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지(權智) 1장
1. 류서구(柳瑞九)는 증산성사의 부친과 친분이 있는 분으로서 증산성사의 예지(豫知)에 깊이 놀라 증산성사를 경송하게 되었도다. 증산성사께서 그의 내왕을 언제나 미리 아시고 주효를 준비한 사실을 부친이 서구에게 알렸으되 그가 믿지 않았도다. 임인년(1902년) 정월 七일에 증산성사께서 그가 다시 오는 것을 마당에서 맞으면서 “세전에 공사가 있어 오신 것을 대접하지 못하여 부친에 대한 예가 안 되었나이다”고 말씀하시고 아우 영학으로 하여금 책력의 틈에 끼워 둔 종이쪽지를 가져오게 하여 펼쳐 보이시니 “인일에 인간방에서 사람이 오는데 마당에서 만나게 되니 그는 꼭 류서구였도다.(寅日人來寅艮方 逢場必是柳瑞九)”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도다. 이에 류서구는 놀라 그 후 증산성사를 경송하게 된 것이니라.
◐ 寅日人來寅艮方 逢場必是柳瑞九(인일인래인간방 봉장필시유서구); 복희팔괘도 순환도에서 1234까지 陽(양)의 氣運(기운)으로 돌아가다 5678로 陰(음)이 動(동)하여 가는데 1234는 宗敎(종교)가 성하고 周易(주역)은 陽(양)이 강한 시대에 만들어지기에 宗敎(종교)에 비하여 빛을 발하지 못하며 4에서 5678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中央(중앙) 5土(토)를 거쳐 지나가기에 周易(주역)은 중국에서 완성되고 시간은 흘러 艮方(간방)은 戌土(술토)자리로 씨앗, 열매를 艮方(간방)에서 만들고 간직한다. 간방은 지구 중심부에서 볼 때 바로 한국이다. 그래서 한국 땅은 원래 개(狗)자리이다. 주역을 보면 "간방(艮方)은 구야(狗也)" 라는 구절이 있다. 간방(艮方)은 한국을 가리킨다. 간방 한국은 개(狗)자리라는 얘기이다. 음양오행으로 보면 개자리는 술(戌)자리이다. 술(戌)은 곧 완성되는 곳, 열매 맺는 곳이다. 그래서 천지의 주인이신 옥황상제님께서는 간방인 우리나라로 인간 추수하러 오시는데 개띠로 오신다는 것이다. 한국이라는 땅 자체가 열매 맺는 곳이다.
2. 증산성사께서 가시는 여름의 폭양 길은 언제나 구름이 양산과 같이 태양을 가려 그늘이 지는도다.
3. 증산성사께서 “제갈량(諸葛亮)이 제단에서 칠일 칠야 동안 공을 드려 동남풍을 불게 하였다는 것이 우스운 일이라. 공을 드리는 동안 일이 그릇되어 버리면 어찌 하리요” 말씀하시고 곧 동남풍을 일으켜 보였도다.
4. “공부하는 자들이 방위가 바뀐다고 말하나 내가 천지를 돌려 놓았음을 어찌 알리요”라고 말씀하셨도다.
◐ 천지를 돌려놓았다는 말씀은 천지(天地)를 운영하는 섭리를 바꾸어 놓으심으로써 상극(相克)에 지배되던 선천의 법리를 상생의 도(道)인 후천의 법리로 바꾸어 놓았다는 의미이시다. 그러므로 천지공사를 통하여 바꾸어 놓은 법리에 의해서 성공과 실패가 정해지며 그것에 맞게 가는 사람은 성공이 있을 것이요, 그것에 반(反)하여 가는 사람은 실패가 따를 것이다. 새로운 세상에 걸맞게 살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먼저 달라져야 한다. 남은 마지막 고비를 넘기고 후천을 구현하기 위해서 인간들의 지혜가 밝아져야 하는 것이다. 강증산성사께서 모든 것은 다 예비해 놓으셨으므로 이제 인간이 새로운 세상에 걸맞게 지혜를 열어야 할 때이다. 마지막으로 이루어 내는 것은 결국 인간이라는 얘기이다. 왜냐하면 교법 3장 35절에 “‘선천에는 모사(謀事)가 재인(在人)하고 성사(成事)는 재천(在天)이라’ 하였으되 이제는 모사는 재천하고 성사는 재인이니라. 또 너희가 아무리 죽고자 하여도 죽지 못할 것이오. 내가 놓아주어야 죽느니라.” 하고 도수를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5. 증산성사께서 농부들이 九월에 일손 바쁘게 밭을 갈고 보리를 심는 것을 보시고 “이렇게 들 신고하나 수확이 없으리니 어찌 불쌍치 아니하랴”고 탄식하시는 말씀을 엿듣고 형렬은 결단하고 그 해 보리농사를 짓지 아니하였다.
6. 이듬 해 봄 기후가 순조로와 보리농사가 잘되어 풍년의 징조가 보이는지라. 농부들과 김 보경, 장흥해는 지난 가을에 증산성사께서 들판을 보시고 보리농사가 실패될 것을 염려하시기에 보리농사를 짓지 아니한 형렬을 비웃으니라. 이것을 들으시고 증산성사께서 “그것은 신명공사에서 작정된 것인데 어찌 결실하기도 전에 농작을 예기할 수 있으리요” 하시고 종도들의 성급함을 탓하시니라. 五月 五日에 폭우가 쏟아지니라. 보리이삭에 병이 들어 이삭이 마르기 시작하더니 결실이 되지 않는도다. 쌀값이 뛰고 보리 수확이 없게 되자 보경과 농부들이 증산성사의 말씀을 깨닫고 감복하기만 하였도다.
7. 이 해 임인년(1902년) 七월에 이르러 쌀값이 더욱 뛰고 거기에 농작물마저 심한 충재가 들어 인심이 더욱 사나워지기에 증산성사께서 종도들에게 “신축년부터 내가 일체의 천지공사를 맡았으니 금년에는 농작물이 잘되게 하리라”고 이르시니라. 이 해에 비가 적절히 내리고 햇볕이 쪼이더니 들판에서는 온통 풍년을 구가하니라.
8. 이것을 보시고 증산성사께서 가라사대 “내가 천지공사를 행하면서부터 일체의 아표신(餓莩神)을 천상으로 몰아 올렸으니 이후에는 백성이 기근으로 죽는 일은 없으리라”고 하셨도다.
◐ 아표신(餓莩神); 주릴 아, 굶어죽을, 표 귀신 신. 굶어죽은 귀신을 말함.
9. 증산성사께서 언제나 출타하시려면 먼저 글을 써서 신명에게 치도령(治道令)을 내리시니라. 증산성사께서 계셨던 하운동은 원래 산중이라 길이 매우 좁고 험하고 수목이 우거져 길에 얽혀 있느니라. 치도령을 내리시면 여름에는 나무에 내린 이슬을 바람이 불어 떨어뜨리고 겨울에는 진흙길이 얼어붙기도 하고 쌓인 눈이 녹기도 하였도다.
10. 최운익(崔雲益)의 아들이 병으로 인해 사경을 헤매이므로 운익이 증산성사께 달려와서 배알하고 살려주시기를 애걸하니라. 증산성사께서 가라사대 “그 병자가 얼굴이 못생김을 일생의 한으로 품었기에 그 영혼이 지금 청국반양(淸國潘陽)에 가서 돌아오지 않으려고 하니 어찌하리요.” 운익이 증산성사께서 병자를 보신 듯이 말씀하시므로 더욱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굳이 약을 주시기를 애원하니라. 증산성사께서 마지못해 사물탕(四物湯) 한 첩을 지어 구월음(九月飮)이라 써 주시니라. 운익이 약을 가지고 집에 돌아가니 아들은 벌써 숨을 거뒀도다. 운익이 돌아간 후에 종도들이 구월음의 뜻을 여쭈었더니 가라사대 “九월 장시황어여산하(九月葬始皇於驪山下)라 하니 이것은 살지 못할 것을 표시함이로다. 그 아들이 죽을 사람이지만 만일 약을 굳이 원하다가 얻지 못하고 돌아가면 원한을 품을 것이므로 다만 그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약을 주었노라” 하셨도다.
◐ 청국반양(淸國潘陽); 淸國(청국)은 옥황상제님의 도를 의미하고 반양은 道(도)가 양적으로 소용돌이치며 나타나는 것을 뜻한다. 도가 세상에 밝혀지는데 돌아가고 싶겠는가! 사물탕은 사계절을 의미하므로 사계절 중 9월에 잔치가 베풀어진다는 의미이다. 驪山(여산)이란 山(산)은 山君(산군)으로 삼신하느님을 말하는 것이고 臚(여)는 살갗臚(여) 字(자)이므로 이것을 註解(주해)하면 죽어 장사지낸 진시황도 9월 잔치에 옥황상제님 곁에서 원한이 풀린다는 뜻으로 누구라도 옥황상제님 곁에서 원을 풀 수가 있다는 뜻이다.
11. 증산성사께서 어느 날 경석을 데리고 농암(籠岩)을 떠나 정읍으로 가는 도중에 원평 주막에 들러 지나가는 행인을 불러 술을 사서 권하고 “이 길이 남조선 뱃길이라. 짐을 많이 실어야 떠나리라”고 말씀하시고 다시 길을 재촉하여 三十리 되는 곳에 이르러 “대진(大陣)은 일행 三十리라” 하시고 고부 송월리(松月里) 최(崔)씨의 재실에 거주하는 박공우(朴公又)의 집에 유숙하셨도다. 공우와 경석에게 가라사대 “이제 만날 사람 만났으니 (通精神)이 나오노라” 나의 일은 비록 부모형제일지라도 모르는 일이니 또 “나는 서양(西洋)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와서 천하를 대순하다가 삼계의 대권을 갖고 삼계를 개벽하여 선경을 열고 사멸에 빠진 세계 창생들을 건지려고 너의 동방에 순회하던 중 이 땅에 머문 것은 곧 참화 중에 묻힌 무명의 약소민족을 먼저 도와서 만고에 쌓인 원을 풀어주려 하노라, 나를 쫓는 자는 영원한 복록을 얻어 불로불사하며 영원한 선경의 낙을 누릴 것이니 이것이 참 동학이니라. 궁을가(弓乙歌)에 조선강산(朝鮮江山) 명산(名山)이라. 도통군자(道通君子)다시 난다”라 하였으니 “또한 나의 일을 이름이라 동학신자간에 대선생(大先生)이 갱생하리라고 전하니 이는 대선생(代先生)이 다시 나리라는 말이니 내가 곧 대선생(代先生)이로다”라고 말씀하셨도다.
◐ ‘이 길이 남조선 뱃길이라’ 하신 남조선이란 남한, 즉 대한민국을 의미하며, 뱃길은 전 세계로 진법을 전하여 나갈 수 있는 길을 말함이다. 1989년(을사년) 12월 대한민국 정부의 해외여행 자율화 조치 이후 대한민국 사람이 전 세계로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러므로 증산성사께서 박공우(朴公又)를 만나러 가는 이 길은 다시 말하면 상도 박성구미륵세존께서 대두목을 만나야 통정신이 나오게 됨으로써 진법이 나오게 되니 이 길은 만국대장인 박공우(朴公又=박성구미륵세존)가 진법을 세계만방에 펼쳐 나가는 그 길인 것이다. ‘짐을 많이 실어야 떠나리라’고 하심은 진법을 세계 만방에 전할 1만2천 도통군자(一萬二千道通君子)가 승선(乘船)했을 때 그 뱃길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대진(大陣)은 일행(日行) 삼십리란 군대의 대진(大陣)이 하루에 30리를 행군함을 말한다.
한나라 문제(漢文帝)에게 어느 사람이 천리마(千里馬)를 바치자 문제가 말하기를 ‘난기(鸞旗)는 앞세우고 속차(屬車)는 뒤세우니, 길한 행차는 하루 오십 리를 가고, 사행은 하루 삼십 리를 가니 나 홀로 천리마를 타고 앞서가서 어찌 할고’ 하며 그 말을 돌려보내었다. 이 말은 박성구미륵세존께서는 하루 50리를 가는데 대두목은 하루 30리를 간다면 만날 수가 없어 통정신이 나올 수가 없다는 말이다.
時有獻千里馬者 帝曰鸞旗在前屬車在後 吉行日五十里
시유헌천리마자 제왈란기재전속차재후 길행일오십리
師行日三十里 朕乘千里馬獨善安之 是還其馬
사행일삼십리 짐승천리마독선안지 시환기마
즉 대진(大陣)은 모든 것을 갖추어서 나아감으로 하루 30리를 행군해 나간다. 즉 대두목이 있는 곳에 대진(大陣)이 쳐지는 곳이다. 훈시에서 진법(眞法)이 진법(陣法)이라 하셨다. 현 대두목이 도전 박성구(朴成九)를 밝혀 진법(眞法)을 정하고 세계 만방에 대진(大陣)을 쳐나감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증산성사께서 그 대진을 치는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최씨 재실(齋室)에 있는 박공우(朴公又), 즉 상도(上嶋) 박성구(朴成九)께서 대두목을 만나는 공사를 보신 것이다. ‘만날 사람 만났으니 통정신(通精神)이 나오노라’라고 하신 말씀은 도전 박성구께서 대두목을 만나 통정신(通精神)이 나오게 된 것이다. 즉 서로 이심전심으로 심법(心法)이 통한 것이다. 그러나 통정신이 나왔지만 나 홀로 천리마를 타고 앞서가서 어찌 하겠는가! 즉 대진을 갖추어서 하루아침에 대세가 돌려 잡히면 그 일행이 하루에 수 천리를 가므로 대진이 50리를 간다한들 다시 상봉할 날이 오게 된다.
‘궁을가(弓乙歌)에 조선 강산 명산이라 도통군자 다시난다, 라 하였으니 또한 나의 일을 이름이라’ 하셨는데, 궁을가는 일명 용호대사 (龍虎大師)로 불리는 북창(北窓) 정염(鄭
) 선생(1506~1549) 작으로서, 정염은 조선 중종, 명종 때의 학자로 충청도 온양 사람이며, 소시에 산사(山寺)에서 선가(禪家)의 육통법을 시험해 보려고 3일 동안 정관(定觀)하더니 이로부터 배우지 않고 저절로 통하여 천리 밖의 일도 생각만 일으키면 휜히 알게 되었다고 한다.
[교운 1장 35절]에 증산성사께서 공우에게 ‘천지의 조화로 풍우를 일으키려면 무한한 공력이 드니 모든 일에 공부하지 않고 아는 법이 없느니라. 정북창 같은 재주로도 입산 삼일 후에야 천하사를 알았다 하느니라.’고 이르셨다. 궁을가는 용호대사 북창 선생이 미래사의 전개 과정을 가사 형식에 담아 후세에 전한 것을 말한다. 이 비결서에 보면 ‘조선 강산(朝鮮江山) 명산(名山)이라 도통군자(道通君子) 다시 난다’ 하였는데 이것 또한 증산성사의 일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증산성사의 일이란 ‘동학신자간에 대선생(大先生)이 갱생(更生)하리라’고 전하는 것은 대선생(代先生)이 다시 나리라는 말인데, 최제우가 옥황상제님으로부터 신교(神敎)를 받아 동학(東學)을 세우고 인간을 가르친 것은 옥황상제님을 대신해 가르친 대선생(代先生)이었다. 동학 신자들 간에는 최제우가 갱생한다 하여 대선생(大先生)이 다시 온다고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이요, 대선생(代先生)이 다시 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최제우가 갱생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대선생(大先生)이신 강증산(姜甑山), 조정산(趙鼎山), 박우당(朴牛堂)을 이어서 가르칠 대선생(代先生)이 다시 나리라는 말이니, 곧 대두목을 말함이다. “내(증산성사)가 곧 대선생(代先生)이로다”라고 하신 말씀은 대두목이 대선생(代先生)으로써 나(옥황상제님)를 대신해서 가르친다는 말씀이시다. 그리하여 대두목이 옥황상제님의 도(道)를 가르쳐 1만 2천 도통군자를 창성시키고, 1만 2천 도통군자가 또 대선생(代先生)으로써 천하에 옥황상제님을 가르쳐 나가니 이 일이 바로 옥황상제님의 일을 말함이다.
12. 증산성사께서 섣달 어느 날 종도들과 함께 동곡으로 가시는데 길이 진흙으로 심히 험하거늘 치도령을 내리시니 질던 길이 곧 굳어지니라. 마른 짚신을 신고 동곡에 가실 수 있었다. 그 당시 쓰신 치도령은 “어재함라산하(御在咸羅山下)의 여섯 글자인 바 증산성사께서 이것을 불사르셨도다.
◐ 어재함라산하(御在咸羅山下); 원문은 칙령치도신장(勅令治道神將) 어재함라산하(御在咸羅山下) 이어우전주동곡(移於于全州銅谷)이다. 道路(도로)를 만드는 신장에게 칙령을 내리노라, 내가 지금 함라산에서 전주 동곡으로 가려 하니 길을 열어라.
※ 勅令(칙령); 천자가 문서로서 내리는 명령.
13. 증산성사께서 농암에 머무르시며 공사를 마치시고 그 곳을 떠나려 하실 때에 차경석이 와서 배알하고 “길이 질어서 한 걸음도 걷기 어렵나이다”고 아뢰는도다. 증산성사께서 양지에 “칙령도로신장 어재순창농암 이우정읍대흥리(喇令道路神將 御在淳昌籠岩 移于井邑大興里)”라 쓰시고 물에 담갔다가 다시 끄집어내어 손으로 짜신 후에 화롯불에 사르시니라. 이 때 갑자기 큰비가 내리다가 그치고 남풍이 불더니 이튿날 땅이 굳어지는도다. 증산성사께서 새 신발을 신고 경석을 앞장 세우고 정읍에 가셨도다.
◐ 칙령도로신장 어재순창농암 이우정읍대흥리(喇令道路神將 御在淳昌籠岩 移于井邑大興里); 도로 신장에게 명령을 내린다. 내가 순창 농암에서 정읍 대흥리로 이동하니 길을 열어라.
14. 그 후에 증산성사께서 김제 반월리(金堤 半月里) 김준희(金駿熙)의 집에 계셨을 때 전주 이동면 전룡리(全州 伊東面 田龍里)에 사는 이직부의 부친이 증산성사를 초빙하는도다. 증산성사께서 그 집에 옮겨가셨는데 그 집 훈장이 증산성사의 재주를 시험하고자 하는 것을 미리 아셨다. 증산성사께서 줏대를 갖고 산을 두시며 그 동네 호구와 남녀 인구의 수를 똑바로 맞추시고 “사흘 안에 한 사람이 줄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니라. 그와 직부가 이상히 여겨 동네 호구를 조사하니 一호 一구의 차이도 없었고 사흘 안에 한 사람이 죽었도다.
15. 증산성사께서 아우 영학(永學)에게 부채 한 개에 학을 그려주시고 “집에 가서 부치되 너는 칠성경(七星經)의 무곡(武曲) 파군(破軍)까지 읽고 또 대학(大學)을 읽으라. 그러면 도에 통하리라”고 이르셨도다. 영학이 돌아가는 길에 정남기의 집에 들르니 그 아들도 있었는데 아들이 부채를 탐내어 빼앗고 주지 않으니라. 영학이 그 부채의 내용 이야기를 말하니 아들은 더욱 호기심을 일으켜 주지 않으니 하는 수 없이 영학은 빼앗기고 집에 돌아왔도다. 아들은 부채를 부치고 대학의 몇 편을 읽지도 않는데 신력이 통하여 물을 뿌려 비를 내리게 하며 신명을 부리게 되는지라. 남기는 기뻐하여 자기 아들로 하여금 증산성사의 도력을 빼앗고자 아들과 함께 하운동에 가는데 때마침 증산성사께서 우묵골(宇黙谷)로부터 하운동에 오시는 길이었도다. 남기의 아들이 증산성사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겁을 먹고 도망가거늘 남기가 붙들고 와서 증산성사께 배알하니 증산성사께서 그의 속셈을 꿰뚫고 남기의 무의함을 꾸짖으시며 그 아들의 신력(神力)을 다 거두신 후에 돌려보내셨도다.
16. 증산성사께서 전주 용두치(龍頭峙)에서 우사(雨師)를 불러 비를 내리는 공사를 보셨도다. 이치복이 전주 김보경을 찾고 증산성사를 배알하니 증산성사께서 가라사대 “이런 때에 나이 적은 사람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절을 받느니라.” 치복이 증산성사께 사배를 올리니 증산성사께서 “금년에 비가 극히 적으리라. 만일 비가 내리지 않으면 천지에 동과혈(冬瓜穴)이 말라죽으리라. 그러므로 서양으로부터 우사를 불러서 비를 주게 하리라” 말씀하시고 술상을 차리고 치복에게 술 두 잔을 주시며 한 잔을 요강에 부으셨도다.
17. 백남신의 친족인 백용안(白龍安)이 관부로부터 술 도매의 경영권을 얻으므로써 전주 부중에 있는 수백 개의 작은 주막이 폐지하게 되니라. 이 때 증산성사께서 용두치 김주보의 주막에서 그의 처가 가슴을 치면서 “다른 벌이는 없고 겨우 술장사하여 여러 식구가 살아 왔는데 이제 이것마저 폐지되니 우리 식구들은 어떻게 살아가느냐”고 통곡하는 울분의 소리를 듣고 가엾게 여겨 종도들에게 이르시기를 어찌 남장군만 있으랴. 여장군도 있다” 하시고 종이에 여장군(女將軍)이라 써서 불사르시니 그 아내가 갑자기 기운을 얻고 밖으로 뛰어나가 소리를 지르는도다. 순식간에 주모들이 모여 백용안의 집을 급습하니 형세가 험악하게 되니라. 이에 당황한 나머지 그는 주모들 앞에서 사과하고 도매주점을 폐지할 것을 약속하니 주모들이 흩어졌도다. 용안은 곧 주점을 그만두었도다.
18. 증산성사께서 김덕찬, 김준찬 등 몇 종도를 데리고 용두리에서 공사를 행하셨도다. 이곳에 드나드는 노름꾼들이 돈 팔십 냥을 가지고 저희들끼리 윷판을 벌리기에 증산성사께서 저희들의 속심을 꿰뚫고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저 사람들이 우리 일행 중에 돈이 있음을 알고 빼앗으려 하나니 이 일로써 해원되니라” 하시고 돈 五十냥을 놓고 윷을 치시는데 순식간에 八十냥을 따시니라. 품삯이라 하시며 五푼만을 남기고 나머지 돈을 모두 저희들에게 주며 말씀하셨도다. “이것은 모두 방탕한 자의 일이니 속히 집으로 돌아가서 직업에 힘쓰라.” 저희들이 경복하여 허둥지둥 돌아가니라. 종도들이 증산성사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윷이 되는 법을 궁금히 여기는 것을 알아차리시고 증산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던지는 법을 일정하게 하면 그렇게 되나니 이것도 또한 일심이라” 하셨도다.
19. 박공우가 한때 일진회의 한 간부였으나 증산성사를 따른 후의 어느 날 가만히 일진회 사무소에 일을 보고 돌아왔는데 증산성사께서 문득 공우에게 이르시기를 “한 몸으로 두 마음을 품은 자는 그 몸이 찢어지리니 주의하라” 하시기에 공우는 놀라며 일진회와의 관계를 아주 끊고 숨기는 일을 하지 않으니라.
20. 증산성사께서 어느 날 공우를 데리시고 태인 새울에서 백암리로 가시는 도중에 문득 관운장(關雲長)의 형모로 변하여 돌아보시며 가라사대 “내 얼굴이 관운장과 같으냐” 하시니 공우가 놀라며 대답하지 못하고 주저하거늘 증산성사께서 세 번을 거듭 물으시니 공우는 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관운장과 흡사하나이다”고 아뢰니 곧 본 얼굴로 회복하시고 김경학의 집에 이르러 공사를 행하셨도다.
21. 증산께서 “내가 삼계대권을 주재(主宰)하여 선천의 모든 도수를 뜯어고치고 후천의 새 운수를 열어 선경을 만들리라”고 종도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씀하셨도다. 그 때가 더딘 것에 종도들이 한탄하면서 하루 바삐 증산성사께서 개벽을 이룩하시기만 기다리는 도다.
◐ 천 • 지 • 인 삼계의 모든 신명과 인간들을 주재하시는 대권을 가지고 계신 증산성사께서 선천의 모든 불상사의 원인인 상극의 도수를 뜯어버리고, 후천의 새로운 운수를 열어, 인간들이 다시는 괴롭고, 어려운 난관에 들지 않는 선경 세상을 만드리라 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종도들에게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종도들에게 이러한 선경 세상에 가려면, 인간의 본심으로 돌아가 참된 인간으로 다시 서야만 후천 선경에 동참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아직도 우매한 자들은 증산성사의 뜻을 모르고, 오직 후천의 선경이 빨리 오기만을 무작정 고대하고 있다. 후천은 누가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옥황상제님의 도(道) 안에서 스스로 열어가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22. 증산성사께서 청도원(淸道院)에서 동곡에 돌아와 계시던 어느 날 “풍․운․우․로․상․설․뇌․전(風雲雨露霜雪雷電)을 이루기는 쉬우나 오직 눈이 내린 뒤에 비를 내리고 비를 내린 뒤에 서리를 오게 하기는 천지의 조화로써도 어려운 법이라” 말씀하시고 다시 “내가 오늘밤에 이와 같이 행하리라” 이르시고 글을 써서 불사르시니라. 과연 눈이 내린 뒤에 비가 오고 비가 개이자 서리가 내렸도다
23. 증산성사께서 어느 해 여름에 김형렬의 집에 계실 때 어느 날 밤에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강감찬은 벼락칼을 잇느라 욕보는구나. 어디 시험하여 보리라” 하시며 좌우 손으로 좌우 무릎을 번갈아 치시며 “좋다 좋다” 하시니 제비봉(帝妃峰)에서 번개가 일어나 수리개봉(水利開峰)에 떨어지고 또 수리개봉에서 번개가 일어나 제비봉에 떨어지니라. 이렇게 여러 번 되풀이 된 후에 “그만하면 쓰겠다” 하시고 좌우 손을 멈추시니 번개도 따라 그치는지라. 이튿날 종도들이 제비봉과 수리개봉에 올라가서 살펴보니 번개가 떨어진 곳곳에 수십 장 사이의 초목은 껍질이 벗겨지고 타죽어 있었도다.
24. 신원일이 건재약국을 차리고 약재를 사려고 공주 감영으로 가는 길에 김보경의 집에 들러서 증산성사께 배알하였도다. 이 자리에서 그는 여러 이야기 끝에 “길이 질어서 행로에 불편을 심하게 받았노라”고 여쭈니라. 증산성사께서 웃으시고 아무 말씀이 없었는데 원일이 이튿날 아침 길에 나서니 길이 얼어붙은 것을 보고 놀라면서도 기뻐하였느니라.
25. 증산성사께서 농암에 계실 때에 황응종과 신경수가 와서 배알하고 “눈이 길에 가득히 쌓여 행인이 크게 곤란을 받나이다”고 아뢰이니 증산성사께서 장근(壯根)으로 하여금 감주를 만들게 하여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잡수시니라. 쌀쌀하던 날씨가 별안간 풀리면서 땅의 눈이 녹아서 걷기가 편하여졌도다.
26. 한겨울에 증산성사께서 불가지 김성국의 집에 계셨도다. 김덕찬과 김성국이 꿩이 많이 날아 와서 밭에 앉기에 그물을 치고 꿩잡이를 하였는데 이것을 증산성사께서 보시고 “너희들은 잡는 공부를 하라. 나는 살릴 공부를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상하게도 그 많은 꿩이 한 마리도 그물에 걸리지 아니하니라.
27. 증산성사께서 약방에 계시던 겨울 어느 날 이른 아침에 해가 앞산 봉우리에 반쯤 떠오르는 것을 보시고 종도들에게 말씀하시니라. “이제 난국에 제하여 태양을 멈추는 권능을 갖지 못하고 어찌 세태를 안정시킬 뜻을 품으랴. 내 이제 시험하여 보리라” 하시고 담배를 물에 축여서 세 대를 연달아 피우시니 떠오르던 해가 산머리를 솟지 못하는지라. 그리고 나서 증산성사께서 웃으며 담뱃대를 땅에 던지시니 그제야 멈췄던 해가 솟았도다.
28. 증산성사께서 갑진년(1904년) 二월에 굴치(屈峙)에 계실 때 영학에게 대학을 읽으라 명하셨으되 이를 듣지 않고 그는 황주죽루기(黃州竹樓記)와 엄자능묘기(嚴子陵廟記)를 읽으니라. 증산성사께서 “대(竹)는 죽을 때 바꾸어 가는 말이요, 묘기(廟記)는 제문이므로 머지 않아 영학은 죽을 것이라” 하시며 이도삼을 불러 시 한귀를 영학에게 전하게 하시니 이것이 곧 ‘골폭 사장 전유초(骨暴沙場纏有草) 혼반 고국 조무인(魂返故國弔無人)’이니라.
◐ 황주죽루기(黃州竹樓記)와 엄자능묘기(嚴子陵廟記); 황주죽루기는 북송 왕우칭이라는 사람이 호북성 황주에 귀양가 있을 때 대나무로 정자를 지어 놓고 그 대나무의 덕을 칭송한 얘기이다. 근데 옛날에는 바꿀 '역자', 대나무 자리 '책'자, 역책(易 )이라고 해서 사람이 죽을 때는 대나무자리를 새롭게 깔아준다. 대나무 자리라는 것은 사람이 죽을 때 까는 것이다. 황주죽루기는 황주에서 대나무로 집을 지어놓고 그걸 적어 놓은 것이다. 그 다음에 범희문(范希文)이 쓴 '엄선생사당기'가 있는데 [엄자능묘기]라고도 한다. 엄자능이라는 사람은 후한 광무제와 동문수학했던 사람이며 공부를 잘했다. 이름은 엄광(嚴光)인데 하루는 광무제가 동문수학했던 엄광을 불러 하룻밤을 같이 잤다. 그런데 그 다음날 천문을 보는 태사가 와서 "폐하께서 간밤에 무슨 일이 없었습니까? 제가 천문을 보니까 객성이 임금의 보좌를 범하는 것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냐? 나는 내 친구인 엄자능하고 같이 잠을 잤다" 엄자능이 자다가 발을 후한 광무제 유수의 배위에 올려놓고 잤어요. 아마 그런 것도 천문에 나타나는 모양이다. 객성(客星)이 범한 것이 나타난 것이다. 하여튼 엄자능에게 벼슬을 줬는데 받지 않고 절강성 부춘산에서 낚시질을 하다가 죽었다. 북송 때 범희문이라는 사람이 거기 가서 사당을 하나 잘 지어 놓고 제사를 지내줬는데, 영학이 그 묘기(廟記)를 읽고 있었던 것이다. 廟(묘)라는 것은 죽은 사람의 사당이다. 증산성사께서 "죽을 것이다." 라고 하신 것은 죽는 기운을 불어들이지 말라는 뜻이었다.
◐ 골폭 사장 전유초(骨暴沙場纏有草) 혼반 고국 조무인(魂返故國弔無人); 뼈는 보기 흉하게 모래사장에 나뒹굴고 풀에 얽히어 있다. 혼은 고국으로 돌아오는데 조문하는 사람은 없다.
29. 처음부터 영학(永學)은 도술을 배우기를 원했으나 증산성사께서는 그것을 원치 말고 대학을 읽어라 하셨는데도 명을 어기고 술서를 공부하기에 시(詩)를 보내어 깨닫게 했으나 증산성사의 말씀을 듣지 않더니 기어코 영학이 죽게 되었니라. 증산성사께서 내림하셔서 영학의 입에 엄지손가락을 대시고 “이 손가락을 떼면 곧 죽을 것이니 뜻에 있는 대로 유언하라” 하시니 영학이 부모에게 할 말을 모두 마친 후에 엄지손가락을 떼시니 곧 사망하니라.
30. 갑진년(1904년)에 김덕찬이 모친상을 입고 장례를 지내려고 전주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용두치(龍頭峙) 주막에서 증산성사를 배알하니 가라사대 “오늘 장사는 못 지내리니 파의하라” 하셨도다. 덕찬이 이를 듣지 않고 돌아가서 장례를 그대로 행하여 지정한 땅을 파니 큰 의혈(蟻穴)이니라. 다시 다른 곳을 파니 그곳도 역시 마찬가지라. 덕찬이 그제서야 증산성사께서 가르치심의 어김을 뉘우치고 부득이 토롱(土壟)을 하였도다.
◐ 의혈(蟻穴); 개미가 사는 굴을 말함.
◐ 토롱(土壟); 묘를 쓰지 못하고 가묘를 하는 것으로 사람의 살이 탈골을 위하여 쓰는 묘. 이후에 다시 장사지냄.
31. 증산성사께서 섣달 어느 날 종도들을 이끌고 모악산 용안대(龍眼坮)에서 여러 날을 머무르셨도다. 마침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교통이 두절되고 따라서 양식이 두 끼니의 분량만이 남으니라. 증산성사께서 종도들이 서로 걱정하는 것을 듣고 남은 양식으로 식혜를 짓게 하시니 종도들은 부족한 양식을 털어서 식혜를 지으면 당장 굶게 되리라고 걱정하면서도 식혜를 지어 올렸도다. 증산성사께서 종도들과 함께 나누어 잡수시는데 눈이 멈추고 일기가 화창하여 쌓인 눈도 경각에 다 녹고 길도 틔어 종도들과 함께 돌아오셨도다.
32. 하루는 원평(院坪)에서 음식을 드시고 여러 사람을 향하여 외쳐 말씀하시기를 “이제 곧 우박이 올 터이니 장독 덮개를 새끼로 잘 얽어 놓아라” 하시니 여러 사람은 무심히 들었으나 오직 최명옥(崔明玉)만이 말씀대로 행하였더니 과연 두어 시간 후에 큰 우박이 내려 여러 집 장독이 모두 깨어졌도다.
33. 천도교 손병희(孫秉熙)가 호남일대를 순회하고자 전주에 내려와서 머물었도다. 증산성사께서 공우에게 “네가 전주에 가서 손병희를 돌려보내고 오라. 그는 사설로 교도를 유혹하여 그 피폐가 커지니 그의 순회가 옳지 않다”고 분부를 내리셨도다. 이에 그가 복명하였으되 이튿날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씀이 계시지 않으므로 이상히 여겼느니라. 며칠 후에 손병희는 예정한 순회를 중지하고 경성으로 되돌아갔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