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도인의 채지가 해설
62. 도원결의桃園結義 하실적에 만고대의萬古大義 누구신고
* 관우(關羽, 162~219); 관우(關羽)는 자가 운장(雲長)이고 하동(河東) 해량(解梁: 지금의 산서성 운성시<雲城市> 상평촌<常平村>) 출신이다. 동한 말기에 그는 유비(劉備)·장비(張飛)와 결의형제를 맺고 의병을 일으켜 촉한(蜀漢)을 건국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정사에는 관우가 태어난 날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지만, <전장군관장목후조묘비명(前將軍關壯穆侯祖墓碑銘)과 <사전비기(祀田碑記)>· ≪관제지(關帝志)≫ 등의 기록과 민간에 전해지는 여러 가지 설들을 종합하면, 그는 대체로 환제(桓帝) 연희(延熹) 3년(160)에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이름을 장생(長生)이라 하였다가 뒤에 우(羽)로 바꾸었다. 어릴 때부터 집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학문과 무예를 익혔다. 관우는 광화(光和) 6년(183) 그의 나이 23세에 악덕 호족 여웅(呂熊)을 죽이고 고향을 떠나 5년 후에 탁(: 지금의 하북성 탁주시<에 이르러 유비와 장비를 만나 결의형제를 맺었다. 당시에 황건적의 난이 전국을 휩쓸자 동한의 통치자는 각지의 군대를 소집하여 그들을 진압하였다. 관우는 유비를 따라서 탁현(모집에 응하여, 유주태수(幽州太守) 유언(劉焉), 중랑장(中郞將) 노식(盧植), 교위(校尉) 추청(鄒淸), 교위도정후(校尉都亭侯) 공손찬(公孫瓚)의 부대에서 황건적 진압에 가담하였다.
동한 헌제(獻帝) 초평(初平) 원년(190), 공손찬에게 의지하고 있던 유비는 평원(平原: 지금의 산동성 평원현) 현령, 영평원상(領平原相)에 임명되었으며, 관우와 장비는 별부사마(別部司馬)가 되어 소속 부대를 통솔하였다.
동한 흥평(興平) 원년(194), 조조(曹操)와 도겸(陶謙)이 서주(徐州)를 쟁탈할 때 유비는 예주자사(豫州刺史)로 파견되어 관우와 함께 도겸을 구원하였다.
동한 건안(建安) 원년(196), 원술(袁術)이 유비를 공격하자 유비는 관우와 함께 회음(淮陰: 지금의 강소성 우이현<; 회음시)에서 그것을 막았다.
건안 3년(198) 11월, 유비와 조조의 연합군이 여포(呂布)를 공격하여 조조가 하비(下관우도 그 전쟁에 참가하였다.
건안 4년(199), 관우는 유비의 명으로 서주자사 거주(車胄)를 죽이고 서주를 점령하였다. 관우는 하비에 주둔하면서 태수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건안 5년(200), 조조가 유비를 공격하자 유비는 패주하여 원소(袁紹)에게 몸을 의지하였다. 이때 유비의 아내와 함께 있던 관우는 하비에서 조조에게 포위되어 항복하였으며, 조조는 그를 편장군(偏將軍)에 임명하고 극진히 예우하였다. 같은 해 4월, 조조가 원소와 백마(白馬: 지금의 하남성 활현<滑縣> 동쪽)에서 일전을 벌였다. 이때 관우는 용감하게 적진을 뚫고 돌진하여 원소의 대장 안량(顔良)의 목을 베었다. 이 전공으로 관우는 한수정후(漢壽亭侯)에 책봉되었다. 7월, 유비가 원소 휘하에 있다는 것을 안 관우는 조조에게 이별을 고하고 유비에게로 돌아갔다. 그후 유비와 함께 여남(汝南: 지금의 하남성 여남현 동남)으로 달려가서 유벽(劉噼)과 연합하여 조조를 공격 하였다. 관도(官渡)에서 원소를 물리친 조조는 건안 6년(201) 9월에 남쪽으로 내려와 유비를 공격하였다. 이때 유비와 관우 등은 형주(荊州)의 유표(의 하남성 신야현 남쪽)에서 7년간 주둔하였다.
건안 12년(207), 유비는 관우·장비와 함께 융중(隆中)의 초막에 있던 제갈공명(諸葛孔明)을 삼고초려하여 군사(軍師)로 초빙하였다. 건안 13년(208) 7월, 조조는 남쪽으로 진격하여 유표(劉表)를 공격하였다. 8월에 유표가 병사하자 그의 둘째 아들 유종(劉琮)이 조조에게 항복하였다. 이에 유비는 번성(樊城)에서 강릉(江陵: 지금의 호북성 강릉현)으로 달아났다. 관우는 수군을 이끌고 강하(江夏)의 유기(劉琦: 유표의 장남)에게 가서 구원을 요청한 후, 다시 면강(沔江)에서 유비와 합류하여 함께 하구(夏口: 지금의 호북성 무한시<武漢市>)로 갔다. 이해 11월에 제갈량·노숙(魯肅) 등이 오(吳)나라 손권(孫權)을 설득하여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을 결성하는데 성공하였다.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은 적벽(赤壁: 지금의 호북성 포기현<蒲圻縣> 경내)에서 조조군을 대파하였으며, 이로써 유비는 형주(荊州) 이남의 4개 군을 차지하였다. 이때 관우도 이 전쟁에 참가하였다.
건안 14년(209) 12월, 오나라 장수 주유(周瑜)가 병사하자 유비는 손권에게서 형주 이북의 여러 군을 빌었다. 관우는 양양태수(襄陽太守)·탕구장군(蕩寇將軍)에 임명되어 강릉에 주둔하였다.
건안 16년(211), 유비가 유장(劉璋)의 요청으로 사천(四川)에 들어갔을 때, 제갈량과 관우는 형주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 이듬해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오나라를 공격하였다. 관우는 제갈량과 함께 청니(靑泥: 지금의 호북성 안격현<安擊縣> 동쪽)에서 조조의 장수 악진과 우금(于禁)을 물리쳤다.
건안 19년(214), 유비가 낙성(지금의 사천성 광한현<廣漢縣>)을 공격하였다가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제갈량·장비·조운(趙雲) 등이 급히 달려가서 유비를 지원했다. 이에 관우 혼자서 형주를 지키게 되었다.
이해 6월, 유비는 성도(成都)를 점령하여 스스로 익주(益州) 목사에 오른 다음 정식으로 관우를 도독형주사무(都督荊州事務)에 임명하였다.
건안 20년(215), 손권이 유비에게 형주를 돌려달라고 요구하였으나, 유비가 이것 저것 핑계를 대며 거절함으로써 오와 촉은 갈등이 더욱 심화되엇다. 손권은 장사(長沙)· 영릉(零陵)· 계양(桂陽) 3개 군(郡)에 관리를 파견하였으나 모두 관우에게 쫓겨났다. 손권은 여몽(呂蒙)에게 명하여 장사와 계양을 습격하게 하였다. 유비는 직접 5만대군을 이끌고 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그들을 대적하였으며, 관우도 정예병 3만을 이끌고 익양(益陽: 지금의 호남성 익양시 서쪽)에서 노숙과 대치하였다. 이해 2월, 조조가 한중(漢中)을 공격하자 유비는 익주를 잃을까 염려되어 손권과 강화를 맺었다.
건안 24년(219), 유비는 조조를 공격하여 한중을 점령하고 스스로 '한중왕(漢中王)'에 오른 다음, 관우를 전장군(前將軍), 가절월(假節鉞)에 임명하였다. 8월, 관우는 손권과 조조가 싸우는 틈을 이용하여 주력부대를 이끌고 북상하여 번성·양양을 점령, 조조의 장수 방덕(龐德)의 목을 베고 우금(于禁)을 항복시킴으로써 그 위세를 천하에 떨쳤다. 같은 해 10월, 손권은 여몽을 보내어 퇴로를 차단한 후 형주를 습격하여 점령하였다. 관우는 오나라 군대의 협공을 받고 위기에 처하였다. 11월, 관우는 번성에서 철수하여 형주 탈환을 기도하였으나 도중에 오나라 군대의 기습을 받고 엄청난 병력의 손실을 입었다. 관우는 형주 탈환을 포기하고 퇴각을 거듭하여 일단 맥성(麥城: 지금의 호북성 당양현<當陽縣> 동남)에서 버티다가 사천으로 도주하여 유비와 합류하려고 하였다. 12월, 관우는 맥성에서 패하여 임저장향(臨沮章鄕: 지금의 호북성 안원현<安遠縣> 북쪽)으로 퇴각하다가 손권의 복병에게 사로잡혀 아들 관평(關平)과 함께 피살되었다. 이때 관우의 나이 59세였다.
관우가 죽은지 41년 후 촉(蜀) 경요(景耀) 3년(260, 관우 탄신 100주년)에 후주 유선(劉禪)은 관우의 시호를 장목후(壯繆侯)로 추증했다. 그러나 남북조 시기부터 청대 말기에 이르기까지 관우는 역대 제왕들의 추존을 끊임없이 받아, "후(侯)에서 왕, 왕에서 제(帝), 제에서 성(聖), 성에서 천(天)"으로 올라갔다. 그의 명성은 중국은 물론 해외에까지 널리 알려져 중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고 신성시 되는 우상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마침내는 공자와 함께 "문무이성(文武二聖)"으로 병칭되었다.
정사에서는 관우의 활약에 대한 기록이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명성은 민간설화와 명대의 소설 ≪삼국연의(三國演義)≫를 거치면서 '충의(忠義)'의 화신으로 신격화 되어갔다. 역대 왕조의 통치자들은 이러한 전형 인물을 빌어 그들의 통치를 유지하는 수호신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관우의 충의와 용맹·무예를 더욱 과장하여 많은 문무대신들이 관우처럼 왕에게 충의를 다하고 사직에 용맹과 무예를 바치기를 바랬던 것이다. 관우에게 왕이라는 작위를 붙이기 시작한 것은 송대부터이다. 휘종(徽宗)은 숭녕(崇寧) 원년(1102)에 관우의 시호를 '충혜공(忠惠公)'으로 추증하고 그의 작위를 후작에서 공작으로 한단계 더 높였다. 다시 계속하여 숭녕 3년(1104)에는 '숭녕진군(崇寧眞君)', 대관(大觀) 2년(1108)에는 '소열무안왕(昭烈武安王)', 선화(宣和) 5년(1123)에는 '의용무안왕(義勇武安王)'으로 추존했다.
남송의 창시자 고종(高宗)도 건염(建炎) 2년(1128)에 관우를 '장목의용무안왕(壯繆義勇武安王)'에 봉했고, 그의 아들 효종(孝宗)은 순희(淳熙) 14년(1187)에 관우를 '장목의용무안영제왕(壯繆義勇武安英濟王)'에 봉했다.
원나라 문종(文宗)은 천력(天曆) 원년(1328)에 남송시대에 관우에게 내린 시호에서 '장목(壯繆)'을 없애고 대신 '현령(顯靈)'으로 바꾸어, '현령의용무안영제왕(顯靈勇武安英濟王)'이라 하였다.
관우에게 제(帝)라는 시호를 붙이기 시작한 것은 명대부터이다. 주원장(朱元璋)이 죽은 후 혜제(惠帝)가 왕위를 계승했다. 혜제 건문(建文) 3년(1399)에 주체(朱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했는데, 그가 바로 성조(成祖: 영락황제<永樂皇帝>)이다. 성조는 자신의 행동을 관우의 영험한 도움을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즉 그가 황제가 된 것이 "하늘의 뜻"이라는 말이다. 황제가 관우를 신이라 한 이상, 신하와 백성들도 당연히 관우를 신으로 숭상하였다. 명대 중후기의 정덕(正德) 4년(1509), 조정에서는 조서를 내려 전국에 있던 관묘(關廟: 관우 사당)의 이름을 모두 '충무묘(忠武廟)'로 고치게 했다. 만력(萬曆) 22년(1594), 도사 장통원(張通元)의 요청으로 신종(神宗: 만력황제<萬曆皇帝>)은 관우를 제(帝)에 봉하고, 관묘의 이름을 '충무'에서 '영렬(英烈)'로 바꾸었다.
만력 42년(1614) 10월, 신종은 관우를 '삼계복마대신위원진천존관성제군(三界伏魔大神威遠震天尊關聖帝君)'(≪해여총고(咳余叢考)≫≪노포총담(老圃叢談)≫ 참고)에 봉했다. ≪해현지(解縣志)≫와 ≪산서통지(山西通志)≫에는 관우에게 '제'라는 시호를 봉한 기록이 상술한 내용과 다르다. 일설은 만력 18년(1590)에 관우를 '협천호국충의제(協天護國忠義帝)'에 봉하였다는 것이고, 다른 일설은 만력 10년에 관우를 '협천대제(協天大帝)'에 봉하였다는 것인데, 어느 것이 사실인지에 대해서는 더 고증을 요한다.
청대의 통치자들도 관우를 매우 숭배했다. 세조(世祖: 순치황제<順治皇帝>)는 순치 원년(1644)에 관우를 '충의신무관성대제(忠義神武關聖大帝)'에 봉했고, 성조(聖祖: 강희황제<康熙皇帝>)는 강희 42년(1703)에 관우의 선조, 조부, 부친을 공작(公爵)으로 추존했다.
건륭(乾隆) 이후 가경(嘉慶)·도광(道光) 두 왕조를 거치면서 관우의 시호를 '인용위현호국보민정성수정우찬선덕충의신무관성대제(仁勇威顯護國保民精誠綏靖羽贊宣德忠義神武關聖大帝)'라고 하여 그에 대한 숭배가 극에 달했다. 문종(文宗: 함풍황제<咸豊皇帝>)은 함풍 5년(1855)에 관우의 선조를 '광소왕(光昭王)', 조부를 '유창왕(裕昌王)', 부친을 '성충왕(成忠王)'에 추증하고, 관우의 신위를 황궁에 모셔두었다.
☞ 관림(關林); 관림은 관제묘(關帝廟)라고도 한다. 낙양시(洛陽市) 남쪽 7㎞에 위치한 관림은 관우의 목이 묻힌 곳으로 알려져 있다. 옛날에는 이곳에 무덤만 하나 있었으나, 명대 만력(萬曆) 연간에 여기에 사당을 짓고 잣나무를 심었다. 그후 다시 청대 건륭(乾隆) 연간에 증축하여 현재의 규모로 조성하였다.
'관림'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과거 중국의 등급제도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과거 중국에서는 황제의 무덤을 '능(陵)', 왕후의 무덤을 '총(塚)', 일반 백성의 무덤을 '분(墳)'이라 하였으며, 오직 성인의 무덤에만 '림(林)'자를 붙였다. 중국 역사상 성인으로 일컬어지는 인물은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는 중국 최초의 교육가 공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바로 삼국시대 촉의 명장 관우이다. 따라서 오직 이 두 사람의 무덤만은 각각 '공림(孔林)'과 '관림(關林)'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 이러한 관림묘(關林廟)는 세 군데 있다. 관우의 목이 안장된 낙양 관림 외에도, 관우의 시신이 안장된 호북성 당양(當陽)의 관림과 관우의 고향인 산서성 해현(解縣)에 세워진 운성관림(運城關林)이 있다. 따라서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민간에서는 관우를 일러 "머리는 낙양을 베게삼고, 몸은 당양에 누워 있으며, 혼은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말한다.
≪삼국연의≫에 의하면, 관우가 59세에 호북성 당양에서 오나라 군사에게 피살되었을 때, 오나라의 손권은 유비의 보복이 두려워 관우의 머리를 몰래 낙양에 있던 조조에게 보내어 책임을 조조에게 전가시킴으로써 일시적인 화를 면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손권의 음모를 미리 간파한 조조는 평소에 관우의 인품을 흠모하고 있었던 터이라 관우를 극진히 예우하고 낙양성 남쪽에 안장했다. 이곳이 바로 현재의 관림묘이다.
63, 황금갑옷黃金甲옷 떨쳐입고 적토마상赤兎馬上 비켜앉아
* 적토마: 관운장이 탔던 준마의 이름.
64. 봉鳳의눈을 부릅뜨고 삼각수三角鬚를 거사리고
* 봉의눈: 길게 위로 치켜 찢어진 눈. 관운장의 눈.
* 삼각수: 두 뺨과 턱에 세 갈래로 난 수염. 관운장의 수염은 석자나 된다.
65. 청룡도靑龍刀를 손에 들고 중원회복中原回復 하려할제
* 청룡도: 청룡언월도의 준말이다.
* 중원: 한족의 발상지인 황하유역 을 이름.
66. 추상秋霜같은 높은의리義理 만고일인萬古一人 아니신가
* 추상(秋霜): 가을의 찬 서리. 또 서슬이 퍼런 위엄이나 엄한 형벌의 비유.
秋(추)는 義(의)와 같고 利(이)와 같다. 가을 서리는 알맹이와 죽정이를 가리는 냉엄한 기운이 있다. 정의와 불의를 결단하는 것.
* 만고일인: 오랜 세월동안 한사람뿐.
67. 임란출세臨亂出世 하실적에 삼보조선三保朝鮮 하신다니
* 臨亂出世(임란출세); 어려운 난이 일어 날 때에 세상에 출현 하셔셔 세 번 조선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이다. 관운장은 의리와 용맹의 표상으로 그의 대인대의(大仁大義)를 기려 역대 왕조에서 거룩할 성(聖), 임금 제(帝), 임금 군(君) 자(字)를 놓아 성제군(聖帝君)으로 추앙해 왔다. 우리 민족이 관운장을 경애하여 잘 받들어 주어 관운장이 삼보조선(三保朝鮮)한다는 말이 전해 온다.
<연려실기술>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 구절이 보인다.
일찍이 임진년과 정유년의 왜란 때에 관우의 신령이 나타나 신병(神兵)으로써 싸움을 도와주어 명나라 장수와 군사들이 모두 말하기를, "평양의 싸움에서 이긴 것과 도산(島山)에서의 싸움과 삼도(三道)에서 왜병을 구축할 때 관우의 신령이 늘 나타나 음조(陰助)하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 장병들이 말하기를 평양싸움, 홍산싸움 때에 관우의 영혼이 나타나서 왜병들과 싸우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말하였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평양까지 차지하니 선조는 의주로 피난하고 곧이어 명나라 이 여송의 구원병이 들어 닥쳤다. 조명연합군은 먼저 평양성을 되찾으려 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왜군도 만만치 않게 버티니 싸움은 밤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로부터 수천의 신병이 나타나 왜병을 치는지라 마침내 빼앗겼던 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 날 칠흙 같이 어두운 밤 신병을 거느리고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관운장.
때는 선조대왕 25년 어는 봄날이다.
선조대왕께서는 춘곤을 못이겨 깊은 잠이 들었는데 비몽사몽간에 위퐁이 당당한 한 장군이 적토마를 타고 청룡도를 들고 삼각수를 날리며 늠름하게 대궐 안으로 들어와서 선조대왕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아우님 그간 별고 없으신지? 나는 삼국시대 관우인데 우리들의 의리와 인정을 잊지는 않았겠지? 유비관우장비의 도원결의 말일세. 우리 3형제는 살아서는 합심협력하고 서로를 도왔고 특히 형님(유비)이 촉한의 왕이 되자 나(관우) 와 동생(장비)는 촉한에 충성을 바치고 마침내 순국하지 않았는가? 우리 삼형제는 한 세대가 끝나고 영혼의 세계에서도 그 의를 지켜왔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후 형님은 명나라의 신종황제가 되고 나는 전쟁에서 인명을 너무 많이 해쳐서 인간 환생이 안 되었고 아우는 현재 조선왕이 돠었지. 머지않아 동생의 나라에는 큰 병란이 일어날 텐데 아무 방비도 없이 나날이 보내는 동생이 딱해서 지금 내가 일깨워 주러 왔네. 이 난리는 표독한 왜적이 쳐들어오는 난리인데, 7 ~ 8년이나 걸릴테니 명나라 신종황제(유비)에게 구원을 청해서 수습하도록 하게. 내가 신종황제에게 도원의 고사를 들어 간곡히 부탁할테니 주저말고 시행하게." 하고 선연히 사라졌다. 깨고 보니 이상한 꿈이었다. 그러나 정신이 아찔하고 머리가 핑돌았다. 대왕은 조정의 백관과 더불어 방책을 논의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힘없는 조정은 별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마침내 임진왜란 때 관운장이 현몽한데로 선조 25년 4월 왜군 15만이 부산에 상륙하여 쳐들어오니 이것이 임진왜란인 것이다. 막아낼 재주가 없는 선조대왕은 서울을 비우고 의주로 피난을 가니 삼천리강산은 초토화가 되고 피가 흘러 강이 되었다. 이 틈에 많은 보물과 문화재는 왜적들의 손에 들어갔고 피난민들은 쫓기다 굶어죽은 자가 부지기수였다. 임진왜란이야 말로 개국 오천년 이래의 대참살전이었는데 자칫하면 국맥이 끊어질 뻔한 위기에까지 다달았다.
선조대왕께서는 의주에서 사신을 명나라 신종황제에게 보내어 원병을 청하였다. 그 요청이 간곡해서인지 관우의 신종황제에 대한 현몽에 감동해서인지 신종황제는 이여송(李如松)을 총수로 하여 5만의 군사를 파병하였는데 마침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과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전쟁은 가짜스로 끝이 났다. 전쟁은 끝이 났지만 그간에 겪은 말할 수 없는 오욕과 회한과 비통과 수모를 어찌 다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마는 그중에서도 잊지 못할 것이 있다.
그것은 관우의 현몽이요, 명나라에 대한 고마움이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관제묘를 건립하였는데 명나라 신종황제는 사신을 보내어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그래서 임진왜란이후에 수많은 관왕묘가 이 땅에 세워지게 되었고 극진한 대접과 공경을 받게 되었다.
68. 무섭더라 무섭더라 의리의자義理義字 무섭더라
* 권지 1장 20절에“내 얼굴이 관운장과 같으냐” 하시니 공우가 놀라며 대답하지 못하고 주저하거늘 증산께서 세 번을 거듭 물으시니 공우는 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관운장과 흡사하나이다”고 아뢰었다. 즉 증산성사께서는 뇌성보화천존으로 삼계해마 대제신위 원진천존 관성제군과 같은 분임을 암시하여 놓은 것이다.
* 해마란: 마를 풀어 준다는 뜻.
* 대제란: 그 임무를 맡고 있는 주장이 되는 분을 말함.
69. 무지無知한 창생蒼生들아 오천만신傲天慢神 부디마라
* 창생: 세상에 모든 사람들.
* 오천만신: 하늘에 거만하고 신에게 방자함. 조상신은 인간의 뿌리요 천지신명은 천지를 다스리는데 사람은 신의가호아래 살면서 신을 무시하거나 神(신)앞에 오만해서는 안된다. (명심보감)에 획죄어천이면 무소도야니라. 하늘에 죄를 범하면 빌 곳이 없다는 말이다.
70. 선천도수先天度數 어찌하여 선악구별 혼잡善惡區別 混雜해서
* 혼잡: 뒤섞이어서 분잡함.
71. 소인도장小人徒長 되었으며 군자도소君子道消 되었던가
* 소인배는 늘어나고 군자는 사라져 가는 도리(이치)라는 말씀이다.
* 소인도장: 인간의 도리와 공중도덕을 무시하고 金權(금권) 暴力(폭력) 人權蹂躪(인권유린)등 상극을 조장하는 모든 행위를 하면서 무도한 자들의
행위가 판을 치는 세상.
* 군자도소(君子道消): 소인들이 무법천지로 날뛰는 세상이 되어 소인들의 무리가
크니 군자의 도는 힘을 못쓰고 군자들을 보고 嘲笑批評(조소비평) 하고 군자의
도를 따르는 자가 적으니 군자의 道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72. 악惡한 자者도 복福을받고 착한 자者도 화禍 당하네
* 악한 자도 복을 받고: 간악한 권모술수와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천리와 인륜을 어기고 금전에 눈이 어두운 사람들이 마음대로 하는 것을 해원으로 착각하고 복 받는 것으로 생각하는 선천세상이다.
* 착한자도 화 당하네: 착하고 선량하고 양심을 지키고 인륜의 도리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라도 도를 모르면 척신들에게 유린당하여 억울한 화를 당하여 죽는다.
73. 후천운수 後天運數 개벽開闢하여 선악구별善惡區別 가릴적에
* 교법 3장 24; 24. 증산께서 교훈하시기를 “인간은 욕망을 채우지 못하면 분통이 터져 큰 병에 걸리느니라. 이제 먼저 난법을 세우고 그 후에 진법을 내리나니 모든 일을 풀어 각자의 자유의사에 맡기노니 범사에 마음을 바로 하라. 사곡한 것은 모든 죄의 근본이요. 진실은 만복의 근원이 되나니라. 이제 신명으로 하여금 사람에게 임하여 마음에 먹줄을 겨누게 하고 사정의 감정을 번갯불에 붙이리라. 마음을 바로 잡지 못하고 사곡을 행하는 자는 지기가 내릴 때에 심장이 터지고 뼈마디가 퉁겨지리라. 운수야 좋건만 목을 넘어가기가 어려우리라.”
74. 신목여전神目如電 무섭더라 암실기심暗室欺心 하지마라
75. 너의몸에 지은죄罪는 너의몸에 그칠지오
* 교법 1:7 우리공부는 물 한 그릇 이라도 연고 없이 남의 힘을 빌리지 못하는 공부이니 비록 부자와 형제간이라도 함부로 의지하지 말지어다.
* 재생 30. 남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면 내 눈에서는 피가 흐르느니라.
76. 너의몸에 닦은공덕功德 너의몸에 복록이다
77. 콩을심어 콩이나고 외를심어 외가난다
78. 그도 역시亦是 이치理致로써 천리인사天理人事 일반一般일세
* 불변의 법칙 심은 대로 거둔다.
* 세상에 속담같이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하지 않고 콩을 심어 콩이 나고 외를 심어 외가 난다고 한 까닭은? 외(참외)는 여름철 더위에 갈증과 더위를 면하기 위하여 먹는 채과(菜果)이다. 콩은 봄에 심어서 가을에 수확을 하고 외는 봄에 심어서 여름에 수확하는 것이다. 난법은 외가 되고 참 진법은 콩이 된다.
* 천리: 하늘의 이치. 하늘이 하는 일.
* 인사: 사람이 하는 일.
* 일반: 다를 대가 없는 마찬가지의 상태.
79. 이말저말 그만두고 뱃노래나 불러보자
* 이말: 선천에 관한 말.
* 저말 :후천에 관한 말.
* 뱃노래: 도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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