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韓=井)의 유래

[스크랩] 井(정), 우리의 韓(우물난간)과도 同一 語源이다.

고도인 2007. 6. 2. 22:13
 

고구려 문양 우물정(井)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


중국길림성 환인지방에서 정(井)자가 음각된 토기병이 나왔고 우리나라의 김해(金海) 예안리에서도 토기인 고기대배의 외부측면에 정자가 새겨진 토기가 출토되었으며 풍납토성에서도 정자명이 있는 토기병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아래 그림은 경주 호우총에서 출토된 우물정(井) 문양이 새겨진 그릇이다. 이것은 명백한 고구려의 상징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해석자에 따라서 다양한 의견이 제시 되기는 하였지만 "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 岡上廣開 土地好太 王壺玗 十) " 이라는 글씨에서 보듯이 고구려의 호태왕의 명문이 새겨진 그릇이 출토 되었으므로 그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경주에서 처음으로 이 유물이 발굴되었을때 어떤 학자가 말하기를 고구려와의 교역품 내지는 조공품이었을 것이라고 설명을 하였다. 무턱대고 이런 망발부터 늘어 놓는 학자를 우리는 철밥통이라고 한다. 어떻게던 한반도 경주를 신라의 수도라고 주장해야만 하는 똥배짱을 이제는 불쌍하게 생각하고 싶다. 가련한 관변사학자들이여...

최근에 상고사학회에서 대륙답사시 어느 주유소간판에 새겨진 우물정(井) 문양을 사진으로 찍어 왔을 때 나는 적지 않게 놀랐다. 아직도 현지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고구려의 숨결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상고사학회의 박인수씨는 이 문양이 고구려를 상징하는 것으로 하백(河伯)의 후손임을 표시하는 것 이라고 하였다. 긴 설명이 필요없는 말이다. 고구려는 유목민 중에서 가장 먼저 물가에 터전을 잡고 나라를 세웠다. 하백(河伯)은 물의 신(神)으로 유목생활을 하던 고대민족에게는 하느님 같은 존재이다.  그런 뜻에서 우물정(井)은 천상(天上)의 궁궐을 뜻 하기도 한다. 경주에서 발견된 호우(壺玗)의 글을 해석해 보면 " 乙卯年國 岡上廣開 土地好太 王壺玗 十, 을묘년(乙卯年) 국강상(國岡上) 광개토지(廣開土地) 호태왕(好太王) 호우(壺玗) " 가 된다. 즉 ‘고구려 19대 광개토왕이 돌아가신(412년) 3년 후인 을묘년(415) 만주 집안 국강상에 영원히 잠드신 광개토왕을 기념하는 항아리’라는 말이다.(호우총 발굴보고서. 1948년).맨 끝의 ‘十’ 표는 무덤의 주인이 좋은 곳에 가라는 뜻으로 새긴 문양 으로 사람이 태어난 곳(자궁, 무극의 자리)을 뜻하며 넓게는 우물정(井) 과 같은 의미 이다. 


지금까지 본인이 소개했던 몇가지 해석들을 다시한번 소개한다.    


 임용택

호태왕(好太王)의 성(姓)은 정(井)씨이다.

[井]或曰黃帝所作  ※정(井)자가 들어있으면 황제처소에서 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

[姓]虞大夫食邑於井. 謂之丘. 後爲氏. ※성씨이다. 우대부식읍지가 정(井)이란 곳이다. 즉 128가호(家戶)가 되는 취락소(丘)의 이름을 후에 정(井)씨 성(姓)으로 호칭하게 되었다.

[黃帝] 古帝名. 姓 公孫. 生於軒轅之丘. 國於有熊. 故亦曰有熊氏. ※황제는 고대의 임금 이름이다. 성은 공손이다. 태어난 곳이 헌원이란 취락소(丘)여서 고대의 원(轅)씨라고도 하였다. 이 나라에는 곰이 살고 있는 연유로 또한 웅씨라고도 호칭하였다.

[複姓]路史云. 軒轅帝初姓. 公孫. ※두 글자로 된 성이다. 노사(路史) 즉 송(宋)나라 나필(羅泌)이 지은 책에는 헌원제(軒轅帝) 초성(初姓)이 공손(公孫)이라고 하였다.


※ 앞의 글을 체계화하면 황제(黃帝)의 성은 공손 원 웅씨라고 되어 있다. 이 황제소작(黃帝所作)이란 징표가 정(井)자라고 하였고 우대부식읍지가 정(井)인데 이 128가호가 사는 구(丘)부락의 이름인 정(井)이 후에는 성(姓)으로 호칭하게 되었다.

중국길림성 환인지방에서 정(井)자가 음각된 토기병이 나왔고 우리나라의 김해(金海) 예안리에서도 토기인 고기대배의 외부측면에 정자가 새겨진 토기가 출토되었으며 풍납토성에서도 정자명이 있는 토기병이 발굴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보다 결정적인 증거를 들면 생전에는 영락태왕이고 사후에는 위대한 왕 즉 호태왕의 위패를 씻는 욕기인 청동기 외부 저면의 관(款)자 위에도 우물정(井)자의 마크인 징표가 확실하게 색인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아 북부여의 17세손인 호태왕은 성이 정(井)씨이고 이 정씨의 궁부(宮府)에서 제작한 기물(器物)이기에 정(井)자의 징표가 각인되어 있다고 보는 바이다.


헌원(軒轅)은 지명(地名)인데 지금의 하남성(河南省)이다. 진치신정현(秦置新鄭縣)이고 명청속(明淸屬) 하남개봉부(河南開封府)로 되어 있다.

※상시대(商時代)의 유물(遺物)이 많이(多量) 출토(出土)된 곳(處所)이다.


풍납토성은 낙랑군에 무너지다

'井'字가 들어 있으면 황제궁부(黃帝宮府)에서 제작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우대부(虞大夫)의 성(姓)을 후에는 井씨라고 호칭하였다고 되어 있다. 虞씨 성을 가진 황제(黃帝)가 태어난 곳은 헌원지구(軒轅之丘)여서 고대에 원(轅)씨 또는 헌원(軒轅)씨 등으로 호칭하였다.


중국문헌에 의하면 황제(黃帝)는 지금부터 4256년전경의 현재의 하남성(河南省) 개봉부(開封府) 지역의 요왕(堯王) 이전의 군주(君主)이고 우(虞)씨 성인 순왕(舜王)의 선조(先祖)로 되어 있다. 이 우황제(虞黃帝)의 성씨가 변하여 井씨가 되었다는 역사적인 기록이다. 우씨황제(虞氏黃帝) 궁부(宮府)의 표징(標徵)이 들어있는 토기(土器)가 한반도의 풍납토성, 김해, 길림(吉林)지방에서 출토되었다는 사실은 이런 토기들이나 청동기등을 제작한 사람들은 모두가 중국황제(中國黃帝) 우씨(虞氏)의 후예들이라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호태왕(영락태왕)계의 우왕종족(虞王種族)이 한반도로 진입하기전에 기자계(箕子系)의 우왕종족이 먼저 한반도를 점거하였다는 사실이 되고 풍납토성은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王)인 기준(箕準)이 통치한 마한(馬韓)의 것이고 이 풍납토성을 기원전후에 점령할 수 있었던 나라는 한사군(漢四郡)의 하나인 낙랑(樂浪)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광개토지호태왕의 성이 정(井)씨라는 근거

[井]혹왈황제소작(或曰黃帝所作).

*황제(黃帝BC2697-2597)는 헌원(軒轅)이란 구(丘)취락지(聚落地)에 살았다. ``재금하남신정현(在今河南新鄭縣)`` 그래서 헌원씨(軒轅氏)라고도 하였고 궁궐(宮闕)에서 쓰는 기물(器物), 의복, 화폐 등도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정(井)자 표시(標示)가 있으면 황제소작이니까 궁궐용 기물이 되는 바이고 또한 정자(井字)는 황제의 이칭(異稱) 성씨(姓氏)도 된다는 뜻이다.

정(井)자는 성(姓)이다. 우대부식읍어정(虞大夫食邑於井), 후위씨(後爲氏).

*우대부 즉 순임금의 부임지가 정(井)이란 취락지(聚落地)이고 이 취락지의 정(井)이란 이름이 후에는 성씨(姓氏)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리치나 저리치나 정자(井字)가 들어있으면 정자(井字)는 황제의 성씨가 되는 바이고 정자(井字)표시가 되어있는 기물은 궁궐에서 제작한 궁궐용기물이 되므로 이 정자(井字)가 새겨진 기물이 사용된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의 성은 정씨(井氏)가 된다는 결론이다.  사원(辭源)에 의함.

*정(井)자 마크*


김해(金海) 예안리에서는 정(井)자명의 고배(高杯)가 한무제(漢武帝 BC140-87) 시대에 사용된 오수(五銖)동전과 함께 출토되었다. 이 말은 광개토지호태왕 즉 영락태왕시대 이전부터 정(井)자마크가 이미 있었다는 뜻이고 뿐만 아니라 순임금시대(BC2357-2254)에 순임금의 성씨(姓氏)였고 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 BC2697-2597)시대 궁궐에서 궁실용으로 만든 기물(器物)등의 표시(標示)로 사용된 마크가 정(井)자로 되어 있다는 사실(史實)이다.


노중평

광개토대왕비와 경주 호우총 출토 청동 호우, 중원 누암리 출토 제기(祭器) 등 각종 고구려 유물에서는 정(井)자를 새긴유물이 발견 됩니다. 우물 정(井)은 사람이 태어난 곳, 북두칠성을 가리킵니다.

" 북두칠성은 배달국과 단군조선시대, 그리고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는 물론 고려와 조선의 별이었다. 고조선 시대에 만든 고인돌의 뚜껑돌 위에 이미 북두칠성이 새겨져 있었다. 특히 고구려 왕릉의 천장 벽화에서는 북두칠성의 형상이 다량으로 발견된다. 그리고 광개토대왕비 상단 경주 호우총 출토 청동 호우, 중원 누암리 출토 제기(祭器) 등 각종 고구려 유물에서는 정(井)자도 함께 발견된다. 소설가 최인호씨가 96. 8 SBS가 방영한 「왕도의 비밀」에서 고구려의 상징 문양으로 제기한 우물 정(井)자는 북두칠성이 있는 곳을 나타내는 것이다. 최인호씨는 이 井자를 백두산 천지일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井을 땅에 적용시킬 때는 맞을 것이나 하늘에 적용시키면 북두칠성이 있는 곳을 가리킨다. 광개토대왕을 비롯한 고구려인들은 스스로를 하늘 북두칠성의 자손 즉 천손민족으로 적고 있다. 고려시대 고분에도 북두칠성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우리는 제 5부 예언편 격암유록과 토정비결에서 말세 도탄의 위기에서 사는 방법으로 한결같이 석정 水(石井: 돌우물 물) 또는 석정곤(石井崑)이 거론된 것을 알았었다. 이 석정수는 바로 북두칠성의 정기가 고인 우물이다. 석정곤의 곤(崑)은 곤륜산의 약자다. 옛날 사람들은 북두칠성이 상조금궐 하부곤륜(上照金闕 下覆崑崙: 칠성경)이라고 하며, 위로는 금궐(호천금궐: 옥황상제가 계시는 곳)을 비추고 아래로는 땅의 중심인 곤륜산을 비추는 곳에 있다고 하였다. 이 곤륜산은 북두칠성의 정기가 비추어지는 지구 모든 산의 조종(祖宗: 아버지격)이다. 명나라 사람 주장춘은 곤륜산의 제4지맥의 왕기(旺氣)가 백두산 지맥을 통해 금강산으로 들어가 증산(甑山)이 모악산 아래에서 출현한다고 하였다.  / 칠성신앙 (참고: 노중평저 「유적에 나타난 북두칠성」) "

         최인호(소설가): 백두산 천지일 가능성 (1996. 8 . SBS방송 「왕도의 비밀」)



한국사 미스터리]‘井’이 뭘까?


“호우 다음의 십(十)자는 전후 국제관계를 보더라도 해석에 곤란한 자인데 이 십(十)자를 다만 여백을 메우는 데 쓰는 의미없는 ‘十字形’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외에도 #문양이 보이는데 이 역시 여백을 메우는 한 장식으로 본다”

청동용기에 새겨진 수수께끼 같은 글자 혹은 부호에 대해 내린 ‘호우총’ 발굴보고서의 결론이다. 그런데 발굴후 무려 57년이 흘렀어도 이 수수께끼를 제대로 풀어낸 연구는 거의 없다.

그런 가운데 이 #, 즉 ‘우물 井’ 같은 문양을 흥미진진하게 추적한 소설가 최인호씨는 ‘왕도의 비밀’에서 재미있는 결론을 내렸다. 즉 이 井자는 고구려의 정복 군주 광개토대왕을 상징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학자들은 “제대로 된 논문이 거의 없는 상황”이라면서 섣부른 추정을 삼가고 있다. 그런 가운데 이 ‘井’가 새겨진 유물은 지난 1997년 풍납토성에서도 발굴됐고, 구의동 아차산 4보루에서도 확인됐다. 그러니 더욱 답답할 노릇이다.


최종택 고려대 교수는 “고구려 토기에는 井, 小, ●, 工, 大, 卍자 모양이 새겨진 경우가 많다”면서 “이들 부호는 제작지와 제작자, 혹은 주문처를 표시한 것이거나 벽사(●邪·귀신을 쫓는 것)의 의미일 것”이라고 보고 있다. 특히 井자 문양토기는 일본에서도 묵서(墨書)로 쓴 예도 있는데 이 역시 벽사의 의미라는 것이다. 이형구 선문대 교수는 “이 井자 문양은 글자라기보다는 칼로 쓱쓱 그은 형태로 글자로 보기가 어렵다”면서 “무슨 다른 뜻이라기보다는 발굴보고서 내용처럼 여백을 메우는 장식이 아닐까 한다”고 추정했다. 서길수 고구려연구회장은 “연구없이 추정하는 것은 무리지만 아마도 그 토기를 만든 사람들의 사인 같은 게 아닐까 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주역에서 단서를 찾아보면 어떨까. 대산 김석진 선생의 저작인 ‘대산 주역강의’(한길사)의 ‘수풍정(水風井)’괘 풀이에 따르면 ‘열이라고 하는 태극의 공허에서 음양이 교차하는 十을 井자 중심에 넣으면 자연의 이치와 인간만사가 이 속에 있다’고 돼있다. 또한 “井의 중심은 공(空), 즉 무극이태극(无極而太極)이요, 十은 음양이며 口자에 十을 넣어 田이 되니 이것이 사상이 된다”는 등 井자와 十자가 여러번 등장한다. 주역풀이에 따르면 井은 하늘이고, 十은 땅이라고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호우총 용기 명문에 나오는 ‘井’과 ‘十’은 혹 주역의 내용을 표현하는 것일까.

                               〈이기환기자 lkh@kyunghyang.com


[동양사]연개소문

... 묘지인 천남생묘지에 기록되어 있다. 그의 성씨에 대하여 중국측 기록에는 ‘천(泉)’ 또는... 해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조는 ‘샘〔井〕’ 또는 ‘물〔水〕’에서 태어 났다고 한다....


井(정), 우리의 韓(우물난간)과도 同一 語源이다.

부(富),정(井),봉(封),최(崔),좌(左),가(柯),고(高),락(駱),강(强),기(紀),제(齊) 그러고 보니 옛날 흑룡강성에서 온 조선족 교포중에 강국봉이란 사람이 있어 희안한 성이라 생각한 적이 있는데 알고 보니 강씨 후손임을 알게 되었다.그것뿐인가 국어를 지은 좌구명도 바로 동이족이고 동이족 고신씨 후예로 알고 있는 고(高)씨는 내내 강씨를 중간 기착지로 해서 내려온 것이고 한국에서 8대성인 최씨 역시 강씨의 후손이다.

*중화성씨일람Click here!


대대로 문벌이 있는 성씨(성관)를 흔히 "삼한갑족"이라고 하는데 게시판의 어느 글에 '삼한을 신라,고려, 조선을 칭한다'고 하였기에 삼한에 대하여 몇자 적습니다.


삼한이란 마한, 진한, 卞(弁)韓을 칭함인데 辰韓은 檀君이 直接 統治하던 辰朝鮮이 뒤에 辰國이 되고 또 뒤에 辰韓이 되었으니 "요사지리지"에 부여위진한지라 하였고 또 同書에 辰州 本高句麗 개모성 改 蓋(개주) 又改 辰州 위진한지야라 하였으며 "성경통지"에 개평현 주속조선 본진한지라 하였고 同書에 復州(요동반도남방) 周時 朝鮮界 辰韓地 寧海(金州) 周時 朝鮮界 辰韓地라 하였으며 "古今圖書集成"에 奉天府 蓋平縣 周屬朝鮮 本辰韓地라 하였고 "周書"에 辰州 謂州 謂本辰韓之地也라 하였으며 "太白逸事"에 辰朝鮮 천왕자위이지칙내구진한야 정산천왕 三韓皆一統就令也 命黎元興 爲馬韓治莫朝鮮 徐于餘(箕子)爲 番韓治 番朝鮮總之名曰 檀君 管境是則辰國 史稱 檀君朝鮮이라 하였다.


弁(卞)韓은 番朝鮮이 뒤에 卞(弁)韓으로 되었으니 番朝鮮은 辰朝鮮 西便(朝陽부근)에 있었으니 "太白逸事"에 依하면 檀君王儉이 蚩尤의 後孫 蚩頭男을 番朝鮮王으로 삼고 險瀆을 都邑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同書에 그 뒤 檀君索弗婁때 徐于餘(箕子)를 番韓王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또 "史記"에 澎吳買滅朝鮮 置蒼海郡 澎吳人名 朝鮮番名也라 하였으니 朝鮮番名이란 番朝鮮을 指稱함이라 여겨진다. "唐書" 渤海傳에 大祚榮盡得 扶餘 沃沮 弁韓(番汗) 朝鮮海北諸國이라 했으며 "高麗史"에 高麗世祖(王隆) 說弓裔之言 大王 若王朝鮮 肅愼 卞韓(番汗) 莫如先占 松嶽이라 하였으니 卞韓이 처음에는 渤海灣 北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馬韓은 莫(말)朝鮮이 뒤에 馬韓이 되었으니 太白逸事에 依하면 檀君王儉이 態伯多를 馬韓王으로 封하였다 하였으며 그 뒤 檀君索弗婁는 黎元興을 馬韓(汗)이라 하여 莫朝鮮을 統治하게 하였다."史記" 朝鮮傳에 前燕時 嘗略屬辰番朝鮮이라 하고 그 註에 徐廣 曰 一作 莫이라 하였으니 辰,番朝鮮 以外에 莫朝鮮이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潛確類書(잠확류서"에 黃海道(황해도) 古朝鮮(고조선) 馬韓舊地(마한구지)라 하였으며 "東國與地勝覽"에도 馬韓則 高句麗 辰韓則 新羅地라 하였고 "帝王韻記"에 開國 馬韓王儉城 今西京야라 하였으니 莫朝鮮이 韓半島에 位置 하였다가 뒤에 馬韓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三韓(삼한) 卽(즉) 辰韓(진한), 馬韓(마한), 卞(弁)韓(변한)의 '韓(한)'이라는 字源자원(本來본래 뜻)은 '井幹(정간)'이니 '幹(간)'이 聲符(성부)가 되고 '井(정)'이 의미 요소인 義符(의부)가 되며 '井(우물)'은 古代語(고대어)에서 '民(민)' '國(국)'을 상징하는 文字(문자)로서 '井幹정간=우물 난간)'은 백성/국가를 지키는 난간(幹) 卽 칸(韓=汗 khan)을 의미하며 이것은 알타이語(어)에서 國王(국왕)을 의미하는 一般(일반)명사 칸(khan)과 同一 語源(동일어원)이다. 韓(한)의 古代音(고대음)은 캄(kham)으로khan-han으로 음운변화 하였으며 汗(한)(han)은 알타이語(어)인데 우리의 경우 韓(한), 몽고語 만주語로 汗(한), 新羅語(신라어)로 居西干(거서간)의 干(간) 가야의 九干(구간), 日本語(일본어)의 기미(神신, 守수), 기미(王왕, 君군)等(등)이 서로 비슷한 알타이語이다.

몽골族(족)이 中央아시아에 세운 一汗(한)國, 챠카타이汗(한)國, 킵챠크汗(한)國, 오고타이汗(한)國 等의 汗(한)은 징기스칸(khan)의 칸과 같은 말이며 우리의 韓(우물난간)과도 同一 語源이다.


"桓檀古記" 三韓管境本紀에 檀君王儉이 朝鮮을 開國한 後 나라를 '三韓'으로 나누어 다스렸다고 하였으며 唐나라의 行軍摠管 薛仁貴가 新羅에 보낸 글에서 '一統三韓'이라 하였고 新羅末 崔致遠은 '古三韓地 今朝鮮之' 라 하였으며 高麗중엽 宋나라 蘇軾(號: 東坡)은 文安公(諱: 良鑒)에게 준 唱和詩에서 '三韓使'라 하였은즉 三韓이 新羅,高麗,朝鮮을 指稱함이 아님을 알 수 있다. / 晟峰성봉.



                                             고 도인






출처 : 고도인의 해인海人으로 가는 카페
글쓴이 : 高 道 人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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