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증산 성사께서 가라사대
“위징은 밤이면 옥경에 올라가 옥황상제님을 섬기고
낮이면 당태종을 섬겼다 하거니와,
나는 사람의 마음을 뺐다 넣었다 하리라”고 하시니라.
말을 소ㆍ장(蘇秦, 張儀)의 웅변이 있고 앎은 강절(康節)의 지식이 있고 글은 이ㆍ두(李太白, 杜子美)의 문장이 있노라 하였으니 잘 생각하여 보라.
소진(蘇秦 ?∼BC 284)은 중국 전국시대 중후기 낙양(洛陽) 출신으로 생년은 미상이다. 자는 계자(季子)이고 진(秦)의 효공(孝公)이 위(魏)나라 출신 상앙(商鞅)을 등용하여 변법을 시행한 이후 진나라는 일약 제후국의 강대국으로 발돋움하였다. 기존의 강대국 제나라와 신흥 강대국 진나라를 사이에 두고 주변 제후국들이 각자 살아남기 위한 전략으로 내놓은 것이 이른바 ‘연횡’과 ‘합종’인데 ‘연횡’을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이 장의라면 ‘합종’을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이 소진이다. 1973년 장사(長沙)의 마왕퇴삼호한묘(馬王堆三號漢墓)에서 발굴된『 백서전국책(帛書戰國策) 』에는 소진이 제나라의 민왕(재위 BC 300∼284)과 연나라의 소왕(재위 BC 311∼279)에게 보낸 서신과 헌책 등이 실려 있다. 소진은 연나라의 문후에게 6국 합종의 이익을 설득하여 합종책을 성사시켰다. 다시 조(趙)․한(漢)․위(魏)․제(齊)․초(楚)의 여러 나라를 설복하는데도 성공하여, 드디어 BC 333년 연나라에서 초나라에 이르는 남북선상의 6국의 재상이 되었고, 스스로 무안군이라 칭하여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이 때문에 동방으로 진출을 꾀하려던 진나라는 십수 년간 그 진출을 저지당했다. 그러나 그의 합종책은 장의 등이 헌책한 연횡책에 패배하여 실패하였다. 그 후 소진은 연나라의 관직에 있다가 다시 제나라에 출사했으나, 제나라 대부의 미움을 받아 암살당하였다. 소진은 진나라를 위해 연횡책을 썼던 장의와 함께 전국시대 책사의 1인자로 병칭되고 있다.
장의(張儀 ?∼BC 168)는 중국 전국시대 모사이다. 종횡가의 비조이며 위나라 사람이다. 합종책(合從策)을 제창한 소진과 더불어 귀곡선생에게서 사사하였다. 처음에 초나라에 가서 벽(璧)을 훔친 혐의를 받고 태형의 벌을 받은 뒤에 추방되었으나 제후에 대한 유세(遊說)를 계속하였다. 이후 소진의 주선으로 진(秦)나라에서 벼슬을 하게 되어 혜문왕의 재상이 되었다. 그는 연형책(連衡策)을 주창하면서 위․조․한 등 동서[횡(橫)]로 잇닿은 6국을 설득, 진을 중심으로한 동맹관계를 이룩하는 등 활약이 컸으나 혜왕이 죽은 후에는 실각하였으며 위나라로 피신하여 재상이 된 지 1년 만에 죽었다.
소진과 장의는 중국 전국시대 최고의 책사들로서 그들은 웅변으로써 전국시대 6국을 설득하여 가히 천하를 움직여 통합하였다.
소강절(邵康節 1011∼1077)은 중국 송대(宋代)의 유학자이다. 이름은 옹(雍)이며 자는 요부(堯夫)이고 강절은 그의 시호이다. 이정지(李挺之)에게 도가(道家)의 도서선천상수(圖書先天象數)의 학을 배워 신비적인 수리(數理) 학설을 세우고, 이에 의해 우주관과 자연철학을 설파하였으며 또 이를 기본으로 한 경륜(經綸)을 주장했다. 그는 「황극경세서」에서 역리(易理)를 응용하여 수리(數理)로써 천지만물의 생성변화를 관찰ㆍ설명하였는데 123진(辰)을 하루, 30일(日)을 한 달, 12개월을 1년(年), 30년을 1세(世), 12세를 1운(運), 30운을 1회(會), 12회를 1원(元)으로 하였다. 그러므로 1원(元)은 12만 9천 600년이고, 천지(天地) 우주는 1원(元)마다 한 번 변천하고, 만물은 이 시간적 순서에 따라 진보한다는 것을 밝혔다. 6권까지는 역(易)의 64괘(卦)를 원ㆍ회ㆍ운ㆍ세에 배당하여 요제(堯帝)의 갑진년(甲辰年)에서 후주(後周)의 현덕 6년까지의 치란(治亂)의 자취를 적고, 7~10권은 율려성음(律呂聲音)을 논하고, 11~12권은 동식물에 관해 논하였다.
이러한 소강절의 지식은 가히 천문ㆍ지리와 역사, 정치, 예술, 동식물학까지 통달하였다.
이백(李白 701∼762)은 중국 당(唐)나라 시인이다. 자는 태백(太白)이고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이다.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되는 중국 최대의 시인이며, 시선(詩仙)이라 불린다. 1,100여 편의 작품이 현존한다.
남성적이고 용감한 것을 좋아한 그는 25세 때 촉나라를 떠나 양쯔강(揚子江)을 따라서 장난(江南)·산둥(山東)·산시(山西) 등지를 편력하며 한평생을 보냈다. 젊어서 도교(道敎)에 심취했던 그는 산중에서 지낸 적도 많았다. 그의 시의 환상성은 대부분 도교적 발상에 의한 것이며, 산중은 그의 시적 세계의 중요한 무대이기도 하였다.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났다.
청소년 시절에는 독서와 검술에 정진하고, 때로는 유협(遊俠)의 무리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쓰촨성(四川省) 각지의 산천을 유력(遊歷)하기도 하였으며, 민산(岷山)에 숨어 선술(仙術)을 닦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방랑은 단순한 방랑이 아니고, 정신의 자유를 찾는 ‘대붕(大鵬)의 비상(飛翔)’이었다. 그의 본질은 세속을 높이 비상하는 대붕, 꿈과 정열에 사는 늠름한 로맨티시스트에 있었다. 또한 술에 취하여 강물 속의 달을 잡으려다가 익사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그에게도 현실 사회나 국가에 관한 강한 관심이 있고, 인생의 우수와 적막에 대한 절실한 응시가 있었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는 방식과 응시의 양태는 두보와는 크게 달랐다. 두보가 언제나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살고 인간 속에 침잠하는 방향을 취한 데 대하여, 이백은 오히려 인간을 초월하고 인간의 자유를 비상하는 방향을 취하였다. 그는 인생의 고통이나 비수(悲愁)까지도 그것을 혼돈화(混沌化)하여, 그 곳으로부터 비상하려 하였다. 술이 그 혼돈화와 비상의 실천수단이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백의 시를 밑바닥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은 협기(俠氣)와 신선(神仙)과 술이다. 젊은 시절에는 협기가 많았고, 만년에는 신선이 보다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술은 생애를 통하여 그의 문학과 철학의 원천이었다. 두보의 시가 퇴고를 극하는 데 대하여,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詩風)이다. 두보의 오언율시(五言律詩)에 대하여, 악부(樂府)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장기로 한다. ‘성당(盛唐)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이백은 한편으로 인간․시대․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자부에 불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개는 차츰 전제와 독재 아래의 부패․오탁의 현실에 젖어들어, 사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하는 시인은 동시에 ‘만고(萬古)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속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생활태도를 반영한 대표작으로는 「촉도난(蜀道難)」등이 있다. 『 이태백 시집 』 30권이 전한다.
두보(杜甫 712∼770)는 중국의 당대(唐代) 시인이다. 자는 자미(子美)이며 호는 소릉(少陵)이다.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 불렸으며, 또 이백(李白)과 병칭하여 이두(李杜)라고 일컫는다. 본적은 후베이성(湖北省)의 샹양(襄陽)이지만, 허난성(河南省)의 궁현(鞏縣)에서 태어났다. 먼 조상은 진대(晉代)의 위인 두예(杜預)이고, 조부는 초당기(初唐期)의 시인 두심언(杜審言)이다. 소년시절부터 시를 잘 지었으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하였고, 각지를 방랑하여 이백·고적(高適) 등과 사귀었으며, 후에 장안(長安)으로 나왔으나 여전히 불우하였다. 그는 방랑을 하다가 59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그의 시를 성립시킨 것은 인간에 대한 위대한 성실이었으며, 성실이 낳은 우수를 바탕으로 일상생활에서 제재를 많이 따서, 널리 인간의 사실, 인간의 심리, 자연의 사실 가운데서 그 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찾아내어 시를 지었는데, 표현에는 심혈을 기울였다. 장편의 고체시(古體詩)는 주로 사회성을 발휘하였으므로 시로 표현된 역사라는 뜻으로 시사(詩史)라 불린다. 단시정형(短詩定型)의 금체(今體)는 특히 율체(律體)에 뛰어나 엄격한 형식에다 복잡한 감정을 세밀하게 노래하여 이 시형의 완성자로서의 명예를 얻었다. 그에 앞선 육조(六朝)․초당(初唐)의 시가 정신을 잃은 장식에 불과하고, 또 고대의 시가 지나치게 소박한 데 대하여 두보는 고대의 순수한 정신을 회복하여, 그것을 더욱 성숙된 기교로 표현함으로써 중국 시의 역사에 한 시기를 이루었고, 그 이후 시의 전형(典型)으로 조술(祖述)되어 왔다. 최초로 그를 숭배했던 이는 중당기(中唐期)의 한유(韓愈)․백거이(白居易) 등이지만, 그에 대한 평가의 확정은 북송(北宋)의 왕안석(王安石)․소식(蘇軾) 등에게 칭송됨으로써 이루어졌으며, 중국 최고의 시인이라는 인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현재 『 두공부집(杜工部集) 』 20권이 전해지는데, 고체(古體) 399수, 근체(近體) 1006수가 수록되어 있다.
이태백과 두보의 글은 읽는 이로 하여금 마음속 깊이 감동을 자아내게 하는 기운이 있다.
그러므로 천하사에 뜻을 둔자라면 소ㆍ장의 웅변과 강절의 지식과 이ㆍ두의 문장이 주는 기운과 같이 설득할 수 있는 능력과 천지 우주에 이르기까지 관통한 지식과 상대의 마음에 감동을 주어 비분강개케 하거나 웅지를 품게하는 기운을 사용할줄 알아야 함을 잘 알아 두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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