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순 전경 ★/●•―‥행 록

행록(行錄) 1장

고도인 2008. 3. 25. 12:09
 

행록(行錄) 1장


1. 강(姜)씨는 상고 신농(神農)씨로부터 시작되고 성(姓)으로서는 원시성이로다. 우리나라에 건너온 시조(始祖)는 이식(以式)이니 중국(中國) 광동(廣東) 강씨보(姜氏譜)에 공좌태조 이정천하후 양제찬위 공이퇴야(公佐太祖 以定天下後 煬帝竄位 公以退野)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우리나라 숙종 을축년보에 ‘수벌 고구려시 공위병마원수 지살수이 지수장란 잉류불반(隋伐高句麗時 公爲兵馬元帥 至薩水而 至隋將亂 仍留不返)’의 기록이 있는 바와 같이 진주강씨(晋州姜氏)는 중국(中國) 수양제(隨煬帝) 때에 우리나라에 건너 오니라. 시조(始祖) 이식으로부터 三十一대 자손 세의(世義)가 고부(古阜)로 낙향한 후 六대에 진창(晋昌)․우창(愚昌)․응창(應昌) 삼 형제도 이곳에 살았도다.


※ 염제신농(炎帝神農); 삼황(태호복희씨, 염제신농씨, 황제헌원)중의 한사람으로 신농씨는 불의 神(신)이자 태양의 神(신)이다. 염제는 우수인신(牛首人身)의 외모의 형상이며 성은 강(姜), 이름은 궤(軌또는 석년石年)이다. 태호복희씨는 성씨로써 이어져오지 못하고 지구상에서 제일 역사가 깊고 오래된 성씨로는 염제신농으로 원시성이다!! 섬서성 기산 아래 강수(姜水)라는 물가에 살았다고 해서 신농씨의 성을 '강(姜)'이라 했다. 오늘날 동양의학의 始祖(시조)이기도 한 신농씨는 100여종의 독초를 일일이 맛보고 약물학의 기틀이 되었으며 신농은 동양에서 본초의 창시자로 알려져 중국 최고의 약물학 서인 《신농본초경》에 그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그 후 황제 헌원이 의학을 정립하여 황제내경을 저술 하였다. 또한 신농씨는 '최초로 시장경제'를 열었으며. '농사짓는 법'도 처음으로 가르쳤다.

※ 姜以式(강이식) ; 고구려 병마 도원수(兵馬道元帥). 고구려 영양왕때 중국의 수나라 문제(文帝)가 백만 대군을 이끌고 여러 차례 이 나라를 침범함에 강이식장군은 도원수로서 육군에 을지문덕, 해군에 왕제건무(王帝建武) 등 휘하의 장군들로 하여금 대적케 하여 임유관 및 살수대첩에서 승리함으로써 누란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성웅이시다.

※ 양제(楊帝) ; 중국 수(隋)나라의 제2대 황제(569∼618,재위 604∼618). 이름 양광(楊廣). 연호 대업(大業). 문제(文帝)의 둘째아들. 어머니는 문헌독고황후(文獻獨孤皇后). 즉위한 뒤에는 만리장성을 수축하였고, 뤄양[洛陽]에 동경(東京)을 조영하였으며, 남북을 연결하는 대운하를 완성하는 등 그는 단순한 폭군만은 아니었으며, 대업례(大業禮), 대업률령(大業律令)의 정비와 대운하의 완성과 같은 큰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2. 이곳은 예로부터 봉래산(蓬萊山), 영주산(瀛洲山), 일명(一名) 신선봉(神仙峰) 방장산(方丈山)의 세 산이 삼신산(三神山)으로 불리어 오던 곳이로다.


3. 방장산(方丈山)으로부터 내려오는 산줄기에 망제봉(望帝峰)과 영주산(瀛洲山)이 우뚝 솟으니 그 뒤 기슭과 함께 선인포전(仙人布氈)을 이룩하고 있도다. 망제봉(望帝峰)의 산줄기가 기복연면하여 시루산을 이룩하였도다


4. 이 시루산 동쪽 들에 객망리(客望里)가 있고 그 산 남쪽으로 뻗은 등(燈)판재 너머로 연촌(硯村)․강동(講洞)․배장(拜將)골. 시목동(柿木洞)․유왕(留王)골. 필동(筆洞) 등이 있으며 그 앞들이 기름들(油野)이오. 그리고 이 들의 북쪽에 있는 산줄기가 뻗친 앞들에 덕천사거리(德川四街里) 마을이 있고 여기서 이평(梨坪)에 이르는 고갯길을 넘으면 부정리(扶鼎里)가 있고 그 옆 골짜기가 쪽박골이로다.


5. 객망리에 강씨 종가인 진창 어른부터 六대에 이르렀을 때 증산께서 탄강하셨으니 증산성사의 성은 강(姜)씨이오. 존휘는 일순(一淳)이고 자함은 사옥(士玉)이시고 존호는 증산(甑山)이시니라. 때는 신미(辛未)년 구(九)월 十九일인 즉 이조고종(李朝高宗) 八년이며 단기로서는 四千二百四년이고 서기로는 千八百七十一년 十一월 一일이로다.


6. 그리고 그 탄강하신 마을을 손바래기라고 부르며 당시에 전라북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全羅北道古阜郡優德面客望里)라고 부르더니 지금은 정읍군 덕천면 신월리(井邑郡德川面新月里) 새터로 고쳐 부르도다.


7. 객망리는 증산께서 탄강하시기 이전에는 선망리(仙望里)라 하더니 후에는 객망리라 하고 증산께서 화천(化天)하신 뒤로는 신월리(新月里)라 고쳐 부르고 오늘에 이르도다.


8. 父親(부친)의 성함은 문회(文會)이며 자는 흥주(興周)이고 그는 범상에 우렁찬 음성을 가진 분으로서 그의 위엄은 인근 사람만이 아니라 동학의 義兵(의병)들에게까지 떨쳤도다.


9. 모친은 권(權)씨이며 성함은 양덕(良德)이니 이평면(梨坪面) 서산리(西山里)에 근친가서 계시던 어느 날 꿈에 하늘이 남북으로 갈라지며 큰 불덩이가 몸을 덮으면서 천지가 밝아지는 도다. 그 뒤에 태기가 있더니 열 석달 만에 증산(上帝)께서 탄강하셨도다.


10. 증산께서 탄강하실 때에, 유달리 밝아지는 산실(産室)에 하늘로부터 두 선녀가 내려와서 아기 증산을 모시니 방안은 이상한 향기로 가득 차고 밝은 기운이 온 집을 둘러싸고 하늘에 뻗쳐 있었도다.


11. 증산께서 어려서부터 성품이 원만하시고 관후하시며 남달리 총명하셔서 뭇 사람들로부터 경대를 받으셨도다. 어리실 때부터 나무심기를 즐기고 초목 하나 꺾지 아니하시고 지극히 작은 곤충도 해치지 않을 만큼 호생의 덕이 두터우셨도다.


12. 증산께서 일곱 살 때에 어느 글방에 가셨는데 훈장(訓長)으로부터 놀랄경(驚)의 운자를 받고 ‘원보공지탁 대호공천경(遠步恐地坼 大呼恐天驚)’이라고 지으셨도다.


◐ 멀리 뛰려 하니 땅이 꺼질까 두렵고 크게 소리치려 하니 하늘이 놀랄까 두렵도다.


13. 증산께서 글방에 다니실 때 훈장(訓長)으로부터 들으신 것은 그 자리에서 깨우치시고 언제나 장원하셨도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노라. 훈장이 서동(書童)들의 부모에게 미안함을 느껴 속으로 다음 서동에게 장원을 주려고 시험을 뵈었으나 역시 증산께서 장원하셨던 바 이것은 증산께서 훈장의 속셈을 꿰뚫고 그로 하여금 문체와 글자를 분별치 못하게 하신 까닭이라고 하도다.


14. 증산께서 열세 살 되시던 어느 날 모친께서 짜 놓은 모시베를 파시려고 이웃사람 유덕안(兪德安)과 함께 정읍(井邑)에 가셨도다. 그는 볼일이 있어 가고 증산께서는 잠시 다른 곳을 살피시는 사이에 옆에 놓았던 모시베가 없어진지라. 유덕안이 곧 돌아와서 증산성사와 함께 온 장판을 찾아 헤매었으나 날이 저물어 찾지를 못한지라. 증산성사께서 덕안의 귀가 권유를 물리치고 덕안에게 일러 돌려보내고 그 길로 다음 날이 고창(高敞) 장날임을 아시고 고창에 행하셨도다. 포목전을 두루 살피시는데 마치 잃으신 모시베를 팔려 나온 자가 있는지라. 증산께서 다시 그것을 찾아 파시고 집에 돌아오셨도다.


15. 증산께서 어렸을 때 남달리 장난을 즐기셨도다. 강연회(姜然會)와 강기회(姜驥會)는 기골이 장대하고 기력이 출중하여 가끔 증산성사와 힘자랑을 하였느니라. 증산께서는 돌로 만든 맷돌 밑짝의 가운데 중쇠를 이빨에 물고 올리시니 주위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놀라 넋을 잃고 멍하니 보고만 있더라. 때로는 마당에 서서 발로 지붕 처마 끝을 차기도 하고 때로는 한 손으로 용마름을 지붕 위로 던지기도 하고 때로는 발뒤꿈치와 두 팔을 땅에 대고 떠 있는 몸으로 장정 십 여인으로 하여금 허리를 땅에 닿게 하였으나 장정들은 힘만 빠지고 증산성사의 허리는 흔들리지도 아니하니라. 어느 날 여럿이 증산성사와 장난하는데 증산께서 돌절구를 머리에 쓰고 상모를 돌리듯이 하시더라고 김광문은 전하도다.


16. 증산께서 여러 글방으로 자주 드나드실 때 글씨의 청을 받으시면 반드시 글줄 끝마다 한 두 자쯤 쓸만한 빈곳을 남기고 써 주셨도다.


17. 증산께서 부친이 정읍의 박 부자로부터 수백 냥의 빚 독촉에 걱정으로 세월을 지내는 것을 아시고 부친에게 오십 냥을 청하여 박 부자의 집으로 찾아가서 갚으시고 그의 사숙에 모인 학동들과 사귀셨도다. 이 때 훈장이 학동에게 시를 짓게 하니 증산께서 청하셔서 낙운성시(落韻成詩)하시니 그 시격의 절묘에 훈장과 서동들이 크게 놀라니라. 박 부자도 심히 기이하게 여겨 집에 머물러 그 자질들과 함께 글 읽기를 청하는지라. 증산께서는 마지못해 며칠 머물다가 부친의 빚을 걱정하시니 그는 이에 감동되어 증서를 불사르고 채권을 탕감하였도다.


낙운성시(落韻成詩); 제목이 주어지자 누에가 실을 뽑아 고치를 짓듯 詩(시) 술술 써 가는 것을 말함.


18. 증산께서 정해년(丁亥年1887년) 어느 날 외가에 행하셨도다. 어떤 술 주정꾼이 까닭없이 증산께 욕설을 퍼붓도다. 그러나 증산성사께서 아무 대항도 하지 아니하시니 난데없이 큰 돌 절구통이 떠 와서 그의 머리 위를 덮어 씌우니 그는 절구통 속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니 증산께서 몸을 돌리시고 다른 곳으로 가셨도다.


19. 증산께서 송광사(松廣寺)에 계실 때 중들이 증산께 무례하게 대하므로 증산성사께서 꾸짖으시기를 “산 속에 모여 있는 이 요망한 무리들이 불법을 빙자하고 혹세무민하여 세간에 해독만 끼치고 있는 이 소굴을 뜯어버리리라” 하시고 법당 기둥을 잡아당기시니 한자나 물러나니 그제야 온 중들이 달려와서 백배 사죄 하였도다. 그 뒤에 물러난 법당 기둥을 원상대로 회복하려고 여러 번 수리하였으되 그 기둥은 꼼짝하지 않더라고 전하는 도다.


20. 증산성사께서 갑오년(甲午年1895년)에 정남기(鄭南基)의 집에 글방을 차리고 아우 영학(永學)과 이웃의 서동들을 모아서 글을 가르치시니 그 가르침이 비범하여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송이 높았도다. 글방은 처남의 집이고 금구군 초처면 내주동(金構郡草處面內住洞)에 있었도다.


21. 이 해에 고부인(古阜人) 전봉준(全琫準)이 동학도를 모아 의병을 일으켜 시정(時政)에 반항하니 세상이 흉동되는지라. 이 때에 금구인 김형렬(金亨烈)이 증산성사의 성예를 듣고 찾아 뵈인 후 당시의 소란을 피하여 한적한 곳에 가서 함께 글 읽으시기를 청하므로 글방을 폐지하고 전주군 우림면 동곡(全州郡雨林面銅谷) 뒷산에 있는 학선암(學仙庵)으로 가셨으나 그곳도 번잡하기에 다른 곳으로 떠나셨던 바 그 곳을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도다.

 

 

 

◐ 전봉준(全琫準); 동학란의 始發(시발)이 되는 고부민란은 1894년 3월 전라북도 고부에서 전봉준이 일으켰으니 이때가 증산성사께서 24세 되시던 해였다. 어려서부터 민초들의 고통을 몸소 겪으며 자라난 전봉준(全琫準)은 그 마음속에 울분이 가득 차 있는 상태였으며 어떻게 해서든 억울한 백성들의 울분과 고통을 덜어주고 해소시킬 수 있는 정치ㆍ사회적인 개혁을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내정을 안정시키고 중국 일본을 비롯하여 양이(洋夷)의 세력을 격퇴시켜 외세로부터 벗어날 방도를 찾고자 하였다. 그는 체구는 작았으나 눈빛이 샛별같이 빛나고 얼굴은 개혁의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그는 예사롭지 않은 인물로 주위 사람들로부터 주목받는 사람이었다.
전봉준은 훗날 체포되어 문초를 받을 때의 문서를 보면 “동학을 대단히 좋아했다”는 자술이 나온다. 그 이유는 ‘마음을 지키고(守心), 하늘을 공경하는(敬天) 도(道)’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전봉준은 교도로서 믿음에 충실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용무지지(用武之志, 무력을 쓰고자 하는 의지)를 발견하고 동학에 들어갔다 한다. 그리하여 그는 계속하여 동학을 민중적 교문(敎門)으로 삼아 교세를 확장해 갔으며, 교문의 정신에 있어서도 개혁적 색채가 비교적 농후하므로 세간의 불평분자는 이를 이용코자 입교하게 되었다.
이러한 남접계열의 동학교도들을 중심으로 하여 지방의 농민들을 흡수하여 커다란 세력을 형성한 남접의 거두(巨頭)들인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등은 고부의 황토현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고 정읍, 고창, 함평, 장성 등을 공략한 다음 전주성을 함락시켰다.
일이 이렇게 되자 조정에서는 동학군의 봉기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리고 동학군과 타협을 하는 한편 청국의 원병을 청하였다. 그리고 부랴부랴 관군을 전주로 파견하여 동학군과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게 되었다.
화약을 맺은 동학군은 전라도 일대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고 그들이 제시한 개혁안(폐정개혁안 12조)을 실천에 옮기려 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조정에서는 동학군의 요구를 수용하려는 의사도 없을뿐더러 일단 난을 가라앉히고 청군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벌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니 조정에서 동학군이 요구한 개혁을 제대로 시행하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처음에 정부는 동학군과 협상하여 농민 봉기를 가라앉히고 일본군도 돌려보내도록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물러 갈 줄 알았던 일본군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 땅에서 청나라와의 전쟁을 유발시켜 한반도의 남부가 동학군으로 뒤덮여 있는 중에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동학군이 전주화약을 맺어 잠시 주춤한 사이에 청과 일본은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결국 조선을 전쟁터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예상 외로 일본군은 강했다. 평양전투, 성환전투, 풍도해전 등에서 일본이 이겨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일본은 그 결과 청으로부터 요동반도를 할양받았다.
훗날 이 청일전쟁은 러일전쟁을 일으키는 화근이 되어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조선을 삼킨 일본은 그 여세를 몰아 대륙을 도모하여 대동아전쟁을 일으켰으니 세계 동란의 시발점이 된 것이 바로 동학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외세를 몰아내자고 봉기한 동학군이 거꾸로 외세를 끌어들이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으니 이는 통탄할 노릇이었다.
어이없게도 조선을 건지겠다고 일으킨 봉기가 거꾸로 조선을 망하게 하는 결과를 빚고야 말았으니 조선은 이제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갈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이러한 와중에 조정에서는 친일파가 득세하였으며 일본의 내정간섭 또한 심해졌다. 그리고 백성들의 반일감정은 더욱 고조되어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전봉준은 반외세(反外勢)의 기치(旗幟)를 높이 들고 이번에는 전봉준, 김개남 등이 이끄는 남접 뿐 아니라 최시형이 이끄는 북접과 연대하여 대대적인 공세를 취했다.
논산에서 동학군은 대대적으로 집결하여(약 20만 명) 공주성 점령을 위해 관군과 일본군을 맞아 혈투(血鬪)를 벌였다. 그러나 우세한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개입으로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군은 궤멸당하고 말았다. 20만에 달하던 동학군이 일본군의 화력(火力)을 견디지 못하고 20일 간의 공방전 끝에 마지막 전투장인 우금치에서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우금치에 모인 4만 명의 동학군은 거의 전멸하였으며 생존자들은 흩어져 패주하였다.
수(數)적으로는 우세하였으나 무기의 열세로 인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던 것이다.
증산성사의 예언대로 눈이 내리는 밤 전봉준은 관군(官軍)을 피해 야반도주하였다가 옛 부하의 밀고(密告)로 결국은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훗날 증산성사께서는 이러한 사정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증산께서 어느 날 한가로이 공우와 함께 계시는데 이 때 공우가 옆에 계시는 증산성사께 “동학주(東學呪)에 강(降)을 받지 못하였나이다”고 여쭈니 “그것은 다 제우강(濟愚降)이고 천강(天降)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셨도다. 또 “만일 천강을 받은 사람이면 병든 자를 한번만 만져도 낫게 할 것이며 또한 건너 보기만 하여도 나을지니라. 천강(天降)은 뒤에 있나니 잘 닦으라”고 일러주셨도다.

― 전경 교운 1장 58절

증산성사께서는 일찍이 최제우에게 강(降)을 내려 제세대도를 계시하셨으되 최제우는 유교의 전헌에 막혀 증산성사의 강(降)을 사람에게 전하지 못하고 오히려 동학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동학은 이미 증산성사의 권능으로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최제우의 능력을 따르는 사교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동학군들은 이 동학을 들고 나와 세상을 바로잡아보려 하였으니 그 싸움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증산성사께서는 동학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셨던 것이다.


 

22. 갑오년(甲午年1895년) 오월 어느 날 밤 증산께서 주무시고 계시는 중에 한 노인이 꿈에 나타나 “나도 후천 진인이라. 천지현기와 세계대세를 비밀히 의논할 일이 있노라”고 아뢰는 도다.


23. 전봉준(全琫準)이 학정(虐政)에 분개하여 동학도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킨 후 더욱 세태는 흉동하여져 그들의 분노가 충천하여 그 기세는 날로 심해져가고 있었도다. 이 때에 증산께서 그 동학군들의 전도가 불리함을 아시고 여름 어느 날 ‘월흑안비고 선우야둔도(月黑雁飛高 單于夜遁逃) 욕장경기축 대설만궁도(欲將輕騎逐 大雪滿弓刀)’의 글을 여러 사람에게 외워주시며 동학군이 눈이 내릴 시기에 이르러 실패할 것을 밝히시고 여러 사람에게 동학에 들지 말라고 권유하셨느니라. 과연 이해 겨울에 동학군이 관군에게 패멸되고 증산의 말씀을 쫓은 사람은 화를 면하였도다.


◐ 달빛은 어둡고 기러기 높이 나는데 삼국지에 나오는 선우가 패하듯 동학군도 패하여 밤을 타서 도망하는구나. 장수와 날쌘 기병들도 쫓기게 되어 큰 눈 내린 겨울 들판에는 패한 동학군의 시체만 가득하리라.

 

 

결국 동학란은 증산성사께서 예언하신 대로 갑오년을 넘기지 못하고 수없는 무고한 인명만 상하게 한 채 그해 겨울에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서 궤멸(潰滅) 당하고 말았다.
그때의 상황을 전하는 증산성사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이해 시월에 동골에 가사 동학접주(東學接主) 안윤거(安允擧)를 방문(訪問)하시니 마침 태인 닥뱀이 안필성(安弼成)이 한 마을에 사는 동학신도 최두연(崔斗淵)과 함께 와서 윤거에게 도담(道談)을 듣고 있더라. 증산성사께서 마루에 걸터앉으사 윤거와 더불어 성명(姓名)을 통(通)하신 뒤에 일러 가라사대 고부에서 난리가 일어나서 동학군(東學軍)이 황토마루(黃土峴)에서 승리(勝利)를 얻었으나 필경(畢竟) 패망(敗亡)을 면치 못하겠으므로 동학군의 발원지(發源地)인 이곳에 효유하러 왔노라. 그대가 접주(接主)라 하니 삼가 전란(戰亂)에 참가(參加)하기를 회피(回避)하여 무고(無辜)한 생민(生民)을 전화(戰禍)에 몰아들이지 말라. 섣달이 되면 그들이 전패(全敗)하리라. 하시고 돌아가시는지라. 윤거 이 말씀을 듣고 드디어 접주를 사면(辭免)하고 전란에 참가치 아니하니 최두연은 믿지 않고 윤거의 대(代)로 접주 겸 명사장(明査長)이 되어 윤거의 부하(部下)를 인솔(引率)하고 출전(出戰)하더라.

― 대순전경 초판 제1장 15절

이때에 김형렬(金亨烈)이 필성의 곁에 있다가 증산성사께서 필성과 수작(酬酌)하시는 말씀을 듣고 인사를 청하거늘 형렬에게도 종군하지 말라고 권하시는지라. 필성과 형렬은 증산성사의 말씀을 믿지 않고 종군하여 가다가 청주 병영 앞 산골에 이르니 좌우에서 복병(伏兵)이 일어나서 포화(砲火)를 퍼부음에 동학군에 죽는 자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지라. 필성과 형렬은 황겁(慌怯)하여 몸을 빼어 송림(松林)속으로 들어가니 증산성사께서 이곳에 계시다가 불러 가라사대 너희들은 잘 도망(逃亡)하여 왔도다. 이곳은 안전(安全)하니 안심(安心)하라. 하시니 형렬은 비로소 증산성사의 지감(知鑑)이 비상(非常)하심을 감복(感服)하니라. 두 사람은 종일(終日) 먹지 못하여 주림을 이기지 못하거늘 증산성사께서 돈을 내어주시며 가라사대 저곳에 가면 떡집이 있으리니 주인이 없을지라도 떡값을 수효(數爻)대로 떡그릇 안에 두고 떡을 가져오라. 필성이 명하신대로 하여 떡을 가져오니 증산성사께서 두 사람에게 나누어 먹이시니라.

― 대순전경 초판 제1장 19절

증산성사께서 두 사람에게 일러 가라사대 동학군이 미구(未久)에 쫓겨오리니 우리가 먼저 감이 옳으리라 하시고 두 사람을 데리고 돌아오실 때 진잠에 이르러 문득 가라사대 동학군이 이곳에서 또 많이 죽으리라 두 사람이 이 말씀을 듣고 심히 불쾌히 생각하거늘 가라사대 저희들을 미워함이 아니요 사태(事態)의 진전(進展)될 기미(機微)를 말함이니 아무리 듣기 싫을 지라도 불쾌(不快)히 생각하지 말라 하시니라. 산중유벽(山中幽僻)한 곳에 쉬시더니 얼마 아니하여 총소리가 어지러히 일어나며 그 곳에서 격전(激戰) 끝에 동학군이 많이 사상(死傷)하니라.

― 대순전경 초판 제1장 20절

심지어 증산성사께서는 동학란의 앞날을 예견하시고 동학에 들지 말라고 권하셨으며 동학군의 접주를 만나 싸움을 포기할 것을 종용하기도 하셨으니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큰 물결 앞에 민초(民草)를 하나라도 더 건지고자 함이셨던 것이다. 이러한 일을 행함에 있어 전해오는 일화(逸話)가 있으니 그때는 동학군이 전주성을 점령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연세(年歲) 23세이시던 증산성사께서 전주부에 들어가서 접주와 면담한 적이 계셨는데 그 때 동학군의 거병으로 인하여 앞으로 벌어질 사태에 대해 설명하고 전투를 중지할 것을 권고하신 바가 있었다.
“내말을 잘 들으시오. 동학군이 황토현에서는 이겼으나 이것은 한 때일 뿐이요. 이번에 관군뿐 아니라 왜병까지 오게 될 것이오. 자네들은 조선 팔도를 전쟁터로 만들 셈인가? 무고한 생민들을 전쟁터로 끌어내 죽이지 말라.”
“우리의 뜻은 왜놈은 물론 서양 세력도 물리치는 것이요. 우리는 전주를 장악하고 서울로 진군하여 탐관오리를 주살하고 상감을 도와 구국제민하려는 것이요.”
“동학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오. 지금 조정에서는 동학군을 진압할 명분도 힘도 없소. 그러면 어떻게 되겠소. 결국은 외국의 힘을 빌어 자기네들의 연명을 꾀하게 되지. 청나라가 손을 대면 왜가 가만히 안 있어. 일본이 출병하면 청국이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요. 동학이 나서게 되면 조정의 입장이 청국과 일본에 꼬투리를 잡히게 됩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니 동학은 해산하는 것이 좋소. 동학군은 눈이 내릴 시기에 패망할 것이요.”
“무엇이라고요.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쇼. 오늘은 그냥 보내지만 다음엔 가만 두지 않겠소. 썩 물러가시오.”
“사람 죽이는 일이 그렇게도 바쁘신가? 그렇다면 나는 사람 살리기에 바쁜 사람이요.”

이러한 사정은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찰해보면 쉽게 답이 나온다. 동학이 본래 거의(擧義)한 뜻은 나쁘지 않으나 동학군의 봉기로 인하여 당시 조선의 상황은 더욱 나빠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봉기로 인하여 어떠한 상황이 벌어질 것인가를 미리 감안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동학은 민중들의 쌓이고 쌓인 불만과 일본의 횡포에 대한 저항으로 일어났으나 결국은 조선 강토를 들쑤셔 전란이 퍼지고 백성들의 생목숨을 잃게 한 계기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 單于(선우); (넓고 크다는 뜻으로) 흉노(匈奴)가 자기네(自己-) 군주(君主)나 추장(酋長)을 높이어 부르던 칭호(稱號). 후에 선비(鮮卑)ㆍ저(低)ㆍ강(羌)에서도 이 칭호(稱號)를 사용(使用)했음. 선우는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 곽가전(郭嘉傳)〉에 나오는 말이다. 전한(前漢) 말기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명문가 출신 원소(袁紹)는 기주(冀州)의 지방 장관에 임명되어 그의 세력은 강대해졌다. 이때 원소의 통치 지역 북쪽에는 오환(烏丸:소수 민족의 취락)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요서(遼西)에 있는 선우(單于)의 세력이 가장 컸다. 원소는 선우를 만만치 않다고 판단하여 그를 화친정책으로 회유하여 후방지역의 군사적 보루로 삼았다. 이때 원소는 조조(曹操)와 화북 지역을 양분하여 상호 견제하던 중 조조로부터 불의의 습격을 받고 대패하였으며,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피를 토하고 죽었다.


24. 고부지방의 유생들이 을미(乙未)년 봄에 세상의 평정을 축하하는 뜻으로 두승산(斗升山)에서 시회(詩會)를 열었을 때 증산성사께서 이에 참여하시니라. 이 때 한 노인이 증산을 조용한 곳으로 청하여 모셔가더니 작은 책 한 권을 전하거늘 그 책을 통독하셨도다.


25. 유생들은 세상이 평온하다고 하나 세도는 날로 어지러워졌도다. 증산성사께서 이 때에 비로소 광구천하하실 뜻을 두셨도다.


26. 오월이 되어 증산성사께서 본댁을 떠나셨으나 가신 곳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도다. 그리하여 매우 염려하는 증산성사의 부친을 보고 유덕안(兪德安)은 대신하여 증산을 찾으려고 의관을 갖추고 객망리를 떠났도다. 그가 태인(泰仁) 강심리에 이르렀을 때 관군은 의병 두 사람을 잡고 덕안을 동학군으로 몰고 포박하여 전주 용머리 고개 임시 형장으로 끌고 가니라. 두 사람이 먼저 참형되고 덕안의 차례가 되었을 찰나에 하늘이 캄캄하여지고 천둥치고 번개가 번쩍이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지라. 관군들은 지레 겁을 먹고 도망하였으나 비바람은 그치지 않고 밤은 깊어 사방이 보이지 않아 덕안이 정신을 차리니 두 사람의 시체만이 짙은 어둠 속에 뒹굴어 있었도다. 무서움에 쫓겨 그는 먼 곳에서 비치는 등불을 향하여 지친 몸을 이끌어가니 날이 새기 시작하니라. 등불은 간데 온데 없는 산중이었도다. 그제서야 그는 정신을 차리고 포박을 풀고 재생의 기쁨을 안고 집에 돌아왔느니라. 그는 이 재생의 인도를 호랑이가 불빛을 비춰 준 것으로 믿었도다. 얼마 후 증산성사께서 객망리에 홀연히 돌아오셨도다. 증산성사께서 덕안을 보시고 “험한 시국에 위급한 환경을 당하여 고통이 많았도다.” 말씀하며 위로하시니 그는 더욱 자신의 재생을 증산성사의 덕화라고 굳게 믿으며 재생의 감격을 되새기니라. 당시는 가릴 사이 없이 마구 죽이는 판국이었도다.


27. 증산성사께서 임인년(1992년) 어느 날 김형렬과 함께 금산사(金山寺) 부근의 마을에 가서 계셨도다. 이 부근의 오동정(梧桐亭)에 살고 있던 김경안(金京安)이란 사람이 기독교의 신약전서를 가지고 있었던 바 증산성사께서 어느 날 김형렬에게 신약전서 한 권을 구하게 하시니라. 그는 이르신 대로 그로부터 책을 빌려다 증산성사께 드렸더니 증산성사께서 그것을 불사르셨도다.


28. 그 후 어느 날 형렬은 증산성사를 모시고 오동정을 찾아 음식을 대접하였도다. 이 자리에 경안이 찾아와서 빌려준 신약전서를 돌려달라고 말하기에 형렬이 우물쭈물 하면서 딱한 표정만 짓고 앉아있노라니 증산성사께서 가름하시면서 “곧 돌려주리라”고 말씀하시니라. 마침 이 때에 그곳을 한 붓 장수가 지나가는지라 증산께서 그를 불러들이고 음식을 권한 다음에 그 붓 상자를 열어 보이라고 청하시니 그가 분부에 쫓으니라. 증산성사께서 “그대는 예수를 믿지 아니하니 이 책은 소용이 없을 터이므로 나에게 줄 수 없느냐”고 물으시니 그는 음식 대접을 받은 터이어서 기꺼이 응하는지라. 증산성사께서 그 책을 경안에게 돌려주시니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어리둥절하였도다.


29. 증산성사의 신성하심이 하운동(夏雲洞)에도 알려졌도다. 이곳에 이선경(李善慶)이란 자의 빙모가 살고 있었도다. 증산성사께서 주인을 찾고 “그대의 아내가 四十九일 동안 정성을 드릴 수 있느냐를 잘 상의하라” 분부하시니라. 주인은 명을 받은 대로 아내와 상의하니 아내도 일찍부터 증산성사의 신성하심을 들은 바가 있어 굳게 결심하고 허락하니라. 증산성사께서 다시 주인에게 어김없는 다짐을 받게 하신 뒤에 공사를 보셨도다. 그 여인은 날마다 머리를 빗고 목욕재계한 뒤에 떡 한 시루씩 쪄서 공사 일에 준비하니라. 이렇게 여러 날을 거듭하니 아내가 심히 괴로워하여 불평을 품었도다. 이날 한 짐 나무를 다 때어도 떡이 익지 않아 아내가 매우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노라니 증산께서 주인을 불러 “그대 아내는 성심이 풀려서 떡이 익지 않아 매우 걱정하고 있으니 내 앞에 와서 사과하게 하라. 나는 용서하고자 하나 신명들이 듣지 아니하는 도다.”고 이르시니라. 주인이 아내에게 이 분부를 전하니 아내가 깜짝 놀라면서 사랑방에 나와 증산성사께 사과하고 부엌에 들어가서 시루를 열어보니 떡이 잘 익어 있었도다. 부인은 이로부터 한결같이 정성을 드려 四十九일을 마치니 증산성사께서 친히 부엌에 들어가셔서 그 정성을 치하하시므로 부인은 정성의 부족을 송구히 여기니 증산성사께서 부인을 위로하고 그대의 성심이 신명에게 사무쳤으니 오색 채운이 달을 끼고 있는 그 증거를 보라고 하셨도다.


30. 증산께서 정읍으로부터 진펄이나 논이나 가리지 않고 질러오셨도다. 이것을 보고 류연회(柳然會)란 동리 사람이 “길을 내버려두고 그렇게 오시나이까?”라고 말하니 증산성사께서 “나는 일을 하느라고 바쁘건만” 하시며 그대로 가시니라. 이 일로부터 수년이 지난 후에 그가 측량기사가 되어 신작로를 측정하게 되었는데 그 측량이 바로 증산께서 함부로 걸어가신 선이 되니라. 지금 덕천(德川) 사거리에서 정읍을 잇는 신작로가 바로 그 길이로다.


31. 김형렬은 증산를 모시고 있던 어느 날 증산성사께 진묵(震黙)의 옛 일을 아뢰었도다. “전주부중(全州府中)에 한 가난한 아전이 진묵과 친한 사이로써 하루는 진묵에게 가난을 벗어나는 방법을 물으니 진묵이 사옥소리(司獄小吏)가 되라고 일러주니 아전은 이는 적은 질책이라 얻기가 쉬운 것이라고 말하고 자리를 떠났으나 그 후에 아전은 옥리가 되어 당시의 갇힌 관내의 부호들을 극력으로 보살펴주었나이다. 그들은 크게 감동하여 출옥한 후에 옥리에게 물자로써 보답하였다 하나이다. 그리고 진묵은 밤마다 북두칠성을 하나 씩 그 빛을 가두어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게 하여 칠일 만에 모두 숨겨버렸다 하나이다. 태사관(太史官)이 이 변은 하늘이 재앙을 내리심이니 천하에 대사령을 내리시어 옥문을 열고 천의에 순종하사이다 하고 조정에 아뢰오니 조정은 그것이 옳음을 알고 대사령을 내렸다 하나이다.” 이 말을 증산성사께서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그러하였으리라. 내가 이를 본받아 한달 동안 칠성을 숨겨서 세상사람들의 발견을 시험하리라” 하시고 그날 밤부터 한달 동안 칠성을 다  숨기시니 세상에서 칠성을 발견하는 자가 없었도다.


32. 증산성사께 김형렬이 “고대의 명인은 자나가는 말로 사람을 가르치고 정확하게 일러주는 일이 없다고 하나이다”고 여쭈니 증산성사께서 실례를 들어 말하라고 하시므로 그는 “율곡(栗谷)이 이순신(李舜臣)에게는 두율천독(杜律千讀)을 이르고 이항복(李恒福)에게는 슬프지 않는 울음에 고춧가루를 싼 수건이 좋으리라고 일러주었을 뿐이고 임란에 쓰일 일을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고 아뢰이니라. 그의 말을 듣고 증산께서 “그러하리라. 그런 영재가 있으면 나도 가르치니라”고 말씀하셨도다.


33. 증산께서 일진회가 발족되던 때부터 관을 버리시고 삿갓을 쓰고 다니시며 속옷을 검은 것으로 외의를 흰 것으로 지어 입으셨도다. “저 일진회가 검은 옷을 입었으니 나도 검은 옷을 입노라” 말씀하시고 문밖에 나오셔서 하늘을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구름의 안이 검고 밖이 흰것은 나를 모형한 것이니라” 하셨도다.


34. 증산성사께서 구릿골을 떠나 익산(益山)에 이르시고 그 곳에서 월여를 보내시다가 다시 회선동(會仙洞)에 이르시니라. 이곳에 김보경(金甫京)이 살고 있었는데 그의 집 외당에 증산께서 계셨도다. 이 때 그는 모친의 위독함을 증산성사께 아뢰니라. 이를 들으시고 증산께서 그에게 가라사대 “오늘밤은 명부사자(冥府使者)가 병실에 침입하여 나의 사자의 빈틈을 타서 환자를 해할 것이니 병실을 비우지 말고 꼭 한 사람이 방을 지키면서 밤을 새우라” 하셨도다. 보경이 이르심을 쫓아 가족 한 사람씩 교대로 잠자지 않고 밤을 새우기로 하고 가족들을 단속하였느니라. 여러 날이 계속되매 식구들이 졸음에 못 이겨 증산성사의 이르심을 잊어 갔도다. 이날 밤 보경이 깨어 방을 지키다가 깜박 잠에 빠졌던 바 이 때 증산성사께서 외당에서 급히 소리쳐 부르시니라. 그가 놀라 깨어 보니 벌써 모친은 운명하여 있었도다. 증산성사께서 말씀하신 나의 사자는 바로 병자를 간호하는 사람을 가리키신 것이로되 식구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도다.


35. 이날 밤에 객망리 앞 달천리에 별안간 우레 같은 요란한 소리가 나자 오동팔(吳東八)의 집이 무너졌도다. 다행히 사람은 다치지 않았느니라. 그 후 얼마 지나 그가 무너진 집의 재목을 모아 가지고 집을 세우기를 여러 번 되풀이 하였으되 그 때마다 집이 무너지는 도다. 그는 부득이 술집을 거두고 움막을 치고 농사로 업을 바꿨느니라. 농사로 살아오던 어느 날에 면이 없는 사람이 와서 움막살이의 참상을 보고 손수 집을 한나절 만에 세우고 흔적 없이 그대로 돌아가는지라. 사람들은 수십일 걸릴 일을 하루도 못 되게 완성한 것에 크게 놀랐도다. 사람들은 이것이 증산성사께서 측은히 여기사 신장을 보내신 덕이라 믿고 더욱 증산성사를 쫓는 도다.


36. 김형렬은 겨울의 추위 속에서도 증산성사를 모시고 있었도다. 그러던 어느 날 형렬이 증산성사의 말씀 끝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송시열(宋時烈)은 천지의 정기를 타고난 사람이고 그가 있는 주택의 지붕에는 백설이 쌓이지 못하고 녹는다 하나이다.”라고 아뢰니 증산성사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그려하랴. 이제 나 있는 지붕을 살펴보라” 하시니라. 형렬이 밖에 나가 살펴보니 일기가 차고 백설이 쌓였는데도 오직 계시는 그 지붕에 한 점의 눈도 없을 뿐 아니라 맑은 기운이 하늘에 뻗쳐 구름이 가리지 못하고 푸른 하늘에까지 통하니라. 그 후에도 살펴보면 언제나 증산성사께서 머무시는 곳에 구름이 가리지 못하는 도다.


37. 금산사 청련암(靑蓮庵)의 중 김현찬(金玄贊)이 전부터 증산성사의 소문을 듣고 있던 차에 증산성사를 만나게 되어 명당을 원하니 증산성사께서 그에게 “믿고 있으라.”고 이르셨도다. 그 후 그는 환속하여 화촉을 밝히고 아들을 얻었느리라. 그리고 김병욱이 또한 명당을 바라므로 증산성사께서 역시 “믿고 있으라.”고 말씀하셨도다. 그 후 그도 바라던 아들을 얻었느리라. 수 년이 지나도록 명당에 대한 말씀이 없으시기에 병욱은 “주시려던 명당은 언제 주시나이까?”고 여쭈니 증산성사께서 “네가 바라던 아들을 얻었으니 이미 그 명당을 받았느니라.”고 이르시고 “선천에서는 매백골이장지(埋白骨而葬之)로되 후천에서는 불매골이장지(不埋白骨而葬之)니라”고 말씀을 하셨도다. 그 후 얼마 지나 현찬이 증산성사를 뵈옵고 명당을 주시기를 바라므로 증산성사께서 “명당을 써서 이미 발음 되었나니라.”고 말씀이 계셨도다.


◐ 지금까지 세상은 사람이 죽으면 명당자리를 찾아서 장사(葬死)를 지내고 소원을 빌었으나 이제는 명당자리를 찾을 필요가 없고 道(도)를 잘 닦으면 마음먹은바 대로 소원을 이룰 수가 있다는 말씀이시다. 이러한 말씀대로 증산께서 후천에는 知心大道術(지심대도술)이라고 하셨다. 즉 마음이 서로 道(도)와 통하여 깨달으면 大道(대도)의 道術(도술)이 나오므로 불로불사가 되니 명당을 찾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당이란 믿는 마음이다.


38. 어느 때인지 분명치 않으나 증산성사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때가 있느니라. “고부에 나보다 항렬이 높은 친족들이 계시는 도다. 내가 그들을 대할 때에 반드시 항렬을 쫓아 말하게 되느니라. 이것이 윤리상 전통이라. 무슨 관계가 있으리오 만 모든 신명은 그들의 불경한 언사를 옳지 않게 여기고 반드시 죄로 인정하느니라. 나는 이것을 어렵게 생각하여 친족과의 왕래를 적게 하느니라.” 하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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