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관아의 명칭에서 유래한 이름 [TOP]
사직동 사직단: 토지와 곡식의 신을 모시는 단
체부동 체부청: 왕명을 받아 장병들을 시찰, 독려하던 관아
내자동 내자시: 궁내에 미곡, 술, 기름, 과일 등을 공급하던 관아
소격동 소격서: 소격전, 삼청전의 제사를 관장하던 관청
사간동 사간원: 왕 및 정부요인에 정치의 과실을 직언하던 언론 관청
신영동 총융청: 오군영의 한인 총융청을 새로 조영하였다하여 지음
평창동 총융청 소속의 평창
도렴동 도렴서: 궁중 납부용의 직물 염색을 하던 관아
내수동 내수사, 궁내의 미곡, 옷감 등을 하던 공급하던 관아
계 동 계생원-제생원로-: 농업을 권장하던 왕실 농원과 이를 관장하던 관아
묘 동 종묘: 조선조 역대 왕과 왕비를 모시는 태묘
다 동 다례를 주관하던 사옹원에 속한 다방이 있었다
태평로 태평관: 중국사절이 유숙하던 곳
북창동,남창동 선혜청의 창고가 있었던 곳
예관동 교서관-속칭 예관이라 불리움: 서적의 출판, 인쇄, 보급 등의 업무를 맡던 관아
주자동 주자소: 활자를 주조하던 관아
예장동 훈련장-무예장을 줄여 예장이라 부름. 군사들이 무예를 연습하던 곳
장충동 장충단: 을미사변 때 순국한 충신들을 제사하는 단
2. 성곽과 문루에서 유래한 이름 [TOP]
홍지동 홍지문: 탕춘대성의 관문
신문로 서대문의 위치가 여러번 바뀜에 따라 신문(새문)이라 불림
혜화동 혜화문: 도성의 동소문
광희동 광희문: 도성의 남대문과 동대문 사이의 문, 일명 시구문
흥인동 흥인지문: 동대문)
3. 조선초의 행정구역명(9방)에서 유래한 이름 [TOP]
서린동 중부 서린방
가회동 북부 가회방
통의동 북부 의통방
적선동 서부 적선방
동숭동 동부 숭교방의 동쪽이라 하여 동숭동
4. 강북구 동명의 유래 [TOP]
미아동(彌阿洞)
미아동이란 이름은 조선말 고종 2년(1865)에 편찬한 [육전조례]에 한성부 동부 숭신방(성외) 미아리계라고 공식기록에 처음 나타나는데 그 유래는 획실하지 않으며,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되너미고개(돈암현)을 일명 미아리고개라고 부르는 까닭에 고개이름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는 설과 미아 7동에 있는 불당(佛當)골에서 미아사(彌阿寺)가 오랫동안 있었으므로 이 절 이름에서 동명이 유래 되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여하간 미아리라는 한자 뜻 그대로 언덕에서 쉬어간다는 마을 이름인 만큼 동명과 고개와는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하겠다.
수유동(水踰洞)
수유동이라는 이름은 조선 태조 5년(1396)에 동부에 속했으며, 그뒤 영조 27년(1751)에 간행된 수성책자 [도성삼군분계총록]에 동부 숭신방(성외) 가오리계, 수유촌계, 우이계로 되어 어영청 전영에 소속되어 도성방어에 일익이 되기도 하였다.
수유동명의 유래는 북한산 골짜기에서 물이 이 마을로 넘쳤기 때문에 물 수(水)자와 넘칠 유(踰)자를 써서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우리말로는 물이 넘친다 하여 '무너미'라고 부르게 되었다.
빨래골
수유동 486번지 일대의 이곳은 북한산 골짜기에서 흘러 내리는 물의 양이 많아 '무너미'라고 부르게되었다.
물이 많아 자연적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인근 주민들의 쉼터와 빨래터로 이용되었고, 당시 대궐의 궁중 무수리들이 빨래터와 휴식처로 이용하면서 빨래골이라는 명칭이 유래되었으며 지금도 널리 일반인에게 통용되는 지명이다.
번 동(樊洞)
번동이라는 이름은 18세기 중엽 정선 그린[도성대지도]와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에 벌리(罰里)로 표시되어 왔으며 갑오개혁때 동서숭신방(성외) 동소문외계번리로 되어 있다.
이때 벌리(伐里)가 번리(樊里)로 바뀐 것 같다. 번동이라는 동명의 유래를 살펴 보면 고려 시대에 씌여진 [운관비기]라는 책에 "李氏가 한양에 도읍하리라"는 비기설이 있어, 고려 말기의 왕과 중신들이 이 설에 의거 경계를 하던 중, 한양 삼각산 아래 이곳에 오얏나무(李)가 무성하다는 말을 듣고 李氏가 흥할 징조라 여겨 오얏나무를 베기 위해 벌리사를 보냈는데 이로부터 이곳을 벌리(伐里)라 칭하다가 번리(樊里)기 되었다고 한다.
우이동(牛耳洞)
우이동이라는 동명의 유래는 동리 뒤에 있는 삼각산 봉우리 중에 소 귀 같이 보이는 봉우리가 있으므로 소귀봉 즉 우이봉 아래 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 전해진다.
우이동은 도성에서 꽤 먼 거리에 있지만 오래전부터 서울의 성외 지역의 한 마을로 되어 있었으며, 고종 4년(1867)에 발간된 육전조례에 한성부 동부 숭신방(성외) 우이동계가 있었고 또 갑오개혁 당시에 문서에 동서숭신방(성외) 동소문외계에 우이리가 있다.
가오리(加五里)
가오리는 현재 수유동 우이초등학교 등이 있는 곳으로 옛날 미아리 고개에서 장사를 지내는 소리가 임금에게까지 들리자 번잡스러우니 오리(五里)를 더 가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5. 강남구 동명의 유래 [TOP]
개포동
개포란 동명이 붙여진 것은 이 지역에 갯벌이 있다하여 "갯펄"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개패"또는 한자명으로 개포라 하였다. 이것은 개포동의 옛 마을 이름으로써 지금도 개패·개포의 옛 지명이 전하여지고 있다. 개포동의 연혁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포일동, 반곡동의 일부였는데, 1914년 경기도 구역 획정 때에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반포리가 되었다.
대치동
대치동 동명의 유래는 원래 자연부락 7~8개 마을 중 큰 고개 밑에 있는 한티(또는 한터) 마을을 한자명으로 대치라 한데서 비롯되었다. 조선 말 까지는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대치동이었는데 일제 때에는 대치리라 하였으며 1963년 1월1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대치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일원동
일원동 동명의 유래는 옛날 이 마을에 일원이라는 서원(書院)이 있었으므로 일원 또는 일언이라 한데서 연유하고, 이 근처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므로 본동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일설에는 이 마을의 사방이 대모산에 가리워져 [숨어져 있는 마을]또는 [편안한 마을]이라 해서 일원동 이라고 불리워졌다고 한다.
도곡동
도곡동 동명 유래는 이 마을 뒤의 매봉산과 물 아래쪽 산부리에 돌이 많이 박혀 있어 독부리라 하던 것이 독구리, 독골이 되었다가 도곡으로 변하였다 한다. 어떤 이는 동네 주변 밭에 그릇 깨진 것들이 많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이 마을에 큰 도요(그릇 굽는 가마)가 있어서 흔히들 독골(독, 옹기, 도자기를 굽는 가마가 있는 마을)로 불려 왔을 것으로 짐작하여 마을의 유래를 살려서 이름을 붙인다면 道谷洞이 아닌 陶谷洞으로 해야 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수서동
수서동 동명의 유래는 이 동리의 서쪽에 한강물이 흐른다 하여 수서라 하였다. 수서동은 옛부터 궁말 또는 궁촌 이라고도 불리었다. 그것은 이 마을에 조선 태조의 제7자 무안대군 방번 내외와 그 봉사손 광평대군 내외 및 그 자손들의 묘소가 있기 때문이다.
포이동
포이동 동명의 유래는 이 마을에 큰 물이 지면 한강물이 들어와 갯펄이 되므로 그 뜻을 따서 포이리라 했던 데서 연유한다.
포이동, 개포동 일대에 걸쳐 있는 구룡산은 해발 283m로서 계곡이 9곳이 있는 산으로, 이 산 이름의 유래가 다음과 같이 전해져 온다. 옛날에 용 10마리가 승천하다가 임신한 여자를 보고 놀라서 그 중 한 마리가 양재천 연못에 빠져 죽고 9마리가 올라갔다고 하여 구룡산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구룡산은 양산 통도사에서 세운 서울 포교당으로서 1987년 8월12일 만불전의 기공식을 가졌다
신사동
신사동 동명의 유래는 이 지역 한강변에 있던 부락 새말과 사평리등으로 불리던 지역으로, 조선 시대 신사동의 자연 부락에 대한 상고에 의하면 이곳에 사평원이라는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또 이곳에는 시장이 형성되어 조선 후기에는 송파시장을 중심으로 이곳에도 그 영향이 미쳐 성행하였다. 또 인조는 이괄의 난을 피하여 이른 새벽에 도성을 빠져 나와 이곳 사평원에 머물러 의의죽으로 요기한 일도 있었다 한다. 1925년에는 을축년 대홍수로 인하여 주민은 모두 이주하였고, 모래벌만이 남아 있었다.
새말은 한강 동쪽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불리어진 이름으로 일명 신촌이라 불렀으며 새말나루터가 새말에서 한남동으로 건너가는 길목, 즉 한남대교 주위에 있었으며 신사도선장이라고도 하였다.
청담동
청담동의 유래는 지금의 청담동 105번지 일대에 옛날에 맑은 못이 있었으며, 또 134번지 일대 한강변의 물이 맑아 이 부락을 청숫골이라 하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조 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청담리였으며 1963년 1월1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청담동이 되었다. 1970년 5월 18일 법정동과 행정동을 일치 시킬 때, 수도동사무소가 청담동사무소로 개칭되었다. 1973년 신설된 성동구 영동출장소 관할이 되었다가 1975년 10월1일 신설된 강남구에 속하게 되었으며 1988년 청담1동과 청담2동으로 분동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역삼동
역삼동은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역촌이었던 말죽거리, 웃방아다리, 아랫방아다리 세마을을 합쳐 역삼리라 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1997년 도곡동사무소에서 역삼동 사무소가 분동 신설되었다. 1980년 4월 1일에는 역삼동이 역삼1동과 역삼2동으로 분동 되어 현재에 이른다.
세곡동세곡동 동명은 1914년 행정 구역을 조정하면서 옛날의 자연 부락 명칭인 세천리와 은곡동의「세」자와 「곡」자를 각각 따서 제정한 것이다. 세곡동의 연혁을 살펴보면, 이곳은 조선시대 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세천리, 은곡동 지역으로서 1914년 3월1일 이곳을 광주군 대왕면 세곡리로 칭하게 되었다. 세곡동의 행정동 변천 관계를 살펴보면, 1962년 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관할 아래였던 이 지역은 1975년 10월 1일에는 성동구로 부터 분리·신설된 강남구에 속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세곡동사무소는 변함 없이 율현·자곡·세곡동의 행정을 맡고 있다.
삼성동
삼성동은 조선시대 말까지는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봉은사 무동도 닥점 지역이었는데 일제 때인 1914년 3월1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대치동, 청담동과 함께 수도동사무소에서 관장하였다. (수도동이라는 명칭은 봉은사가 있는 수도산에서 따온 것이라 함) 그 뒤 1970년 5월18일 법정동과 행정동 명을 일치 시킬때 수도동사무소는 청담동사무소로 개칭되었고 1977년 9월1일 청담동에서 삼성동이 분동 되었고 1985년 9월1일에는 삼성로를 경계로 삼성 1,2동으로 분동 되어 오늘에 이른다.
삼성동의 자연 부락은 닥점, 무동도, 학당동, 배곶이마을 등으로 형성되어 있었으며 닥점은 무동도 쪽에 있던 마을로 이 마을에는 닥나무(한지원료)를 파는 상점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압구정동
압구정동은 조선 세조 때 권신 한명회(1415~1487)가 지은 압구정이라는 정자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대청마을강남이 개발되기 전 일원1동 주택가 및 일원2동사무소가 위치한 지점에 99칸의 한옥이 있었다. 탄천을 건너 잠실 일대에서 바라다 보면 이 한옥의 대청이 보인다 하여 이 곳을 대청마을로 불렀다고 전해진다. 위치는 강남구 일원동 612-687번지 일대로 일원2동사무소 주변이 된다.
마고개
1860년경 세곡동에 살던 홍수근이라는 사람의 셋째아들이 힘이 장사였다. 이로 인하여 도리어 화를 입게 될 것을 걱정하던 홍수근이, 어느날 그 아들을 심하게 꾸짖고 매질을 하다 그만 죽여 버리고 말았다.
기이하게도 그날 밤, 이 고개에서 밤새도록 말 우는 소리가 들리자 마을 사람들은 홍장사가 말로 환생한 것으로 믿고, 이후 이곳을 마고개라 불렀다고 한다. 위치는 강남구 세곡동 산 48번지 일대이다
한여울
이곳엔 600년 수령의 은행나무를 중심으로 자연촌락이 형성되어 있었다. 한여울이란 지명은 한강이 이곳에 이르러 큰 여울을 이룬다 하여 붙여진 것이다.
1986년 은행나무가 고사하자 1990년 20년 나이의 대목(大木)을 이곳에 새로 심었다. 정확한 위치는 강남구 개포2동 189번지 일대로, 개포동 주공아파트 401동, 주공아파트 506호 사이 이면도로가 된다.
싸리고개
말죽거리와 사평나루 사이에 있는 고개로서 조선시대에는 수십 년된 싸리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 싸리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고개마루에는 이곳을 왕래하던 사람들의 안녕을 빌던 성황당이 있었으며, 고개에 오르면 서울 남산이 보인다고 해서 서울고개라고도 하였다. 위치는 강남구 도곡1동이다.
말죽거리
말죽거리는 현재 지하철 3호선 양재역 부근을 지칭하는데 강남 일대에서는 양재동, 역삼동이란 동명보다 말죽거리라고 하면 알아 듣는 사람이 더 많다.
주민들에 의하면 이 곳을 말죽거리라고 칭하게 된 내력은 옛날 제주도에서 올려보낸 말을 한양으로 보내기 전에 이 곳에서 최종적으로 손질하고 말죽을 쑤어 먹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얼마전까지도 양재동사무소 동쪽의 헌릉로변 게리 또는 거여리에는 많은 마방이 있었다.
학여울
학여울이란 탄천과 양재천이 만나는 한강 갈대밭 부근의 옛 지명으로, 조선시대 대동여지도에는 학탄(鶴灘)으로 기록되어 있다.
강남구 대치동 514번지 일대가 학여울터이다. 현재 이곳을 지나는 지하철 3호선 역의 이름도 옛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학동
강남구 논현동 26번지 학동근린공원의 지형은 용이 꿈틀거리며 등천하는 모습을 닮았다 하여 용요봉으로 부르던 곳이다. 용요봉 정상에서 동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현 강남우체국 자리는 5일장이 섰던 들이다. 용요봉 아래에는 학동으로 불리던 전형적인 농촌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옛 이름을 1992년 이곳에 공원을 조성하면서 따서 붙인 것이고, 근방을 지나는 지하철 7호선의 학동역 또한 마찬가지이다.
6. 도로명의 유래 [TOP]
세종로(중구)
일제강점기인 1914년 광화문통으로 개칭한 것을 8·15해방 후인 1946년 세종대왕의 탄생지가 이곳에서 가까운 옥인동에 위치하여 세종로라 명명.
율곡로(종로구)
이름을 율곡로로 부르게 된 것은 이 길이 지나는 관훈동에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이이(李珥)가 살았던 곳이므로 그의 호를 붙인 것임.
소공로(중구)
1966년 11월 26일 서울특별시고시 제1093호로 처음 제정되었다. 소공로의 길이름의 유래된 소공동은 조선 태종의 둘째공주인 慶貞公主의 궁이 있었기 때문에 작은공주골이라 하였다. 이를 한자로 고친 것이 소공주동 혹은 줄여서 소공동이라 하였다.
사당로(동작구)
1979년 1월 30일 서울시가 시내 7개 도로에 대한 가로명을 제정할 때 사당로로 제정되어 지금까지 불리어 온다. 사당로는 사당동의 동명에서 유래하며 옛날에 큰 사당이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붙여졌다고 함.
동일로(중랑구), 동이로(노원구)
서울시가 한양천도 578주년 기념일을 맞아 1972년 11월 제정. 東쪽에 첫 번째 만든길(영동대교에서 망우로와 만나는 곳 까지)을 東一路, 두 번째 만든길(망우로 만난 곳부터 상계동까지)을 東二路라고 칭한다
장수(한천)로
장안동에서 수유동까지의 도로, 한천을 따라 만들어진 도로
종암로(성북구)
고려대학교 뒷산에 종 또는 북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어 한자로 종암(鍾岩)이라고 한 데서 유래. 종암을 인용하여 종암로라고 제정.
아차산길(중랑구)
아차산 앞 벌판에 거주했던 조선초기 학자이며 대신인 사가정의 호를 인용하여 제정
능산길(중랑구)
신내동 구능산 옆을 통과하는 도로
망우로(중랑구)
이 도로가 지나는 종점지인 망우동 동명에서 유래함.
청계천로(중구)
청계천을 복개하여 만든 데서 유래
덕수궁길(중구)
덕수궁담을 따라 이어졌으므로 덕수궁을 인용하여 덕수궁길이라 함
올림픽로(송파구)
이 길의 이름은 88올림픽 개최를 위한 주경기장 앞을 통과하므로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붙여진 가로명이다.
풍납로(송파구, 강동구)
풍납토성이 있으므로 해서 인용된 길이다.
테헤란로(강남구)
강남지역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왕복10차선 간선도로로, 국제금융과 무역이 활발하고 도시설계지구에 해당한다. 1972년 11월 26일 서울특별시가 한양 천도 578주년을 맞아 이름없는 시내 59개 도로에 대한 가로명을 지을 때 삼릉로가 되었다가 그 뒤 한국의 중동 진출이 한창이던 1977년 6월 17일 이란의 수도 테헤란시장의 서울방문때 테헤란시와의 자매결연을 기념하여 현재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영동대로(강남구)
서울특별시가 1972년 시내 무명 59개 가로에 대한 이름을 붙일 때 영동6로라고 하였다가 1976년 6월 26일 지금의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영동지역을 지나는 간선도로이므로 여기서 도로명이 붙었고, 영동이란 영등포의 동쪽 지역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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