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道란 무엇인가?

[스크랩] ③ 황극신은 관성제군신명

고도인 2008. 1. 12. 18:32
 

③ 皇極神(황극신)은 關聖帝君神明(관성제군신명)


공사 3장 22절; 상제께서 어느날 고부 와룡리에 이르사 종도들에게 󰡔이제 혼란한 세상을 바르려면 황극신(皇極神)을 옮겨와야 한다.󰡕고 말씀 하셨다. 󰡔황극신은 청국광서제(淸國光緖帝)에게 응기하여 있다. 하시며 󰡔황극신이 이땅으로 옮겨오게 될 인연은 송 우암(宋 尤庵)이 만동묘(萬東廟)를 세움으로부터 시작되었느니라.󰡕하시고 밤마다 시천주(侍天呪)를 종도들에게 염송케하사 친이 음조를 부르시며 󰡔이 소리가 운상(運喪)하는 소리와 같다.󰡕하시고 󰡔운상하는 소리를 어로(御路)라 하나니 어로는 곧 군왕의 길이로다. 이제 황극신이 옮겨져 왔느니라.󰡕고 하셨다 이때에 광서제가 붕어 하였다.

 

◐ [주해] 샘은 인류 역사 이래로 이 지구상에 가장 신성한 것으로 대해져 왔다. 때문에 어느 누구도 감히 부정한 것을 가지고 샘가를 지나가지 않았다. 혹 부득이하여 상여가 샘가로 지나가는 일이라도 있게 되면 반드시 먼저 멍석으로 샘을 덮어 준 연후에 지나갔다. 상여는 그 형상이 옛날에 임금님이 타시던 연(輦)과 똑 같은 것이다. 이는 마지막 길을 떠나가는 망자에게 최대한의 예우를 해 주는 것이었다. 때문에 상여꾼들이 "어로(御路)""어로(御路)"하는 소리를 하며 매고 가는 것이다. 즉 "임금님이 가시는 길"이라는 뜻이다. 산길이 험한 강원도에서는 상여소리를 "어림차(御臨次)""어림차(御臨次)"하기도 하는데 이 또한 "임금님의 행차"라는 뜻이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지체가 높은 사람일지라도 감히 가마나 말을 타고 상여 앞을 지나가지 못했던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더라도 샘이 임금님 보다 지위가 훨씬 높으신 것이다.


* 황극신은 군왕으로서 군왕보다 훨씬 높으신 샘(태을천=6壬水임수)의 이치인 옥황상제님을 모신다. 황극신(태을천=1癸水계수)이 侍天主(시천주=천지의 주인을 모심) 즉 옥황상제님을 모시고 혼란한 세상을 바로잡게 되는 것이다.

* 만동묘는 관우를 모신 사당으로 황극신은 관성제군을 말하는 것이다. 관성제군은 군왕으로서 대두목이시다.


* 만동묘(萬東廟)는 "만절필동(萬折必東)"의 줄임말로서 김일부의 정역에 나오는 말이다. 만 번 꺾어지고 꺾어져서 필경에는 동으로 이른다는 말이니 이 뜻을 누가 알리오?


* 화양서원과 만동묘...

화양서원...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데 대한 보답으로 명나라 신종, 의종을 제사 지내기 위해, 1704년(숙종 30) 충북 괴산군 청천면(靑川面) 화양동(華陽洞)에 지은 관우 사당이다.

도산서원 등과 더불어 4대 서원으로 유명하였으나, 지금은 만동묘정비(지방기념물 25)만 남아 있다.

왼편 높은 대문을 통과하면 만동묘가 있고, 오른편 누각이 만동묘정비이다. 만동묘는 인조 때 송시열(宋時烈)이 명나라 의종(毅宗)의 친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이라는 글 한 폭을 받고서 이 글을 화양동 석벽(石壁)에 새겨 놓고 석벽 위에 공부하는 사당을 지었는데, 송시열이 죽을 때 그의 제자 권상하(權尙夏)에게 이곳에 묘우(廟宇)를 지어 신종과 의종을 제사지내도록 하여 권상하가 유림을 동원하여 지은 것이다. 만동묘萬東廟는 "만절필동萬折必東"의 줄임말로서 김일부의 정역에 나오는 말이다. 만 번 꺾어지고 꺾어져서 필경에는 동으로 이른다는 말이니 이 뜻을 누가 알리오?

만동묘정비...안내문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이 비석은 만동묘를 세우게 된 취지와 제사를 모시고 있는 명나라 신종 의종을 추모하는 뜻을 기록한 것이다. 영조23년 1747년 이재가 글을 지어 세웠다...."

한평생 주자를 흠모하여 동토에 주자학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했던 송시열은 만동묘를 세우고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따서 화양구곡을 세웠을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관우를 모시는 관왕묘가 네 군데 있다. 경북의 성주와 안동에 임진왜란때 세운 관왕묘가 있고, 그 뒤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서울의 동묘(東廟)와 남묘(南廟)의 두 개의 묘(廟)가 있습니다.


서울의 종로구 숭인동에는 보물 142호로 지정되어 있는 동묘라는 사당이 있다. 동대문에서 신설동 쪽으로 가는 길옆에 자리 잡고 있다. 동관왕묘라고도 불리는데, 바로 관우를 제사지내는 사당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물리치는데 관우의 신령이 도와주었다고 생각하여, 명나라의 신종 황제가 건립 비용과 함께 친필 현판 글씨를 보내왔고, 이에 선조 32년인 1599년에 짓기 시작하여 1601년에 완공했다.


이 곳의 정식 명칭은 "동관왕묘(東關王廟)인데 현판은 "현령소덕의렬무안성제묘(顯靈昭德義烈武安聖帝廟)"라고 적혀있다. 왕(王)과 천자(帝)는 그 격이 다르기에 시대에 따라서 관우를 부르는 명칭이 왕에서 천자로 격상된 것이다.


명나라 신종(神宗)이 친히 현판을 써서 보내주니 조선은 별 수 없이 꽥소리 못하고 사당을 지어 제사를 드리고 전쟁이 나면 출정하기 전에 이곳에서 무운을 빌었다고 한다. 그러면 관우의 신령이 나타나 신기를 발휘하며 신병(神兵)을 이끌고 왜를 물리쳤다는 전설이 <연려실기술>이라는 책에 이런 대목이 있다.

" 일찍이 임진년과 정유년의 왜란 때에 관우의 신령이 나타나 신병(神兵)으로써 싸움을 도와주어 명나라 장수와 군사들이 모두 말하기를, "평양의 싸움에서 이긴 것과 도산(島山)에서의 싸움과 삼도(三道)에서 왜병을 구축할 때 관우의 신령이 늘 나타나 음조(陰助)하였다" 는 내용이 나온다.


서울 동묘에는 나무로 만든 관우의 상이 안치되어 있으며, 그 좌우로 관우의 부하 관평, 주창 등의 상이 안치되어 있다. 우리나라에 그 사당이 있을 정도로 관우는 후세 사람들로부터 높이 추앙 받았다. 세상을 떠난 뒤 관우는 관왕, 그러니까 왕으로까지 높여졌고 더 나아가 관성대제, 즉 성스런 황제 관우로까지 높여 졌다. 그리고 신령으로까지 추앙 받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오늘날 중국, 대만은 물론 중국인들이 사는 동남아 지역에도 관우를 모시는 사당인 관제묘가 많다.


남묘는 선조(宣祖) 31년 (1598) 에 명(明)의 유격장(遊擊將) 진인(陳寅)이 임진왜란에 관우(關羽)의 영이 나타나 도와주었다고 해서 그가 머물러 있던 남산 기슭에 묘를 세우고 그 안에 관우와 주창(周倉)의 초상을 모시게 된 데서 비롯되었다. 6.25전쟁 때 전소된 것을 1957년에 재건한 바 있으나 정문이 되는 그 형적(形蹟)만 남기고 있던 것을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남묘의 본 명칭은 남관왕묘로서 7년 왜란의 마지막 해인 선조 31년(무술, 1598) 4월에 명의 유격장(遊擊將) 진인(陳寅)이 이번 왜란에 관우(關羽)의 영(靈)이 나타나 도와 주었다고 해서 그가 머물러 있던 남산 기슭에 묘(廟)를 세우고(현 중구 장충동 2가 186-140호) 그 안에 관우와 주창(周倉)의 초상을 모시게 된 데서 비롯되며 건축경비는 명(溟8의 양호(楊鎬)를 비롯한 명장들이 은(銀)을 바쳤으며 우리 조정에서도 일부 보조를 해서 이룩된 것으로서 6·25전쟁으로 인해 전소된 것을 1957년에 재건한 바 있으나 정문이 되는 그 형적(形蹟)만 남기고 있었다가 1979년 1월에 동작구 사당동 180-1번지로 이전하였다.


* 증산성사께서 “현하 대세가 씨름판과 같으니 애기판과 총각판이 지난 뒤에 상씨름으로 판을 마치리라.” (도전 5:7:1)고 하셨습니다. 곧 ‘앞으로 상씨름으로 선천 세상을 문 닫는다.’는 말씀이에요. 지금 서양인들을 무극 태극은 알아도 이 황극은 잘 모릅니다. 황극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이건 어떤 대 철인이라도 마찬가집니다. 증산성사의 진리에서 처음으로 명쾌하게 밝혀주는 겁니다. 무극과 태극과 황극이 있는데, 이번에 황극신이 한국으로 들어옵니다. 그러면서 개벽이 일어납니다. (증산도 카페)

  

♣ 교법 2;33 현하의 대세가 씨름판과 같으니 아기판과 총각판이 지난 후에 상씨름으로 판을 마치니라.


출처 : 고도인의 해인海人으로 가는 카페
글쓴이 : 高 道 人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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