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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신불사(谷神不死)'의 뜻은

고도인 2007. 1. 12. 19:47
 

*** 연속극 주몽 작가가 미첬나?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는 MBC 연속극 주몽은 전 국민의 시선을 집중하고 있고 지금 중국의 동북공정 방어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런데 잘 나가던 극 내용이 이상하게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 두개가 있다.

아무리 연속극 이라 하지만 연속극이란 시청자 보기에 조리 있게 써야하고 또 자라나는 청소년을 위해서도 고구려, 다물 등 극 용어가 합리적 이유가 있어야 하기에 우선 두 가지를 지적한다.


 1. 고구려 라는 국호

드디어 주몽이 高句麗 라는 국호를 짓는다. 그리고 그 국호의 뜻을 서소노에게 설명한다." 이 高句麗라는 뜻은 높고 밝은뜻이기 때문에 고구려라 한 것이다"

아니 高句麗 라는 말 속에 어디 높고 밝은 뜻이 들어있는가?

우리 민족은 앗선(朝鮮)이 세워지기 전 까지의 이름이 바로 구리였다. 혹 배달(培達)이라고도 하지만 배달은 밝달, 밝은땅의 임금인 밝달임금 즉 단군(檀君)과 같은 말이고 특히 혹자는 주신 이라고 하지만 이는 참으로 치욕스런 역사의 산물 이다. 우리 밝달임금은 앗선, 즉 첫 조선을 천부인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통치 하셨는데 자신은 천제로써 사람 천부인에서 일어선다는 뜻의 선한을 직접 통치하셨다. 즉 하늘을 뜻하는 불한(卞韓)이나 땅을 뜻하는 말한(馬韓)이 있음에도 구지 사람천부인 선한을 통치한 이유는 하느님의 교훈인 천부경은 인본주의적 道 이며 또 天地人 중에 땅덩어리가 만들어진 이유는 사람이 살라고 만들어 진것이고 그래서 사람이 가장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天一 地一 太一中 太一 最上貴)  이 사람이 일어선다는 뜻의 선은 앗선,이 된 것이며 그래서 이것의 한자 표현이 조선이 됐는데 이 선 이 하늘이라는 앗 과 잇이 모음이 혼동되니 같은 말 이어서 하늘의 아들이 잇큼> 임금 이 되듯이 선과 신역시 모음이 혼동되니 신 이라도 하여 신한 이 된것이며 이를 후세에 한자로 신한(辰韓)이라 적었다. 그러니까 원래 앗선인 조선은 불한, 신한 마한 의 삼한 이지만 천체국이 신한이니 삼한을 모두 신한 이라고도 했는데 이 신(辰) 자는 진(辰)자와 같으므로 후세인이 진한(辰韓) 이라고도 하던 것을 앗선이 망하고 진시황의 진(秦) 나라가 되자 약삭빠른 유민들은 우리가 일제에게 국혼까지 내 주며 아부하듯 진나라에 아부 하고자 진시황의 진 자를 써서 진한(秦韓)이라했었다.


그러나 이 진나라가 망하자 또 약삭빠른 유민들은 우리가 중국, 일본을 섬기다가 이제는 일본잔재어는 쓰면 안되고 영어는 써도 되며 또 우리 말과 글자가 차츰 영어로 대치되어 미국을 섬기듯 더이상 망한 진나라를 바뜰 필요가 없으니 진(秦)자와 비슷한 아뢸주(奏)자를 써서 주한이라 했던것이다. 즉 주 (奏) 자는 아래에 天 자가 붙고 진(秦) 자는 아래에 벼禾 자가 붙어 혼동하기 쉬우니 약삭빠른 앗선의 유민들은 진한(秦韓)에서 어느새 주한(奏韓)이라는 신조어를 만든것이다. 그러나 이 주한은 첫조선의 선한, 신한 과 아무 관계가 없으므로 새 시대에 아부할줄 모르고 우리 뿌리, 전통만 지키는 멍청한 유민들은 먼저 원 이름인 신한(辰韓)이라 고집하는 자들도 있으므로 말이 혼동되니 주한 신한의 복합어 주신한 이라는 신조어를 다시 만들어 낸것인데 세월이 흐르자  한 자는 생략되고 그냥 주신(奏辰)이라 한것이다. 그러므로 이 주신 은 참으로 치욕스런 우리 역사의 산물인데  그런것도 모르는 사학자들은 우리가 주신 대제국 이었다고 큰소리 치고 있는것이다.  그러므로 앗선 이전의 우리 이름은 구리라는 것이다.


그럼 구리 란 무엇인가?

천부인으로 만든 우리 글자 ㄱㄴㄷ...ㅎ 에서 ㄱ 의 뜻은 가장자리 이다. 강가니 바닷가니 갓길 모두 가장자리 이고 가죽도 가장자리이며 왕겨의 겨도 알맹이가 빠진 가장자리인데 지금 계집(女)은 세종때 까지만 해도 겨집 이였고 북한은 물론 경상도에서도 여자를 가장자리라는 뜻의 가시, 갓인애 > 가시네 라 한다.

또 굴 이나  골도 감둥이 검둥이가 같은 말이듯 같은 말이며 가장자리 이다. 즉 무엇인가 빠진 껍대기 이다. 따라서 남녀 결합시 남근은 중심이 되지만 여음은 그 가장자리가 되니 여음이 바로 굴(谷곡)이다. 즉 굴은 구무 와 같고 구무는 구멍이며 여음이고 골도 굴이다, 즉 골짜기는 골이 짜개진 것이니 그냥 골은 굴과 같은 구멍(口구)이고 여음(谷곡)이다. 이 말은 노자 도덕경 6 장 谷神不死 是謂玄牝(곡신불사 시위현빈) 에도 나온다. 즉 谷(곡)자는 유방 두개 아래 가리쟁이가 있고 그 가운데 입(口구) 가 있는 글자이며 그래서 이는 생명의 탄생을 말하고 그래서 생명의 신 은 죽지 않는다는 말이 谷神不死(곡신불사)이며 是謂玄牝(시위현빈)은 이는 소 엉덩이에 비수자국 과 같은 것 이라 한 것이다.

 '곡신불사(谷神不死)'의 뜻은

'계곡의 신이 죽지 않는다'가 아니고 '신이 죽지 않는 계곡'을 말한다. 띄어쓰기

를 해서 읽으면 '곡(谷), 신불사(神不死)'이다. 신이 죽지 않는 계곡이 뭐냐? 바로

신선의 고향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이고 해탈의 세계이고 부처가 사는 곳이고  바둑 두는 무릉도원이고 무극(無極)이고 태허(太虛)의 자리이고 구름이 죽은 다음에 갈 곳이다. '그 곳을 일컬어 검은 계곡이라 한다'라는 뜻이고 두 문장을 연결해서 읽으면 '신이 죽지 않고 영원 불사하는 계곡이 있으니 이를 일러 '현빈(玄牝)'이라 하느니라.'다.


☞ 제6장의 전체를 같이 보고 하권으로 넘어 가자.


谷神不死,是謂玄牝,玄牝之門,是謂天地根,綿綿若存,用之不勤

곡신불사,시위현빈,현빈지문,시위천지근,면면약존,용지불근


신이 죽지 않고

영원 불사하는 溪谷(계곡)이 있으니

그 골짜기의 이름을

일러 현빈이라 한다.

그 계곡의 문이야 말로

천지가 시작된 곳이니

그로부터 이어지기가 영원하지만

결코 쓰이고자 노력하지 않는 도다.


玄牝之門, 是謂天地根(현빈지문 시위천지근)

이 세상의 뿌리는 현빈(현묘한 암컷 혹은 현묘한 골짜기)의 문에 존재한다

그 곳이야말로 우주의 근본 자리이고 영원불사하는 세계이며 고통과 슬픔과 비참이 없는 곳이며 우주와 내가 일체가 되는 자리이다.

 '용지불근(用之不勤)' 불근은 말 그

대로 '부지런하지 않음'이다. 달리 말하면 '나태하고 게으른 것'이 '불근'이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쓰임에는 게으르다'는 뜻이다.

 또 사람의 일생은 어떤가? 말이 몇마디 되지 않던 원시말로 생각해 보자. 사람은 굴 속에 씨를 뿌리고 굴 속에서 싹이 트며 굴속에 있던 태아가 크면 굴 구멍을 나와서 또 굴구멍(입)으로 먹거리가 들어가야 하고 또 그 찌꺼기는 역시 굴 구멍으로 배설한다.


우리 말에 똥이나 방귀의 냄새를 구린내라 한다. 구린내는 굴인내에서 나온 말이고 그 굴은 우리의 위장이다.


이렇게 그 굴안에 씨를뿌려 굴안에서 싹이트고 굴에서 나와서 굴구멍으로 먹고 굴구멍으로 배설하는 옛 사람들은 또 토굴 안에서 살았고 죽어도 땅굴 구멍으로 들어갔다. 그러므로 사람의 다른 말이 바로 굴이고 이 굴에 우리말에 흔히붙는, 즉 갑순이 갑돌이 하느 접미사 이 가 붙으면 굴이> 구리 가 된다.


뭐 짐승도 굴 속에서 살아서 구리가 될것 같지만 사람이 짐승의 대표이고 또 사람 입장에서 말 하니 구리는 짐승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신지 전자 굴 그림                    

여기에 대한 중국인들이 객관적 으로 본 근거 문헌을 찾아 보자


* 진서 동이전에 의하면 "여름에는 나무 위의 깃에서, 겨울에는 굴속에서 살았다"고 했다 (夏則巢居冬則穴處 - 晋書 東夷傳하칙소거동칙혈처 - 진서 동이전)

* 또 삼국지에서도 나온다.


...‘보통 거주하는 굴구멍의 큰집은 깊고, 사다리는 아홉 개까지 있는데 이는 많을수록 좋다(常穴居大家深九梯以多爲好상혈거대가심구제이다위호)’라 했고

그런데 여기서 아주 중요하고 주목해야 할것은 "보통 거주하는 굴구멍의 큰집은 깊고 사다리는 아홉 개까지 있는데 이는 많을수록 좋다"(常穴居大家深九梯以多爲好상혈거대가심구제이다위호) 이다.


즉 많은 사람이 사는 큰 굴 구멍 일수록 깊고 사닥다리를 옆으로 아홉개나 놓았다는 것인데 이 사닥다리를 많이 놓았다는 것은 그만큼 굴이 깊고 식구가 많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사다리 들은 그 굴 구멍이 평지가 아니라 굴에서 급경사 진곳, 즉 낭떠러지 위에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상으로 볼 때 좌측이 터진 尸자 그림 꼬리처럼...즉 좌로 터진 "ㄷ"의 아래 꼬리 부분은 바로 사닥다리를 놓았던 자리 그림 일 것이다.


 이렇게 굴 속에서 살던 한아비들은 죽어서도 굴 속으로 들어가는데 이는 땅 굴만 아니라 아예 굴속에다 시신을 안치 한다는 말이며 이는 지금 인도네사아등 오지에서 사람이 죽으면 절벽...즉 낭떠러지 에 굴을 파고 시신을 안치 하는데 이역시 그림 글자를 만든다면 같은 그림이 될것이다.


주검(죽엄)시(尸) 그림             

그래서 위 신지 녹도 전자에서 그 입구가 막힌 글자로 진화한 것이 바로 주검시(尸)자 인것이다.


 따라서 단군조선 (배달국 )이전 환웅때부터 우리는 우리 종족의 명칭을 '구리' 라 하였고 이것이 한자로 표현 하면서 높다는 뜻의 高자가 붙어 고구려(高句麗)가 되고 또 고리(藁離)의 음대로 고려(高麗)가 되었는가 하면 이것의 영문표기가 KOREA가 되었다.


그러면 이번에는 우리 조상이 구리 라는 중국인의 표현을 보자

중국인은 한자로 구리 표현을 구려(九黎), 고리(藁離),구이(九夷)라 하였다.

* 왕동령(王桐齡)이라는 중국 사학자는 이십오사를 인용하여 삼묘족(三苗族)의 나라를 구려(九黎)라 하였고 구려는 옛날 천자의 이름 (古天子之名고천자지명)이고 구려의 임금을 치우 라 한다고 했다.

* 위서(魏書)에는 "고리(藁離)에서 온 동명(東明聖王동명성왕)이 세사람을 만나 흘승골(訖昇骨)에 이르렀다"라는 말 있다.


* 후한시대後漢時代의 공안국孔安國도 "<구려국>의 군주는 <치우>이다.(九黎君號蚩尤是也구려군호치우시야)"라 하였다.


 * 이십오사 에서는 구이(九夷)라 하였다.

이 이외에더 다수의 기록이 있지만 생략하고 여기서 한자의 뜻과 음에 대하여 크게 신경쓸 필요가 없다.

이유는 여기에 지금 전개되고 있는 사건은 환인 환웅 시대로 한자가 만들어지기 훨씬 전 이야기 이고 그후 환웅의 신하 신지의 제자 창힐이 한자를 만들었다 하나 이도 그림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원시 한자 이기 때문이다. 그후 중국인들은 이 창힐 한자를 토대로 자기네 들이 우리 상고사를 기록 할때 우리 말과 글자의 뜻은 상관없이 엇비슷하게 음만 적어 놓은것도 다행 이다.


 이상을 참고로 위에 중국의 기록인 "구려"(九黎), "고리"(藁離), "구이"(九夷 -여기서 구이는 아홉 동이족 이라고 볼수도 있겠지만...)는 구리를 쓴다는 것이 그렇게 써진것으로 본다

단 여기서 "굴"이 한자 굴(窟)에서 나온말이 아니가 의심 할수도 있느데 이는 신지의 제자인 창힐이 한자를 만들었으므로 우리말의 대다수를 본뜬것이 한자 음이니 한자가 우리 말과 같은것이 많다.


 * 그렇다면 지금 우리말에 "구리"라는 말이 남아 있는가?


그 흔적은 "멍텅구리"의 "구리"에 그대로 남아있고 심술 꾸러기 작난 꾸러기의 "꾸러기"도 굴이 > 구리 > 꾸리 > 꾸러기 이다.


 따라서 위 연속극 주몽에서 극작가들이 구려의 뜻이 높고 밝게 어쩌구는 완전 우리 역사와 우리 말의 뿌리를 알지 못하고 쓴 소치이고 고구려는 이 구리, 구려, 고리 에서 나온 말이다.


 2. 다물의 뜻이 무엇인가?


극작가는 금와왕을 정신병자로 만들었다. 즉 연속극이 시작될때는 금와왕이 잃었던 조선의 영토를 회복하는게 꿈 이었기 때문에 부여의 신물을 다물활로 삼았다.


여기서 다물(多勿)을 흔히 사학자들은 잃었던 국토 회복 이라 하지만 한자 多勿 속에는 국토회복의 뜻이 전연 없으니 역사 학자들은 그게 왜 국토회복인지 전연모른다.


多勿(다물) 이란 우리말 입을 다물다 의 다물을 음차하여 한자로 쓴 기록이다. 즉 입을 다물때 남의 살을 합치는것이 아니라 자기 살을 합치는것이 다물 이니 남의 땅을 침탈하는것이 아니라 벌어졌던 입술과 같이 벌어졌던, 떨어졌던 자기 땅을 합치는것이 다물인것이다.


우리 민족은 역사를 통하여 거의 천번의 외침은 받았을 망정 남의땅을 침탈한일은 한번도 없는 선량한 민족이었다는것이 바로 이 다물에서 나타난다.



그렇다면 다물활을 부여의 신물로 삼았던 부여국의 꿈은 읽었던 옛 조선의 땅을 회복하는것이었고 따라서 금와왕은 다물군을 이끄는 해모수를 친 형제 이상으로 대했고 그가 죽고 나서도 그 부인인 유화부인을 자기 부인보가 더 보살폈으며 그 해모수에게서 난 주몽을 친자 이상으로 대 했고 다음 대를 이을 태자도 주몽을 삼으려 했다.


 그런데 주몽이 정말 해모수의 뜻대로, 또는 다물의 정신대로 잃었던 옛 땅을 회복하려는 다물군을 창설하자 적으로 돌리고 자기아들 대소의 뜻 대로 한나라와 교섭을 하려 한다.


지금 금와왕은 처음과는 달리 부여에만 집착한다. 그러나 부여만 가지고는 다물이 아니다. 잃었던 옛 영토를 회복해야 다물이다. 그러니 주몽과 합세를 하여 한나라를 격파하고 잃었던 조선의 옛 땅을 찾아야 할 텐데 그까짓 부여 하나 지키려고  원수로 알던 한나라와 손을 잡을 수 있는가?


아무리 금와왕이 병중이라 하나 이렇게 정신병자로 만들어 연속극의 앞 뒤가 맞지 않게 할 수가 있는가?


차라리 금와왕이 정신이 없을 정도로 중병에 누어 있다거나 차라리 죽었다고 하고 그 아들 대소가 그런짓을 한다면 말이 될 텐데 말이다.


이는 금와왕이 정신병자가 ?榮쩝? 극작가가 정신병자가 ?榮쩝? 알 수 없다.

   

3. 삼족오


    


세 발 달린 까마귀의 진실

 지난 1999년 김대중 정부시절에 만든‘3호 봉황국새’에 금이 갔다는 감사원의 발표 이후 국민들 사이에는 차기 국새의 손잡이에 삼족오(三足烏)를 새기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다지 예쁘지도 용이나 봉황처럼 화려한 멋도 없는 삼족오이지만 고구려 열풍 속에 삼족오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얼마 전 방영된 주몽에서도 ‘주몽은 새로운 나라를 세울 것이다. 삼족오의 나라를…’ 이라는 의미심장한 대사가 등장했다.

 이 대사처럼 최근 드라마에서도 고구려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삼족오가 자주 등장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과연 삼족오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삼족오는 ‘오(烏)’를 ‘까마귀’로 해석하느냐 ‘검다’는 의미로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그 해석이 조금 달라진다.

 하지만 어떻게 해석을 하든 공통점은 ‘태양 안에 사는 세 발 달린 검은 새’라는 점이다.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의미를 분석해보자.

 첫째, 삼족오는 태양(광명)숭배의 원 뿌리로서, 동아시아 천자국의 상징으로 천손(天孫:하늘백성)의식을 갖고 있던 한민족 고유의 상징이다.

 둘째, 하나의 몸통에 달려 있는 3개의 발은 우리 민족이 고대로부터 모시던 삼신하나님의 삼신일체(三神一體) 사상을 이 땅에 구현하겠다는 철학을 담고 있으며, 또 검은 색은 오행에서 수(水)를 상징하며 생명과 역사의 근원을 의미한다.

 즉, 우리 민족이 인류 태초 문명의 시원국임을 상징화한 것이다.

 

<참고문헌> 서길수,『 고구려유적답사』홀본·국내성 편, 사계절, 2000 증산도 편집부,『 9천년 역사의 뿌리를 찾아서』, 대원출판, 2000 MBC <느낌표> 홍보책자,『 깨어나라 고구려의 후예들이여!』, KTF 후원, 2006


4. 고구려 얼마나 알고 있나?


지금 우리나라에는 고구려 열풍이 거세게 불고 있다. 2년 전 중국의 동북공정을 계기로 크게 높아진 고구려에 대한 관심에 미디어가 합세하면서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발생한 것이다. 현재 인터넷 쇼핑몰에는 100여 가지가 넘는 고구려 관련 상품이 검색되며, 이동통신사에서는 고구려 관련 요금제를, 인터넷 강의 업체에서는 고구려 패키지 강좌를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관심과 열풍은 대개‘물건을 잘 팔기 위한’상업적 활용에 그치고 있을 뿐, 정작 알고보면 우리가‘고구려’에 대해서 몰랐던 것, 잘못 알고 있던 사실들이 적지 않다. 우리는‘주몽’과‘삼족오’에 열광하고‘동북공정’에 분노하기 이전에 고구려에 대해서 먼저 제대로 알아야 한다.

 이 글에서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꼭 알아두어야 할 고구려 역사 상식 몇 가지를 소개한다.

 

 ‘고려’는 ‘고구려’다?

 만주에는 고려성(高麗城), 고려묘(高麗墓), 고려방(高麗房)과 같은 지명이나 유적이 많다. 헌데 잘 알다시피 왕건이 세운 고려의 영토는 압록강을 넘지 않는다. 그렇다면 만주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고려라는 이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만주지방에 등장하는 ‘고려’는 다름아닌 ‘고구려’를 일컫는 말이다.

 

 사서들을 살펴보면 『삼국사기』에만 유독 고구려란 이름이 고집스럽게 등장한다. 그 영향으로 우리가 배운 국사교과서는 모두 고구려라는 표기를 통일해서 쓰고 있다. 하지만 중국 사서를 보면 고구려와 고려가 동시에 쓰이고 있으며, 일본 사서는 고려라고만 쓰고 있다. 『삼국유사』에도 고구려라는 기록은 7번, 고려라는 기록은 70번이 나온다.

 

 한편 고구려인들이 남긴 유적이나 유물에서는 어떻게 기록되고 있을까? 1979년 충주에서 발견된 중원고구려비는 더욱 분명한 해답을 내려주고 있다. 이 비는 장수태왕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비문 첫 줄에 ‘5월중 고려태왕(五月中 高麗太王)’이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중원고구려비가 세워진 시기에 고구려인들은 고려라는 국명을 썼다는 말이 된다. 이 외에도 ‘연가7년명불상(延嘉七年銘佛像)’의 광배에도 고려란 이름이 등장해 ‘고려=고구려’임을 입증해주고 있다.

 

 정신문화연구원의 정구복 교수는 오랜 연구 끝에 ‘고구려’라는 국호는 장수왕 10년대에 ‘고려’로 고쳐져 말기에는 완전히 고려로 칭해졌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왕건이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지은 고려라는 국명도 당시 고구려가 고려로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고려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 된다.

 

 이제 중국땅을 가서 고려라는 이름을 접하게 된다면 ‘고려=고구려’임을 꼭 기억하자.

 

 광개토대왕인가? 광개토태왕인가?

 고구려 19대 왕으로 22년 동안 고구려를 통치한 광개토태왕을 부르는 호칭은 나라나 학자마다 다르다. 일본이나 중국 학자들은 ‘호태왕(好太王)’이라 부르고, 우리 나라와 일본 학자들 사이에서 자주 쓰이는 것으로 ‘광개토왕(廣開土王)’이라는 표현도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쓰이는 것은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이라는 표기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정확한 표현일까.

 광개토태왕비문에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긴 시호가 나온다. 광개토태왕릉에서 나온 벽돌에도 ‘태왕’이라는 칭호가 나오고, 중원고구려비에도 분명히 같은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공통된 호칭을 찾아보면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이다. 그러나 ‘대왕(大王)’이라는 칭호는 어느 유적에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삼국사기』에 김부식 등 사대주의 학자들이 중국에 대해 스스로 자신을 낮추기 위해서 태왕이란 호칭을 쓰지 않고 왕이라 썼던 것이다.

 

 고구려는 광개토태왕비에 태왕이라는 호칭이 등장하고 있고, 신라는 전성기인 신라의 진흥왕순수비에 진흥태왕이라는 말이 나온다. 장수왕이 세운 중원고구려비 역시 태왕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세 왕은 모두 활발한 정복활동을 통해 주변 국가를 복속하거나 합병하는 등 뚜렷한 업적을 남긴 공통점을 갖고 있다. 밖으로 뻗어나가며 제국의 질서를 구축한 왕에게 ‘태왕(太王)’이라는 호칭을 붙였던 것이다. 당시 태왕은 중국의 천자나 황제와 같은 반열의 제국의 군주를 칭하는 보편적 용어였고, 따라서 광개토대왕도 마땅히 ‘광개토태왕’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른 호칭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제부터라도 민족의 자긍심을 살리고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 광개토태왕의 바른 이름을 되찾아주자.

 

 고구려는 당당한 천손국가(天孫國家)였다

 고구려는 하늘의 아들임을 표방한 천손국가였다. 대표적으로 광개토태왕비의 비문에도 시조 추모(주몽)를 “하느님의 아들(天帝之子)”이라고 기록한 대목이 나온다. 중국의 황제들은 자신만이 하늘의 아들이고 주변 국가는 모두 그 천자의 신하라 해서 ‘천자’라는 단어의 사용을 엄격하게 금했지만, 고구려는 스스로를 당당히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표방했던 것이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또 하나의 증표는 독자적인 연호의 사용이다. ‘연호’란 임금이 자리에 오른 해에 짓는 칭호로, 중국의 각 왕조는 천자 국가를 자임하며 독자적인 연호를 썼다. 반면에 주변 나라들은 제후 국가로 규정하여 독자적인 연호를 쓰지 못하게 하고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도록 강요했는데, 고구려는 이에 굴하지 않고 떳떳이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던 것이다.

 

 고구려가 독자적인 천하관을 유지했다는 것은 천제(天祭)문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중국은 자신만이 하늘의 아들(天子)로서 천제를 지낼 수 있다고 규정하고, 주변 제후국은 제후들의 부모인 종묘(宗廟)와 땅과 농사의 신인 사직(社稷)에만 제사지내도록 허용했다. 하지만 고구려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제의식이 엄연히 거행돼 왔고, 그것을 이름하여 ‘동맹’이라 불렀다.

 

 고구려인은 거친 무인(武人)들?

 고구려 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강인함과 용맹성을 바탕으로 한 ‘상무정신(尙武精神)’의 기질이다. 그러나 고구려인들이 용맹했을 뿐 아니라 매우 수준 높은 문화민족이었음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고구려인들이 남긴 90여 기가 넘는 고분벽화들. 그 벽화들은 고구려인들이 얼마나 우수한 선진문화를 꽃피웠는지 잘 보여준다.

 

 우선 고구려인들은 노래와 춤을 즐긴 사람들이었다. 온 나라 온 마을에서 해가 지면 남녀가 모여 노래하고 춤을 추었으며, 노래와 춤을 즐기다 보니 음악 형태도 다양해지고 자연스럽게 악기도 발전하였다. 벽화에는 합창단과 탈춤, 북춤, 칼춤 등 다양한 춤 형식이 나타나며, 타악기와 관악기 등 벽화에 나오는 악기만 해도 24종이나 된다. 또 벽화에 나타난 여인들의 의상과 장신구, 평상과 밥상 등의 뛰어난 공예술, 갖가지 천장과 다양한 고임, 기둥과 두공에서 볼 수 있는 예술적 건축술, 그리고 벽화 자체가 웅변으로 증명해 주는 그림 솜씨, 이들은 모두 고구려인들의 섬세하면서도 힘찬 예술적 창조력을 유감없이 보여 주는 예들이다. 고구려인들의 과학적 생활은 천문학이 대변한다. “화성(熒惑)이 전갈자리 시그마별(心性)에 머물렀다”(유리왕 13년)고 정확하게 관측할 만큼 고구려의 천문학은 다른 영역 못지 않게 발달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인은 높은 정신세계를 추구하였는데 음양사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해와 달 그림이 그려진 벽화가 24기나 되고, 보살도 사신도와 온갖 신선들 그리고 불사조 삼족오 등 유·불·선의 세계를 모두 섭렵한 고구려의 현묘지도가 벽화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이상으로 고구려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몇 토막 소개했다. 하지만 사실 고대사는 사료의 절대적 부족으로 인해 역사의 실체를 정확히 규명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그런 모순된 기록들이 혼란을 준다고 해서 역사의 진리가 변하고 진실이 흔들리는 것은 아니다. 누가 뭐래도 고구려는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역사이며, 그 유산도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우리가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진다면 잊혀진 역사를 반드시 되살리고, 빼앗긴 역사를 되찾아 올 날도 머지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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