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록(行錄) 2장
1. 증산성사께서 정유년(丁酉年1897년)에 다시 정남기(鄭南基)의 집에 글방을 차리고 아우 영학(永學)과 형렬(亨烈)의 아들 찬문(贊文)과 그 이웃 서동들을 가르치셨도다. 이때에 유불선 음양참위(儒佛仙陰陽讖緯)를 통독하시고 이것이 천하를 광구함에 한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시고 얼마동안 글방을 계속하시다가 인심과 속정을 살피고자 주유의 길을 떠나셨도다.
◐ 유불선음양참위(儒佛仙陰陽讖緯); 儒家(유가), 佛家(불가), 仙家(선가), 그리고 陰陽(음양)의 이론서적과 참서I(풍수 도참서), 위서(예언서, 비결서)서적을 총망라한 것.
2. 금구 내주동을 떠나신 증산성사께서는 익산군 이리(裡里)를 거쳐 다음날 김일부(金一夫)를 만나셨도다. 그는 당시 영가무도(詠歌舞蹈)의 교법을 문도에게 펼치고 있던 중 어느 날 일부가 꿈을 꾸었도다. 한 사자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일부에게 강사옥(姜士玉)과 함께 옥경(玉京)에 오르라는 천존(天尊)의 명하심을 전달하는 도다. 그는 사자를 따라 사옥과 함께 옥경에 올라 가니라. 사자는 높이 솟은 주루 금궐 요운전(曜雲殿)에 그들을 안내하고 천존을 배알하게 하는 도다. 천존이 증산성사께 광구천하의 뜻을 상찬하고 극진히 우대하는 도다. 일부는 이 꿈을 꾸고 이상하게 생각하던 중 돌연히 증산성사의 방문을 맞이하게 되었도다. 일부는 증산성사께 요운(曜雲)이란 호를 드리고 공경하였도다.
◐ 김일부는 ‘정역(正易)’을 지은 자로서 죽어서 청국명부(淸國冥府)를 맡은 자이다. 강사옥(姜士玉)은 강증산의 존함이다. 김일부가 꿈속에서 강사옥과 함께 천존(天尊)이 계시는 요운전(曜雲殿)에 올랐다. 천존이란 응원뇌성보화천존(應元雷聲普化天尊)으로서 전기(電氣)를 맡으셔서 삼라만상(森羅萬象)을 지배 자양하시는 분이시며, 요운전이란 바로 천존이 계시는 궁궐이다. 일부가 강사옥의 방문(訪問)을 받고 공대(恭待)하면서 ‘요운(曜雲)’이란 호를 올린 것은 바로 강사옥이란 분이 요운전(曜雲殿)에 계시는 천존과 동일한 분임을 나타내는 표징(標徵)인 것이다. 즉 강사옥의 원신(元神)이 바로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이심을 뜻한다.
그러므로 강증산은 옥황상제님의 명을 받고 삼계대권의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신장으로 광구천하하기 위하여 인간의 몸으로 오신 분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내용은 신장주문에 잘 나타나 있다.
3. 증산성사께서 이곳에 며칠 머물고 다시 계속하시어 경기(京畿)․황해(黃海)․ 평안(平安). 함경(咸鏡). 경상(慶尙)도의 각지에로 두류 유력하셨느니라. 어느 날 증산성사께서 전주부에 이르시니 부중 사람들이 증산성사를 신인으로 우러러 모시니라.
4. 주유하시다가 증산성사 함열(咸悅)에 이르셔서 “만인함열(萬人咸悅)”이라 기뻐하셨도다.
◐ 萬人咸悅(만인함열); 만인이 다함께 기쁘다. 즉 후천에는 모든 사람이 이와 같이 기쁨을 다 함께 누리게 된다는 뜻.
5. 증산성사께서 어느 때 내장산(內藏山)에 가셨을 때에
世界有而此山出 紀運金天藏物華 應須祖宗太昊伏 道人何事多佛歌
세계유이차산출 기운금천장물화 응수조종태호복 도인하사다불가
라고 읊으셨도다.
≪세계(우주 삼라만상)가 있는 것은 이 山(산)으로부터 나오고, 세기의 운은 금천운(가을운)으로 돌아오니 감추어졌던 만물이 화려하게 드러난다. 마땅히 조상의 근본은 태호 복(伏=人犬)인데 도인들은 어찌하여 부처(석가)노래만 자꾸 하는가!≫
※ 山(산)이란 어떤 의미 인가? 山(산)은 宗敎(종교)의 宗(종)자위에 山(산)을 올려놓으면 숭상할 崇(숭)자가 된다. 그래서 모든 宗敎(종교)에서 崇尙(숭상)하는 신앙의 대상을 山(산)이라고 표현하는데, 山(산)은 제일 높으신 우주 삼라만상의 주인을 의미 한다. 우주 삼라만상의 주인을 西敎(서교)에서는 하느님, 천주님, 불교에서는 미륵, 유교에서는 조물주 또는 옥황상제님이라고 하였는데 전경에서는 山君(산군)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모든 만물은 이 山(산)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이 감추어졌던 山(산)이 그 정체가 밝혀지니 화려하게 빛이 나는 것이다. 그 山(산)은 우주의 가을 세상에 인간 추수하러 오시는 하느님이신데 그 분을 태호 伏(복) 즉 人犬(인견=개띠)으로 오신 하느님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어쩐 일로 많은 도인들은 서가여래만 찾는단 말인가? 이 글의 내용은 증산성사께서 후천을 여는 실마리를 암시한 내용으로 내장산에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그 결과로 내장산이란 그 속에 山(산)을 감추어 놓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後人山鳥皆有報(후인산조개유보)라고 하였던 것이다. 즉 운수는 내 뒷사람인 山鳥(산조=산군과 해왕)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알리노라.
6. 또 어느 때 증산성사께서 종도들에게
步拾金剛景 靑山皆骨餘 其後騎驢客 無興但躊躇
보습금강경 청산개골여 기후기려객 무흥단주저
를 외워 주시니라.
◐ 세월의 흐름(사계절이 바뀌는 것) 따라 금강산(道도)을 다 구경하고보니, 맑고 빼어난 금강산(道도)은 어디 가고 뼈다귀만 남은 겨울산(겨울道)이 되었구나. 이후에 당나귀 타고 오는 손님(대두목)은 객(도인들)이 없으니 흥이 없어 다만 머뭇거릴 뿐이다.
※ 이 글은 道(도)의 흐름을 금강산에 비유한 것이라고 사료 된다. 금강산은 봄에는 금강산이라고 부르고, 여름에는 봉래산, 가을에는 풍악산, 겨울에는 개골산이라고 부른다. 즉 무극도(봄), 태극도(여름), 대순진리회(가을)를 거쳐 지금은 생장염장(生長斂藏생겨나서, 자라고, 거두고, 저장)의 藏(장)의 시기다. 즉 겨울의 水氣(수기)속에 道(도)가 숨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道(도)가 원시반본 하여 완성이 되어 무극대운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태극도에 머물러 있거나, 대순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꽃은 피었으나 성장하지 못하고 낙화, 낙과가 되어 결실하지 못한다는 결론이다.
※ 기려객(騎驢客)은 당나귀 타고 오는 손님을 뜻하며, 이는 鄭(정)도령을 말하는 것이며 鄭(정)은 井(우물 정)이고 井(정)은 韓(우물귀틀 한)이 된다. 흔히 이것은 나귀를 타고서 나귀를 찾는다는 뜻으로, 근본을 잊고서 딴 곳에서 구하는 어리석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즉 말하자면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다. 이는 원시반본 되는 이치에서 원 근본을 찾으라는 뜻이다. 금강산의 겨울을 개골산이라고 한 것은 추풍낙엽에 앙상한 가지만 남은 것에 비유한 것이며, 道(도)로서 이치를 풀어 본다면 추풍낙엽에 꽃 같았던 도인들은 낙엽처럼 다 떨어지고 몇 안 되므로 흥이 없어 주저주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증산성사께서는 그때를 대비하여 미리 말씀해 놓으셨다. 행록 5장 22절에 “내가 죽어도 나를 따르겠느냐”고 물으시는지라. 종도들이 그래도 따르겠나이다. 라고 맹세하니 또 다시 말씀하시기를 “내가 궁벽한 곳에 숨으면 너희들이 반드시 나를 찾겠느냐”고 다그치시니 역시 종도들이 찾겠다고 말하는지라. 증산성사께서 “그리 못하나니라. 내가 너희를 찾을 것이오. 너희들은 나를 찾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도다.
7. 증산성사께서 삼 년 동안 주유하신 끝에 경자년(庚子年1900년)에 고향인 객망리에 돌아오셔서 시루산 조모님의 묘를 면례하시니 이 때 류서구(柳瑞九)가 지사(地師)로서 증산성사를 보좌하였도다. 이후에 증산성사께서 항상 시루산 상봉에서 머리를 푸시고 공부를 하셨도다. 그러던 어느 날 호둔 하고 앉아 계셨을 때 마침 나뭇꾼들이 지나가다가 이것을 보고 기겁하여 증산성사의 부친께 아뢰는지라. 부친께서도 당황하여 시루봉에 오르니 범은 보이지 않고 증산성사께서 태연자약하게 앉아서 공부하고 계시는 것만이 보였도다.
8. 증산성사께서는 객망리 시루봉에서 공부하시다가 밤이 되면 간간이 유덕안의 집에 내려가셔서 쥐눈이콩 한 줌을 얻어 冷水(냉수)와 함께 잡수시곤 하셨도다. 증산성사께서 덕안의 아들 칠룡(七龍)을 바라보시고 “네가 나에게 살려달라고 애걸하는구나.”고 말씀하셨느니라. 증산성사께서 시루봉에 오르시면 산천이 크게 울리도록 소리를 지르셨도다. 이 소리에 마을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두려워 문 밖으로 나오지 못하였도다.
◐ 쥐눈이콩; 鼠目太(서목태)라고 하는데 쥐 서. 눈 목. 클 태, 통할 태이다. 鼠(서)는 子(자)를 말하는 것이며 북방 1.6수이다. 쥐 눈은 밤눈이 밝다. 그러므로 道(도)는 겨울의 水氣(수기)속에 감추어져 있으므로 이치를 깨달아서 쥐 눈처럼 밝게 보면 도를 통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9. 성사께서 시루산에서 공부하시다가 이따금 산 밑에 있는 샘터 너머에서 우시기도 하셨는데 한번은 부친께서 밥을 가지고 시루봉에 오르다가 그 광경을 보았도다.
10. 그러시다가도 다시 공부를 계속하셨는데 어느 날 시루봉에서 진법주(眞法呪)를 외우시고 오방신장(五方神將)과 四十八장과 二十八장 공사를 보셨도다. 이후에 증산성사께서 목에 붉은 수건을 걸고 쌍정리(雙丁里)에 있는 김기진(金基鎭)의 집에 가셔서 그에게 공사에 관해서 말씀하셨도다. 이 집에 동리 사람들이 많이 모이곤 하였도다.
◐ 희역시대에는 천지신명(12지지 신명)을 하늘에 봉하여서 천존시대라 하는데 하늘이 天用雨露之薄則必有萬方之怨(천용우로지박즉필유만방지원) 즉 ≪하늘에서 비와 이슬을 박하게 쓰므로 만방(萬方)에 원망을 맺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오방신장(五方神將=오행)을 땅에 봉하였는데 이것을 지존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땅도 地用水土之薄則必有萬物之怨(지용수토지박즉필유만물지원)≪땅이 물과 흙을 박하게 써서 만물(萬物)에 원망을 맺게 되었으니≫ 이번에는 陰陽神明(음양신명)을 사람에게 봉하게 되는 인존시대이다. 道(도)가 음양이니 어떤 신명도 순응하게 되어 吾心之樞機門戶道路大於天地(오심지추기문호도로대어천지) 즉 ≪내 마음의 추기와 문호와 도로는 천지(天地)보다 더 크므로≫ 知心大道術(지심대도술)이 된다. 즉 마음이 서로 道(도)와 통하여 깨달으면 大道(대도)의 道術(도술)이 나오므로 불로불사의 시대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관건은 마음에 어떤 신명을 모시느냐가 관건인 것이다. 그런데 신명이 사람에게 봉해지려면 강태공과 문왕의 도수가 나와야 된다.
* 목에 붉은 수건을 걸었다는 말씀은 목은 목 줄기라고 하는데 木(목)에서 木(목)으로 이어진다는 뜻이며, 붉은 수건은 朱丹(주단)이란 뜻이다. 주단은 단주라는 뜻이고 줄기는 맥으로써 단주의 원을 품고 오신 목성(木姓) 즉 박성구도전님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뜻하신 것이다. 박우당은 1969년(기유년) 대순진리를 창설하시고 1995년 12월 4일 화천하기까지 27년간은 '헛 도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비결서에 次出朴(차출박=두 번째 나타나는 박씨)이라고 하였으며 다시 1995년(을해년)부터 2005년(을유년)까지 10년간은 次出朴(차출박)인 박성구도전님께서 강태공도수로써 “강태공(姜太公)이 십 년의 경영으로 제후(대두목)를 얻어 멀리 후세에 전하려 함이다. 그러므로 태공의 도술은 이때에 나온다.” 하셨듯이 포항에서 상도방면 10년 경영으로 대두목(제생관장)을 기다린 것이다. 강태공이 위수(渭水)에서 10년 간 3600개의 낚싯대를 버리며 때를 기다린 것은 봉신(封神)을 하고 지존시대를 열 도수(度數)를 짜는 과정이고 그 끝에 문왕을 만나 주역(周易)의 괘상(卦象)에 따라 봉신(封神)을 실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도 그와 같아서 강태공이 3600개의 낚시를 위수에 버리면서 짜둔 도수대로 강태공(강신농)은 문왕(대두목)을 만나 봉신(封神)을 실행하게 되므로 봉신(封神)의 법방이 대두목에게 있는 것이다.
11. 증산성사께서 공부하시는 소문이 그 지방에 전해지자 고부(古阜) 경무청은 증산성사께서 요술공부를 한다 하여 붙잡으려고 순검들을 보내오니 증산성사께서는 순검이 오는 것을 미리 아시고 삿갓을 쓰고 길가에 나가서 안개를 짓고 앉아 계셔도 순검들이 몰라보고 지나가곤 하였도다.
12. 증산성사께서 신축년(辛丑年) 五월 중순부터 전주 모악산 대원사(大院寺)에 가셔서 그 절 주지승 박금곡(朴錦谷)에게 조용한 방 한 칸을 치우게 하고 사람들의 근접을 일체 금하고 불음 불식의 공부를 계속하셔서 四十九일이 지나니 금곡이 초조해지니라. 마침내 七월 五일에 오룡허풍(五龍噓風)에 천지대도(天地大道)를 여시고 방안에서 금곡을 불러 미음 한잔만 가지고 오라 하시니 금곡이 반겨 곧 미음을 올렸느니라. 잠시 후에 증산성사께서 밖으로 나오시니 그 입으신 옷이 보기에 민망스러울 정도로 남루한지라. 주지승 금곡이 곧 증산성사의 본댁에 사람을 보내 의복을 가져오게 하였더니 부인 정씨(鄭氏)는 의복을 내어놓으며 불경한 말을 하니라. 이것은 평소에 증산성사께서 가사를 돌보시지 않았던 불만에서 나온 소치였도다. 금곡이 그 의복을 증산성사께 올리니 가라사대 “이 옷에 요망스런 계집의 방정이 붙었으니 속히 버리라” 하시고 입지 않으셨다. 이 일을 금곡이 다시 사람을 시켜 부인에게 전하니 그제야 비로소 부인 정씨가 뉘우치고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다시 새 옷을 올렸도다.
13. 그 후 어느 날 금곡이 증산성사를 정중하게 시좌하더니 증산성사께 저의 말을 말씀하여 주시기를 청원하였도다. 증산성사께서 가라사대 “그대는 전생이 월광대사(月光大師)인 바 그 후신으로서 대원사에 오게 되었느니라. 그대가 할 일은 이 절을 중수하는 것이고 내가 그대의 수명을 연장시켜 주리니 九十세가 넘어서 입적하리라” 하시니라.
14. 하루는 증산께서 가라사대 “대범 판 안에 있는 법을 써서 일하면 세상 사람의 이목의 저해가 있을 터이니 판 밖에서 일하는 것이 완전하리라”고 이르셨도다.
◐ 판 안에 있는 법, 즉 기존의 기득권(旣得權)을 가진 사람들이 ‘알고 있는 법’으로써 일을 하게 되면, 기득권을 가진 자들의 간섭으로 인해 일을 행해 나가는데 저해가 따르게 된다. 그러므로 판 밖, 즉 기득권을 가진 자들의 영향이 없는 곳에서 일을 해야만 저해가 따르지 않아 안전하게 일할 수 있으므로 뜻을 완전히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정산성사께서는 증산성사 재세시에 한 번도 직접 만난 적이 없으셨다. 그러나 오직 정산성사가 판 밖에서 강증산 성사를 판 밖에서 아무런 저해없이 증산성사을 봉안하셨고 증산성사의 덕을 펼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박우당께서도 태극도를 나와 서울로 올라오셔서 정산성사를 봉안하신 것이다. 태극도 내에서는 임원들의 저해(沮害)로 인해 이 일을 이룰 수가 없으므로 판 밖에서 일을 이루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산성사의 덕을 펴신 것이다. 박우당 재세시 상도 박성구 선감이 박우당의 존영을 그려 올리고 원위(元位)에 모시고자 주장하였으나 임원들이 이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를 했었다. 상도 박성구 선감은 박우당을 원위(元位)에 모시는 이 진리를 판 안에서 주장하게 되면 인정하지 않는 임원들로부터 저해를 받기 때문에 판 밖에서 1995년 12월 15일 봉안하였다. 또한 제생관장은 상도 박성구도전님이 옥황상제님이심을 밝히고 2005년(을유년) 9월9일(음) 原位(원위)에 모시고 寃(원)의 뿌리인 丹朱(단주)의 해원치성을 올렸다. 이로써 진법(眞法)이 완성(完成)되어 옥황상제님의 덕화를 전 세계 만방으로 펼쳐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15. 증산성사께서 대원사에서의 공부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 방에서 나오시니 대원사 골짜기에 각색의 새와 각종의 짐승이 갑자기 모여들어 반기면서 무엇을 애원하는 듯하니라. 이것을 보시고 증산성사께서 가라사대 “너희 무리들도 후천 해원을 구하려 함인가” 하시니 금수들이 알아들은 듯이 머리를 숙이는 도다. 증산성사께서 “알았으니 물러들 가 있거라.”고 타이르시니 수많은 금수들이 그 이르심을 쫓는 도다.
16. 그리고 증산성사께서 어느 날에 가라사대 “나는 곧 미륵이라. 금산사(金山寺) 미륵전(彌勒殿) 육장금신(六丈金神)은 여의주를 손에 받았으되 나는 입에 물었노라”고 하셨도다. 그리고 증산성사께서 종도들에게 아래 입술을 내어 보이시니 거기에 붉은 점이 있고 증산성사의 용안은 금산사의 미륵금신과 흡사하시며 양미간에 둥근 백호주(白毫珠)가 있고 왼 손바닥에 임(壬)자와 오른 손바닥에 무(戊)자가 있음을 종도들이 보았도다.
◐ 증산성사께서 ‘나는 곧 미륵이라’ 하심은 ‘나는 미륵의 일을 하러 왔노라’ 하심이지 ‘나의 정체가 미륵’이란 뜻은 아니다. 증산성사께서는 정체가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이시지 ‘미륵’은 아니신 것이다. ‘곧’이란 단어의 의미는 ‘즉’, ‘다시 말하면’, ‘바로’의 뜻으로써 성격상 동일함을 설명하는 부사이다. 예를 들면 ‘민심이 곧 천심이다’와 같이 성격은 동일하지만 존재는 엄연히 다른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미륵은 따로 계신다는 뜻이다.
17. 김형렬이 어느 날 증산성사를 모시고 있을 때 “정(鄭) 집전이라 하는 사람은 지식이 신기한 사람이외다. 저의 증조가 계실 때에 저의 집에 오랫동안 머물었나이다. 동리 사람들이 보릿고개를 앞에 두고 걱정하였는데 이 걱정을 알고 금광을 가리켜 주어서 고생을 면케 하였으며 많은 영삼(靈蔘)을 캐어 병든 사람을 구제하였고 지난 임술(壬戌)년에 경상도에서 일어난 민란을 미리 말하였나이다. 저의 증조께서 그의 지식을 빌어 명당 하나라도 얻어서 그 여음을 후세에 끼치지 못하였나이다. 이것이 오늘날 저의 한이 되는 일이옵니다.”고 여쭈는지라. 듣고만 계시던 증산성사께서 가라사대 “그런 휼륭한 지혜를 가진 사람이 어찌 남인 너의 집의 밥을 헛되게 먹으리오. 천리의 극진함이 털끝만한 인욕의 사가 없도다.” 하셨도다.
18. 증산성사께서 어느 날 형렬에게
夫用兵之要在崇禮而重綠 禮崇則義士至 祿重則志士輕死
부용병지요재숭례이중록 례숭즉의사지 록중즉지사경사
故祿賢不愛財賞功不逾時 則士卒並敵國削
고녹현불애재상공불유시 즉사졸병적국삭
을 외워 주시고 기억하라고 이르셨도다.
◐ 대체로 병사를 쓰는 요체는 예를 받들고 녹을 중하게 쓰는 있는 것이다. 예(禮)로써 받들면 의로운 선비라 이르는 것이고, 녹을 중하게 쓰면 지사(志士)가 충성을 다하게 된다. 그러므로 어진 이에게는 재물을 아끼지 말 것이며, 공에 따라 상을 주되 그 시기를 놓치지 않아야 되며. 그런즉 장군과 신하가 서로 힘을 합하여 나라를 위해 적을 무찌르고 충성을 다하는 것이니라.
※ 志士(지사) ; 절개와 의리가 있는 선비.
19. 김도일(金道一)이 앓고 난 뒤에 어느 날 지팡이를 짚고 증산성사를 뵈러 갔도다. 이것을 보시고 증산성사께서 그 지팡이를 빼앗아 꺾어 버리시니 그는 할 수 없이 서있게 되었도다. 이후부터 그는 요통이 쾌차하였느니라. 그리고 증산성사께서 도일에게 가라사대 “문 밖에 나가서 서쪽 하늘에 붉은 구름이 떠있나 보라”고 하시고 그가 나가보고 들어와서 그러함을 아뢰였도다. 다시 증산성사께서 가라사대 “금산(金山) 도득(圖得)하기가 심히 어렵도다”고 하셨도다.
20. 증산성사께서 계묘년(1903년)에 객망리에 계셨도다. 삼월 어느 날에 형렬에게 “신명에게 요금을 줄 터이니 여산 윤공삼(礪山尹公三)에게 가서 돈을 얻어서 오라” 하시니 옆에서 시좌하고 있던 김 병욱이 전주 거부인 백남신(白南信)을 천거하는도다. 증산성사께서 형렬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하시고 위정 술을 많이 드신 후에 신발을 벗으신 채 대삿갓을 쓰시고 병욱을 앞세우고 그의 집에 가시니라. 이 때 장흥해(張興海)가 와 있었으며 마침 남신이 병욱의 집에 들어서는지라. 병욱이 증산성사께 손님이 온 것을 아뢰이니 누워 계시던 증산께서 몸을 일으켜 앉으시나 처음 대하는 예를 베풀지 않으시고 다짜고짜 그에게 “그대가 나의 상을 평하라” 말씀하시니 그가 “상리를 알지 못하나이다” 하거늘 증산성사께서 “상리는 참되지 못하나니 속평을 하라” 하시니 그가 “속평에 얼굴이 방정하고 풍후하면 부하고 미간 인당에 백호주가 있으니 가히 부귀 쌍전 하리로소이다”고 아뢰니 증산께서 웃으시며 “그대의 상을 평하면 입가로 침이 부글부글 나오니 이는 소가 마구 삭이는 격이라. 가히 부호가 되리라. 내가 쓸 곳이 있으니 돈 십만 냥을 가져오라” 이르시니라. 남신이 묵묵히 말이 없다가 “칠만 냥을 드리겠나이다. 어떠하나이까” 여쭈니라. 증산께서 응낙하시지 않으시니 남신이 다시 여쭈니라. “십만 냥을 채우려면 서울에 있는 집까지 팔아야 하겠나이다.” 그는 드디어 십만 냥을 만들어 드릴 것을 응락하는도다. 병욱이 증인이 되어서 증서를 써서 증산께 올리니 증산성사께서 그 증서를 받으셔서 병욱에게 맡기시니 병욱과 흥해가 세상에 드문 도량이심을 탄복하였도다. 그 후 증서를 증산께서 불사르셨도다. 이로 인하여 백남신이 증산성사를 쫓기 시작하였도다.
21. 계묘년(1903년) 가을에 가뭄이 동곡(東谷)에 계속되었도다. 김성천(金成天)은 동곡에서 밭을 부쳐 업으로 삼으니라. 그 나물밭에 가뭄 때문에 뜨물이 생겨 채소가 전멸케 되었는지라. 증산성사께서 그것을 보시고 가라사대 “죽을 사람에게 기운을 붙여 회생케 하는 것이 이 채소를 소생케 하는 것과 같으니라” 하시고 곧 비를 내리게 하셨도다. 그 후에 증산께서 출타하셨다가 얼마 후에 돌아오셔서 자현에게 “김성천의 나물밭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으시니라. 자현이 “지난 비로 소생되어 이 부근에서는 제일 잘 되었나이다”고 대답하였도다. “사람의 일도 이와 같아서 병든 자와 죽는 자에게 기운만 붙이면 일어나니라”고 말씀하셨도다.
22. 계묘년(1903년)도 저물어 가고 추수가 끝나 농부들이 벼를 들에서 말리기에 바쁜지라. 증산성사의 부친도 벼를 말리기 바쁘고 새와 닭을 쫓기에 애를 쓰느니라. 이것을 보시고 증산성사께서 “새 짐승이 한 알씩 쪼아 먹는 것을 그렇게 못 마땅히 여기니 사람을 먹일 수 있겠나이까”고 말씀하시면서 만류하셨도다.
23. 증산성사께서는 일진회가 일어난 후부터 관을 버리시고 대삿갓을 쓰시더니 정읍에 가신 후부터 의관을 갖추셨도다.
24. 안필성(安弼成)이 못자리를 하려고 볍씨를 지고 집을 나서려는데 증산성사를 뵈었도다. 증산성사께서 “쉬었다 술이나 마시고 가라”고 말씀하셨으되 필성이 사양하는지라. “못자리를 내기에 바쁜 모양이니 내가 대신 못자리를 부어주리라” 하시고 지게 위에 있는 씨나락 서너 말을 망개장이 밭에 다 부으셨도다. 그는 아무런 원망도 하지 못하고 앉아서 주시는 술을 마시면서도 근심하였도다. 주모가 들어와서 씨나락은 가지고 온 그릇에 그대로 있는 것을 알리는도다. 필성은 이상히 여겨 바깥에 나가 뿌려서 흩어졌던 씨나락이 한 알도 땅에 없고 그대로 그릇에 담겨 있는 것을 보고 전보다 한층 더 증산성사를 경대하는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