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잠들어 있다.
인류는 잠들어 있다. 잠든 인류는 깨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죽음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不可抗力)의 상황이 닥쳤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지구촌 동포들은 지금이 과연 우주의 몇 시인지를 알고 깨어나야 한다.
어둠이 드리워진 새벽이라면 모르겠지만 해가 중천을 향하는데도 애써 눈감은 채 ‘아직도 어두운 밤’이라고 고집한다면 이 얼마나 무지하고 한심한 노릇이겠는가.
그간 숱하게 들었을 ‘끝날에 깨어 있으라’, ‘늘 깨어 있으라’는 말이 어항 속 금붕어마냥 스물네 시간 눈뜨고 살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평소에 늘 마음의 귀를 열어두고 말귀를 잘 알아들어 명료한 의식을 유지하라는 말일 게다.
자아를 깨닫지 못한 채 하는 명상은 명상이 아니라 망상이듯,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으로 태어나 대우주와 인류역사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 살아간다면 그것은 이성(理性)을 가진 존재로서 얼마나 허무하고 무기력한 삶이겠는가. 이는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미신(迷信)에 빠진 삶과 하등 다를 바 없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과 같은 감동적인 연설일지라도 의식이 잠든 사람이 해대는 연설은 어디까지나 잠꼬대에 불과하듯, 참 진리에 눈뜨지 못한 그 자체가 넓은 의미에서는 모두 미신에 속한다는 것이다.
작금(昨今)의 현실을 놓고 보면 잠든 뱃사공이 잠든 대중(大衆)을 싣고 노를 젓고 있는 판국이니 배가 산으로 향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도리어 순리에 어긋날 것이다. 그러다가 어떤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깜짝놀라 눈떠보면, 배는 이미 나루터가 아닌 뒷산 계곡에서 발견되는 어이없는 난센스가 반복되고 있음이다.
세상이 이처럼 갈피를 못 잡고 무감각하며 무질서하다는 뜻이다. 질서를 지키는 게 도(道)인데 말이다.
이대로는 안 된다
깨어나지 못해 미신에 사로잡힌 사회를 보면, 마치 뿌리 얕은 나무가 바람이 이는 대로 휘청거리듯 사회 전체가 흐느적거리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 과거에 대한 새로운 분석과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자는 말이 뇌리에 들어올 리 없으며 그러한 문화가 뿌리내리기는 더욱 어렵다.
이러한 현실을 걱정하는 세계의 여론은 단 한마디로 요약된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무슨 말인가? 지금까지 인류사회를 이끌어왔던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종교, 철학 등으로는 인류사회를 도저히 구해낼 수가 없다는 말이다.
사태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새로운 사상이나 제도에 대해 여전히 보수적이다 못해 부정적인 견해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오지 않으면 그냥 이대로가 좋다는 것이다. 말로는 ‘이대로는 안 된다’면서, 어느 시대나 세상을 건질 새로운 사상은 대중의 무지로 인한 두려움 때문에 늘 거부당해온 전례를 가지고 있다. 외국 안 갔다 온 사람이 외국 갔다 온 사람보다 목소리도 크고 더 아는 체하는, 그런 상황이 늘 반복됐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제 그런 진부한 역사의 흐름이 완전히 뒤바뀔 때가 왔다. 아니, 뒤바뀌지 않으면 안 되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상황이 우리 눈앞에 다가왔다. 인간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우주의 흐름이 새로운 방향으로 급격히 진행되고 있는 까닭이다. 제아무리 아집으로 똘똘뭉친 사람이라도 우주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이 흐름은 영국의 셰익스피어가 말했듯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와 직결되는 그런 흐름이다. 독일의 시인 니체가 늘 갈망했던 초인(超人)들의 세상인 지상신선문명(地上神仙文明)이라는 전혀 새로운 시대가 이 지구상에 도래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가을이 그러하듯 지상신선문명이 열리는 우주의 가을 역시 이 시기에는 ‘완성’이나 ‘미완성’이냐를 판별하여 그 씨앗의 본모습대로 열매를 맺어주는 연유이다.
예언보다는 진리의 근원
이러한 우주사(宇宙史)의 흐름을 대변하듯 지난 20세기 말에 ‘세기말 증후군’이라 하여 수많은 예언서들이 출간된 적이 있었다.
‘1999년=지구종말’로 대변되었던 노스트라다무스와 잠자는 예언가 에드가 케이시의 예언서, 1917년에 계시된 교황청의 극비문서인 「파티마 제3의 비밀」을 위시하여 한국의 『정감록』『격암유록』등 그 종류도 다양했다.
이러한 ‘세기말현상’은 그만큼 대중들의 심층심리에 현시대에 대한 불만족과 불안, 미지의 세계에 대한 궁금증이 도사리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다행히 세기말의 충격적 예언들은 빗나갔지만 지금 세계 도처에서는 기상이변이 불러들인 자연재해를 비롯하여 종교-이념-민족-계층간의 갈등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쟁과 테러의 악순환, 그로 인한 세계경제의 심리적 경색과 정신적 공황에 따른 연이은 자살 등이 잇따르고 있어, 이러한 상황을 불러들인 문제발생의 ‘근원’을 정확히 알아서 풀지 않고서는 온 인류가 평화로운 세상을 기대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현실에 처해 있다.
이런 와중에 생활 주변에서 대형 참사가 연이어 터져도 그것은 나와는 별 상관없는 TV속의 일인 양 모두가 무감각과 무관심의 터널로 하나둘씩 빠져들어가고 있으니, 만물의 영장이며 사회적 동물이라는 존재로서의 책임은 고하간에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의 본질마저 망각해 가고 있는 절망의 시대가 아닐수 없다.
더구나 둔감하기 짝이 없는 근시안적인 판단으로 인해 날로 그 심각성을 더해가고 있는 환경오염에 따른 대기와 지층의 불안은, 지구가 “나도 자전(自轉)하며 살아가고 있는 생명체다!”라는 것을 전 인류에게 시위(示威)라도 하듯 매년 예상치 못한 자연재해를 일으켜 시시각각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하니 인류의 모든 문제를 하나하나씩 풀어줄 궁극적인 진리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멸망의 공포는 시시각각 인류를 옥죄는 양상으로 좁혀 들어올 것이다.
우주 삼라만상에는 원리(原理), 즉 이치(理致)가 존재한다.
세상을 구제할 진리라는 것은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이치의 결합이라야만 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혹세무민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김없고 틀림없는 법칙이기에 세심하게 비교 • 연구해보면 누구나 쉽게 판별할 수 있는, 지극히 당연한 것들이다. 그 진리를 찾기 위해서는 가급적 크게 생각하고 크게 보면서 합리적인 사고와 과학적인 잣대를 이용해 하나하나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러고자 하는 마음자세이다.
본문 내용 역시 이러한 기준에 입각해 살펴보았으면 한다.
적극적인 이기심을 부추기는 금수(禽獸)문명
지금과 같이 위급한 환경에 처했음에도 서로 화합을 지향해야 하는 인류는,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라면 양심마저도 버젓이 속이는 행태를 반복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본질이 왜곡된 ‘금수(禽獸)들의 가치관’으로 인해 보다 나은 생존가치를 위해서라면 한 푼이라도 더 버는 것만이 인간답게 사는 정도(正道)인 양 오도된 가치관을 서로서로 부추기고 있는 이 시대는 그야말로 ‘동물의 왕국’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가 소리 높여 외치는 ‘잘살아보세’라는 구호를 ‘돈벌어보세’라는 뜻 외에는 달리 해석할 그 무엇이 없다는 것 자체가 정신적 공황이 아니겠는가. 서로가 인간성이 아닌 동물성을 키워주고 있는 판국이다.
물론 극소수 사람다운 사람들이 혼탁한 사회를 밝히고자 의분을 삭이며 고군분투(孤軍奮鬪)하고는 있지만 그런 의인일수록 ‘적극적인 이기심’이 거대한 물줄기를 이룬 이 사회에서 정체성을 지키며 산다는 것이 어디 그리 녹록한 일이겠는가. 참으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시절이 걱정스러울 뿐이다.
게다가 구호(口號)로는 늘 인간의 가치와 생명의 존엄성을 논하면서 유혈이 낭자한 격투기 게임에 박수치고 열광하며 ‘스트레스를 푸느니 어쩌니’ 하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생방송으로 방영되는 이른바 ‘전쟁중계방송’을 즐기고 사는 것이 오늘날 인류사회다. 이러한 문화를 지속시키는 것이 과연 옳겠는가?
인간답지 않은 문화를 일소해서 새로운 차원의 문명으로 전환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말이다.
사실 ‘말세(末世)’라는 말은 과거에도 역사적인 위기 때마다 반복되어온 해묵은 푸념일 수도 있지만, 주지하다시피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말세’라는 개념이 해석돼야 한다. 그만큼 그 위기가 총체적이며 심각하다는 것이다.
인류에게 재앙을 가져다주는 자연계의 위기상황을 뒤로하더라도 이를 개선시킬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인 인간의 의식세계마저 이처럼 합리적인 대안과 진리의 중심을 찾지 못한 채 극심한 해이에 빠져 서서히 마취돼 잠들어가고 있는 양상이다.
그야말로 정신이 물질을 지배하는 정신도덕문명세계(情神道德文明世界)가 활짝 열리지 않고서는 인류의 미래를 결코 낙관할 수 없는 다급한 실정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여러 성현들이 입을 모아 예언한 이른바 ‘불심판’에 대한 공포는 환경오염으로 인해 발생하는 원인 모를 괴질을 필두로 하여 온갖 자연재해의 형태로 표출되어 있으니 인류는 지금 심각한 위기상황에 노출돼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아무리 여름날의 낭만이 좋다 한들 가을이 되면 가을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하듯, 인류는 이제 우주의 여름을 보내고 다가오는 새로운 우주변화의 원리에 맞춰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천지인(天地人)의 오염으로 인해 급속도로 다가올 인류의 재앙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깨어 있는 사람들만이라도 진리의 중심을 찾아 너도나도 모여들어 능동적인 지혜를 모아야 한다.
간단히 말해 인류의 공멸을 막기 위해서다. 이 책자는 부족하나마 그 진리의 중심이 어디인가를 제시할 것으로 믿는다. 이제 인류는 더 이상 작은 이익에 얽매여 고루하기 짝이 없는 한정된 지식과 협소한 정신적 공간에 갇혀 매일매일 반복되는 희망 없는 뉴스에 귀 기울일 것이 아니라, 과연 이 세상이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를 과학적인 사고와 근거에 맞게 명철이 깨달아 불안하기 이를 데 없는 현실을 바꿔나가야겠다.
사회에 불만이 많았던 성인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과정은 물론이고, 어느 시대든지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고 건설했던 선지자들은 부당한 희생과 고통을 감내해야 했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당시는 과학기술이 발달하지 못해 일반인들에게 눈에 잘 안 보이는 새로운 진리를 심어주고자 해도 그 진리를 뒷받침할 만한 명백한 근거가 없어서 어려운 점이 많았지만, 지금은 어떠한 분야라도 과학이 앞장서서 사실 여부를 밝혀주고 있으며, 하늘의 섭리가 진리의 근원을 감싸고 도는 이치를 명백한 자료로써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고 마음만 열려 있다면 ‘과학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고대의 소크라테스, 석가, 마호메트, 예수, 장자, 공자 역시 당시의 일반적인 시대기준에 휩쓸리지 않고 끊임없이 문제의식을 일으켜 진리의 근원을 찾고자 애쓴 끝에 온 인류에게 새로운 빛을 던져준 사람들이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인류의 성인이라는 그분들은 ‘사회에 불만이 많았던’ 사람들이었다. 시대의 이단아였고 반항아였으며, 의식이 잠들어서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조용한 세상에 파장을 일으킨 난동자(亂動者)였던 것이다.
실례로 민중의 선구자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긴 녹두장군 전봉준 역시 당시 조정(朝廷)의 입장에서 보면 난동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심지어 민족의 스승이라는 백범 김구 또한 일본측에서는 ‘테러리스트’로 지목했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그들이 지향했던 바를 알기에 그들을 평할 때 난동자가 아니라 참되고 올바른 시각을 갖고 앞을 내다본 선각자(先覺者)요 선구자(先驅者)였음을 안다.
단지 그들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관찰해 그것을 올바로 세워보고자 ‘합리적인 불만’을 표출했을 따름이다. 이런 사람들의 깊은 사색과 들끓는 불만이 아니었던들 인류는 아마 오래 전에 진리의 척도를 잃어 진멸했을지도 모른다. 선각자들은 말 그대로 누구보다 ‘먼저’ 문제점을 깨달아 시대의 불합리를 단호히 배격하고 천지이치에 맞는 합리(合理)를 추구했던 철두철미한 합리주의자 들이었다.
또한 합리적인 불만이 많았다는 것은 불만(不滿: 가득 차지 않음)이라는 말 그대로 뭔가 완벽함을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불만이라는 것은 불만족(不滿足)의 준말이니 꽉 차지 않은 ‘미완성’이라는 뜻이 된다. 미완성된 세상을 한번 완성시켜 보고자 하니 어찌 불만이 없을 수 있겠는가?
성인들의 경전을 보면 그들이 당시 사회에 얼마나 불평불만을 많이 늘어놓았으며 시대를 개탄했는지 금세 알 수 있다. 이성(理性)이 잠든 덕에 조용했던 사회를 들쑤셔놓은 소크라테스, 카스트(caste)라는 세습적 신분제도의 철폐를 강력히 주장했던 석가모니, 불합리한 아랍문화를 혁신하고 인권회복에 온몸을 불사른 마호메트, 고루한 인습주의자들과 일대격전을 벌인 혁명가 예수, 혼탁했던 세속의 부귀영화를 버러지처럼 경멸했던 장자, 비인간적인 사상이 난무하는 가운데 인간미 넘치는 사회를 세우고자 각국을 떠돌아다닌 공자 등, 성인들의 실제적인 면면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고고한 모습과는 약간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는 다혈질적인 면도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렇지 않고서는 만인을 살리고자 하는 개혁의 기치를 세우기 어려웠을 것이다.
성인들의 혁신성과는 반대로 지금 우리 사회는 뜨뜻미지근한 적당주의가 판을 치는 바람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처참한 죽임을 당했던가. 그런 보신주의자들이 만일 성인들과 같이 불만이 많은, 완벽한 세상을 지향했다면 이 사회가 지금처럼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성인들이 추구했던 대자유의 기치는 사라지고 인류사회를 선도해야 하는 종교계에서조차 불합리한 면들이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횡행하고 있음을 볼 때 인간의 자유와 평화를 옥죄는 종교문화의 병폐에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폐단이 지구촌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위해서는 성인(聖人) 차원이 아닌, 하느님의 절대가치가 세워져야 한다. 그 불변의 가치로써 인류를 각성시켜 정신세계와 과학기술이 어우러지는 신문명(新文明)의 꿈을 실현해야 한다.
1만2천명이 건설하는 정신도덕문명세계
현대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행동은 마음 이면에 있는 마음속의 마음, 즉 심층심리가 더 중요함을 강조한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문제들도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을 가지고는 도저히 풀 수 없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지듯 음(陰)의 세계를 통찰해야 하는 것이다. ‘참으로 말세다’라는 말이 불쑥불쑥 불거져 나오는 우리의 현실은 인간의 심리가 그러하듯 ‘왜’가 아닌 ‘왜의 왜’까지 꿰뚫지 않고서는 인류가 처한 제반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그 심층심리에 해당하는 우주의 근원적인 수수께끼가 하나씩 풀릴 것이다.
본문을 읽어보면 수긍하겠지만 이 혼란한 사회상의 본질은 바로 혼란하게끔 짜여져 있는 ‘우주의 설계도’인 것이며, 그것은 인간이 정한 바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천지가 열릴 때 하느님의 섭리로써 이미 설정된 질서였음이 밝혀져 있다.
이제 인류는 수천 년간 지속되어온 긴 잠에서 깨어나 가치관을 일대혁신하는 정신개벽(情神開闢)으로써 영적(靈的) 진보를 해야 한다. 정신개벽이 이루어지지 않은 사회는 아무리 과학이 발달했다손 치더라도 그 사회는 정신적으로는 원시사회를 벗어나지 못한 미개(未開)한 사회라고 진단할 수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구인’이자 ‘우주인’인 인간 모두가 우주 변화의 이유와 과정과 결론을 알아야만 한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존재 이유를 깨닫고 천하대세를 올바로 보는 시각을 길러 희망을 잃어가는 인류를 널리 구하고 지구라는 거대한 생명체를 되살려내어 지상천국의 신천지를 건설하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
또한 그러한 일을 하고자, 하늘의 뜻을 받들어 태어난 1만2천의 선남선녀들이 한자리에 모여야 하는 것이다.
본문의 <지맥론>을 보더라도 지리(地理)의 법칙상 한국을 중심으로 세계 각국에서 금강산의 정기를 받은 도통군자들이 새로운 도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국가에서 천재가 10명만 나와도 그 나라는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음을 지나간 역사는 증거하고 있다. 하물며 각 분야의 천재인 1만2천명이 합심해서 건설하는 세상은 어떠하겠는가!
대한민국,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보석
오늘날 세계정세는 각 사상 간의 그칠 줄 모르는 이전투구(泥田鬪狗)로 인하여 그 불안한 행로는 전인류에게 물심양면의 피해를 주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세계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종교와 사상을 흡수할 수 있는 새롭고 분명한 진리가 나오지 않고서는 안 된다.
그 진리는 다름아닌 모든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믿고 의지했던 하느님(上帝)께서 이 땅에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몸으로 다녀가셨고 그 맥(脈)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다소 내용이 부족하고 기초적이기는 하지만, 이 책은 독자들에게 그러한 사실에 대한 핵심적 토대를 마련해주는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만일 모든 인류가 이 혁명적인 소식을 알고 깨닫는다면 지금과 같이 온 세상을 불안하게 만드는 ‘복수와 응징’의 악순환은 말끔히 종식될 것이다. 싸워야 할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을 생각해볼 때 본 내용은 60억 인류가 기다려왔던 궁극적인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구세(救世)의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속담은 오늘날 희망을 잃어가는 모든 인류를 위해 진실로 위안이 되는 말이라고 본다. 천만 다행스럽게도 그 말은 그저 속담에 그친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차후에 진리(眞理)를 깨닫고 그 뜻을 회고해보면 그것은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하나의 ‘예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천지자연은 물론이고 온 인류가 중병에 걸려 신음하고 있는 이 시대에 하느님께서 준비해두신 구원의 열쇠가 이 작고 아름다운 나라에서 솟아날 것이다.
‘솟아날 구멍’으로 상징되는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진리이다.
노벨상 수상자이며「25시」의 작가인 루마니아 태생의 프랑스 신부 게오르규(Gheorghiu : 1916~1992)는 약 30년 전인 1974년, ‘동양의 정신문명만이 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며, 자신의 새로운 고향인 한국에 대해 영감(靈感)에 찬 시를 써서 한국사회에 그 성가(聲價)를 높였다.
한국은 반도가 아니라 아시아 대륙의 귀고리이다.
아시아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하여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하여
하느님은 그 자리에 한국이라는 귀고리를
달아놓은 것이다.
지도상의 한국은 매우 작다.
모든 보석이 그런 것처럼 하나의 귀고리는
제아무리 커도 역시 작은 것이다.
고난을 이기고 자유세계를 지켜온
아시아를 아름답게 만든 보석
희망을 안겨주는 구절 하나하나가 그야말로 보석들의 나열이 아닐 수 없다. 그는 한국을 일컬어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보석’이라고 찬미했듯이 그 보석이랄 수 있는 위대한 진리가 이 땅에 출현한 것이다.
이는 일찍이 1929년, 타고르가 읊었던 ‘동방의 등불’인 것이고, 성인들이 한 목소리로 예언했고 인류가 그토록 기다려왔던 옥황상제님(三神)의 진법진리이다. 그것이 인류가 위기에 처한 이 시점에 나온 것이다. 진법(眞法)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법이요 인간을 완성시키는 법이다.
이로써 미완성된 부족함과 그에 따른 무지로 인해 서로가 고통을 주고받던 인류에게 화평(和平)의 새 길이 열린 것이다. 이제 인류는 지난 수천 년간 알게 모르게 지배받아오던 온갖 고정관념의 틀에서 완전히 해방되어야 하는 때를 맞이했다. 지금은 모든 것이 근원으로 돌아가는 원시반본(原始反本)의 섭리에 맞게 원래의 자아를 찾는 ‘정신적 독립’을 해서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약속하신 ‘살아서 해탈을 이루고 불로장생하는’ 지상신선문명(地上神仙文明)을 이 땅에 걸설해야 하는 시대이다.
4대성인 공동선언문
인류의 성인들이라는 석가-공자-예수-마호메트가 약 500년 간격으로 질서정연하게 인간계에 내려와서 하나같이 선언한 말이 있었다. 시대는 달랐지만 그 말들은 이른바 ‘4대성인 공동선언문’ 형식이었던 것이다.
즉, ‘앞으로 어느 시점이 되면 구세주께서 친히 인간계에 오신다’라고 절대자의 강세(降世) 일정을 미리 대변했고 그 말이 각 종교의 경전으로 명백하게 기록되고 말았으니, 절대자이신 하느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 하신 약속을 지키셔야 하고 하느님만을 믿고 그들을 따랐던 수십억 신도들의 애타는 기다림을 충족시켜주시기 위해서라도 강세하실 수 밖에 없으셨다. 이러한 순서에 따라 하느님께서는 4대성인이 공동으로 선언했던 그 시기와 장소에 맞춰 예언된 장소로 오셨고, 여러 성인들이 예언한 ‘그분’이심을 스스로 공표하셨다.
이렇듯 동서양의 성인들이 말했던 하느님은 사실 동일(同一)한 분이셨다. 말하자면 그들은 가운데 중앙(中央)에 계신 하느님을 두고 동쪽에서 바라본 공자는 ‘그분이 서쪽에 계신다’ 하고, 서쪽에서 바라본 예수는 '그분이 동쪽에 계신다'하고, 남쪽에서 바라본 석가는 ‘그분이 북쪽에 계신다’고 하고, 북쪽에서 바라본 마호메트는 ‘그분이 남쪽에 계신다’고 하는 상황과 같다.
즉, 성인들이 바라본 방향에서 보면 정확히 증언한 것이지만 정작 하느님께서는 특정한 ‘방향’이라는 기준의 한계를 떠나 그냥 중앙에 계셨을 뿐이었다.
문제는 네 명의 성인들이 워낙 확신에 찬 어투로 ‘자신들의 위치에서 본 하느님’을 설파하다 보니 그 말을 전해들은 수많은 인류는 그분이 서로 다른 분인 것으로 착각하게 된 것이다.
이제 인류는 이런 ‘공간의 착각’에서 벗어나 중앙에 계신 그분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하는 시점이다.
열린 시대에는 모든 것이 밝혀진다.
하느님께서 동방의 해 돋는 땅에, 한국인으로 오셨다는 것은 실로 혁명적인 뉴스이다. 진리의 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고통받는 인류에게 새로운 빛을 주시기 위해 우주의 시간표에 맞춰 지금으로부터 130여년 전 서구유럽을 영(靈)으로서 두루 순회하시고 동쪽 끝 나라인 대한민국(조선)땅에 인간의 모습을 빌려 강세하셨다.
하느님의 진리는 그로부터 삼천(三遷)의 완성과정에 따른, 일편 부끄럽기도 한 내 • 외부적인 진통을 겪고 나서야 이제 새로운 모습으로 인류사회에 나타났다.
이른바 천지대도(天地大道)로 명명되는 이 도는 여러 번잡한 이론을 시대변화에 따라 임의대로 끼워맞춘 편협하고 인위적인 법이 아니고, 이미 수천, 수만 년 전부터 천지자연이 생성-변화-발전되는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도달하는 최종적인 결론이므로 지극히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보편타당한 진리이다.
무릇 하나만 아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과 같을 수 있다.
‘비교종교학’이라는 학문이 옛날 같았으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수난을 당하거나 이단시되었던 행위였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신학문(新學問)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유학자가 불경을 연구하고 승려가 성경을 연구한다고 해도 문제될 것이 없는 세상이다. 이처럼 진리라는 것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연구를 거듭하여 그 근원을 찾아가는 것이 이 세상은 물론 자기 자신을 살리는 길이다.
현대를 일컬어 ‘열린 시대’라고 하는데 이는 곧 열 ‘개(開)’ 열 ‘벽(闢)’으로 이루어진 개벽시대(開闢時代)가 이미 도래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우주의 섭리인 천기(天機)가 시시각각 이러한 열린 시대에 맞춰 돌아가기 때문에 인간이 뭔가를 알고자 하면 모두 알 수 있게끔 ‘열려’ 있다는 뜻이다.
우주의 섭리(천기)가 진법을 중심으로 돈다는 것이 사회의 ‘사건사고’와 맞물려 암시되거나 어떠한 ‘유행’을 통해 알려주거나 과학적 사실로 밝혀지거나 하기 때문에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미래의 시간표를 알 수가 있다. 미래는 법칙(원리)으로 짜여져 있는 까닭이다. 그 법칙을 모르니 “인간은 미래를 알 수 없다”는 ‘위대한 착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반복하지만 이제는 이론과 실제를 통해 절대적인 진리임을 확신할 수 있는 ‘과학적인 깨달음’이 가능하다. 인간계만이 아니라 신명계(神明界=4차원영계)까지 활짝 열려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현대는 우주의 대변환기이므로 음의 세계인 신명계에서 인간계로 끊임없이 정보를 개방해주지 않고서는 신도 인간과 합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종교는 하느님이 만드신 게 아니다. 하느님은 오직 진리로 향하는 메시지를 주셨고, 그 진리에 따라 인간이 종교(宗敎)라는 특정한 테두리를 만든 것이다. 문제는 특정한 테두리에 갇혀서는 시야가 넓어지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제 인류는 편협한 테두리를 떠나 진리의 근원을 찾아나서야 할 때이다.
과학 천재인 뉴턴을 보더라도 그가 발견한 것은 만유인력의 법칙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과가 떨어지는 법칙’이었다. ‘만류인력’이라는 단어가 본질이 아니라 사과가 떨어지는 그 ‘현상’이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았기 때문에 뭔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현상의 본질을 찾기보다는 타성에 젖은 기존의 사고방식 내에서만 판단하고 이해하려하니 진리의 눈이 열리겠는가, 인간관계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새 길이 트이는 경우가 많듯이 진리의 귀의처 역시 마찬가지다. 천 년 묵은 산삼이 그렇듯이 영원한 진리는 생각지도 않은 곳에 있다.
이제 인간으로 오신 하느님의 법을 중심 삼고 지난 수천 년간 서로 갈라져 한 가족이 되지 못했던 인류는 다시 하나의 테두리 안에 모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무지(無知)로 인한 무지(無智) 때문에 세계는 끊임없는 살육전이 계속 전개될 수밖에 없으며, 이 혼란한 세상에 영원한 평화가 온다는 것은 실현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밤이 어두울수록 별은 빛난다.
우주의 가을을 맞이하기 위해서 모든 인류는 환절기에 해당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는 찬란한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 새벽의 어둠을 지나야 되는 이치이다.
이 환절기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중요한 시기인데 노아홍수와 똑같은, 이른바 ‘역사의 반복’이 지구촌 전역에 ‘병겁’으로 표출될 것으로 보인다.
지금 지구촌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러한 재앙이 닥쳐도 달리 변명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의식이 잠들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인간이 어차피 우주의 운행질서를 바꿀 수 없는 존재라면 전인류는 순천(順天)하는 자세로 이에 대비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자세일 것이다.
독자들은 이 책이 제시하는 길이 과연 이 시대의 문제점을 근원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참된 길인지, 또 그것이 지극히 합리적이고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길인지 대화나 인터넷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내어주신 마지막 결론인 진법진리의 길은 갈수록 빛이 사라져가는 용두사미(龍頭蛇尾)법이 아니라 점점 이치에 밝아지고 궁극에는 모든 법칙에 두루 통하는 사두용미(蛇頭龍尾)법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은 말 그대로, 가장 혼란하고 살기 어려운 시대일지라도 희망의 빛은 반드시 나타난다는 뜻이다. 바야흐로 모든 인류는 하느님께서 지상천국 건설의 주체를 왜 한민족이 맡도록 하셨는지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책은 하늘이 무너질 때 솟아나는 그 통로를 안내해줄 것이다. 그래서 입체적이고 명백하게 검증된 밝은 길을 제시하여 자유, 평등, 평화, 행복이 가득 찬 희망의 문명을 건설하고자 하는 여러 벗과 동지들에게 이 소식을 알려 그 뜻과 마음을 모으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한민족이 지난 5천년간 주창했던 홍익인간의 이상이 비로소 실현되는 것이요, 타고르가 말했던 동방의 등불을 다시 켜는 일이다. 그등불로써 암울한 인류의 미래를 환히 밝히고자 한다.
하늘의 시계에 따라 정해진 시점에 맞춰 출간을 하다보니 다소 서툰흔적이 눈에 띌 것이다. 그러나 이는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지도편달을 기다리는 여유 공간일 수도 있다.
이 책을 인연으로 하여 희망을 찾는 대중은 물론이고 시대를 논하고 천하를 도모할 수 있는 숨어 있는 인재들과의 대화와 만남의 자리가 이어지기를 바라며 열어주는 글을 마무리한다.
밤이 어두울수록 별은 빛난다. 단지 사람들이 하늘을 쳐다보지 않아서 그 영롱한 별빛을 보지 못할 뿐이다. 어두운 밤과 같은 이 시대는 모두가 하늘을 올려다볼 때이다. 하느님이 지금 인간 개개인을 향해 진리의 빛을 내려주고 있으시기 때문이다.
이제 그 진리의 빛과 하느님의 숨결을 느껴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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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문 (0) | 2008.05.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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