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고사(故事)

진묵의 고사(故事)

고도인 2008. 5. 27. 06:10

강증산 성사께서 어느 날

진묵의 고사(故事)를 들려주셨다.

김봉곡(金鳳谷)은 조선시대 유학자이고 진묵(震黙)은 승려로서 둘은 친구였다.

 

“김봉곡(金鳳谷)이 시기심이 강한지라. 진묵(震黙)은 하루 봉곡으로부터 성리대전(性理大典)을 빌려 가면서도 ‘봉곡이 반드시 후회하여 곧 사람을 시켜 찾아가리라’ 생각하고 걸으면서 한 권씩 읽고서는 길가에 버리니 사원동(寺院洞) 입구에서 모두 버리게 되니라.

봉곡은 과연 그 책자를 빌려주고 진묵이 불법을 통달한 자이고 만일 유도(儒道)까지 통달하면 상대할 수 없이 될 것이고 또 불법을 크게 행할 것을 시기하여 그 책을 도로 찾아오라고 급히 하인을 보냈도다.

그 하인이 길가에 이따금 버려진 책 한 권씩을 주워 가다가 사원동 입구에서 마지막 권을 주워 돌아가니라.

그 후에 진묵이 봉곡을 찾아가니 봉곡이 빌린 책을 도로 달라고 하는지라. 그 말을 듣고 진묵이 그 글이 쓸모가 없어 길가에 다 버렸다고 대꾸하니 봉곡이 노발대발하는 도다. 진묵은 ‘내가 외울 터이니 기록하라’고 말하고 잇달아 한 편을 모두 읽는 도다. 그것이 한 자도 틀리지 않으니 봉곡은 더욱 더 시기하였도다.

그 후에 진묵이 상좌에게 ‘내가 8일을 한정하고 시해(尸解)로서 인도국(印度國)에 가서 범서와 불법을 더 익혀 올 것이니 방문을 여닫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고 곧 입적(入寂)하니라.

봉곡이 이 사실을 알고 절에 달려가서 진묵을 찾으니 상좌가 출타중임을 알리니라. 봉곡이 ‘그럼 방에 찾을 것이 있으니……’라고 말하면서 방문을 열려는 것을 상좌가 말렸으나 억지로 방문을 열었도다.

봉곡은 진묵의 상좌에게 ‘어찌하여 이런 시체를 방에 그대로 두어 썩게 하느냐. 중은 죽으면 화장하나니라’고 말하면서 마당에 나뭇더미를 쌓아 놓고 화장하니라. 상좌가 울면서 말렸으되 봉곡은 도리어 꾸짖으며 살 한 점도 남기지 않고 태우느니라.

진묵이 이것을 알고 돌아와 공중에서 외쳐 말하기를 ‘너와 나는 아무런 원수진 것이 없음에도 어찌하여 그러느냐’ 하니 상좌가 자기 스님의 소리를 듣고 울기에 봉곡이 ‘저것은 요귀(妖鬼)의 소리라. 듣지 말고 손가락뼈 한마디도 남김없이 잘 태워야 하느니라’고 말하니 진묵이 소리쳐 말하기를 ‘네가 끝까지 그런다면 너의 자손은 대대로 호미를 면치 못하리라’ 하고 동양의 모든 도통신(道通神)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옮겨갔도다.


이 일이 있기 전까지는 동양이 서양보다 사상(思想)의 발전이 앞서 있었으나 이후로 동양의 사상은 퇴보하고 서양의 사상이 크게 발전하였다.


*김봉곡(金鳳谷․1575~1661):조선 인조 때의 유학자. 본관은 광산(光山). 본명은 동준(東準), 호는 이식(而式). 유학의 대가인 김장생(金長生)의 문인(門人)으로 43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인조반정 뒤에 의금부도사에 천거되어, 사헌부감찰. 양성현감, 한성판관 등을 역임하였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그는 척화에 앞장서는 한편 인조를 수종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난하게 하였다. 그 뒤 세자사전, 사헌부지평, 의정부사인 등 여러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1년 정도 상운도찰방을 했을 뿐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 양성과 한문야학으로 여생을 보냈다. 유저(遺著)에 연남도(演男圖), 계몽편(棨蒙篇), 의례문해(疑禮問解) 등이 있음.


*진묵(震黙․1562 명종 17~1633 인조 11) : 조선의 승려. 이름은 일옥(一玉), 만경 불거촌(萬頃 佛居村) 사람으로서 7세에 전주(全州) 봉서사(鳳棲寺)에서 승려가 되었다. 석가의 소화신(小化身)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술이면 무엇이나 한정 없이 마시는데, 술이라 하면 안 마셨으나 곡차(穀茶)라면 마셨다고 한다. 그의 술잔을 다른 사람이 핥아보면 술맛은 없고, 단맛이 있었다고 한다. 신통이 자재(自在)하여 물 위를 걸어 다니고 땅 속으로 마음대로 들어가기도 하였다고 한다. 책을 읽으면 그 자리에서 다 외고 책을 버렸다고 한다. 봉곡(鳳谷)김동준(金東準)과 우의가 깊었고 변산(邊山)의 월명암(月明庵)・전주의 원등사(遠燈寺), 대원사(大元寺) 등에 있다가 72세에 입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