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순 전경 ★/●•―‥교 운

교운(敎運)2장 1 ~ 29 까지

고도인 2008. 6. 8. 07:49

교운(敎運)2장 1 ~ 29 까지 


1. 여흥민씨(驪興閔氏)가 어느 날 하늘로부터 불빛이 밝게 자기에게 비치더니 그 후 잉태하여 한 아기를 낳으니라. 이 아기가 장차 증산성사의 공사를 뒤이을 정산이시니 때는 을미년 십이월 초나흘(十二月四日)이고 성은 조(趙)씨이요, 존휘는 철제(哲濟)이요, 자함은 정보(定普)이시고 존호는 정산(鼎山)이시며 탄강한 곳은 경남함안군 칠서면 회문리(慶南咸安郡漆西面會文里)이도다. 이곳은 대구(大邱)에서 영산 창령 남지에 이르러 천계산 안국산 여항산 삼족산 부봉산으로 연맥되고 도덕골(道德谷)을 옆에 끼고 있는 문동산. 자고산의 아래로 구미산을 안대하고 있는 마을이로다.


2. 정산성사의 부친은 성함이 조용모(趙鏞模)이고 자함은 순필(順弼)이고 호는 복우(復宇)이며 조부는 홍문관정자(弘文舘正字)로 있다가 을사년의 국운이 기울어감에 통탄한 나머지 피를 토하고 분사하였도다.


3. 아기가 자라니 그 음성이 웅장하고 안광이 부시어 범의 눈초리와 같고 목은 학의 목과 같고 등은 거북의 등과 같고 이마가 해나 달과 같이 빛이 나서 관상을 남달리 하셨도다.


4. 정산께서 기유년(1909년)十五歲時) 四월 二十八일에 부친과 함께 고국을 떠나 이국땅인 만주에 가셨도다.


5. 정산께서는 경술년(1910년)에 어린 몸으로 나라에 충성하는 마음에서 일본 군병과 말다툼을 하셨으며 이듬해 청조(淸朝 말기에 조직된 보황당(保皇黨)원이란 혐의를 받고 북경(北京)에 압송되었다가 무혐의로 풀려난 엄친의 파란 곡절의 생애에 가슴을 태우고 고국만이 아니라 동양 천지가 소용돌이치는 속에서 구세제민의 큰 뜻을 가슴에 품고 입산 공부에 진력하셨도다.


6. 정산께서 九년의 공부 끝인 정사년에 증산성사의 삼계 삼계대순(三界大巡)의 진리를 감오(感悟)하시도다.


7. 정산께서 어느 날 공부실에서 공부에 진력을 다하시던 중 한 신인이 나타나 글이 쓰인 종이를 보이며 “이것을 외우면 구세제민(救世濟民) 하리라”고 말씀하시기에 정산성사께서 예(禮)를 갖추려 하시니 그 신인은 보이지 않았으되 그 글은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지기금지 원위대강(侍天呪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至氣今至願爲大降)’이었도다.


8. 그 후에 정산께서 공부실을 정결히 하고 정화수 한 그릇을 받들고 밤낮으로 그 주문을 송독하셨도다. 그러던 어느 날 “왜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느냐. 태인에 가서 나를 찾으라.”는 명을 받으시니 이 때 정산께서 이국땅 만주 봉천에 계셨도다.

 

◐ 이 때 조정산께서는 강증산성사(上帝)께서 펴신 대순진리(大巡眞理)에 감오득도(感悟得道)하시고 태을주 23자(字)와 기도주 21자(字)를 받으셨으며, 강증산성사의 천명(天命)을 깨달아 그 유지(遺志)를 잇기 위하여 귀국하셨으니 그 때가 1917년(정사년, 丁巳年)이다. 그리고 이 해는 조정산성사의 천수(天壽) 23세셨으니 바로 태을주 23자와 본령합리(本領合理)를 이루는 해이기도 하며, 앞으로 도(道)의 대통(代統)을 이어갈 박우당께서 탄생하신 해이기도 하다.                         [오선위기로 대순하다 65P]


9. 그리하여 정산께서 정사년(1917년) 四월에 친계 가족을 거느리고 만주를 떠나 뱃길로 태인으로 향하셨던 바 도중에 폭풍을 만나 배는 서산 태안에 닿으니라. 이곳을 두루 다니면서 살폈으되 증산성사께서 가르치신 곳이 아닌 듯하여 안면도(安眠島)에 옮기셨도다. 정산성사를 반가이 맞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이곳 창기리(創基里)의 이정률(李正律)이었도다. 정산께서 이 섬의 정당리(正當里) 느락골에 우일재(宇一齋)를 마련하고 이곳에서 공부를 하셨도다. 섬사람 삼십여명이 정산성사를 쫓으니 그 중에서 이정률(李正律)이 지극히 따랐도다.


10. 정산께서 무오년(1918년) 가을에 재실에서 공부하실 때 증산성사께 치성을 올리신 다음에 이 정률외 두 사람을 앞세우고 원평을 거쳐 구릿골 약방에 이르셨도다. 이 길은 증산성사께서 九년 동안 이룩하신 공사를 밟으신 것이고 “김제 원평에 가라”는 명에 쫓는 것이라 하시도다.


11. 이 해(1918년) 시월에 정산께서 권태로(權泰魯) 외 몇 사람을 이끄시고 모악산의 대원사에 이르시니라. 이 때에 정산께서 “개벽후 후천(後天) 五만년의 도수를 나는 펴고 너는 득도하니 그 아니 좋을시고”라 하시고 이정률에게 원평 황새마을에 집을 구하여 가족들을 그곳에 이사 거주하게 하고 자신은 대원사에 몇 달 동안 머무셨도다.


12. 이정률이 집을 구하려고 황새마을에 이르러 마을 사람 권씨를 만나니 그가 “간 밤에 꿈을 꿔 사람이 오기를 기다린다”고 하면서 자기집에 이사 거주하기를 간청하면서 정률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안면도에 건너가 가족들을 모셔오니 권씨는 모든 것에 불편 없게 지성껏 보살폈도다.


13. 정산께서 다음해(기미년1919년)에 정월 보름에 이치복(호; 석성)을 앞세우고 정읍 마동(馬洞) 김기부의 집에 이르러 대사모님과 증산성사의 누이동생 선돌부인과 따님 순임(舜任)을 만나셨도다. 선돌부인은 특히 반겨 맞아들이면서 “증산성사께서 재세시에 늘 을미생이 정월 보름에 찾을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셨음을 아뢰이니라. 부인은 봉서(封書)를 정산성사께 내어드리면서 “이제 내가 맡은 바를 다 하였도다” 하며 안심하는도다. 정산께서 그것을 받으시고 이곳에 보름동안 머무시다가 황새마을에 오셨도다.


14. 선돌부인은 하루는 “구릿골 약방에 비치하셨던 둔궤가 천지도수의 조화 둔궤라 하루 바삐 그것을 찾도록 함이 어떠하겠나이까”라고 정산께 아뢰니라. 이 때에 정산께서는 도수에 따라 이준세(李俊世)의 재실에서 도수를 보고 계셨도다. 이곳은 황새마을에 가까운 통사동(通士洞)이니라.


15. 정산께서 칠월 보름에 이우형(李右衡)을 앞세우고 금산사에 다녀오시니라. 권태로. 이상우. 박붕래(朴朋來)와 여러 무리들의 앞에서 “오늘 백종일(百種日)이니 인간 백종의 허물을 청산하는 날이니라. 인숙무죄(人孰無罪)요. 개과하면 족하리라”고 분부하시니 그들이 모두 자기의 허물을 개과하기에 힘쓰니라.


◐ 인숙무죄(人塾無罪)요,  개과(改過)하면; 사람이라면 누가 죄가 없으리요. 허물을 고치면 족하니라.


16. 정산께서 기미년(1919년) 九월에 들어서서 정읍대흥리차경석(井邑大興理車京石)의 보천교 본부에 둔(遁)궤를 가져다 둔 것을 확인하시고 그것을 재실로 옮기고자 하셨도다.


17. 조용의(趙鏞懿)와 권태로(權泰魯). 권영문(權寧文). 이정두(李正斗). 김사일(金士一). 박붕래 외 두 명이 대흥리로 가니라. 이들이 보천교 본부에 당도하니 九월 四일 새벽 한 시경이 되니라. 본부의 사람들이 모두 깊이 잠이 든 때인지라. 그들이 한방에 들어가 병풍으로 가리어 놓은 둔궤와 약장을 찾아 가지고 나왔으나 약장만은 도중에 놓고 왔기에 옮겨지지 못하였도다.


18. 정산께서 통사동(通士洞) 재실에서 어느 날 “오도자 금불문 고불문지도야(吾道者 今不聞 古不聞之道也)라 믿고 닦기가 어려우니라” 하시고 다시 추종하는 여러 사람들을 앞에 모으고 무극대운(无極大運)의 해원(解寃) 상생(相生) 대도(大道)의 진리를 설법하시어 도(道)를 밝혀주셨도다.


◐ 오도자 금불문 고불문지도야(吾道者今不聞古不聞之道也); 나의 도는 옛날에도 지금도 듣지 못한 도이다. 즉 나의 도는 정산성사께서 짜놓은 법방도 아니요, 그렇다고 대순진리의 법방을 계승함도 아니고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참 진법이다.


19. 정산께서 이상우를 데리고 부안(扶安) 변산(邊山) 굴 바위에 이르러 이곳에서 공부하시면서 증산성사의 대순하신 진리를 사람들에게 설법하시니라. 이에 따르고자 하는 무리 이백이 넘었도다.


20. 정산께서 경신년(1920년)에 재실에서 밤낮으로 불면 불식하면서 공부하시던 중 이월 열 이레에 둔궤가 봉안된 곳에서 벼락소리가 나더니 둔궤가 저절로 열려져 있었도다. 그 속에 호피 한장과 반쯤 핀 국화 한 송이가 그려있고 양피(羊血) 스무넉 점이 궤에 찍혀있고 오강록(烏江錄) 팔문둔갑 설문(舌門)이란 글자가 궤에 쓰여 있었도다. 그 후 둔궤는 정산께서 함안 반구정(伴鷗亭)에서 공부하실 때 그곳에 옮겨졌도다. 그러나 당시 심복자이던 창원 사람 조주일(曺周一)이 둔궤를 훔쳐 갔는데 훗날에 종도들이 이를 알고 매우 안타까워하니 정산께서 “그 시기의 도수에 쓰였으면 족하리라. 둔궤의 둔자는 도망 둔자이도다”고 그들에게 이르셨도다.


21. 종도들에게 칠성경을 외우게 하시고 정산께서 대원사에 들어가셔서 백일 도수를 마치셨도다. 마치신 날이 마로 신유년 칠월 칠석날이라, 그 때에야 종도들이 칠성경을 외운 뜻을 깨달으니라. 그들을 보시고 정산성사께서 “이곳이 바로 증산성사께서 천지신명을 심판한 곳이니라. 아직 응기하여 있는 것을 내가 풀었노라”고 말씀하셨도다.


22. 신유년(1921년) 九월 五일에 권태로와 그 외 네 사람이 정산성사의 분부를 받고 구릿골에서 통사동 재실로 증산성사의 성골을 모시고 돌아오니라. 이 때 갑자기 뇌성이 일고 번개가 번쩍였도다.


23. 성골이 옮겨진 후 십오일이 되니 증산성사께서 구세 제민 하시고자 강세하신 날이 되니라. 이날 재실에 모여 치성을 올린 후에 정산께서 “시시묵송 공산리 야야한청 잠실중 분명조화 성공일 요순우왕 일체동(時時黙誦 空山裡 夜夜閑聽 潛室中 分明造化 成功日 堯舜禹王 一切同)이라” 말씀하셨도다. 그러나 듣고 있던 사람들은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하느니라. 그들 속에 권태로. 이상우. 이우형이 끼어 있었도다. 이들은 재실에서 매일 밤낮으로 치성을 올리고 공부하시는 정산성사의 시종을 들었도다.


   시시묵송 공산리(時時默誦 空山裡)

   야야한청 잠실중(夜夜閑聽 潛室中)

   분명조화 성공일(分明造化 成功日)

   요순우왕 일체동(堯舜遇王 一切同)


◐ 때때로 空山(공산=   ) 안에서 조용히 주문을 외는 소리가 깊은 밤 숨겨진 방에서 한가하게 들리는 이 소리가 분명히 조화로서 성공하는 날이 온다. 요순우왕 모두가 일체로 같다.


※ 空山(공산=    ); 뜻은 사람이 살지 않는 산중을 말하나 이치로 풀어야 한다. 三神山(삼신산)의 山(산)자에서 |(일)을 빼면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공산)이 된다. 이 말은 세분하느님이 아니고 두 분 즉 兩山(양산)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正陰(정음) 正陽(정양)으로서 천지부모를 뜻하는 것이다. 주문에서는 无極神(무극신)과 太乙天上元君(태을천상원군)만을 부르는 것을 말한다. 이 두 분께 빌어야 성공한다는 뜻이다.

※ 堯舜遇王 一切同(요순우왕 일체동); 요, 순, 우임금을 증산, 정산, 우당에 비유한 말로서 증산, 정산, 우당이 한가지로 같다는 뜻이다. 증산께서는 미륵도 아니고 정산께서는 옥황상제도 아니며 우당께서도 미륵세존이 아니다. 이 세분은 모두가 옥황상제님의 일을 하러 오셨던 것이며 그 터전을 마련한 것이다.

※ 그리고 현무경에 보면 益者三友(익자삼우) 巽者三友(손자삼우)라 하였다. 나에게 이익을 주는 세 명의 벗이 있고 나에게 손해를 주는 세 명의 벗이 있다. 즉 우당을 중심으로 해서 甑山(증산) • 鼎山(정산) • 牛堂(우당)은 巽者三友(손자삼우)이고, 牛堂(우당) • 朴成九都典任(박성구도전님) • 韓昇元大頭目(한승원대두목)은 익자삼우이다. 이 말은 증산, 정산, 우당을 세분하느님이라고 믿고 따르면 운수가 없으므로 내가 손해를 본다는 뜻이다. 그리고 박우당, 박성구도전님, 한승원대두목, 이 세분을 믿고 따르면 운수가 있으므로 나에게 이익이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우당께서는 화천 했으므로 세분의 山(산)이 兩山(양산=   )만 남게 되므로 兩山道(양산도)라 하였고 空山(공산=   )이 되는 것이다.


24. 정산성사를 흠모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 나니라. 이 쫓는 무리들에게 정산께서 말씀하시길 “임술년(1922년) 섣달에 이르면 납월도수(臘月度數)에 북현무도수(北玄武度數)가 닥쳐서 금전이 아니면 일이 풀리지 않을 것이라” 하시고 소액의 금품을 남겨 놓으셨도다. 쫓던 무리 중 한 사람이 문공신(文公信)과 합세하여 야밤에 재실에 침입하여 난동을 부린 끝에 증산성사의 성골과 약간의 금품을 훔쳐가니 섣달그믐 새벽 두시였도다.


25. 정산께서 계해년(1923년) 정월에 함안 회문리에 순회하고 그 곳에 잠시 머무시다가 밀양(密陽) 종남산(終南山) 세천동(洗川洞) 김병문(金炳文)의 집에 가셨도다. 이 때 배문걸이 정산성사를 모시고 따르니라. 그 곳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많은 종이에 글을 쓰셔서 둔도수라 하시고 석 달 동안 행하셨는데 그 종이가 심한 바람에도 날리지 않았도다.


26. 정산께서 그 후 주선원(周旋元)과 주선원보(周旋元補)란 두 직책을 마련하고 전교의 임무를 담당하게 하셨도다. 이 해 六월 치성일 전날에 밀양의 이우형 김용국 최창근 안병문. 그리고 부산의 박민곤과 안동의 권태로와 의성의 조원규와 예천의 이종창. 신용흠 그리고 봉화의 박붕래. 김천의 김규옥과 풍기의 조진명과 청도의 장득원 외 여러 사람들이 회문리에 모인 자리에서 정산께서 “금년이 이재신원(利在新元) 계해년(1923년)이라”고 말씀을 마치고 전교를 내리시니라.


傳 敎(전 교)


   七閏十九歲爲章二十七章是會當(칠윤십구세위장이십칠장시회당) 

接 間一年置閏則有餘日 間二年置閏則日不足 及至十九年

접 간일년치윤즉유여일 간이년치윤즉일부족 급지십구년

   置七閏則無餘不足故 以十九年爲一章

   치칠윤즉무여부족고 이십구년위일장

   二十七章爲一會凡五百十三年也孟子 所謂五百年必有王者

   이십칠장위일회범오백십삼년야맹자 소위오백년필유왕자

   興者此也三會爲統 三統爲元 循環往復互無彊

   흥자차야삼회위통 삼통위원 순환왕복호무강

接 一會各五百十三年則 三會合一千五百三十九年也

접 일회각오백십삼년즉 삼회합일천오백삼십구년야

   一統各一千五百三十九年 則 三統合四千六百十七年是爲一元

   일통각일천오백삼십구년 즉 삼통합사천육백십칠년시위일원

   四天六百十七年前丁巳軒轅立極肇斯元

   사천육백십칠년전정사헌원입극조사원

接 黃帝距今四千六百十七年前丁巳(上元甲前計算)

접 황제거금사천육백십칠년전정사(상원갑전계산)

   萬像萬事皆有是 諸法諸書總此源

   만상만사개유시 제법제서총차원

接 天文地理人事 皆黃帝之所始敎而 史記記年亦自黃帝始也

접 천문지리인사 개황제지소시교이 사기기년역자황제시야

   傳囂頊嚳勛華禹 初統初會世世聖

   전효욱곡훈화우 초통초회세세성

接 自黃帝至於舜禹畧五百年矣 初統初會者以黃帝爲始則

접 자황제지어순우략오백년의 초통초회자이황제위시즉

   以黃帝元年計 以至於 舜禹五百十三年者也

   이황제원년계 이지어 순우오백십삼년자야

   日出萬暈同發明 春回品物共華盛

   일출만운동발명 춘회품물공화성

   初統之中降中季 聖不承承但一時

   초통지중강중계 성불승승단일시

接 初統者黃帝以後 凡一千五百三十九年之謂而

접 초통자황제이후 범일천오백삼십구년지위이

   五百十三年以後則初統之中會也

   오백십삼년이후즉초통지중회야

   一千二十六年以後則爲初統之季會也

   일천이십육년이후즉위초통지계회야

   禹後有湯湯後文 一會一聖應會期

   우후유탕탕후문 일회일성응회기


   中統由來世漸降 聖不道行但敎傳

   중통유래세점강 성불도행단교전

接 中統者黃帝卽位 後千五百三十九年以後爲仲統也

접 중통자황제즉위 후천오백삼십구년이후위중통야

   釋後有孔孔後耶一會一敎各門筵

   석후유공공후야일회일교각문연

接 釋迦如來距今二千九百五十年(癸亥年計)

접 석가여래거금이천구백오십년(계해년계)

   癸丑生 孔子距今二千四百七十四年

   계축생 공자거금이천사백칠십사년

   庚戌生 耶蘇距令一千九百二十三年辛酉生

   경술생 야소거령일천구백이십삼년신유생

   季統敎亦無慨聖  惟有術述聖斷啓來

   계통교역무개성  유유술술성단계래

接 季統者黃帝卽位 後三千七十八年以後之季統也

접 계통자황제즉위 후삼천칠십팔년이후지계통야

   距今一千五百年前六朝及新羅之時 佛道中興

   거금일천오백년전육조급신라지시 불도중흥

   其後五百年距今略一千年前大宋之時濂洛諸賢一時傳道

   기후오백년거금약일천년전대송지시렴락제현일시전도 

   其後五百年以後 羅馬法王以耶蘇敎爲西洋之盟主

   기후오백년이후 라마법왕이야소교위서양지맹주

   佛梁儒宋耶羅馬 一敎一昌應會回

   불양유송야라마 일교일창응회회

 

 


◐ 이재신원(利在新元) 계해년; 새로운 원년인 계해년(1923년)부터 이로움이 있다.

전교(傳敎); 그 이로움을 가르침으로 전한다.

⊙ 윤년이 7번 있는 19년은 1장(章)이다. 27장(章)은 1회(會)이다. 19년에 윤월을 7번 두면 날짜가 남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다. 이렇게 하여 정해진 19년을 1장(章)이라 한다. 그리고 27장(章)은 1회(會)이므로 1회(會)는 513년이다.

맹자가 말한 ‘오백년마다 반드시 새로운 왕[聖人]이 일어난다.’는 것은 회(會)를 두고 말한 것이다. 3회(會)는 1통(統)이고 3통(統)은 1원(元)이 되어 끊임없이 순환 • 왕복한다. 4617년 전(前) 정사년[丁巳年:1원(元)이 시작하는 해]에 황제헌원(軒轅)이 등극하여 나라를 세웠다. 만상(萬象) • 만사(萬事) 모두가 여기서 시작하고, 제법(諸法) • 제서(諸書) 모두가 이를 근원으로 한다. 천문, 지리, 인사 모두를 황제가 비로소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며, (사마천이 지은) 『사기(史記)』의 기년(記年) 역시 황제로부터 시작한다. 황제로부터 전하여진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 전욱고양씨(頊高陽氏), 제곡고신씨(帝高辛氏), 제요도당씨(帝堯陶唐氏), 제순유우씨(帝舜有虞氏), 제우하우씨(帝禹夏禹氏)는 초통 초회 때 대대로 성인이었다. 초통 초회 때 효, 욱, 곡, 훈, 화, 우 등 성인이 대를 이어 계속 나타난 것은) 해가 뜨면 만방에 비치는 광휘가 모두 동시에 밝게 드러내 놓고, 봄이 돌아오면 만물이 모두 함께 번성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나 초통에서 초회를 지나 중회와 계회에 이르러서는 성인이 계속 이어지지 않고 일정한 시기를 두고 계승되었다. 초통 중회에는 우임금 이후 탕왕이 있었고, 초통계회에는 탕왕 이후 문왕이 있었으니, 1회에 한 명의 성인이 있음은 한 회에 한 사람의 성인이 회(會)의 시기에 응한 것이다. 그리고 중통 이후로 대를 이어 내려오면서부터는 성인의 도(道)는 행해지지 않고 교(敎:종교적 가르침)만 전하여졌다. 중통은 황제 즉위 후 1539년 이후이다. 석가모니 뒤에 공자가 있었고, 공자 뒤에 예수가 있음은 한 회(會)에 하나의 교(敎)가 각각 교문(敎門)을 연 것이다. 서가여래는 지금[계해년(癸亥年, 1923년]으로부터 2950년 전 계축생이고, 공자는 지금으로부터 2474년 전 경술생이고, 예수는 1923년 전 신유생이다. 계통에서는 교(敎) 또한 여는 성인이 없어 오직 성인의 가르침만 이어져 내려왔다. 계통은 황제 즉위 후 3078년 이후이다. 지금[계해년(癸亥年, 1923년]으로부터 1500년 전 육조시대(남북조시대)와 신라 때 불도가 번창하였다. 그후 500년간 즉 지금[계해년(癸亥年, 1923년]으로부터 1000년 전 대송시대에 염제와 낙양에 있는 모든 현인들이 한때나마 도를 전했다. 그 후, 즉 500년 이후 로마법황(로마교황)이 야소교(예수교)로써 서양의 맹주가 되었다. 불교는 양나라(남북조시대 때 나라 이름), 유교는 송나라, 야소교는 로마에서 각각 하나의 종교가 창성하게 된 것은 회(會)에 응한 것이다.


27. 정산께서 청도유천(淸道楡川)의 박동락(朴東洛)의 집에서 단도수를 행하시니 이것이 곧 진인 보두법(眞人步斗法)이니라. 이 때 배 문걸이 시종을 들었도다.


28. 계해년(1923년) 九월에 이를 마치시고 정산께서는 十月부터 다음에 二月 중순까지 청도의 적천사(磧川寺) 도솔암에 있는 칠성각 뒤에 돌단을 높이 쌓고 二十四방위를 정하고 천지신명을 응기케 하고 공부시간은 저녁 일곱시부터 다음날 아침 여섯시로 정하여 일분 일초도 어김없이 넉 달 동안 계속하셨는데 낮에는 공부 행하실 때 쓰실 글을 많이 쓰셨도다. 이 때에 공부는 단도수라 하셨으며 시종한 사람은 배문걸. 이우형. 박민곤이니라.  


29. 날로 정산성사를 흠모하는 수가 늘어나므로 태인에 갑자년(1924년) 四월에 도장이 마련되었도다. 정산께서 밀양 종남산 세천에서 보시던 둔도수를 미치고 도장에 돌아와 치성을 올리시니라. 치성을 끝내고 칼을 자루에서 뽑아들고 六정신을 외우시면서 보두법을 행하고 종남산 세천에서 공부할 때 써놓았던 여러 글종이를 불사르셨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