을 청국오랑캐와 대항하며 싸우던

인조대왕(仁祖大王)과 신하들은

전세가 크게 불리하게 되자 그래도 끝까지

죽음으로 싸워야 된다고 하는

청음 김상헌(金尙憲)선생의 주장과

죄없는 백성을 더이상 흉악한 오랑캐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게 할 수 없으니

차라리 청나라에 항복하자는

최명길(崔鳴吉)의 주장이 맞서게 되었다.

 

이와 같은 와중에서 인조대왕은

한때의 분함을 참고 나라를 이어 나가겠다는

결의로 항복하게 되었는데

저 흉악 무도한 오랑캐들은 만고에 없는

굴욕적 항복 조건을 요구하였으니

두 왕자와 척화파 대신의 자제 등을 인질로

무고한 남녀 약100만명을 포로로 잡아가고,

또 삼학사(三學士)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을

죽였으니 이는 우리 민족의 긍지에 먹칠을 하고,

그 정기를 꺾어 버리려는

악랄한 폭행이었던 것이다.

 

효종대왕(孝宗大王)이 심양에서

9년동안 인질에서 풀려 돌아올 때

심양에 포로로 잡혀와 있는 명나라

구의사(九義士)를 함께 데리고 서울로 왔으니

이는 장차 북쪽 청나라 오랑캐를 칠 때

안내를 맡은 향도관으로써

한민족(漢民族)의 협조를 받고자 함이었다.

 

효종이 임금이 되어

우암 송시열(宋時烈) 선생과 이완() 대장을

주축으로 북벌의 큰 사업을 추진하던 중

불행하게도 효종이 일찍 죽게 되니

우암 송시열선생은 초야에 물러나 살게 되었지만

효종의 큰 사업인 북벌계획이 계승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숙종10년인 서기 1684년에

가평군 하면 대보리 대보산 절벽 바위 위에

심양 옥중에서 청음 김상헌선생이 구하여 온

의종(毅宗)황제 어필인 사무사(思無邪: 생각에

사특함이 없음)’ 3자를 본뜬 것이다.

아래 사진은 효종임금의 글씨로

일모도원 지통재심(日暮途遠, 至痛在心)

 

 

 

 

이것을 효종이 대한에게 내려 준

일모도원 지통재심(日暮途遠 至痛在心: 해는 저물

고 갈 길은 먼데 지극한 아픔이 마음속에 있네)’

써서 그 당시 가평군수이던 이제두(李齊杜)에게

부탁하여 보냈다.

이 군수가 허격(許格) 백해명 (白海明)

여러 선비들과 힘을 합하여 이를

선조대왕 어필인 만절필동 재조번방

(萬折必東, 再造藩邦: 일만번 꺾여도 반듯이

동역으로 흐르거니 명나라 군대가 왜적을 물리치고

우리나라를 다시 찾아 주었네)

낭선군 이우가 쓴 조종암(朝宗岩: 임금을 뵈이는

바위)등을 함께 조각하고,

의종황제가 순국한 날인 319일에

임진왜란 당시 우리를 도와주었던

신종황제의 은혜에 보답하여

제사를 지내면서부터 유래가 되었다.

 

 

                                    조종재(朝宗齋)

 

조종암 - 경기도기념물 28

경기도 가평군 하면 대보리

도장골입구 정류장옆 산기슭

 

朝宗(조종)의 뜻

강물이 바다에 흘러들어가 모임.

제후가 천자를 알현하는 것.

 

순조 4(1804)에는 이러한 유래를 적은 비를

암벽 앞에 세웠는데 ,

비문은 조진관이 짓고 김달순이 썼다.

또한 순조 31(1831)에는

명나라 9의사(병자호란 때 청에 잡혀간 봉림대군과

합심하여 인조 23년 대군이 귀국할 때 우리나라로

망명했던 명나라 사람들)의 후손이 이곳에 와서

지방 유림들과 함께 대통행묘(大統行廟)

구의행사(九義行祠)를 세워

명나라 태조와 9의사를 위한 제사를 지내었다.

 

조선시대 당시 명나라를 숭상하고

청나라를 배척했던 소위 숭명배청(崇明排淸)

사상을 잘 보여주는 유적이라 할 수 있다.

 

@ 옥조빙호(玉藻氷壺); 옥조빙호는

옥과 같이 맑고, 깨끗하고 투명하게

순결한 일심을 가진 마음을 말한다.

그 절개가 대쪽과 같아 굽힐 줄 모르며

죽음을 불사하고 의로운 일을 행하며

사리에 맞지 않으면 만금의 유혹을 물리치며,

어떠한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는 마음을 일컫는다.

 

옛 충신들은 이러한 마음으로 임금을 보필하면서

이 나라를 위난에서 구해왔던 것이다.

이것이 한 민족의 정신이며 군자의 정신이다.

군자는 현실 속에 살면서도 진리를 구현하고

이상향을 이루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는 사람이다.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 이름이

청사에 빛나며 충의 표본이 된 사람이 있으니,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이다.

자는 근보, 호는 매죽헌이다.

그가 막 태어나려고 할 때 공중에서

"낳았느냐?"하고 세 번 묻는 소리가 났으므로

삼문이라 이름 지었다.

세종대왕 측근에서 좋은 건의를 많이 하였으며,

신숙주등과 같이 정음청에서 훈민정음 창제에도

참여를 하였다.

1453년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참살하고 집현전의 여러 신하들에게

정란공신의 호를 내리니 모두들 순번으로

축하연을 베풀었으나 그는 수치로 여기고

혼자만이 연회를 베풀지 않았다.

1453년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니

그는 예방승지로서 국새를 안고 통곡하였으며

이듬해 그의 아버지 승,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등과 상왕(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같이 모의하던 김질의 밀고로

세조의 친국으로 가혹한 고문 끝에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세조가 그를 친국하는 자리에서

 

세조 : 무엇 때문에 나를 배반 했느냐?

삼문 :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고 했을 뿐입니다.

하늘에 두 태양이 없고 땅에 두 임금이 없으니

상왕이 계시는데 나리께 충성이란 왠 말이며

무엇을 배반이라 합니까?

나리는 항상 주공(周公)을 인용하셨는데

주공도 이런 짓을 했습니까?

 

세조 : 너는 나의 녹을 먹지 않았느냐.

녹을 먹고 배반하는 자는 반역자다.

명분은 상왕을 복위시킨다지만 사실은

자기 잇속을 위한 것이 아니냐?

 

삼문 : 상왕이 계신데 나리가 어찌 저를

()으로 할 수 있습니까?

저는 나리의 녹을 먹지 않았습니다.

이에 세조는 크게 노하여 무사들로 하여금

불에 시뻘겋게 단 인두로 삼문의 다리를

잘라버리니 그는 안색하나 변치 않고

조용히 "나리의 형벌은 참혹합니다 그려.

더 있으면 하십시오. 한번 먹은 마음이

형벌로 변할 수 있습니까?"하였다.

세조가 조사를 해보니 과연 세조가 준 녹은

하나도 먹지 않고 별실에 쌓아 두었으며,

자기 방에는 거적을 깔았고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살림이었다.

그의 아버지 또한 형장에서

"내가 늙어 명분 없이 죽는 줄 알았더니

아들을 잘 두어 죽을 자리를 찾았으니

내가 효자를 두었구나"하면서 웃으며 죽어갔다.

이에 반하여, 현대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잇속에만 치우쳐

충효사상(忠孝思想)이란 찾아볼 수 없으니

너무나도 대조적인 흐름에 빠져 들고 있는

실정을 볼 때, 한번쯤 옥조빙호의 글을 읽고

생각을 하여 반성의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증산성사께서 "일심 가진 자에게 지체 없이

베풀어 주리니……." 라고 하셨다.

 

만동묘로 황극신을 옮기시는 공사

 

숭명보은(崇明報恩)과 만동묘(萬東廟)

 

임진란이 끝난 직후 조선 조정에서는

자국을 구원하기 위해 명국에서 왔다가

순절한 사람이나 공이 있는 사람들의 노고에 대한

보은으로 망일사은비(望日思恩碑 - 공주),

거사비(去思碑 - 현재 서울 명지대학교와

대신고등학교 교정에 있음), 종덕비(種德碑),

민충단(愍忠壇), 선무사(宣武祠), 무열사(武烈祠)

등을 건립하여 한말까지 300년간 치제(致祭)하여

오다가 왜적의 침략으로 철폐되었다.

그리고 병자호란 이후 북벌계획을

쉽사리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한 숙종은

갑신년(숙종 30)에 대보단(大報壇)을 세웠다.

그 후 역대 국왕이 200년간 국가적 최고

의절(儀節)인 사천지례(祠天之禮)의 대사(大祠)

명나라의 태조, 신종, 의종 세 황제에게

친향(親享)하였다.

 

또 우암선생과 당대 유학가의 숭명보은사상의

일환으로 당시의 청주(현재의 충북 괴산군 화양동)

에 만동묘(萬東廟)와 경기도 가평에

조종암(朝宗巖) 대통단(大統壇)이 건립되었다.

 

만동묘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효종대왕의 승계로 은거(隱居)하게 되면서

현종대왕 15년 갑인(1674)에 화양동 중간계곡

암석 서편에 의종황제 어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 - 노봉(老峰) 민정중(閔鼎重)

선생이 북경에서 구해옴)과 선조대왕 어필인

만절필동(萬折必東)을 조각하고 이후 신종,

의종의 묘를 세워 봉제(奉祭)할 계획을 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우암이 죽을 때

제자 권상하(權尙夏)에게 유명을 내리게 된다.

 

그 후 15년이 경과한 숙종 29

계미년(1703)에 권상하, 정호(鄭湖), 민정중 등이

우암선생의 유명을 따라 묘를 건립하고

매년 춘추 2회씩 봉제하였다.

이처럼 유학자들의 춘추대의(春秋大義)의 표상이며

예의동방의 상징처로써 숭앙되다가

대원군이 실각한 후 만동묘는 이항로, 최익현 등의

항소로 10년만에 다시 중수복건(重修復建)되고

국비로 치제하다가 일제통치로 철폐되었다.

후에 유림이 존화계(尊華界)를 조직하여

자비로 봉사하였으나 일제의 압박으로

중단되었으며 8. 15광복 후에는

유지설단행사(遺址設壇行祠)를 기획하였다.

은혜를 입었으면 그 은혜에 보답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중국의 은혜를 많이 받아 왔다.

 

특히 두 나라의 관계는 조선이 건국되면서부터

긴밀해져서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과 같은

큰 시련이 있을 때마다

명나라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비록 명나라가 청국에 의해 멸망되었으나

우리나라는 명나라에 대한 보답으로

많은 비와 제단을 세우고 제향 하였다.

그 중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의 만동묘는

명나라에 대한 춘추대의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혼란한 세상을 바르게 하기위한

황극신(皇極神)신이 옮겨 오게 되는 인연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