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순 전경 ★/●•―‥교 운

교운(敎運)2장 48 ~ 54 까지

고도인 2008. 6. 8. 14:32

교운(敎運)2장 48 ~ 54 까지

 

 

48. 정산께서 마하사에서 도수를 마치고 도장에 돌아오시니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느니라. 정산성사께서 그 자리에서,


少年才氣拔天摩 手把龍泉幾歲磨 世界有而此山出

소년재기발천마 수파용천기세마 세계유이차산출

紀運金天藏物華 應須祖宗太昊伏 道人何事多佛歌

기운금천장물화 응수조종태호복 도인하사다불가


의 증산성사의 글귀를 외우시고 “증산성사께서 짜 놓으신 도수를 내가 풀어나가노라”고 말씀하셨도다.


◐ 소년의 재주와 기운은 하늘에 닿을 만큼 높고, 용천검을 손에 쥐고 수많은 세월을 갈고 닦아 왔노라. 세계의 모든 生存(생존)은 이 山(산)으로부터 나오게 되어 있다. 금천운(金天運=우주의 가을 운).으로 돌아오니 감추어졌던 물건이 빛이 나는구나. 응당 모든 조종은 태호 복희씨인데 道人(도인)들은 어찌하여 불교(佛敎) 노래만 많이 하는가?

※ 山(산)이란 어떤 의미 인가? 山(산)은 宗敎(종교)의 宗(종)자위에 山(산)을 올려놓으면 숭상할 崇(숭)자가 된다. 그래서 모든 宗敎(종교)에서 崇尙(숭상)하는 신앙의 대상을 山(산)이라고 표현하는데, 山(산)은 제일 높으신 우주 삼라만상의 주인을 의미 한다. 우주 삼라만상의 주인을 西敎(서교)에서는 하느님, 천주님, 불교에서는 미륵, 유교에서는 조물주 또는 옥황상제님이라고 하였는데 전경에서는 山君(산군)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모든 만물은 이 山(산)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이 감추어졌던 山(산)이 그 정체가 밝혀지니 화려하게 빛이 나는 것이다. 그 山(산)은 우주의 가을 세상에 인간 추수하러 오시는 하느님이신데 그 분을 태호伏(복) 즉 人犬(인견=개띠)으로 오신 하느님(미륵) 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어쩐 일로  많은 도인들은 서가여래만 찾는단 말인가? 이 글의 내용은 증산께서 후천을 여는 실마리를 암시한 내용이며 내장산에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그 결과로 내장산이란 그 속에 山(산)을 감추어 놓았다는 뜻이다. 그러면 전경 마지막 예언내용을 보자. 後人山鳥皆有報(후인산조개유보)라고 하였다. 분명히 내 다음 사람은 山(산)과 鳥(조)라고 하였다. 山(산)은 龍(용)으로도 표현되며 鳥(조)는 鳳(봉)으로 되니 이 의미를 잘 알아야 한다. 그래서 龍鳳(용봉)도수인 것이다. 그러므로 금수 대도술(禽獸大道術)은 용봉대도술(龍鳳大道術)이란 뜻이 되며 그 하느님은 태호 伏(복), 즉 人犬(인견)으로 깨띠로 오신다는 뜻이다.


49. 박한경(朴漢慶)이 정산성사의 부르심을 받고 청주의 근방에 있는 청천면 화양동의 만동묘(萬東廟)를 찾으니 건물은 왜정 때에 없어지고 빈터만 남아있는 사정을 정산께 아뢰었도다. 또 그는 정산성사의 분부를 쫓아 류한규(柳漢珪)를 데리고 화양동에 가서 정산께서 거처하실 곳을 마련하고 기다렸으되 다음 기회에 미루신 소식을 듣고 되돌아왔도다. 신묘년 삼월에 있었던 일이니라.


50. 갑오년(1954년) 삼월에 정산께서 안상익(安商翊) 외 네 명을 대동하고 청천에 가셔서 황극신(皇極神)이 봉안되어 있는 만동묘 유지(遺趾)를 두루 살펴보고 돌아오셨는데 돌아서실 때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밤중에 폭풍과 뇌성 벽력이 크게 일어 산악이 무너지는 듯하니라. 다음날에 숭정 황제 어필(崇禎皇帝御筆)의 비례 부동(非禮不動)이 새겨 있는 첨성대 아래쪽 암벽의 좌편에 닫혀있던 석문(石門)이 두 쪽으로 갈라져 내리고 그 안의 옥조빙호(玉藻氷壺)의 네 자와 만력어필(萬曆御筆)의 네 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전하였느니라.


◐ 이 지역에는 예로부터

「화양동의 석문이 열리면 천지가 개벽되고 진인(眞人)이

세상을 구제 하리라」는 말이 구전(口傳)되어 왔다고 전하여 온다.

 

@ 숭정황제어필(崇禎皇帝御筆); 명나라 숭정황제(崇禎皇帝)의 필적이라는 뜻.

@ 만력어필(萬曆御筆); 만력은 중국(中國) 명(明)나라 신종 때의 연호(年號)로 서기(西紀) 1573년부터 1619년까지를 말하며 御筆 [어필] 임금의 글씨란 뜻이다. 즉 명나라 신종황제(만력萬曆)의 글이라는 뜻. 이 공사로 1954년(갑오년) 3월에 행하여 황극신이 들어오는 계기가 되었다.

@ 첨성대(瞻星臺); 충북 괴산군 청천면에 있는 화양동 계곡에 있다. 첨성대 아래의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은 송시열의 글씨이고 옥조빙호(玉藻氷壺)는 명나라 신종, 비례부동(非禮不動)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글씨에서 따온 것인데 숙종 때 판서 민정중이 북경에 갔을 때 구해서 송시열에게 준 것을 새겼다고 한다. 옥조빙호의 옥조는 임금의 면류관에 달았던 옥을 뜻하며 빙호는 얼음을 넣는 항아리이다. 첨성대에서 조금 올라간 곳의 큰 바위에 새겨진 만절필동(萬折必東--중국의 강물이 도중에 만 번을 돌더라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은 선조 임금이 임진왜란 후에 쓴 글씨로 경기도 가평군의 조종암에 새겨진 것을 베껴 옮긴 것으로 의리사상을 말한다.

              

             

                  

 

                    큰 바위에 뚜렷하게 새겨진 만절필동


조종암(기념물 제28호 시대: 조선 숙종)


@ 조종암(朝宗巖)은 가평군 하면 대보리산176-1에 소재한 바위 위에 문자를 조각하고 비석을 세우고 단(壇)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면서부터 붙여진 이름이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서울 남한산성에서 40여일간을 청국오랑캐와 대항하며 싸우던 인조대왕(仁祖大王)과 신하들은 전세가 크게 불리하게 되자 그래도 끝까지 죽음으로 싸워야 된다고 하는 청음 김상헌(金尙憲)선생의 주장과 죄없는 백성을 더이상 흉악한 오랑캐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게 할 수 없으니 차라리 청나라에 항복하자는 최명길(崔鳴吉)의 주장이 맞서게 되었다. 이와 같은 와중에서 인조대왕은 한때의 분함을 참고 나라를 이어 나가겠다는 결의로 항복하게 되었는데 저 흉악 무도한 오랑캐들은 만고에 없는 굴욕적 항복 조건을 요구하였으니 두 왕자와 척화파 대신의 자제 등을 인질로 무고한 남녀 약100만명을 포로로 잡아가고, 또 삼학사(三學士)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을 죽였으니 이는 우리 민족의 긍지에 먹칠을 하고, 그 정기를 꺾어 버리려는 악랄한 폭행이었던 것이다.

효종대왕(孝宗大王)이 심양에서 9년동안 인질에서 풀려 돌아올 때 심양에 포로로 잡혀와 있는 명나라 구의사(九義士)를 함께 데리고 서울로 왔으니 이는 장차 북쪽 청나라 오랑캐를 칠 때 안내를 맡은 향도관으로써 한민족(漢民族)의 협조를 받고자 함이었다.


 

             <인조대왕 어필>  만절필동 재조번방(萬折必東, 再造藩邦)


효종이 임금이 되어 우암 송시열(宋時烈) 선생과 이완(浣) 대장을 주축으로 북벌의 큰 사업을 추진하던 중 불행하게도 효종이 일찍 죽게 되니 우암 송시열선생은 초야에 물러나 살게 되었지만 효종의 큰 사업인 북벌계획이 계승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숙종10년인 서기 1684년에 가평군 하면 대보리 대보산 절벽 바위 위에 심양 옥중에서 청음 김상헌선생이 구하여 온 의종(毅宗)황제 어필인 ‘사무사(思無邪: 생각에 사특함이 없음)’ 3자를 본뜬 것이다.


 

 

     효종임금의 글씨  일모도원 지통재심(日暮途遠, 至痛在心)



이것을 효종이 대한에게 내려 준 ‘일모도원 지통재심(日暮途遠, 至痛在心: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먼데 지극한 아픔이 마음속에 있네)’을 써서 그 당시 가평군수이던 이제두(李齊杜)에게 부탁하여 보냈다. 이 군수가 허격(許格) 백해명 (白海明) 등 여러 선비들과 힘을 합하여 이를 선조대왕 어필인 만절필동 재조번방(萬折必東, 再造藩邦: 일만번 꺾여도 반듯이 동역으로 흐르거니 명나라 군대가 왜적을 물리치고 우리나라를 다시 찾아 주었네)과 낭선군이우가 쓴 조종암(朝宗岩: 임금을 뵈이는 바위)등을 함께 조각하고, 의종황제가 순국한 날인 3월 19일에 임진왜란 당시 우리를 도와주었던 신종황제의 은혜에 보답하여 제사를 지내면서부터 유래가 되었다.


 

                                 조종재(朝宗齋) 


조종암 - 경기도기념물 28호


가평군 하면 대보리 도장골입구 정류장옆 산기슭사면

朝宗(조종)의 뜻 ① 강물이 바다에 흘러들어가 모임.

               ② 제후가 천자를 알현하는 것.


순조 4년(1804)에는 이러한 유래를 적은 비를 암벽 앞에 세웠는데 , 비문은 조진관이 짓고 김달순이 썼다.

또한 순조 31년(1831)에는 명나라 9의사(병자호란 때 청에 잡혀간 봉림대군과 합심하여 인조 23년 대군이 귀국할 때 우리나라로 망명했던 명나라 사람들)의 후손이 이곳에 와서 지방 유림들과 함께 대통행묘(大統行廟)와 구의행사(九義行祠)를 세워 명나라 태조와 9의사를 위한 제사를 지내었다.

조선시대 당시 명나라를 숭상하고 청나라를 배척했던 소위 숭명배청(崇明排淸)의 사상을 잘 보여주는 유적이라 할 수 있다.


@비례 부동(非禮不動); 충북 괴산군 청천면에 있는 화양구곡(華陽九曲)은 기암괴석과 녹수청산이 조화를 이룬 명승지이며 세간에는 한국의 무이구곡(武夷九曲)으로 알려진 곳이다. 그 9곡중 제5곡인 첨성대의 밑부분 석벽 아래에는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황제가 쓴「비례부동(非禮不動)」이란 글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여기서 「비례부동(非禮不動)」의 유래는 송시열의 제자 민정중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숭정황제의 친필 비례부동이라는 글자를 얻게 되어 귀국 후 스승인 송시열에게 주었고 훗날 이를 석벽에 새기게 한 것이라고 전한다. 비례부동(非禮不動)의 뜻을 풀어보면 「예에 맞지 않으면 행동하지 않는다.」라고 해석된다. 〈예(禮)〉의 의미를 다시 대순진리 속에서 찾아보면 먼저 《대순지침》에는 『예라는 것은 사람으로서 일생동안 움직일 때나, 정지할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누워 있을 때나(起居動靜)를 가리지 않고 항상 정도를 넘는 일이 없이, 공경심으로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여 주는 인도(人道)를 갖추는 것을 이른다.』고 하였다. 예라는 것은 인간으로서 꼭 지켜야 할 기본적인 것으로써 모든 일이 예에서 기본 하는 것임을 알 것이다.

또 《대순진리회요람》을 보면 『마음의 현상을 나타내는 것은 몸이니 모든 행동을 법례에 합당케 하며 도리에 알맞게 하고 의리와 예법에 맞지 않는 허영에 함부로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구절이 있다. 즉 「예에 맞지 않은 것에는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비례부동)」것이 바로 수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며 안신(安身)을 이루는 길이다. 예를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형식에 빠져 본질을 잃어버리게 되고, 반대로 예에 소홀해지면 경위를 잃고 분수를 망각해 혼란을 야기한다.

@ 옥조빙호(玉藻氷壺); 옥조빙호는 옥과 같이 맑고, 깨끗하고 투명하게 순결한 일심을 가진 마음을 말한다. 그 절개가 대쪽과 같아 굽힐 줄 모르며 죽음을 불사하고 의로운 일을 행하며 사리에 맞지 않으면 만금의 유혹을 물리치며, 어떠한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는 마음을 일컫는다. 옛 충신들은 이러한 마음으로 임금을 보필하면서 이 나라를 위난에서 구해왔던 것이다. 이것이 한 민족의 정신이며 군자의 정신이다. 군자는 현실 속에 살면서도 진리를 구현하고 이상향을 이루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는 사람이다.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 이름이 청사에 빛나며 충의 표본이 된 사람이 있으니,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이다. 자는 근보, 호는 매죽헌이다. 그가 막 태어나려고 할 때 공중에서 "낳았느냐?"하고 세 번 묻는 소리가 났으므로 삼문이라 이름 지었다. 세종대왕 측근에서 좋은 건의를 많이 하였으며, 신숙주등과 같이 정음청에서 훈민정음 창제에도 참여를 하였다. 1453년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참살하고 집현전의 여러 신하들에게 정란공신의 호를 내리니 모두들 순번으로 축하연을 베풀었으나 그는 수치로 여기고 혼자만이 연회를 베풀지 않았다. 1453년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니 그는 예방승지로서 국새를 안고 통곡하였으며 이듬해 그의 아버지 승,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등과 상왕(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같이 모의하던 김질의 밀고로 세조의 친국으로 가혹한 고문 끝에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세조가 그를 친국하는 자리에서

세조 : 무엇 때문에 나를 배반 했느냐?

삼문 :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고 했을 뿐입니다. 하늘에 두 태양이 없고 땅에 두 임금이 없으니 상왕이 계시는데 나리께 충성이란 왠 말이며 무엇을 배반이라 합니까? 나리는 항상 주공(周公)을 인용하셨는데 주공도 이런 짓을 했습니까?

세조 : 너는 나의 녹을 먹지 않았느냐. 녹을 먹고 배반하는 자는 반역자다. 명분은 상왕을 복위시킨다지만 사실은 자기 잇속을 위한 것이 아니냐?

삼문 : 상왕이 계신데 나리가 어찌 저를 신(臣)으로 할 수 있습니까? 저는 나리의 녹을 먹지 않았습니다. 이에 세조는 크게 노하여 무사들로 하여금 불에 시뻘겋게 단 인두로 삼문의 다리를 잘라버리니 그는 안색하나 변치 않고 조용히 "나리의 형벌은 참혹합니다 그려. 더 있으면 하십시오. 한번 먹은 마음이 형벌로 변할 수 있습니까?"하였다. 세조가 조사를 해보니 과연 세조가 준 녹은 하나도 먹지 않고 별실에 쌓아 두었으며, 자기 방에는 거적을 깔았고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살림이었다. 그의 아버지 또한 형장에서 "내가 늙어 명분 없이 죽는 줄 알았더니 아들을 잘 두어 죽을 자리를 찾았으니 내가 효자를 두었구나"하면서 웃으며 죽어갔다. 이에 반하여, 현대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잇속에만 치우쳐 충효사상(忠孝思想)이란 찾아볼 수 없으니 너무나도 대조적인 흐름에 빠져 들고 있는 실정을 볼 때, 한번쯤 옥조빙호의 글을 읽고 생각을 하여 반성의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증산성사께서 "일심 가진 자에게 지체 없이 베풀어 주리니……." 라고 하셨다.


51. 부산(釜山) 대신동(大新洞)의 산비탈 판자촌에 큰 불이 갑오년 삼월에 일어나니라. 그 불길이 강한 동남풍을 타고 보수동 도장을 향해 번져오므로 사람들이 당황하기 시작하니라. 이 때 오치국. 박봉상이 이를 정산께 아뢰니 듣고 계시다가 문을 열고 대신동 쪽을 바라보셨도다. 거세던 동남풍이 누그러지고 서풍이 일더니 불이 꺼지는도다.


52. 이해 봄 어느 날 조정산께서 보수동 산정에서의 공부를 멈추고 대청에 나오셔서 “앞으로 신도들의 동(動)이 두 번 있으리라”고 말씀하시고 그 주변에 사는 신도들의 사정을 물으셨도다. 이 때 박한경. 오치국. 임규오. 박중하. 박봉상. 이인호 등이 시좌하였도다.


53. 정산께서 갑오년 가을에 박한경에게 사략(史略) 상하권(上下卷)과 사서삼경(四書三經)의 구판을 구하게 하시므로 이 때에 통감(痛鑑) 소학(小學)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시전(詩傳). 서전(書傳). 중용(中庸). 주역(周易)의 구판을 구하여 올렸더니 이 책들은 그 후에 도장에 비치되었도다.


54. 조정산께서 다음 달에 박한경(朴漢慶)과 김용화(金容和). 김해구(金海九). 오치국(吳治國). 류철규(柳喆珪). 이윤섭(李允燮). 류한규(柳漢珪). 김영하(金永河). 오영식(吳永植) 등을 데리시고 해인사(海印寺) 경내에 있는 관음전(觀音殿)이자 심검당(尋劒堂) 뒤편의 다로경권(茶爐經卷)에서 사흘 동안 공부를 하셨도다. 그러나 공부에 관한 말씀은 없으시고 “사명당(四溟堂)의 입적실에 가서 불공이나 드리고 가리라” 말씀하시니 박한경과 그 외 세 사람이 먼저 그 곳을 돌아보고 와서 가시기를 청하니 “너희들이 다녀왔으면 되었다”고 말씀하시고 근처에 있는 백련암과 그 외 여러 암자를 돌아보시고 길에 오르셨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