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순 전경 ★/●•―‥제 생

제생(濟生) 1 ~ 30까지

고도인 2008. 7. 11. 19:45

제생(濟生) 1 ~ 30까지 


1. 증산성사께서 환자를 대하실 때에 환자의 가슴과 뱃속을 들여다보시는 듯이 경락(經絡)과 장부(臟腑)를 낱낱이 가리키시며 이 곳은 어디이고 저 곳은 어디이며 어느 장부에서 병이 났고 또 누릿누릿하게 장부에 끼어 있는 것이 담이라 하시며 하나하나 환자가 알도록 가르쳐주셨도다.


2. 증산성사께서 처음으로 의법(醫法)을 화정동(花亭洞)에서 베푸셨도다. 이경오(李京五)는 화정동에 사는 사람이라. 어느 날 그와 친분이 있는 박금곡이란 대원사(大院寺)주지가 경오의 신병을 아뢰고 심방을 증산성사께 간청하므로 증산성사께서 그의 병세를 보시니라. 왼쪽 발가락이 저리고 쑤시며 오후부터 새벽까지 다리가 부어 기둥과 같이 되는지라. 그러나 그 부기가 아침에는 내렸다가 정오 경에 원상대로 회복되다가도 오후에 붓기 시작하느니라. 이 증세가 삼사 년 계속되어 이제 촌보를 옮기지 못하고 앉은뱅이 노릇을 하게 되었도다. 증산성사께서 진맥하시기를 “진실로 괴상한 병세로다. 모든 일이 적은 일로부터 큰 일을 헤아리니라. 내가 이 병으로 표준을 삼고 천하의 병을 다스리는 시험을 하리라.” 증산성사께서 손수 다리 끝까지 만지고 추녀 끝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받아서 씻으라 이르시니라. 경오 명하신 대로 하니 곧 나으니라.


3. 증산성사께서 전주 능소(陵所)에 가 계실 때  황응종(黃應鐘)이 본댁으로부터 와서 증산성사의 부친의 병보를 아뢰므로 증산성사께서 응종에게 술과 돈 열 냥을 주시며 “해가 저물었으나 불쾌히 생각지 말고 곧 돌아가다가 청도원(淸道院) 김송환(金松煥)의 집에서 자고  내일 이른 아침에 동곡 김갑칠에게 가서 나의 모시 두루마기 한 벌을 가지고 가서 부친에게 입혀드리고 이 돈으로 영양분 있는 음식을 만들어 공양하라”고 이르셨도다. 응종이 날은 저물었으나 감히 명을 거역치 못하고 능소를 떠나 행길에 나온 지 한 시간도 못 되어 길옆에 돌비석이 보이는지라. 청도원에 이른 것이니라. 능소로부터 六十리나 되는 청도원을 한 시간도 못되게 당도한 것에 놀라고 이것은 반드시 증산성사의 도력임을 깨닫고 기뻐하였도다. 김송환의 집에서 자고 이튿날 이른 아침 동곡에 들러 두루마기를 찾아 가지고 객망리에 가서 증산성사의 부친에게 입혀드리니 부친이 곧 정신을 회복하고 영양분 있는 음식 대접을 받으니 몸도 완쾌하였도다.


4. 임인년(1902년)에 증산성사께서 전주와 하운동(夏雲洞) 사이를 다니시면서 약재를 쓰지 않고 병마에 시달리는 사람을 건져주시니 모든 사람들은 그 신력에 경복하셨도다.


5. 증산성사께서 임인년(1902년) 四월 十三일에 김형렬의 집에 이르셨도다. 때마침 형렬의 아내가 막내아들을 분만할 때니라. 그 부인은 산후 사십 구일간 산후 복통으로 고생하는 습관이 있는지라. 형렬이 매우 근심하기에 증산성사께서 가라사대 “이후부터 나를 믿고 근심을 놓으라” 하시니 그는 증산성사의 도움을 믿고 근심을 놓았도다. 이로부터 부인은 복통과 천식의 괴로움에서 벗어났도다.


6. 장효순은 지병인 횟배앓이로 생명을 잃게 된 시집간 딸 때문에 전주부에 머물고 계시는 증산성사를 찾아와서 고쳐주시기를 간청하였느니라. 증산성사께서 그 집에 이르러 그 두 부부를 불러 벽을 사이에 두고 등지고 서게 하여 부인 병이 남편에 옮아가게 하신 후에 증산성사께서 남편의 배를 만져 회복하게 하시니라.


7. 김윤근이 치질로 수십 년 동안 고생하다가 계묘년 삼월에 이르러 기동할 수 없이 누울 정도로 심해지니라. 이를 긍휼히 여기사 증산성사께서 그로 하여금 아침마다 시천주를 일곱 번씩 외우게 하셨도다. 그가 그대로 행하더니 병에 차도가 있어 얼마 후에 완쾌되었도다.


8. 고부(古阜) 사람 이도삼이란 자가 간질병이 있었느니라. 그 자의 청을 받으시고 증산성사께서 “나를 따르라” 이르시고 눕혀놓고 가지 못하게 하셨도다. 그 자가 밥을 먹고 난 후에 배가 아프고 변에 담이 섞여 나오다가 열 나흘만에 간질 기운이 사라졌도다.


9. 증산성사께서 동곡에 머무실 때 그 동리의 주막집 주인 김사명(金士明)은 그의 아들 성옥(成玉)이 급병으로 죽은 것을 한나절이 넘도록 살리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도저히 살 가망이 보이지 않자 아이의 어머니가 죽은 아들을 업고 동곡 약방으로 찾아왔도다. 증산성사께서 미리 아시고 “약방의 운이 비색하여 죽은 자를 업고 오는도다”고 말씀하시니라. 성옥의 모는 시체를 증산성사 앞에 눕히고 눈물을 흘리면서 살려주시기를 애원하므로 증산성사께서 웃으시며 죽은 아이를 무릎 위에 눕히고 배를 밀어 내리시며 허공을 향하여 “미수(眉叟)를 시켜 우암(尤菴)을 불러라”고 외치고 침을 흘려 죽은 아이의 입에 넣어주시니 그 아이는 곧 항문으로부터 시추물을 쏟고 소리를 치며 깨어나니라. 그리고 그 아이는 미음을 받아 마시고 나서 걸어서 제 집으로 돌아가니라.


10. 김창여(金昌汝)가 동곡에서 살았는데 여러 해 동안 체증으로 고생하던 중 어느 날 증산성사를 찾아 자기 병을 보아주시기를 애원하니라. 증산성사께서 그를 평상 위에 눕히고 배를 만지면서 형렬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글을 읽게 하였더니 창여는 체증으로부터 제생되었도다.


調來天下八字曲 淚流人間三月雨 葵花細枕能補袞 萍水浮踵頻泣玦

조래천하팔자곡 누류인간삼월우 규화세침능보곤 평수부종빈읍결

一年明月壬戌秋 萬里雲迷太乙宮 淸音鮫舞二客簫 往劫烏飛三國塵

일년명월임술추 만리운미태을궁 청음교무이객소 왕겁오비삼국진


◐ 천하에 인간들의 한 평생(平生)의 팔자가 화합하여지는 곡조가 전하여 오니 인간들이 3월의 비처럼 눈물을 흘리는구나. 해바라기 꽃처럼 해를 바라보는 세심한 정성으로 천자의 예복을 지어 능히 침수를 들도다. 그러나 물위에 떠다니는 부평초처럼 빈번히 눈물 짖는구나. 일 년에도 달이 밝은 달은 가을의 임술월(壬戌月=9월)이로다. 雲霧(운무)중에 한결같은 마음으로 천리만리 달려서 태을궁을 찾았더니 상어가 춤을 추는 듯 맑고 깨끗한 음성(音聲)이 두 나그네의 퉁소 소리이더라. 몇 겁의 세월이 흘러가더니 까마귀 날듯 3국(증산, 정산, 우당)이 먼지가 사라지듯 사라진다. 이 말씀은 3국이 사라지니 오선위기에서 두 나그네만 남게 되는데 이 두 나그네를 찾아야 濟生(제생)이 돼서 후천 용화선경에 동참이 된다는 의미이다.

※ 八字(팔자); 사람의 한 평생(平生)의 운수(運數).

※ 임술월(壬戌月=9월); 2003년 9월, 2008년 9월, 2013년 9월.

※ 규화(葵花) : 해바라기 꽃,  

※ 곤(袞) : 고대의 천자(天子) 또는 상공(上公)의 예복.  용의 무뉘가 있음.

※ 三國(3국); 증산, 정산, 우당을 3국에 비유한 것으로 암시적인 내용이다.


11. 용두치에 교자를 타고 다니는 김 모란 앉은뱅이가 살고 있었도다. 그가 하루 증산성사를 찾아뵈옵고 편히 걸어다니게 하여주시기를 애원하니라. 증산성사께서 그를 앞에 앉히고 담뱃대에 따라 일어서라고 이르고 그가 담뱃대가 높아짐에 따라 점점 높이 일어서려고 애를 쓰게 하시고 형렬에게 ‘예고신 예팽신 석란신 동서남북 중앙신장 조화조화 운오명령훔(曳鼓神曳彭神石蘭神東西南北中央神將造化造化云吾命令吽)을 읽게 하시니라. 그리고 증산성사께서 다시 그를 뜰에 세우고 걷게 하시며 광찬으로 하여금 그의 종아리를 쳐서 빨리 걷게 하시니라. 그는 교자를 버리고 걸어서 돌아갔도다. 그 후에 그는 걷게 된 인사로 증산성사께 삼십 냥을 공양하니 증산성사께서 그것으로 행인들에게 주식을 베풀어주고 그 사람은 행인들 앞에서 증산성사께서 다리를 펴주셨다고 고마운 인사를 하니라.


◐ 曳鼓神  曳彭神  石蘭神  東西南北中央神將 造化造化  云吾命令吽(예고신  예팽신  석난신  동서남북중앙신장 조화조화  운오명령훔); 예고신,  예팽신,  석난신,  동서남북중앙의 신장이 조화의 술법으로 나의 명령에 훔(吽)을 받아 시행한다.

(도로신장주(道路神將呪) 또는 예고주(曳鼓呪)라 한다.)



12. 박순여(朴順汝)는 어머니를 모시고 동곡에서 살아 왔는데 모친이 나이 육순으로써 병이 도를 넘었으므로 식구들이 치상의 준비를 하니라. 이 소식을 전하여 들으시고 증산성사께서 그 집을 찾아가시니라. 그 곳에 이르셔서 순여에게 시장에 나가 초종지례에 쓰는 제주를 쓰지 않도록 하여 주십소사 하고 지성껏 심고(心告)하고 돌아오게 하시고 사물탕 한 첩을 달여서 병실의 바깥뜰로부터 열 두 걸음이 되는 곳에 광중과 같이 땅을 파서 그 첩약을 묻고 “오래된 병이니 약을 땅에 써야 하리라” 말씀하시고 돌아오는 순여에게 “누구에게 심고하였느뇨”고 물으시니라. 순여가 “선생님께 심고하였나이다”고 대답하기에 증산께서 웃고 그녀에게 빚어 넣은 술을 가져와서 이웃 사람들과 함께 모두들 마시게 하시니라. 병자는 곧 회생하였도다.


13. 전순일(田順一)은 동곡의 주막 주인인데 오랫동안 신병으로 고생한 끝에 증산성사께 치료를 청하여 오므로 이에 이기지 못하여 한공숙을 데리고 병자의 집에서 병을 보셨도다. 증산성사께서 병자에게 죽 한 그릇을 먹이고 공숙에게 주머니 속에 있는 은행 한 개를 방안에 있는 거울 조각 위에 얹어 으슥한 곳에 두게 하시고 병자에게 술 한 상을 청하셨도다. 십여 분 지나서 증산성사께서 “의원이 떠나니 병자는 문밖에 나와 전송하라” 이르시니 순일이 가까스로 일어나 전송하였더니 그 후 곧 완쾌하였도다. 그 뒤에 순일이 증산성사를 공양하지 않기에 증산성사께서 “이 사람은 입맛을 잃고 신고하리라” 말씀하셨는데 이후 몇 달 동안 순일은 병상에서 일어났으나 입맛을 잃고 고통을 받았도다.


14. 동곡 김갑진(金甲辰)은 문둥병으로 얼굴이 붓고 눈썹이 빠지므로 어느 날 증산성사를 찾고 치병을 청원하였도다. 증산성사께서 갑진을 문 바깥에서 방쪽을 향하여 서게 하고 형렬과 그 외 몇 사람에게 대학 우경 일장을 읽게 하시니라. 십여 분 지나서 갑진을 돌려보내셨도다. 이 때부터 몸이 상쾌하여지더니 얼마 후에 부기가 내리고 병이 멎었도다.


15. 김광찬은 증산성사를 모시고 김성화가 있는 고을 임파군(臨陂郡) 둔리(屯里)에 이르러 며칠 동안 머물었도다. 증산성사께서 죽게 된 성화의 이웃 사람을 제생하셨느니라. 증산성사께서 환자를 만나 그 병은 그대로 치료하기 어려우니 함열(咸悅) 숭림사(崇林寺) 노승을 조문하고 돌아오게 하셨도다. 환자는 중병의 몸을 이끌고 그곳을 돌아오므로써 사경에서 벗어났도다. 그는 이튿날 다시 숭림사에 찾아가니 노승이 죽었는지라. 조문하고 돌아오면서도 증산성사 말씀에 위력을 느끼고 두려워하였도다.


16. 증산성사께서 을사년(乙巳年1905년) 정월 그믐날에 형렬과 함께 부안군 성근리(扶安郡成根里) 이환구(李桓九)의 집에서 여러 날을 머물고 계셨는데 환구가 부안 사람 신원일(辛元一)을 자주 천거하기에 증산성사께서 그를 부르니 원일이 와서 배알하고 증산성사를 자기 집에 모시고 공양하니라. 그의 아버지와 아우가 증산성사의 장기 체류를 싫어하므로 원일이 증산성사께 “가친이 본래 해마다 어업을 경영하다가 작년에 폭풍 때문에 큰 손해를 보았으니 선생님께서 금년에는 풍재를 없게 하여 주시면 가친을 위하여 행이 되겠나이다”고 아뢰이니 증산성사께서 “풍재를 없게 하고 어업을 흥왕케 하리니 많은 이익을 얻으면 후에 돈 천 냥을 가져오라” 이르시니라. 원일의 부자가 기뻐하여 승낙하니라. 과연 말씀대로 그 해에 풍재가 없을 뿐만 아니라 七산 바다의 어업 중에서 원일의 아버지가 가장 흥왕하였도다.


17. 증산성사께서 원일의 아버지에게 사람을 보내어 돈 천 냥을 가져오게 하라 하시니 원일의 아버지는 전약을 어기고 보내지 않는지라. 증산성사께서 원일에게 가라사대 “이것은 대인에 대한 기만이니라. 나의 일은 일동이라도 사사롭게 못하나니 이제부터는 그대 집의 어업이 철폐케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이 계신 후부터 고기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아 그의 부친은 마침내 어업을 폐지하였도다.


18. 이 일이 있은 며칠 후에 증산성사께서 원일의 집에 가셨는데 때마침 원일의 부친이 서울 채권자로부터 변제의 독촉에 시달리는지라. 증산성사께서 그 광경을 보시고 측은히 여기사 원일의 부친을 대신하여 채권자에게 “우리 두 사람이 오늘 일기를 알아맞히어 탕감의 내기를 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의하시니 그도 쾌히 허락하니라. 증산성사께서 “만일 그대가 비가 온다고 하면 나는 안 온다 할 것이요. 또 비가 안 온다고 그대가 말하면 나는 온다고 할 것이니 먼저 말하라” 하셨다. 그 날은 유난히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인지라. 그 채권자가 비가 오지 않는다고 말하기에 증산성사께서는 “반드시 비가 오리라”고 하셨도다. 조금 지나서 비가 내리니 그 자는 할 수 없이 빚을 탕감하고 돌아가니라. 그 비는 증산성사께서 내리게 하신 것으로 세상 사람들이 믿었도다.


19. 전주부 사람 문태윤이 증산성사를 배알하니라. 성사께서 “그가 갖고 있는 보따리를 끌러 보이라”고 이르시니 그 자가 주춤하자 “소란 때문에 수상한 자를 근방에서는 재우지 않느니라”고 말씀을 이으시니 그제서야 그 자가 풀어보이는도다. 그것은 그 자와 숙질간의 금전 소송 서류였도다. 태윤은 증산성사께 이러한 불만스러운 일이 있으므로 선생님께 그 해결 방법을 얻고자 방문한 까닭을 아뢰이니라. 증산께서 글을 써서 봉하여 주시며 이것을 조카집 문 앞에서 불사르라고 방법을 가르쳐주셨도다. 태윤이 명을 쫓으니라. 그 후에 듣자니 숙질간의 불화가 가셨다 하니라.


20. 증산성사께서 명하신 대로 육십사괘를 암송하고 갑자기 각통으로 생긴 오한 두통을 즉각에 고쳤느니라. 형렬이 이상히 여겨 그 연유를 여쭈었더니 증산성사께서 “八괘 가운데 오행이 감추어 있으니 오행의 기운을 응하게 한 것이 곧 약이 되었느니라”고 알려주시니라.


21. 김갑칠의 형수가 발가락의 종창으로 죽을 고생을 당하고 있는지라. 증산성사께서 소식을 들으시고 “그 환부가 용천혈(龍泉穴)이니 살기 어려우리라. 준상(俊相)과 갑칠은 오늘 밤 서로 번갈아 환자를 잠에 들지 못하게 하면서 밤을 세우라. 명부사자와 나의 사자 중 누가 강한가 보리라”고 말씀하셨다. 두 사람은 명을 쫓았으나 환자는 한때 잠을 이루지 못하여 정신이 혼몽하고 위독하여지다가 날이 밝으니 차차 정신을 차리는지라. 그제야 증산성사께서 종도들로 하여금 근심을 놓게 하시고 쌀뜨물을 환부에 바르고 백 냥이 있어야 되겠다고 하시면서 돈을 청하셨도다. 준상이 “집안이 워낙 가난하여 가옥을 방매하여야 되겠나이다”고 여쭈어 난색을 보이므로 증산성사께서 그의 집을 증산성사께 팔게 하시니 준상이 기꺼이 승낙하기에 증산성사께서 그로부터 가옥 매도 문서를 받아 가지고 계시다가 잠시 후에 그것을 불사르고 준상을 그 집에서 눌러 살게 하고 방 한칸을 빌려서 수리하여 약방으로 쓰셨도다.


22. 증산성사께서 덕찬을 동행케 하여 김낙범의 집에 가셔서 그의 아들 석(碩)을 사랑으로 업어내다가 엎드려놓고 발로 허리를 밟으며 “어디가 아프냐”고 묻고 손을 붙들어 일으켜 걸려서 안으로 들여보내면서 닭 한 마리를 삶아서 먹이라고 일러주시니라. 이로부터 석의 폐병이 나았도다.


23. 이 무렵에 괴질이 청주(淸州)와 나주(羅州)에 창궐하여 인심이 흉흉한지라. 증산성사께서 “남북으로 마주 터지니 장차 무수한 생명이 잔멸하리로다”고 말씀하시고 글을 써서 괴질 신장에게 “호불범 제왕 장상지가 범차무고 창생지가호(胡不犯帝王將相之家 犯此無辜蒼生之家乎)라 칙령하시고 “내가 이것을 대속하리라”고 말씀하시니라. 증산께서 형렬에게 새 옷 다섯 벌을 급히 지어오게 하시니라. 가져온 옷으로 증산성사께서 설사하시면서 다섯 번 갈아입고 “약한 자는 다 죽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도다. 이후부터 그 괴질이 고개를 숙이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없어졌도다.

◐ 호불범 제왕 장상지가 범차 무고 창생지가호 (胡不犯 帝王 將相之家 犯此 無辜   倉生之家乎); 어찌 제왕이나 장상의 집은 침범하지 않고, 죄도 없는 무고한 창생의 집을 범하느냐?

옷을 다섯 번 갈아입고 “약한 자는 다 죽을 것이니라” 고 하신 것은 다섯 명의 오선위기 도수와 같은 의미로 道(도)를 다섯 번 갈아타야 된다는 암시이다. 이때에 진리가 약한 자(깨닫지 못한 자)는 다 죽으리라 고 하신 것이다.


24. 정태문(鄭泰文)이 정미년(1907년)에 용암리에 살고 있는 김사유(金士有)의 물방앗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태문이 증산성사와 함께 여러 날 한 방에서 지낼 영광스러운 기회를 가졌도다. 그 시절에 태문이 토질로 신고하여 고쳐주시기를 청하니 증산성사께서 허락만 하시고 고쳐주시지 아니 하시더니 어느 날 태문에게 “네가 병을 고치려 하느뇨” 물으시기에 태문이 소원임을 아뢰니 증산성사께서 “내가 이틀 후에 정읍으로 가리니 이제 고쳐주리라” 말씀하시고 글을 써 주시면서 “이 글을 네 침실의 베개 위에 두고 자라. 그리고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방문을 열라. 그러면 개가 방문을 향하여 두 앞발을 모으고 혈담을 토하리라. 곧 네 병을 개에게 옮겼느니라” 이르셨도다. 태문은 이르신 대로 결과가 나타난 것에 새삼 경탄하니라. 태문이 증산성사를 술집에 모시고 술을 올리니 증산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술을 마시고 술값을 바로 갚지 않으면 먹지 아니함만 못하니라.” 태문이 “내일 틀림없이 갚으려 하나이다”고 여쭈니라. 술값은 일곱 냥이었다. 이튿날 증산성사께서 정읍으로 떠나신 뒤에 태문이 술값을 천천히 치르려고 생각하더니 별안간 복통을 일으키는지라. 그제서야 마음을 돌리고 꼭 갚으리라 결심하니라. 복통도 가라앉아 술값을 바로 갚았도다.


25. 증산성사께서 두루 다니시다가 동곡 약방에 들러 그곳에 계셨도다. 그 동리에 평양집이 있었는데 이 집의 다섯 살 난 아들이 갑자기 앉은뱅이가 되었기 때문에 그 주인이 병을 보아달라고 증산성사를 찾았오니 선생께서 “아이에게 쇠고기와 참기름을 먹여서 내일 아침에 안고 오너라”고 이르시니라. 평양집이 가난하여 참기름만 먹이고 아이를 안고 와서 아뢰이니 증산성사께서 아무 말씀 없이 누우시는도다. 주인이 화가 나서 “차라리 죽어라” 하면서 아이를 마구 때리니 아들이 하도 아프기에 울면서 도망치려고 일어서는지라. 그제서야 평양집이 깨닫고 매우 기뻐하면서 증산성사께 감사드리며 사과를 드렸더니 증산성사께서 아무런 말씀이 없었도다.


26. 박순여가 왼쪽 다리에 부종이 생겨 다리가 큰 기둥과 같이 부어 한 발도 움직이지 못하므로 증산성사께 간청하니라. 증산께서 자현에게 “순여의 병을 다스려 살게 함이 옳으냐. 또는 그대로 두어 죽게 함이 옳으냐. 네 말 한 마디에 달렸느니라”고 물으시기에 자현이 조금 주저하다가 “살려주심이 옳을까 하나이다”고 대답하니 가라사대 “박순여는 불량한 사람이라. 너에게 매우 무례하였으니 너와 함께 가서 치료하리라” 하시고 자현을 앞세우고 순여의 집에 가시니라. 증산성사께서 손수 부은 다리를 주물러 내리시며 백탕 한 그릇을 마시게 하시는도다. 원래 순여는 나이가 자현보다 많다 하여 항상 자현을 무례하게 대하여 왔느니라. 자현은 입밖에 내지 않으나 속으로 불쾌하게 여기고 있기에 증산성사께서 이것을 아시고 자현에게 물으신 것이었도다. 순여는 그 후에 부기가 내려 걸어다니게 되었도다.


27. 차경석의 소실이 바늘에 손가락이 찔린 것이 팔까지 쑤시다가 마침내 반신 불수가 된 것을 증산성사께서 육십간지를 써서 주시고 그녀의 상한 손가락으로 한 자씩 힘있게 짚어 내려가며 읽게 하고 다시  술잔을 들고 거닐게 하시니라. 이로부터 혈기가 유통하여 곧 완쾌하였도다.


28. 김경학의 여덟 살 난 아들이 병들어 여러 날 일어나지 못하거늘 증산성사께서 병실에 들어가 보시고 “일어나지 않으니 그런 법이 어디에 있느냐. 빨리 일어나라” 하시니 곧 병이 나았도다.


29. 그 후 또 김경학이 병들어 매우 위독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증산성사께서 경학에게 명하시어 사물탕(四物湯)을 끓여 땅에 묻고 달빛을 우러러보게 하시더니 반시간만에 병이 완쾌되었다.


30. 十八 . 九세 된 소년이 광산에서 일하다가 큰 돌에 맞아 다리가 부러지고 힘줄이 끊어지면서 다리를 오그리지 못하고 몸도 자유롭게 굽히지 못하는지라. 그 소년이 증산성사께서 전주에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와서 고쳐주시기를 간청하므로 증산성사께서 “남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면 내 눈에서는 피가 흐르느니라. 위로 뛰어 보라” 이르시니 그 소년이 힘주어 몸을 세우면서 위로 뛰니 오그라졌던 다리가 펴지니라. 이것은 혈맥과 뼈에 충동을 주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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